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포교대상 유감

담마다사 이병욱 2011. 11. 18. 10:36

 

 

포교대상 유감

 

 

 

 

포교대상을 왜 스님들에게 주나?”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눈에 확 띄는 기사를 읽었다. 제목은 포교대상을 왜 스님들에게 주나?”이다. 이 기사는 조계종의 종회기간 중에 어느 스님이 문제를 제기 한 것이었다. 매우 짤막한 이 기사는 오로지 한 사이트에서만 볼 수 있었는데, 그 때 당시 이의를 제기한 스님의 주장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포상법 제정안 토의에서 중앙신도회장의 추천권 부여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던 중 지홍 스님은 "포교대상을 원로의원 스님들이 받고 있다" "출가수행자에게 포교와 전법은 본분사에 해당하는데, 그 보다 일을 하면서도 포교를 위해 헌신하는 불자들이 참 많다. 어려움 속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그런 분들에게 상을 주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불교포커스, 포교대상을 스님들에게 주나?”, 2011-11-04)

 

 

기사에서 포교대상을 스님들이 받는 현상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출가자들이 포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심쓰듯이 포교대상이라는 영예를 스님에게, 그것도 종단의 고위직을 역임하였거나 어른 스님에게 주는 현상은 고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매우 공감한다. 이미 블로그에서 포교대상과 관련하여 두 차례 글(포교대상은 스님들의 잔치인가, 일반재가불자로 한정해야 하는 이유, 포교대상과 불자대상, 이대로 좋은가)을 올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두 번째 올린 글에서 금년도 포교대상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것은 포교대상에 대한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개정된 조계종의 포교대상에 대한 시행령을 보면 일반재가불자사찰또는 단체도 해당사항에 포함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말이 있듯이 스님이 아닌 자나 단체가 대상후보이기를 잔뜩기대했었으나, 올해 역시 예년과 다르지 않게 원로스님에 그 몫이 돌아간 것이다. 그런 포교대상자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역대 포교대상 수상자들

회수

년도

포교대상자

소속 또는 직책

  

10

1998

지광스님

능인선원장

 

11

1999

도영스님

전포교원장

 

12

2000

지현스님

청량사 주지

 

13

2001

지관스님

전 총무원장

 

14

2002

고산스님

쌍계사 조실

 

15

2003

월운스님

동국역경원장

 

16

2004

동춘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17

2005

월주스님

전총무원장

 

18

2006

정관스님

부산영주암회주

 

19

2007

정무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20

2008

능가스님

범어사 내원암 회주

 

21

2009

도문스님

조계종 원로의원

 

22

2010

대행스님

한마음선원장

 

23

2011

무산스님

신흥사 조실 

2011년 부터 스님, 재가불자, 사찰, 단체로 확대됨

 

 

 

올해의 포교대상은 신흥사 조실인 무산스님이 타게 되었다. 수상이유로서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해 만해대상’ ‘만해축전등을 주최하여 불교포교의 새로운 장을 열은 것이라 한다.  

 

 

 

 

 

 

2011 포교대상

23회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한 신흥사 조실 무산스님이 포교대상 상금 등 모두 2천만원을 육군훈련소 신축법당인 ‘호국 연무사’의 건립 기금으로 쾌척했다.

사진; BBS불교방송, 23 포교대상 신흥사 조실 무산스님

 

 

 

스님들이 스님들을 심사하여 스님들에게

 

조계종 포교대상의 특징중의 하나는 스님들이 스님들을 심사하여 스님들에게 상을 주는 것이다. 바뀐 포교대상 시행령에 중앙신도회장도 포함되어 있지만, 9인심사위원회중 8명이 스님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포교는 스님들의 당연한 의무이다. 동시에 불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것은 부처님이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경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대들도 또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을 가지고,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상윳따니까야 4  마라 상윳따1, 율장 마하왁가 1 11,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이 위 없는 깨달음을 얻고 최초로 법의 바퀴를 굴린 후 1년이 안되어 제자들이 60명이나 생겼다. 이 때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음을 이해한 제자들에서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을 준엄하게 명령한다. 목적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리고 자비심을 가지고 대하라고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다면 결코 포교를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포교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요인도 중생에 대한 자비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자비심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깨달은자만이 자비심을 낼 것으로 본다. 그런 깨달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라 본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인 사성제와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여 부처님이 경험한 것과 똑 같은 경지에 올랐을 때 중생에 대한 자비심은 절로 나는 것이라 본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 이들이 전도명령당시 60명의 아라한들이었다. 아라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깨달은 바를 증명한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만이 자비심을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포교대상을 독식하는 현상은 출가자들의 깨달음이 완성된 수행자들이 그다지 많지 않기 문이라 보여진다. 

 

출가자들이 모두 깨달았다면 중생에 대한 자애와 연민이 넘쳐 도저히 그대로 놓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서는 포교하는 스님들로 넘쳐 나서 포교대상을 스님들에게 주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얼마나 포교에 등한시 했길레

 

수행과 포교가 스님들의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스님들을 심사하여 스님들에게 포교대상을 주는 현상, 그것도 원로스님에게 영광을 주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스님들이 그 만큼 포교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스님들이 얼마나 포교에 등한시 했길레스님들에 포교를 열심히 하라고 장려하는 의미에서 포교대상을 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포교대상은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매우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는 타종교의 종교인들과 매우 대조되는 사항이다.

 

타종교의 경우 목사나 신부들에게 대상을 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 종교인들이 선교나 전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고 하나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은 신자들이 받는데, 그것은 선교를 잘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종교생활을 잘 해서 받는 것이다.  

 

천주교의 경우 가톨릭대상을 받는 이들은 모두 평신도들이다. 그런 평신도들은  가장 낮은 자세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할 바를 다하며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름 없는 신자들이 대부분이다.

 

이에 비하여 불교의 포교대상자들은 모두 스님들로서 그것도 원로스님위주인데. 이런 현상은 스님들이 얼마나 포교에 등한시한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님들은 거의 포교를 하지 않는다. 일년에 두 번 있는 안거기간에 깊은 산중에 있는 선원에 모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행정진에 몰두하거나 죽은 자를 위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지내주는 것이 스님들의 역할처럼 보여진다. 이렇게 스님들이 포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스님들에게 포교를 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 포교대상이라 보여진다.

 

통쾌한 혜문스님의 불교강좌

 

스님들이 포교를 하지 않는 것은 공부가 덜 되어서라고 볼 수 있다. 만일 공부가 다 되었다면 누구나 포교의 전선에 나설 것임에 틀림 없다. 왜냐하면 포교는 자비심을 가진 자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비심은 반드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스님들이 공부를 하지 않아 저자거리로 나올 수 현상에 대한 질타를 들었다.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혜문스님이다.

 

혜문스님의 강의를 들으면 한마디로 통쾌하다는 것이다. 아침 6시에 방송되는 불교강좌시간에서 혜문스님은 최근 목사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교리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강의를 듣고 있으면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 수 있게 되고,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마음껏 고양시켜 준다.

 

하지만 현실은 혜문스님같은 전도자가 매우 희귀하다는 사실이다. 스님들이 깊은 산중에서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 좀처럼 세상에 나오려고 하지 않은 현상에 대하여 혜문스님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사찰에는 안내자도 없고 스님을 한 번 만나려고 하면 하늘의 별따기요 또 마주쳤다고 하더라도 대화는 커녕 소위 무뚝뚝하게 폼만 잡고 무엇을 묻고 싶어도 물어보면 대꾸가 없다고 말합니다.

 

언제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명산대찰을 찾으면 법당에서 일명 법당보살이 화주를 하면서 시주하라고만 하지 도대체 스님 한분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니 과연 우리승가는 어찌 된 일입니까?

 

교회에서는 어떻게 하던 먼저 말을 걸어서 교회에 나오도록 열과 성을 다 하고 있는데, 불교집안에서는 찾아 오는 사람도 붙들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안타까워들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대해 스님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가고 있는 수행의 길에 자신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꾸만 피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스님들이 해야 하는 수행과 공부를 하지 않고 무위도식이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자신도 유니폼만 입고 있는 무뉘만 승려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아니면 순전히 개인주의로 흘러서 겉으로는 대승을 표방하면서도 지독한 소승적 생각으로 흐르는 경향이 짙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출가생활은 정말 곤란합니다. 스님들은 불자들의 시주에 의해서 생활합니다. 때문에 언제든지 나서서 불자와 민중들을 만나고 그들과 대화하며 불교의 정신에 입각한 삶의 조언자 즉, 멘토가 되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출가자의 본분입니다.

 

그렇지 않고 혼자만 산속과 뒷방에 박혀 앉아서 세월만 보낸다면 승려로서는 양가득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좋은 명당터에 앉아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산속에 숨어서 좋은 경치 벗삼아 허송세월 하라고 삼보의 일원으로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혜문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2011-11-17일자)

 

 

 

혜문스님은 공부하지 않는 스님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불자들이 절에 갔었을 때 스님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설명하고 있다.  

 

스님들은 왜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할까

 

불자들은 대게 스님들을 많이 아는 스승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 저것 묻게 되는데,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곤란하다는 것은 그만치 공부가 덜 되어서일 것이다. 그런 공부도 한 두해만 하는 것이 아니라 10, 20, 30, 심지어 평생 공부해도 이루어지 지지 않은 것이라면 하화중생은 요원한 일이 될 것이다. 아니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들을 만나려 하지 않은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불자들과 만나는 것을 회피하려는지 모른다. 

 

이는 자신의 수행과 수행의 결과에 대하여 자신도 없고 확신도 없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스님 자신이 지난 10년간 선방에 다니면서 수행을 해 보았기 때문에 자신있게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스님들이 깊은 산속에 숨어만 지내며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며 살아갈 때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하는 불자들이 있다. 그래서 산속에 숨어 살며 무위도식으로 일관하는 스님들에게 불자들의 멘토가 되어주기를 간곡하게 바라는 뜻에서 위와 같이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스님들을 볼 수 없는 사실, 심지어 방문한 절에서 조차 볼 수 없는 사실은 스님들이 불자들과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스님들에게 포교대상을 주는 것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불교의 현실인지 모른다.

 

포교대상은 폐지되어야

 

포교대상은 폐지되어야한다. 스님들의 의무가 수행과 포교이기 때문에 포교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에게, 그것도 원로스님들에게, 그것도 선심쓰듯이 포교대상을 수여하는 것은 다종교사회에서 매우 낯 뜨겁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정코 포교대상이 없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20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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