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절밥을 너무 오래 먹어서 그런가? 도법불교와 생명평화경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21. 09:18

 

 

절밥을 너무 오래 먹어서 그런가? 도법불교와 생명평화경

 

 

 

 

가벼운 이미지

 

도법스님과 일면식도 없다. 다만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지난해 종교평화선언과 관련하여 수 십차례의 글을 올리면서 도법스님이 쓴 글이나 관련기사를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특히 인터뷰기사를 보면 어느 정도 성격이나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인터뷰기사를 통하여 접한 도법스님에 대한 이미지는 한마디로 가볍다라는 느낌이었다. 현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이 단답형의 답변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가벼운 이미지의 도법스님은 현재 조계종에서 자성과 쇄신 결사추진본부장이라는 긴 이름의 직책을 맡고 있다. 조계종의 개혁을 진두지휘하는 개혁의 총사령탑과 같은 위치이다.

 

이처럼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는 도법스님에 대한 인터뷰기사가 불교포커스에 실렸다. 무려 다섯꼭지에 이른다. 그 중 가장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이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것이다.

 

구럼비 바위가 깨져 나가던 날

 

불교계에서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이다. 이미 두 차례나 발표를 시도 하였으나 번번히 실패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법스님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에 대하여 미디어붓다의 이학종 기자는 단지불회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구럼비 바위가 깨져 나가던 날, 아니 우리의 몸뚱이가 발기발기 찢겨나가던 날, 불교계는 침묵했다. 제주 불교계가 움직였다는 소식은 이날이 저물도록 들려오지 않았다. 사회적 아젠다를 불교가 한 번이라도 먼저 선점한 적이 있었느냐며, 종교평화 불교인선언이 사회적 아젠다를 불교가 선점해 주도해나가는 의미가 있음을 역설했던 이들도 구럼비 바위가 무참히 폭파된 3 7일 내내 침묵했다.

 

( [이학종기자의 불교이야기] 2012 3 7일의 한국불교, 단지불회 2012-03-08)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구럼비 바위 폭파가 전국민적인 이슈로 부각되었다. 막무가내식으로 힘으로 밀어붙이는 MB정권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세력은 종교계밖에 없는데, 천주교의 경우 이미 오래전부터 진을 치고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게 온 국민의 관심사인 구럼비 바위 발파저지를 위하여 불교계도 늦게나마 동참하였다. 그리고 도법스님을 비롯한 종단 지도부 스님들이 제주도에 내려가 “뒤늦은 동참을 후회합니다” 라는 성명을 발표 하였다. 그리고 해군기지 건설 백지화를 천명하였다.

 

하지만 성명서 하나로 끝이었다. 구럼비 발파가 진행되어도 종단에서 농성을 하거나 데모를 하였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와 비교하였을 때 매우 대조되는 모습이다.

 

천주교의 경우 사제들이 끌려가고 수녀들이 연좌농성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불교계는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사본부가 하는 일은 늘 이런 식이었다. 한진중공업사태, 사대강사업문제 등에 대하여 늘 뒷북치기식이었고 용두사미로 끝났다. 이렇게 대정부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뒷북치기와 생색내기, 용두사미로 일관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것이다.

 

종교평화선언에 집착하는 이유

 

종교평화선언에 대하여 조계종에서는 대사회적 아젠다를 선점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선언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법스님은 왜 이렇게 종교평화선언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일까. 불교포커스와의 인터뷰기사에 잘 나와 있다.

 

 

화쟁위나 결사이야기를 밖에서 했다면 나는 맡지 않았다. 집행부가 한다고 했기 때문에잘 활용하면 제도권 종교계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평화선언이다. 종교평화선언을 잘 했으면 남남평화문제로 갈 생각이었는데 안에서 소화를 못 시켜서 터덕거리고 말았다.

 ( 원장의 고백, 단임 의지가 결사동력 만들까?” , 도법스님인터뷰 _4] 자성과 쇄신결사를 말한다, 불교포커스 2012-03020)

 

도법스님인터뷰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docx  도법스님인터뷰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pdf

 

 

도법스님은 먼저 총무원이라는 제도권에 들어온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총무원에서 개혁을 하라는 감투를 주었기 때문에 흔쾌히 들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도권의 힘을 빌어 평소 생각하고 있었던 남남평화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다.

 

제도권의 힘을 이용하여 종교평화선언을 하여 자신이 뜻하던 바를 이루려 하였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게 되자 도법스님은 반대하는 세가 큰것도 아니었는데 문제는 종단이 그 정도에 휘둘린다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한줌도 안되는 세력들에게 종단이 끌려 다녔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털면 안줌도 안된다는 식의 표현은 주권방송에서 아쇼카선언 초안을 작성하였던 조성택 교수도 하던 말이다. 그는 선사의 주장자를 예로 들면서 선사들이 법문할 때 주장자를 한번 내려치면 온갖 벌레들이 다 기어 나온다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종교평화선언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한줌도 안되는 벌레쯤으로 본 것이다.

 

 국민적 영웅이 되고자

 

그렇다면 도법스님은 왜 이토록 종교평화선언에 집착하였을까. 그것은 명분이 좋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나도 좋고 너도 좋은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다종교사회에서 종교간 갈등이 점차 심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때 불교에서 먼저 치고 나가면 즉, 아젠다를 선점하면 불교의 위상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반대세력 정도야 하나의 벌레 정도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부를 상대하는 것과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진리를 양보와 타협의 산물정도로 생각하고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면 그 영광은 누구에게 돌아갈까. 이에 대하여 그동안 도법스님이 추진하던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한 M스님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자승 총무원장은 자신의 부도덕함과 허물을 덮으려고 자성과 쇄신이라는 '결사'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화쟁위 도법으로 하여금 종교평화선언을 서둘러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도법은 의식없는 학자들을 동원하여 어설픈 종교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평화선언문을 작성하도록 했다. 물론 그 댓가는 충분히 지불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약발로 충성을 다하여 종교평화선언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잘 모르고 있다. 다른 종교와 잘 지내자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라고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종교평화선언은 종교간의 평화가 그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 내부는 물론 종교간에 갈등을 부추겨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그 본래의 목적이 있는 것 같다. 그러면 그때 도법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 마치 간디처럼 행동하면서 종교간의 평화가 실현될 때까지 단식에 들어가겠다고 선포할 것이다. 그러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불교를 떠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도법은 많은 욕을 얻어먹어가면서도 이 선언을 발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도법은 불법(부처님의 가르침)을 팔아서라도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이 벼랑끝 전술을 강행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들의 음모를 사전에 읽었기 때문에 끝까지 이 선언의 발표를 저지할 것이다.

 

(M스님, 불교닷컴 댓글과 트위터에서)

 

 

M스님의 글에 따르면 도법스님이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려 한 것은 종교평화선언을 기반으로 존경받은 종교지도자가 되고자 시도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조계종 개혁을 진두 지휘하고 있는 도법스님이 종단내에서 해결해야 될 일이 산적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기어코 종교평화선언을 이루어내고 말리라고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법스님의 나룻배

 

이렇게 오로지 종교평화선언에 올인 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도법스님의 불교관은 어떤 것일까. 불교포커스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질문자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 종교평화선언이 정치적 논리로 가 소모전적 상황이 됐다고 했는데, 일부 교학에 근거한 반대자들의 논리 중열린 진리관에 대한 지적이 있다. 그런데 스님이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나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또 다른 어떤 체제를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내 관심은 현장의 삶의 주체가 행복하다면 어떤 체제든 상관없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아니라 행복한 삶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어야 한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그게 기독교 간판을 내걸었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불교든 아무런 관계가 없다(레디앙과의 인터뷰 중에서)”라고 했다. 스님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열린 진리관이라고 이야기하기에 앞서도법의 불교관아닌가

 

( 빈약한 한국불교 사상체계와 정치논리가 본질 왜곡”, [도법스님인터뷰 _3]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불교포커스 2012-03-20)

 

 

질문 요지는 행복한 삶이 불교의 목적이라면 불교이든 아니든 그 어떤 것도 괜찮지 않는가라는 내용이다. 이 질문에 도법스님은 다음과 같은 놀라운대답을 한다.

 

 

이언진여(離言眞如)와 의언진여(依言眞如). 진리 자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어도단(言語道斷)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심행처멸(心行處滅)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언어의 길이 끊겼다, 언어는 안 된다, 이것은 절대진리에 관한 부분이라. 언어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진리 자체를 언어로 다 표현해 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열린 것이다. 절대진리는 기독교 언어로도 안 되고 불교언어도 안 된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소통을 해야 되니까 언어로 표현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이고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언어로 설명한 것 이것이 의언진여다. 이것을 강을 건너는 나룻배라고 이야기한다. 강을 건너는 나룻배는 각양각생의 모양새로 그 수도 천개 만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언어 이전의 진리이기 때문에 열릴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 것 이라고 벽을 쌓을 수 없다.

 

( 빈약한 한국불교 사상체계와 정치논리가 본질 왜곡”, [도법스님인터뷰 _3]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불교포커스 201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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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은 진리라는 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열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진리에 이르기 위한 나룻배는 수 없이 만다는 것이다. 그 나룻배중의 하나가 불교라는 것이다. 이른바 나룻배론이다.  

 

이런 표현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흔히 산을 오르는데 있어서 길은 여러가지라고 표현되는데, 단지 길이 나룻배로 바뀐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도법스님은 종교다원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경전적 근거가 없는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

 

종교다원주의자 혐의를 받고 있는 도법스님의 인터뷰기사중에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자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문에 대한 답에서 나온 것이다. 도법스님은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의 예를 들면서 이런말이 불교에서도 쓰이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개념으로 오해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도법스님이 언급한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이라는 말은 어느 경전에 근거하는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았지만 경전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다만 발원문에 쓰이고 있었다. 그것도 이산혜연선사의 발원문과 같이 불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보통불자들이 쓰는 발원문들이다.

 

 

1.

(스님) 우주에 충만 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영겁에 항상 하사 아니 계신 때 없으시는 부처님!


(
모두) 우리는 부처님께 발원하기 위하여

화엄도량 정각사에 모두 함께 모였습니다.

 

(소원성취 발원문(대중과 함께))

 

 

2.

대학입시(학업성취) 발원문

우주에 충만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만류에 평등하사 두루 살펴주옵시는

거룩하신 부처님!

 

(대학입시(학업성취) 발원문)

 

 

3.

우주에 충만하사 아니 계신 곳 없으시고

만유에 평등하사 두루 살펴주옵시는 제불보살님, 오늘 인드라망 사찰순례단은 그토록 그리던 봉정암을 찾았습니다.

 

(<봉정암 원만 순례 회향문>, 2010 인드라망 사찰순례 종합편 ②|)

 

 

불자들이 기도할 때 쓰는 대학입시나 소원성취 등에 대한 발원문이다. 이처럼 경전적 근거도 없는 우주에 충만하신 부처님이라는 표현을 이용하여 이는 하나님과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도법스님이 만들었다는 경전을 보면 타종교의 신을 인정하는 듯한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법스님이 만든 생명평화경

 

도법스님이 만든 경전이 있다. 그것은 생명평화경이다. 생명과 평화를 강조하는 도법스님의 사상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생명평화경

 

나는 다음과 같이 들었습니다.

눈 내리는 한밤중에 진리의 스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생명평화 길의 근본이 되는 존재의 실상인

상호 의존성과 상호 변화성의 우주적 진리를 말하리니

그대들은 귀 기울여 잘 듣고, 깊이 사유 음미할지니라.

이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있게 되고,

저것이 있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저것이 없게 되고,

저것이 없음을 조건으로 이것이 없게 되느니라.

상호 의존성과 상호 변화성의 진리를 따라

생성 소멸 순환하는 존재의 실상인 이 사실은,

현재에도 그러하고, 과거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하느니라.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자연은 뭇 생명의 의지처이고,

뭇 생명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존재이니라.

이웃 나라는 우리나라의 의지처이고,

우리나라는 이웃 나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국가 공동체이니라.

이웃 종교는 우리 종교의 의지처이고

우리 종교는 이웃 종교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종교 공동체이니라.

이웃 마을은 우리 마을의 의지처이고,

우리 마을은 이웃 마을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고향 공동체이니라.

이웃 가족은 우리 가족의 의지처이고,

우리 가족은 이웃 가족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가족 공동체이니라.

그대는 내 생명의 어버이시고

나는 그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공동체 생명이니라.

진리의 존재인 뭇 생명은 진리의 길을 걸을 때

비로소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나니,

그대들은 깊이 사유 음미하여 실행할지니라.

 

생명평화의 벗들이여!

서로 의지하고 변화하며 존재하는 생명의 진리는

우리 모두의 영원한 길이니,

지금 진리의 길에 눈뜨는 달관과

진리의 길에 어울리는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생명의 고향인 자연을 병들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인간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우주 자연을 내 생명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우리나라의 의지처인 이웃 나라를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내 나라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나라를 내 나라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우리 종교의 의지처인 이웃 종교를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내 종교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종교를 내 종교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우리 마을의 의지처인 이웃 마을을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내 마을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마을을 우리 마을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우리 가족의 의지처인 이웃 가족을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내 가족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이웃 가족을 내 가족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내 삶의 의지처인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진리를 외면한 자기 중심의 이기적 삶을 버리고

상대를 내 삶의 하느님으로 대하는

달관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내 생명의 의지처인 우주 자연과

내 나라의 의지처인 이웃 나라와

내 종교의 의지처인 이웃 종교와

내 마을의 의지처인 이웃 마을과

내 가족의 의지처인 이웃 가족과

내 자신의 의지처인 그대의 개성과 가치의

존귀함과 고마움과 소중함에 대하여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존중하고 감사하고 찬탄하는

달과과 자족의 삶을 살지니라.

 

존재의 실상인 진리란

상호 의존성과 상호 변화성을 뜻할 뿐

그 밖의 다른 것이 아니므로

지금 여기에서 누구나 이해하고 실현하고

증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느니라.

진리의 길은,

현재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할 때 그 실상이 드러나고

진리의 서원을 세울 때 생명평화의 삶이 실현되나니

항상 깨어 있도록 할지니라.

 

생명평화경은 지금 여기

너와 나의 삶의 실상을 비추어보는 거울이니

항상 잘 받아 지니고 기억하여 어긋나지 않도록 할지니라.

 

거룩하십니다. 진리의 스승이시여!

진리의 가르침을 귀 기울여 잘 듣겠나이다.

깊이 사유 음미하겠나이다.

온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행하겠나이다.

 

(도법스님)

 

  생명평화경-도법.docx  생명평화경-도법.pdf

 

 

 

이것이 도법스님이 만들었다는 생명평화경이다. 내용중에 “이웃 종교를 내 종교의 하느님으로 대하는~”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이 때 하느님이라는 말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실재를 말한다.

 

종교평화선언의 열린진리관

 

산을 오르면 결국 정상에서 만나게 되어 있는데, 마찬가지로 하나로 귀결되는 것에 대하여 여러이름으로 불리운다는 것이다. , 야훼, 알라, 비로자나, 브라만, 상제 등 이름과 명칭이 달라도 결국 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그것이 생명평화경에서 보는 하느님일 것이다.

 

실제로 종교평화선언 초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열린 진리관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선언초안-21세기 아쇼카선언, 조계종 화쟁위 2011-08-23)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pdf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궁극적 실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진리는 결국 같은 것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제자가 함부로 경을 만들어 내도 되는 것일까.

 

도법불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경전에 실려 있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그리고 논장에 실려 있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자신이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것에 대하여 실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마치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경전을 만들어 내었다. 경전을 만들었으니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 것과 같다. 이런 발언에 대하여 도법스님은 어떻게 대답하였을까. 불교포커스에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 일각에서는 스님이도법불교를 자꾸 한국불교와 등치시키려고 하거나 한국불교를 그렇게 정의하려고 고집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법성원융 무이상, 원융무애 세계관이 무슨 내 불교인가? 중중무진 연기의 세계관은 화엄경 이야기다.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은 전법선언에 나와 있다. ‘도법불교라는 말은 맞지 않다.”
 

( 빈약한 한국불교 사상체계와 정치논리가 본질 왜곡”, [도법스님인터뷰 _3]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불교포커스 2012-03-20)

 

 

인터뷰기사에서 도법불교라는 말이 나왔다. 불교앞에 수식어가 붙은 새로운 불교가 출현한 것이다. 생명평화경이라는 경전이 있고 도법식 불교가 생겨난 것에 대하여 지난해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종교평화선언에 대한 논란이 한창일 때 기독교도 화쟁의 대상인가, 도법스님의 생명평화경() 도법교()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다.

 

그 글에서 생명평화경을 소개 하였고 도법교라고 명명하였다. 이렇게 도법교라고 말한 것이 이때가 처음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인터넷에 생명평화경과 도법교라는 말이 차츰 나오더니 이번 불교포커스 인터뷰 기사에서 도법불교에 대하여 질문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인터넷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은 도법불교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일언지하에 부정한다. 자신은 단지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에 대한 이야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전법선언에 실려 있는 문구를 예로 들었다.

 

뭇생명이란 무엇일까

 

도법스님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대승불교주의자라고 명백히 밝혔다. 그런데 자신의 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생명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초기불교 경전에 실려 있는 전법선언문의 예를 들고 있다.

 

이렇게 대승불교이념과 초기불교경전의 일부 문구를 바탕으로 도법스님의 사상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법계연기 사상에 바탕을 둔 화엄사상을 과 초기불교 경전에서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이라는 문구를 빌어 자신의 생명평화사상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초기불교 경전에서 받아 들였다는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은 어떤 것일까.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이 표현되어 있는 전법선언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띠야빠사경

(Dutiyapāsasutta. -올가미경, S4.1.5)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씨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마가다야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수행승들이여'라고 말했다. 그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펴라.

 

오로지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드러내라. 더러움에 덜 물든 사람도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버려지고 있지만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세존께 다가왔다. 다가와서 세존께 시로 말했다.

 

[빠삐만] "모든 올가미에 당신은 묶여 있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그대는 커다란 올가미에 묶여 있네. 수행자여, 그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

 

[세존] "나는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나는 커다란 올가미에서 벗어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

 

 

.

-쎄나니 마을 : 부호 쎄나니가 살던 마을. 쎄나니는 부처님께 우유죽을 공양한 수자타

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고행에서 지친 몸을 이 죽으로 회복하고 이어 성도한다.

 

 

(Dutiyapāsasutta.-올가미경, 상윳따니까야 S4.1.5, 전재성박사역)

 

두띠야빠사경( 전도선언).pdf  두띠야빠사경(전도선언).docx

 

 

 

도법스님이 자신의 생명평화사상의 근거로서 사용하는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에 대한 것은 전법선언문의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떠나라에서 근거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뭇생명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대체 도법스님이 말하는 뭇생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도법스님

 

부처님의 원음이 가장 잘 보전 되어 있다는 빠알리니까야의 전법선언문에는 뭇생명이라는 말 대신  많은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그 다음 문장을 보면 하늘사람인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때 하늘 사람은 천상의 존재(천인)를 말한다. 그런 천상의 존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연기법에 따라 윤회하는 무상한 존재이다.

 

이처럼 전법선언문에는 인간과 하늘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전법할 것을 부처님이 명령하신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이를 뭇생명으로 간주하여 생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존재들로 확대해석 한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사상에 따르면 뭇생명은 인간과 하늘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산천초목이 모두 해당된다. 생명이 있는 것 모두를 뭇생명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것은 부처님이 강조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 열반을 말한다.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사상을 보면 열반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니 열반을 언급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왜 그럴까.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사상에 따르면 뭇생명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 산천초목 모두가 해당 되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을 빼 놓고 불교를 이야기 하기 때문에 도법불교 또는 도법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 열반은 누가 성취할 수 있는가.

 

부처님이 전하고자 한 것은

 

초기경전에서 전법선언 이전에 부처님이 깨닫고 난 후 결심한 것이 있다. 그것이 초기경전에 상세히 전하고 있는데 청원경에서이다.

 

부처님 위 없는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이루시고 난 후 그대로 열반에 들려 하였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채고 하늘사람인 브라흐마(대범천) 사함빠띠가 부처님 앞에 나타나 법을 설해 줄 것을 간청한다. 사함빠띠가 비록 천상에서 천상락을 누리고 있지만 공덕이 다하면 6도 윤회할 수 밖에 없는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망설인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에 대하여 이해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부처님이 깨달은 법은 역류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법을 누가 이해 할 것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간다는 것은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의 소멸을 말한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가며 윤회하는데, 그것을 소멸하라고 하였을 때 알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여 법을 설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사함빠띠는 다음과 같이 청원한다.

 

 

[싸함빠띠]

 

세존이시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거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뭇삶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쇠퇴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아야짜나경(청원경-S6.1.1).docx

 

아야짜나경(청원경-S6.1.1).pdf

 

 

 

사함빠띠의 청원에서 뭇삶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때 뭇삶은 무엇을 말할까. 도법스님이 말하는 산천초목과 같은 모든 생명있는 것을 말할까. 초기경에서 말하는 뭇삶은 명백히 인간과 하늘사람을 말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범천의 요청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이 본 것은 인간들을 본 것이다. 덜 오염된 사람, 많이 오염된 사람, 가르치기 쉬운 사람,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 탐욕에 물든 사람등 각양각색의 삶을 본 것이다. 이들을 보고 자비심이 생겨 제도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법의 바퀴를 굴렸고, 법을 설한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아 제자들이 60명에 이르자 전도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 대상은 인간과 하늘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이다. 그 어디에도 산천초목과 같은 뭇생명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부처님은 단지 안락과 행복만을 위해서 전도하라고 한 것일까. 만일 부처님이 도법스님의 말대로 뭇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서 전도하였다면 불교가 오늘날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님 당대에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가 안락과 행복을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강조한 것은 불사의 문에 대한 것이다. 즉 열반이다. 열반이야말로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고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추가해야할 목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법스님의 생명평화사상에는 열반이라는 말이 빠져 있고, 스님의 어느 법문에도 열반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산천초목은 열반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열반은 탐진치를 소멸시켜야 가능하기 때문에 경전에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과 하늘사람에게만 해당된다.

 

자신의 입맛대로 취사 선택하여

 

이렇게 초기경전의 전법선언을 뭇생명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한 도법스님은 열반에 대하여 결코 언급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도법스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예로서 전법선언문에 표기된  처음도 훌륭하고 가운데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이 풍부하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펴라라는 문장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가르침을 펴라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먼저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이 문구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법 전체는 자기에게 이로운 계로 처음이 좋고, 사마타-위빳사나--과로 중간이 좋고, 열반으로 끝이 좋다. 혹은 계와 삼매로 처음이 좋고, 위빳사나와 도로 중간이 좋고, 과와 열반으로 끝이 좋다.

 

부처님이 잘 깨달으셨기 때문에 처음이 좋고, 법이 좋은 법이기 때문에 중간이 좋고,승가가 잘 실천하기 때문에 끝이 좋다. 혹은 이것을 듣고 여여하게 수행하는 이가 얻어야 할 등각(等覺)으로 처음이 좋고, 독각(獨覺)으로 중간이 좋고, 성문각(聲聞覺)으로 끝이 좋다.

 

 들을 때 이 교법은 장애를 억압하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러므로 처음이 좋다. 도닦을 때 사마타-위빳사나의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닦음으로 좋다. 그러므로 중간이 좋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행복을 가져오도록 그렇게 도닦으면 도닦음의 과가 완성될 때 평정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닦음의 과로도 좋다. 그러므로 끝이 좋다.

 

이와 같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기 때문에 잘 설해졌다고 한다.

 

(청정도론, 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隨念), 70-71)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이유에 대하여 여러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이 말들을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데 있어서 빠짐없이 전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자신의 입맛대로 취사 선택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대하여 설하였다면 열반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초기경전에 자신의 입맛에만 맡는 것을 선택하고 정작 중요한 열반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이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도법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것이다.

 

절밥을 너무 오래 먹어서 그런가?

 

조계종 불교개혁의 중책을 맡고 있는 도법스님의 인터뷰기사를 보면서 한국불교의 미래가 암담하다 못해 참담함을 느낀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왜곡할 뿐만 아니라 없는 경전까지 만들어 내어 마치 자신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것처럼 비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도법스님은 마치 칼춤을 추는 것 같다. 총무원에서 마련해 준 마당에서 결사추진본부라는 작두에 타고 화엄경이라는 고깔에 종교다원주의라는 컬러풀한 옷차림으로 생명평화경이라는 을 휘두르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17세에 출가하여 법랍45세가 되었다는 도법스님의 불교가 이런 것일까. 절밥을 너무 오래 먹다 보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 이런 현상에 대하여 M스님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트위터에서 말하였다.

 

 

이 세 사람은 이 시대 한국불교의 삼적(三敵)이라고 나는 감히 말한다.

만일 호법선신이 있다면 이들의 머리에 철퇴를 가할 것이다.”

 

(M스님)

 

 

여기서 말하는 세 사람이란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고 있는 자승총무원장, 송석구 청와대 사회통합위원장, 도법 결사본부장을 말한다. 이들 삼인에 대하여 M스님은 한국불교 삼적이면서 동시에 한국불교를 망치게 하는 마구니라고 하였다.

 

 

누구를 믿어야 하나

 

도법스님은 인터뷰기사 말미에서 나를 바라보고 나를 믿고 결사를 대했으면 좋겠다. 역량이 부족한 것은 도와달라. 진정성은 믿어달라라고 말했다. 자신의 진정성을 믿어 달라고 여러 차례 말한 것이다. 이렇게 믿어 달라고 애걸하듯이 감성적으로 말한다고 하여 과연 믿어야 할까. 이럴때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아무리 진리가 문자와 언어를 초월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도시에서 절 구경하기 힘들고 더구나 정법을 만나기 힘든 현실에서 그래도 의지해야 할 것이 있다면 경전밖에 없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adīpā bhikkhave,                      앗따디빠 빅카예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위하라타 앗따사라나 아난냐사라나

Dhammadīpā dhammasaraā anaññasaraā.    담마디빠 담마사라나 아난냐사라나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앗따디빠경-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 1. 5. 1, 전재성박사역)

 

 

Monks,

be islands unto yourselves,

be your own refuge,

having no other;

let the Dhamma be an island

and a refuge to you, having no other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docx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pdf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자신(atta)’부처님의 가르침(Dhamma)’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말한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여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은 성자는 당연히 제외 된다. 그 외 부처님의 가르침의 따르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를 믿지 말라는 것이다.

 

도법스님이 마치 MB처럼 믿어 주세요!”라고 호소 하듯이 자신을 믿어 달라고 하소연 하지만, 믿기면 믿지 말라고 해도 믿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대신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담마를 귀의처로 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2012-03-2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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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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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평화경-도법.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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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짜나경(청원경-S6.1.1).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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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인터뷰 -종교평화선언을 말한다 .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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