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를 부정하는 사람들, 사법(邪法)과 사법(似法)과 사법(私
글을 쓴다는 것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공적인 행위일까. 네티즌으로 부터 받는 글 중에 가끔 ‘공적인 글’이라는 말을 듣는다. 개인블로그를 만들어 개인의 견해를 이야기 한 것에 대하여 공적인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이다. 이런 글이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찾아 와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견해와 맞이 않는 글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면서 공적인 자세를 갖추어 달라고 말한다. 그런 표현중의 하나를 예로 든다면 “암튼 앞으로 운영자님은 좀더 공인으로서 조심스럽게 이 곳을 운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와 같은 글이다.
인터넷에 올려진 글은 어떤 식으로든지 타인에게 영향을 끼친다. 카페, 블로그, 게시판, 지식등 수 많은 사이트에 자신의 견해를 올린 것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서 읽혀질 것이기 때문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짧은 댓글 또한 영향이 지대함은 인터넷 뉴스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인터넷에 글을 쓰는 행위는 공적인 것이고 글을 쓰는 사람 역시 공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가지 원칙
매일 매일 글을 생산해 내고 있는 입장에서 매일 매일 업을 짖고 있다. 그런 업이 상대방에 따라 좋은 것일 수도 있도, 반대로 해로운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경우 오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가지 원칙만 정해 놓으면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경전에 실려 있는 내용을 위주로 글을 쓰면 가장 무난하다. 경전에 있는 내용은 수천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미 검증과정을 거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전과 경전을 해석한 논장이나 주석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등불같은 것이다. 그래서 의심없이 믿고 따르는 것이다. 설령 의심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견해에 휘둘리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맛대로 쓴 글
하지만 인터넷상에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집착하는 불자네티즌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받아들이는 자들도 있다. 가르침 중에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의심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중의 두 가지를 들라면 어느 인터넷 카페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이다.
화살경을 보면 불교수행은 육체적 괴로움을 극복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고, 잡아함 259 무간등경을 보면 불교수행은 현세에서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 수행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http://cafe.daum.net/hongsasung/HA6R/1134)
불교수행의 목적이 마치 즐거움만 누리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교수행의 목적은 단지 현세를 즐겁게 보내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망갈라경(행복경)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행복이란 세간적 행복 뿐만아니라 출세간적 행복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현세에 행복만 바란다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견해를 가진 ‘단멸론자’가 되기 쉬울 것이다.
붓다의 무아견(중도)입장에서는 인간의 사후에 대한 내용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유아견(상견)입장인 힌두교의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를 당연히 부정하였던 것이다.
(http://cafe.daum.net/hongsasung/HA6R/1134)
위 내용은 불교의 윤회를 부정한 것이다. 부처님이 윤회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윤회와 업보등을 부정하였다는 이야기는 보지 못하였다. 경의 도처에 부처님이 윤회에 관하여 설한 내용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윤회를 부정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마도 죽어서 돌아온 사람이 없어서 일것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은 전형적인 ‘단멸론자’들이라 볼 수 있다.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단멸론자들의 특징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라는 견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 단멸론자들은 부처님 당시에도 있었다.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i)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대답하기를,
보시나 제사 재물에 대한 공덕도 없고, 선행과 악행의 과보다 없다.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저절로 생긴 것도 없다.
(사만냐팔라경-사문과경, 다가니까야 D2, DN 2: Samaññaphala Sutta — The Fruits of the Contemplative Life {D i 47} [Thanissaro].)
유물론자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도덕을 부정하고 현실적인 쾌락이 인생의 목적임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런 일파를 ‘순세파’ 또는 ‘사탕발림파’라 하는데 보시는 바보들의 생각이라 주장하고, 죽은 후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라 말한다.
단멸론자들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앞서 언급한 어느 네티즌의 글과 정확히 일치 한다. 부처님이 사후윤회, 사후업보, 사후세계를 부정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유물론자의 주장과 다름 없는 것으로 본다.
홍사성님의 글에서
이처럼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에서는 위의 유물론을 비롯하여 여섯가지 신흥사상이 난립하였는데, 이를 육사외도라 한다. 여섯가지 삿된 견해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삿된 견해들은 모두 거짓으로서 부처님이 연기법으로 이미 논파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와 같은 삿된 견해들이 활개를 치는 것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이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설령 부처님의 정법을 접하였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견해가 들어 갔을 경우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삿된 견해들이 인터넷공간에서 떠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는 커다란 구업을 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삿되 견해가 유포되고 현상에 대하여 홍사성님은 자신의 카페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불교중흥의 길은 불교의 외피를 쓴 세 가지 비불교적 태도의 청산에 비롯이 있다. 첫째는 사법(邪法)의 척결이다.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이 배척하고 비판한 제례주의, 주술주의가 만연해있다. 관상과 사주를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허용하면 불교의 앞날은 없다. 둘째는 사법(似法)의 차단이다. 겉은 불교인 척하면서 속으로는 힌두교식, 도교식, 기독교식으로 변용한 교리를 불교라고 우긴다. 정법은 여기서 망가진다. 셋째는 사법(私法)의 극복이다. 부처님이 가르친 불교를 외면하고 편의에 따라 멋대로 해석한 법과 율을 불교라고 내세우면 안 된다. 사법(邪法)과 사법(似法)의 사법(私法)의 발호를 놔두고서는 불교를 불교라 할 수 없다.
(홍사성, 정법중흥(正法中興))
불자라면 불교가 중흥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온 국토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넘쳐 나는 불국토가 되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가장 융성하였던 시기인 통일신라나 고려시대의 불교로 되돌아 가자는 것은 아니다. 불교가 다시 일어난다면 그것은 정법불교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홍사성님은 글의 제목을 ‘정법중흥’이라고 지은 것으로 본다.
세 가지 삿된 견해
글에서 홍사성님은 ‘사법’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법은 한자로 구분되는데, 사법(邪法)과 사법(似法)과 사법(私法)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한다. 이런 사법을 척결하고, 차단하고,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세 가지 삿된법
구 분 |
형 태 |
내 용 |
전 망 |
사법(邪法) |
형식만 불교 |
제례주의, 주술주의, 관상과 사주의 방편으로 일관 |
불교의 앞날은 없음 |
사법(似法) |
무늬만 불교 |
힌두교식, 도교식, 기독교식으로 변용한 교리를 사용 |
불교가 망가지는 요인 |
사법(私法) |
개인만 불교 |
교리를 편의에 따라 멋대로 해석한 불교 |
단멸론, 허무주의 |
인터넷에는 온갖 불교가 난무한다. 마치 부처님당시의 육사외도를 보는 것 같다. 뿌라나 깟사빠(Purana Kassapa)의 도덕부정론,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ala)의 숙명론, 아지따 께사깜발리(Ajita Kesakambali)의 유물론, 니간타 나따뿟따(Nigantha Nataputta)의 영혼론, 브라만교의 아트만론등 무뉘만 불교, 형식만 불교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혼을 인정하는 듯한 불교는 힌두교적 교리 또는 기독교적 교리를 채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는 불교는 도교식 교리를 채용했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의 불교에 대하여 ‘대한힌두교 조계종’ ‘대한도교 조계종’ ‘대한기독교 조계종’이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여기에다 불교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윤회마저 부정하는 개인적인 견해를 가진 자들이 인터넷공간에서 날뛰고 있는데, 이는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이들은 가르침에 대하여 의심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법불교와 주류불교
이런 불교로는 불교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불교의 부흥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하루빨리 정법불교로 가야 하는 당위성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런 정법불교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기불교를 말하고, 이를 계승한 테라와다불교이다. 이런 불교를 한국에서는 ‘소승불교’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UCLA교수이자 동국대학술원장인 세계적 불교학의 석학 ‘로버트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주류불교(Mainstream Buddhism)’라고 부르고 있다.
2011-11-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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