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노랑가사의 권위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16. 15:58

 

 

 

노랑가사의 권위

 

 

 

이런 시장은 처음이야

 

금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취임식을 인터넷으로 보았다. 인터넷으로 본 박시장의 취임식은 파격적이었다. 이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박시장은 마치 TV방송프로의 진행자 같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인터넷취임

 

 

 

마이크만 들지 않았을 뿐 자신이 일일이 시장실 내부를 설명하는 모습이 능숙한 진행자처럼 보였다. 집무실 구석구석에 놓여 있는 물건이나 책등을 소개하고, 더우기 같이 일하고 있는 여직원까지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어느 매체는 파격행보의 절정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뽑았다.

 

박원순시장의 파격에 대하여 네티즌들은 감격하였다. 올린 글을 읽어 보면 거의 대부분 감탄하고 감격한 것에 대하여 짤막하게 표현하였는데 이런 시장은 처음이야”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는 등의 소감을 밝히는 것이었다.

 

박시장의 파격에 대하여 생소하기 보다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전임시장들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전임시장들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감히 범접을 불허하는 성층권에서나 사는 존재들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박시장의 행보를 보면서 서민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비록 쇼로 보일지라도 막연하나마 하나의 희망을 보여 주었다.

 

스님이 스님폭행

 

박시장은 행보는 서울시민과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것에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박시장의 거침없는 파격을 보면서 불교계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조계종 종단의 행보를 보면 불자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파격을 아직 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아니 희망 보다 절망을 더 많이 주었을지 모른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어느 스님의 폭행사건 일 것이다.

 

지난번 조계종 종회에서 폭행사건이 있었다. 종회의원인 S스님이 같은 종회의원을 폭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불교계 관련 인터넷 뉴스에서 보도되고 난 뒤 이에 대한 처벌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하지만 종회에서는 다음 번 종회에 출입을 금지하는 송방망이 조치를 내렸다.

 

스님이 스님을 폭행하였다는 것도 경악스러운 일인데 마치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조치를 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한다. 폭행사건의 당사자인 S스님은 이미 2009년도에도 폭행을 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노스님을 폭행하였지만 종단에서는 문서견책이라는 지극히 가벼운 솜방망이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불교계의 낯 뜨거운 보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것은 메이져 언론의 보도를 타게 된 것이다. 한겨레 신문 종교전문기자의 사이트에서 폭행사건에 대한 기사가 다루어졌는데 조회수가 수 만회에 달하였다.

 

그 기사는 불교단체 모임인 불시넷(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의 성명을 근거로 작성되었는데, 불교 내부의 부끄러운 자화상에 대하여 모두 까발린 것이었다. 더구나 기사의 제목에 삽입된 사진을 보면 스님들이 각목을 들고 싸우는  것을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조직폭력배의 집단 패싸움을 보는 것 같다.

 

 

 

 

 

사진 : 조계종 총무원서 스님이 스님폭행,

출처: 휴심정, 한겨레신문 조현글방

 

  

 

 개판치는 승려들

 

불교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불교계 외부로 알려지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 하지만 견제장치가 없는 스님들의 거침없는 행보는 불교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불자들에게 걱정과 근심과 염려를 끼쳐 주기에 충분하다. 이런 개판치는 승려때문에 다종교사회에서 불교가 욕을 먹고 불자들이 머리를 처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자정능력이 상실된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불자들은 스님들을 삼보의 하나로서 공경한다. 우리나라 한글 삼귀의를 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고 명기 되어 있기 때문에 스님들은 무조건 공경의 대상이다. 그런 스님이 개판을 쳤을 때 과연 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삭발하고 승복만 입었다고 공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승가는 승복의 권능에만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스님이 폭행을 해도 가벼운 징계에 그치고, 스님이 결혼을 한 사실이 있어도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을 보면 종단이 자정 능력이 없음에 틀림없다. 승가에서 세속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속에서 승가의 일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앞으로도 위와 유사한 일이 계속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럴때 마다 언론과 매스콤에서는 대서특필하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불교의 위상은 점점 추락될 것이 뻔하다. 더 이상 개판치는 승려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끊임없이 비판하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런 역할을 불교시민단체, 불교언론, 네티즌들이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승복의 권위가 살아 나도록 해야 한다.

 

노랑가사 이야기

 

승복은 권위의 상징이다.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자체가 존경과 공양의 대상이기 때문에 승복을 입은 비구들은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런 승복은 나라 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노랑가사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런 좋은 예화가 법구경에 있다.

 

 

데와닷따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데와닷따 빅쿠와 관련하여 게송 9번과 10번을 설법하시었다.

 

한때 부처님의 으뜸가는 두 제자인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마하테라는 사왓티로부터 라자가하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 라자가하 사람들은 일천 명의 빅쿠들으 초청하여 아침 공양을 올렸는데, 그중 재가 신자 한 사람이 굉장히 비싼 고급 천을 공양올리는 일을 담당하는 빅쿠에게 헌납했다.

 

그 신자가 천을 바치면서 요청하기를, 만약 라자가하 사람들의 힘으로 일천명의 빅쿠들의 공양을 준비하는데 돈이 부족하면 이 천을 팔아서 비용을 충당하고, 만약 공양을 준비하는데 돈이 충분할 때에는 이 천으로 까사를 만들어서 이를 입기에 합당한 빅쿠에게 바쳐 달라고 했다.

 

그런데 음식을 공양한 데에는 따로 더 이상의 비용이 필요없어서 그 고급천은 팔지 않아도 좋았으므로 그것으로 누구의 까사를 짓는 것이 합당할지를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리뿟따나 마하목갈라나 마하테라를 비롯한 다른 빅쿠들은 사왓티에 머물면서 가끔씩만 이 라자가하에 들르지만, 오직 데와닷따 빅쿠만은 늘 이곳에 머물러 우리를 지도하는 분이니만큼 이 천으로는 데와닷따 빅쿠의 까사를짓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그 옷은 데와닷따에게 공양되었다.

 

그렇게 해서 옷을 지어 받은 데와닷따는 그 까사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그 옷을 입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은근히 뽑냇는데, 일단의 빅쿠들을 통하여 이런 사실이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는 부처님께 전해졌다. 부처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데와닷따는 그런 고급스런 옷을 입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라. 그런데도 그는 그 옷을 입고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구나. 데와닷따가 이런 부적합한 행동을 한 것은 비단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데와닷따의 전생 이야기를 들려주시었다.

 

지난 과거의 어느 때 데와닷따는 코끼리 사냥꾼이었다. 그때 숲속에는 많은 코끼리들이 떼를 지어 살았는데, 이 사냥꾼은 어느 때 코끼리들이 빳쩨까붓다께 공손히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빳쩨까붓다의 노란색 까사를 본뜬 천을두르고 코끼리의 환심을 사기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옷 안에 예리한 창을 숨겼다. 그 방법으로써 그는 그를 빳쩨까붓다인줄 알고 아무런 경계심 없이 접근하는 코끼리들을 손쉽게 사냥하곤 했던 것이다.

 

그때 보디삿따는 코끼리들의 왕으로서 많은 코끼리들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이 코끼리 왕은 동료 코끼리들이 한 마리씩 죽어가는 것을 알고 그 원인을 조사해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코끼리 왕이 코끼리떼의 맨 뒤에 서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창이 날아왔다. 그러나 경계심을 갖고 있던 코끼리 왕은 그 창을 피할 수 있었다. 코끼리 왕은 곧 사냥꾼에게 달려가 자기의 코로 사냥꾼을 감아서 높이 쳐들었다.

 

코끼리는 이 간악한 사냥꾼을 나무나 돌에 부딪쳐서 죽여 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거룩한 빳쩨까붓다의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여 마침내 그의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때의 사냥꾼이 지금의 데와닷따이며, 코끼리 왕은 바로 부처님인 것이다.

 

「데와닷따는 이와 같이 전생에 있어서도 자신에게 걸맞지 않은 옷으 입었던 적이 있었느리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 두 편을 읊으시었다.

 

 

그가 번뇌에 싸여 청정치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면

비록 노란색 까사를 입었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 공덕도 없다.

 

그가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엄정하게 계행을 지키며

자기의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면

그에게 노란색 까사는 실로 고귀한 것.

(Dhp9-10)

 

 

이 법구경 인연담을 보면 노랑가사의 권위에 대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데와닷따가 전생에 사냥꾼이었을 때 노랑가사로 위장하자 코끼리가 공손히 무릎을 꿇어 사냥에 성공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노랑가사의 권위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코끼리와 같은 축생들도 공경해 마지 않은 성스런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랑가사를 입었지만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여 번뇌에 싸이고 청정하지 않았을 때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알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폭행을 일삼는 승려나 승려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결혼한 전력이 있는 승려라면 비록 승복을 걸쳤을지라도 폭력배나 다름없고, 시정잡배와 다름 없을 것이다.

 

한국형 승복때문인가

 

승복은 스님을 스님답게 만드는 상징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승복은 부처님 당시의 가사와 차이가 많이 난다. 겨울이 있는 동아시아 기후적 특성으로 인하여 아열대지방의 가사와 다를 수 밖에 없지만 혹시 이 승복의 차이로 인하여 계율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아닐까.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보아도 부처님이 입고 있는 것은 한쪽 팔을 드러낸 편단우견형 가사임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부처님 당시의 가사를 입지 않고 오로지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한국형 승복을 입고 있어서 개판치는 스님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한국식 승복을 보면 예불 올릴 때나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괴색(壞色)가사를 걸치는 것을 알 수 있다. 평상시에 입는 옷은 다양한 종류의 회색 승복이다. 이렇게 평상시에 입는 옷 다르고, 예불 올릴 때 입는 옷이 다르다면 그에 따라 계행도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항상 가사를 입고 있다면 계행도 항상 지켜 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한국의 스님들은 항상 가사를 입지 않는다. 특별한 때에만 가사를 걸칠 뿐 평상시는 다양한 종류의 승복을 입는다. 바로 이런 점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스님들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당시의 가사로

 

박원순 서울시장의 인터넷취임식에서 파격을 보았다. 한국불교도 파격을 보여 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파격은 승복에서 부터 시작 될 수 있다. 현재의 승복 대신 부처님당시의 가사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것은 노랑가사를 말한다. 아랫가사(antaravāsaka, 안따라와사까)와 웃가사(uttarāsaga, 웃따라상가) 그리고 중복가사(saghāi, 상가띠)로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이런 가사를 매일 입고 있으면 계행은 절로 지켜 지리라 본다. 가사를 항상 입은 상태에서 폭력사태도 없을 것이고, 유흥업소에 출입할 일 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가사의 권위때문이다. 부처님이 입었던 가사의 권위때문에 계행이 자동으로 지켜 질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처님당시의 노랑가사는 화려한 것도 아니고 금빛찬란 한 것도 아니다. 마치 누더기를 걸친 것 같은 소박한 것이다. 그런 노랑가사의 권위라면 인간뿐만아니라 축생, 하늘의 신도 공양하고 찬탄하지 않을까.

 

 

 

그는 마른 몸에 누더기 가사를 걸치고

힘줄이 온몸에 나타나 보이며

숲 속에서 고요히 홀로 앉아 선정을 닦는다.

그런 사람을 나는 브라흐마나라 부른다.

(Dhp395)

 

 

 

 

 

 

 

2011-11-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