진흙속의연꽃

한국불교에 선현정(先顯正) 후파사(後破邪)를

담마다사 이병욱 2011. 7. 26. 13:52

 

 

한국불교에 선현정(顯正) 후파사(後破邪)

 

 

 

 

 

 

 

 

반배의 예를

 

불교교양대학에 다닐 때 듣던 말이 있다. 길거리에서 스님을 만나거든 반드시 반배의 예를 올리라고 하였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도무지 스님 같지 않게 보일지라도 반배의 예를 올리는 것이 예의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출가자는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흔히 말하는 오욕락같은 것이다. 세속에서 누구나 추구하는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을 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 하나만 해도 존경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설령 스님같지 않아 보여도 반배를 받으면서 과연 내가 절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하고 생각할 여유라도 주기 때문이라 한다.

 

일파가 만파가 되어

 

글을 하나 올린 것이 일파가 만파가 되었다. 평생산중에서만 지내던 스님이 댓글을 올려 주었는데, 이에 대해서 소개한 것이다. 그런 스님은 재가불자들이 생각하던 스님하고 달랐다.

 

일반적으로 재가불자들은 스님을 존경의 대상으로 본다. 가장 먼저 오욕락등 모든 것을 버렸다는 그 사실 자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존경을 받을 만 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해 줄스승으로 본 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풀리지 않은 문제를 이야기하면 명쾌하게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댓글을 주신 산중스님은 그런 기대와 달랐다. 특히 중생을 교화하는 부분에 있어서 재가불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너무 달라서 쇼크를 주었다. 모든 스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지만 3대 종찰의 문중사문이라 칭하는 스님은 “산중 중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우리가 죽고 살기로 세속중생들을 교화 해야 합니까? 그럴일 없습니다. 그런건 도시땡중들에게나 시키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 바로 충격 그 자체라는 것이다.

 

흔히 대승불교의 이념 중의 하나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말에 위배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구보리한다음 하화중생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상구보리하기 때문에 하화중생할일은 없다고 들린다. , 스스로 찾아와 예을 갖춘다음 가르침을 청하면 그 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은 어떤것일까.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고

 

선가의 근처에 가보지 않았지만 도가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을 때 차나 한잔 하시게나또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등의 선문답이 떠올려 진다. 여기서 더 나아가 개에도 불성이 있읍니까하고 물으면 없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반대로 개에게 불성이 없습니까하고 물으면 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처럼 청개구리 처럼 동문서답하는 것이 선가의 선문답이다. 그런 선문답에서 방망이()나 고함소리()를 듣기 쉽다는 것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다라고 하면 한방 맞고, 또 불성이 없다라고 말해도 한방이 맞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래도 맞고 저래도 맞는 것이다. 답변을 할 때 마다 왜 두들겨 맞는 것일까. 좀 더 상근기의 수행자가 위와 같이 답한다면 발길질을 당하거나, 코가 비틀리기도 할 것이다. 이는 선가에서 스승이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자비의 방편으로 보기 때문이라 한다.

 

왜 그럴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언어나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분별에 빠졌기 때문에 이래 저래 방망이질을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느 해외불자가

 

평생산중에서만 사는 스님들은 도시에 나올 계획이 없음이 명백하다. 이는 댓글을 단 산중의 스님 말처럼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라는 말에 정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자들은 공부가 끝나면 유일신교가 득세하는 도시로 나와 그들과 진검승부하며 부처님의 법이 널리 퍼지기를 학수 고대한다. 대부분의 불자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과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이념에 투철하다면 수행의 결과를 중생을 위하여 회향하는 것으로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여지 없이 깨버리는 댓글을 산중승이 보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산중승의 생각만 그러할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글을 올린 후 어느 해외불자가 장문의 댓글을 보내 왔다. 그 법우님이 주신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해외불자입니다.
님의 글을 읽으면서 .
님이 지적하시는 산중스님은 오로지 하안거 동안거만을
하면서 한평생 선방만 다니시는 스님을 산중스님이라고 지적함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면 산중스님 옆에 (선방스님) 으로 이렇게 넣든지 아니면 산중스님의
단어를 삭제하시고 (선방스님)으로 대치 하시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게시글에 설명을 해 놓아야 오해가 없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야 산중의 사찰을 정법도량으로 가꾸고 재가불자들을 위해 교화활동을 하시는
산중 사찰에 계시는 산중스님들께 누가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님께서 지적하시는 산중스님이 제 생각에 맞게 선방스님이라면

선방스님들은 절대 교화활동을 벌이지 않는 자신의 깨달음만 관심사이고
절대 중생교화에 관심이 없는 분들임을 저도 얼마전에 알았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에도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전법을 나서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무시하는
수행자들은 솔직히 불교도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사는 곳에 해외불자들을 위해 고생하시는 주지스님이 계십니다
그 스님께서 고국의 대덕스님 몇분을 모셔와서 하안거를 하신다하여 제가
스님께 부탁 건의를 했습니다
스님 저희 해외불자들을 위해서 대덕스님들이 오신다면
하안거 마치시고 해외불자들에게 보살계를 내려 주시면 어떨까요
고국에서는 보살계들을 받고자 불자들이 여러 사찰순례도 하는가 보던데요
저희들도 그런기회를 대덕스님들이 오실때 갖는다면 해외불자들이
신심이 나지 않을까요 했더니

주지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살계는 무슨 절차가 필요하다며 (잘 기억안남)
선방스님들은 절대로 중생교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분들께 보살계 부탁을
하면 노발 대발하면서 자기네들을 이용하는 것으로 오인 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선방스님들은 설법도 안하고 절대 중생교화 안하고 오로지 선 만 하시는
대단하신 스님들이라 하더군요.


20
하안거 ,10 동안거 라면 , 10, 20년 동안 선방서 수행 한 경력이냐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하안거 동안거 끝나면 어디서 사냐고 했더니
산중 사찰에는 빈방이 많이 있기때문에 그런 빈방에서 참선하면서 기거하다가
하안거 동안거 때 다시 선방으로 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내심 분노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스님, 그게 어디 중입니까, 중생교화도 할줄 모르는게,
부처님께서도 6년은 중생교화없이 고행을 하셨으니,
스님들도 6년은 참선에 매달려 보는 것은
출가하신 분이니 이해합니다만 , 한평생 중생교화 없이 참선만 하다가 가는 인생
존경이 안가네요. 그런 스님들이 무슨 대승불교입니까!
한적이 있었지요, 그때 주지스님으로 인해 선방스님들은 절대 설법도 없다
교화도 없다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선방스님들이 산중 사찰을 지키고 중생교화하시는 산중스님들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승불교든 초기불교든 중생교화에 여념없으시는 스님들께 진정 감사의 합장 올립니다.

 

(해외불자님)

 

 

 

먼저 해외불자 법우님은 산중에서 사시는 스님이 선방스님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물어본다. 지금 문제 되고 있는 스님은 선방스님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선방에서 10, 20, 30년 보낸 스님들은 절대중생교화를 하지 않고 오로지 선수행만 하는 스님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블로그에서 언급한 산중승의 글의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LA 불교는

 

글을 주신 법우님은 해외불자라고 하였다. 해외라고 하면 미국의 LA가 자연스럽게 떠 올려진다. 우리나라 교포가 가장 많이 살기 때문이다. 그곳에도 불교가 있을  것이다. 법우님의 표현대로 절이 있고, 스님이 계셔서 그곳 불자들을 위하여 교화활동을 하고 또 한국불교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LA에서의 불교는 어떤 모습일까.

 

일아스님은 2009년도에 어느 불교인터넷신문에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하였다. 기고한 후 일부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기사가 내려 졌지만 인터넷의 속성상 스님이 작성한 글은 이미 다 퍼지고 난 뒤였다. 그 글에서 스님은 모두에 LA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LA 불교 현황>

2008년 한인 업소록에 교회수는 708, 신학대학은 48, 기도원 30, 천주교 25, 원불교 7, 불교는 15 (조계종은 10)입니다. 조계종 10개의 사찰 중 정혜사 어린이 청소년 법회가 가장 활발하고 (아이들이 약 60) 그 나머지 사찰은 모두 제사와 염불에 의존하고, 신도가 점점 줄어 노인네 신도를 빼면 몇 안 되는 상황입니다.

 

기독교는 벌써 몇 년 전부터 엘에이의 한인을 모두 기독교화 하겠다는 운동인 “LA (엘에이) 성시화운동”을 시작하여 지금도 각 신학대학에는 성시화운동본부가 있고 엘에이를 기독교화 하는 운동을 하고 있고 이곳 한국인의 약 70%는 기독교도가 되었습니다. 한 건물에 교회가 세 개나 있는 곳도 있을 정도로 그렇게 교회가 많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소리를 안 듣는 곳이 없고, 모임에서 기도를 하고 한인 사회의 큰 행사는 대개는 교회에서 기독교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버스를 타면 전도사들이 극성이고 길을 갈 때에도 옆에 붙어서 예수 믿으라고 하고 한번은 어떤 광신도가 “중이 왜 산에 살지 여기 있느냐“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런 광신도들은 절 안에까지 들어와서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괴롭힙니다. 미국의 어떤 기독교 나라도 한국 기독교처럼 이렇게 광적인 나라는 없습니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책임이 불교에도 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절에는 마귀가 있는 곳이니 가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엘에이에서 불교 신도로 사는 것은 투사적 신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불교도로 엘에이에 산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절에 다닌 사람도 모두 기독교로 가버립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이것이 LA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한인교회가 708개인데, 한국절은 고작 15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교회에 비하여 0.2%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교포들이 기독교를 믿어서 70%가량이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불자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한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살고 있는 동네는 총 4,066세대이고, 인구는 11, 925명이다. 한개의 동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4,066세대를 대상으로 한 교회는 14개곳이다. 절은 제로이다. 14개의 교회가 11,925명을 놓고 유치원, 청소년공부방, 노인대학, 노인무료급식등 주민들을 위한 봉사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네의 가게들을 보면 바이블의 문구가 들어간 액자를 보는 것이 어렵지 않고, 찜질방등에서 들리는 이야기를 들으면 LA에서와 같이 장로님” “권사님을 호칭하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런 현실에서 일요일 오전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 조차 부담스러워졌다. 그들은 옷차림을 보고서 교회에 나가는지 안나가는지 판별하기 때문이다. 대게 일요일 오전 교회에 가는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 모두 정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큰 집과 작은 집

 

이처럼 일아스님은 LA에서 불교현황에 대하여 언급한뒤 한인들이 불교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LA에 사는 교민들은 한국의 불교와 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까. 일아스님은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한인들의 불교를 보는 눈>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불교를 무식한 구태의 종교, 미신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스님들을 무식하고 점이나 치고 미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어느 절에서는 스님이 시간 약속을 하여 돈 받고 사주팔자니 점을 보아주고, …사 라고 절 이름을 간판 걸고 들어가 보면 부처님 모셔놓고 점치는 곳입니다. 이런 불교가 사람들에게 미신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고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한마디로 불교는 점이나 봐주고 미신행위나 저열한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절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은  곳 다수가 불상을 앞에 놓고 버젓이 스님이 점을 보아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현실은 한국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요즘 점집은 만()자가 붙은 깃발을 사용하고 있다. 이제 만자를 보면 점집이 연상될 정도이다. 그래서일까 조계종에서는 점이 세 게 찍혀있는 문양을 사용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하지만 만자가 들어간 절을 도시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창문에 사주, 관상, 작명, 구병시식과 같은 문구가 보여서 점집인지 절집인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점집은 작은 집이고, 절집은 큰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도시에서 불교는 정법이 부재하다보니 보니는 것은 만자가 걸린 점집이 눈에 띠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LA나 한국의 수도권도시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일아스님은 이처럼 LA에 있어서 한국불교의 현실을 소개한 것은 한국불교의 선방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LA에서 목격한 선방출신 스님의 행태에 기인하다. 스님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현 실정>

한국에서 강원도 안 가고 선방에만 다녔다는 스님들이 미국에 오면 이분들은 포교의 열정도 없을뿐더러 부처님이나 불교 교리도 잘 모르고, 설법도 못하고, 강의도 못하고, 어린이, 학생들, 청년 지도도 할 줄 모르고, 포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거기다 선방만 다녔기 때문에 염불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전쟁터에 나간 사람이 맨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식이지요.

 

이런 스님을 사찰이나 신도들이 환영할 리가 없지요. 이 스님을 이렇게 무능력자로 만들어 슬프게 하는 근본원인은 “강원 안가도 기초선원만 나오면 구족계 받는다.”는 종단의 잘못된 교육제도 때문입니다. 일생을 참선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소임이나 사찰운영 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참선만을 한다 해도, 배운 사람이 참선하는 것은 지도를 가지고 목적지를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기초선원 제도는 없어져야 됩니다.

 

LA 불교의 모습이 이 지경인데 아직도 스님들을 서당식 강원교육에 선교육만 시키니 한탄스럽습니다. 작금의 종교편향으로 불교를 무시하는 현상은 기독교의 훼불을 비롯한 수많은 피해를 당하면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사안일로 일관해온 스님들의 결과입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우리나라 재가불자들은 선방의 스님들에 대하여 잘 모른다. 다만 결제철이 되면 종정스님이 결제와 관련된 말씀이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 소개 되고, 또 해제철이 되면 또 한 말씀이 소개 되어서 일년에 두 차례 결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나, 스님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어떤 공부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일아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선방승들의 문제가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선방출신의 스님들을 한 마디로 무능력자와 같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염불도 할 줄 모르고, 의식을 집전할 줄도 모르고, 교리를 모르니 포교도 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방스님들을 이렇게 무능력자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스님은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교육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 교육문제를 지적하기 위하여 스님은 LA불교현황부터 설명하여, LA에서 본 선방출신의 무능력을 보고 강원 교육시스템을 한탄 한 것이다.

 

 

죽은 교육하는 강원

 

스님이 공부하는 곳을 강원이라 한다. 세속적인 표현을 빌리면 대학과도 같다. 그래서 요새는 강원이라는 말 대신 승가대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강원의 교육은 어떤 것일까. 재가불자들이 잘 모르는 강원에 대하여 스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잘못된 강원교육 >

저의 주장은 수백 년 내려온 서당식 현 강원 교육은 스님들을 무능력자로 배출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아는 것의 한도 내에서 남에게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는 유물관에나 있어야 할 그런 구태의연한 서당식 교육이 강원에서 아직도 그대로 계속된다는 사실입니다. 강원교육은 현장에서 즉각 써 먹을 수 있는 필요한 교육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현실에서 동떨어져 있고 써 먹을 데가 없는 죽은 교육입니다. 지금 한문으로 된 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강원은 한마디로 무능력자의 배출장소와 같다는 것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상은 글로벌하고, 인터넷의 보급에 따라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데, 몇 백년전의 서당식 한문경전 교육이 강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고 세상에 나오니 무능력하다는 소리를 듣고 평생 산에서만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선방승들이 왜 세상에 나오기를 주저하고 산에서만 머물려고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배운 교육이 세상의 중생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고 먹혀 들어 가지 않았을 때 당연히 숙식조차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 본다.

 

강원에서 어떻게 교육하길레

 

그래서 스님은 강원교육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이길레 폐지를 주장하는 것일까. 스님은 현재 강원의 커리큘럼에 대해서도 소개 하였는데, 스님이 되면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는 다고 한다.

 

 

 

강원교육 커리큘럼

학년

전통 명칭

과목 이름 (기본 과목)

약간의 다른

과목 있음

1학년

치문과

치문

2학년

사집과

서장, 도서, 선요, 절요, 우법소승…

3학년

사교과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

4학년

대교과

화엄경

 

 

 

 

 

 

이것이 한국불교에서 지난 수백년동안 변함없이 지켜져 오던 교과과정이다. 모두 중국의 조사스님이나 한국의 스님들이 지은 것으로서 대부분 선수행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그 어느 교과목을 보아도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표에 있듯이 중국스님 일색입니다. 강원에 입학한 사미에게 첫 학기에 가르치는 것은 옛날 중국 스님들의 글인 치문입니다. 너무나 큰 오류는 강원에서 첫 대면하는 과목은 마땅히 부처님의 일생,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어야 합니다. 출가자는 불교의 뿌리인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웬 중국스님 글인지요. 그것도 한문으로 되어있어 난자 새기다가 많은 시간을 다 낭비하고 뜻도 한문서체에 국집하여 큰 틀의 이해를 못합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강원교육에 부처님에 대한 교육이 전혀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불자라면 마땅히 부처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오로지 중국스님들이 지은 교재로 강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무비스님의 강의를 불교TV사이트에서 보았다. 스님은 서장강의에서 서장이 불교서적 가운데 베스트셀러중의 하나라고 극찬 하였다. 서장은 남송시대에 대혜종고스님이 지은 책인데, 지금까지 강원에서 교재로 활용될 정도이니 천년 베스트셀러라고 소개하였다.

 

그런 서장은 선수행하는데 있어서 스님들에게 필수과목이지만 난(難)자 새기다 시간 다 가고, 더구나 한문체라 큰틀의 대의를 이해하기도 어렵다 한다. 그런 교재로 공부하여 세상에 나와 중생을 교화하려 할 때 한문투의 문구가 먹혀 들어가지 않을 뿐 더러 감동도 주지못할 것이다.

 

부처님을 찾아서

 

그래서 일아스님은 한문투의 경전강의를 폐지하고 부처님의 일생부터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불교인이라면 당연히 부처님이 누구인지 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아스님을 불교TV사이트(일아스님, ' 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저자)에서 볼 수 있었다.

 

프로에서 스님은 말하기를 자신은 강원교육을 받을 때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 불교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교육하는 강원에서 왜 부처님이 보이지 않을까하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강원교육과정이 모두 중국스님이나 한국의 유명스님들이 쓴 선에 관한 책이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불교경전위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교인이 되었으면서도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분일까하고 무척 궁금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도반들은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았고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강원을 졸업하고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동남아시아 불교국가로 공부하러 갔다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이 어떤 분인줄 알게 되자 이제 부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알려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 본격적으로 초기경전인 빠알리 삼장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런 역작의 하나로서 책을 하나 내게 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이라 한다. 그렇다면 왜 이책이 집중조명을 받게 되었을까.

 

민족사의 3대 서적

 

그것은 이 책을 펴낸 민족사의 사장이 추천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불서전문서적출판사인 민족사의 사장은 불교tv사이트에서.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이 민족사의 3대 서적중의 하나라고 극찬하였다.

 

민족사 사장이 말하는 3대 서적은 성본스님의 중국선종 성립사 연구와 석지현스님의 벽암록’, 그리고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이라 한다.

 

일아스님의 책을 추천한 이유는 한역계통이 아닌 빠알리 원전을 직역한 것으로 부처님의 원음을 그대로 전달 한 것에 대하여 큰 의미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더구나 세계 어디에 내 놓아도 자부심을 가질 만한 책이라 하였다.

 

실제로 스님의 책을 읽어 보면 문장이 유려하고 절로 신심이 우러나오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이제 까지 접해 보지 못하였던 테라가타, 테리가타등도 소개 되어 있고, 또 주제별로 구분 되어 있어서 마치 부처님을 면전에 보듯이, 부처님의 음성을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잘 짜여져 있어서 불자라면 누구나 한 권정도는 가지고 늘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책은 선물이나 법보시로도 매우 유용할 듯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겨 있는 책을 읽거나 선물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공덕을 쌓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자주불교의 실현을 위하여

 

이처럼 한권으로 요약된 빠알리 경전을 선 보여 부처님이 누구인지 알게 해준 일아스님이 무능력자를 양산하는 강원교육을 확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분명한 것은 강원 1학년에서는 빠알리 경전의 부처님의 일생과 근본 가르침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은 스님들의 주체성 확립에 아주 중요합니다. 스님들이 먼저 배워야 할 분은 중국스님도 아니고, 한국스님도 아닌 부처님 바로 그분이고 그분의 진설입니다.

 

(일아스님,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에서)

 

 

강원의 1학년에서 부처님의 일생과 근본 가르침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교재로 어떤 것이 적당할까.

 

아마도 스님이 지은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 만큼 좋은 교재가 없다고 생각한다. 2008년도 출간된 이책은 발없는 소문이 천리를 간다고 인터넷등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실제로 글을 쓸 때 이 책의 내용을 수 없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때 스님이 지은 한권의 책이 세상을 바꾸어 놓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부처님을 아는 것은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것인데, 이를 달리 말하면 자주불교의 실현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강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부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이제까지 한국불교에서는 부처님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다. 특히 스님들을 교육시키는 강원에서 조차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일생이나 근본가르침을 철저하게 외면하였는데, 이는 매우 놀랄만한 것이다.

 

일아스님의 글이 아니었다면 보통불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보통불자들은 스님들이 부처님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또 가르침에 대하여 통달하고 있을 것 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강원의 교육과정에 부처님의 일대기나 근본가르침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라는 것 같고, “포대기 안에 애가 없다는 것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 강원을 졸업한 스님들이 오로지 선방에서 참선수행만 하게 되었을 때 댓글에서 본 어느 산중승처럼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하여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라고 거침 없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선방승들이 세상에 나와서 중생교화도 하지 않지만, 설령 세상에 나와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일 뿐이라는 것 역시 일아스님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었다.

 

무능력자 양산과 우민화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불교는 이제까지 무능력자만 양성해 왔다고 볼 수 있다. 무능력자밑에서 불교를 신봉하는 재가불자들은 어떠할까.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가불자 역시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매우 간단한 불보살 칭명하는 것이나 불보살 앞에서 기도나 절하는 것등이 신행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신행행태는 불자들을 우민화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한국불교는 무능력자를 양산하고, 우민화하여 왔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이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삿된 법은 깨 버려야 한다. 그래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현정파사(顯正破邪)

 

한국불교는 파사현정해야 한다. 파사현정은 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르게 바로잡다라는 뜻이다. 어떻게 파사현정해야 할 것인가. 해외불자 법우님의 말씀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무시하는 수행자들은 솔직히 불교도가 아니라고 봅니다라고 하여 배척해야 할까, 아니면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반배도 해주지 말아야 할까. 답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저는 이것을 개인적인 성향 내지 견해로 보기 보다는 집단적인 문화로 보는 입장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배우는 기회를 갖지 못하고 조사어록만을 배워서 평생 간화선 만을 하게 되면 저런 견해를 갖게 될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제까지의 선종은 불교라기 보다는 조사교라고 불러야 합니다. 조사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차이가 많은데 그 다른 가르침 때문에,조사어록을 신봉하는 문화 때문에 그 산중승과 같은 견해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제 먼저 다행스럽게 불교를 접한분들이 불교를 접하지 못한 분들에게 불교와 조사교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주어야 하며 자신스스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서 파사현정보다는 현정파사의 방법(선과 대승의 단점을 지적하기 보다 초기경전의 장점을 드러내는 방법)이 많은 에너지 소비 없이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봅니다.

 

 

 

이웃블로거 스님이 주신글이다. 스님은 파사현정하기 보다 현정파사 하자고 하였다. 그 방법은 초기불교의 장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이는 초기불교가 널리 퍼지면 올바르고 바로 잡혀져서 현정이 되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릇된 견해는 깨지기 때문에 파사가 되어서, 결국 선현정하고 후파사하자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후회하면 왜 고통스러울까

 

아비담마에 꿋꿋짜(kukucca)라는 심리현상이 있다. 52가지 마음부수에 속하는 이 술어는 우리말로 후회이다. “아차 잘못(ku) 했구나(kata)”라는 빠알리어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악작(惡作)’이라 한다. 동일한 뜻으로 잘못을 햇다라는 뜻이다.

 

이는 전에 지은 행위에 대하여 뉘우치거나 안달복달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해로운 마음(不善心)’으로 분류한다. 그런 꿋꿋짜는 성냄(dosa), 질투(issa), 인색(macchariya)과 더불어 해로운 마음중에서도 성냄에 뿌리 박은 마음으로 분류된다.

 

후회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성을 내며 불만족 스러워 하는 것과 같다. “그때 좀 더 잘 했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와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고 있어 보았자 고통스럽기만 할 뿐이다.

 

원래 화를 낸다는 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화내는 사람 자신만 손해이다. 따라서 후회는 성냄에 뿌리박고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후회해 보았자 자신만 고통받을  뿐이다. 그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불교tv사이트에서 전현수박사는 매우 심플하게 설명하였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그 때 당시의 조건이 맞았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지금 후회한다는 것은 과거의 조건과 지금의 조건이 맞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과거에 내린 결정은 그 상황에서 그 조건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조건이 다른 현시점에서 지나간 과거의 일을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냄에 뿌리박은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 자신만 고통스러울 뿐이라 한다. 한국불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조건은 갖추워졌다

 

선방스님들이 한문경전으로 서당식교육을 받아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른 것은 그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조건때문으로 보면 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상황과 조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답은 이미 나와 있다.

 

현재는 부처님의 일생과 근본가르침을 접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이 되어 있다. 그것도 부처님을 마치 면전에서 보듯이, 그리고 바로 옆에서 음성을 듣듯이 잘 번역된 빠알리 경전이 있고, 수행방법 또한 소개 되어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수행처에서 수행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재가불자들도 단지 무조건 믿고 빌고 기도만 하는 신도로서의 불자가 아니라, 모든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로서의 불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현시점은 파사현정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파사하고 현정하기에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먼저 현정하고 그 다음에 파사 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인터넷등을 통하여 널리 퍼뜨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일아스.doc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일아스.pdf

 

 

2011-07-26

진흙속의연꽃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doc
0.07MB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일아스.doc
0.06MB
승가교육은 백지에 새로 짜야 합니다-일아스.pdf
0.1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