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스승이 없는 불자들에게 ‘피난처’는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26. 10:36

 

 

스승이 없는 불자들에게 피난처

 

 

 

로그인하게 만든다

 

식자우환이라는 말이 있다. 좀 아는 것이 근심과 걱정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승없이 초기경전을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공부하다 보니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말을 들으면 참을 수 업게 만든다.

 

인터넷 댓글에서 로그인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오늘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인천 Y선원의 S스님의 법문이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S스님은 전국의 불자와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처님 하면 삼천년전 석가모니불을 연상하지만 최상승법에 있어서 삼천년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 부처님 얼굴을 보는 거울에 지나지 못합니다. 최상승법에 있어서 부처님은 지금 산승의 말을 듣고 있는 말의 그 자체입니다.

 

지나간 부처님을 통해서 현재의 부처님을 친견해야 하는 것 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현실을 보다 더 훌륭하게 살게하기 위함이요, 미래를 보다 훌륭하게 건설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부처님을 우리가 존경하고 과거의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현재의 참부처님, 내게 있는 참부처님을 깨닫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부처님, 참나를 깨닫는데 온통 불법의 목적이 거기 있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팔만장경을 읽고 풀이를 한다 하더라도 아무소용이 없을 것이다.

 

지금 산승의 설법을 있는 그놈, 지금 산승의 얼굴을 여러분은 쳐다보고 계시는데 그 볼 줄 아는, 바로 그 들은 놈, 바로 그 보는 놈, 보고 듣고 그것을 여의지 아니하고 초연히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것, 눈 한번 깜박할 사이에 바로 들을 때, 듣는 그 찰나를 득해서 참나로 돌아가야 하고, 볼 때 그 찰나를 여의지 아니하고 부처님 경지에 올라가는 이것이 바로 최상승법입니다.”

 

(인천 Y선원 S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6일자, http://www.bbsi.co.kr/ )

 

 

 

S스님의 법문중 일부를 녹취한 것이다. 스님은 법문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에 대하여 과거불이라 칭하고, 또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서 부처님을 손가락에 비유하고 또 다른 부처님을 달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에 쓰여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아무리 읽고 공부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하였다. 설령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지금 볼 줄 아는 그 놈,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화나면 성낼 줄 아는 그놈 즉, 참나를 깨닫기 위한 것이라 한다.

 

선불교에 대하여 모르는 불자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부처님을 ‘모욕’하는 말이라 하니 할 수 없다. 왜 오늘날 절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타방 부처님이나 보살에 밀려 뒷방신세를 면치 못하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외도의 사상이기에

 

그렇다면 스님이 말하는 그놈,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보면 볼 줄 아는 그놈, 늘 지켜 본다는 그놈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늘 지켜 보고 있다는 그놈은 어떤 개념일까. 이에 대하여 어느 스님의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문답을 보았다.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를 모두 공부하고 현재 동국대 교수로 재직중에 있는 M스님의 블로그가 있다. 그 블로그에서  D법우님은 H스님의 참나에 대한 기사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한겨레신문 청춘상담 앱이라는 연재중 [멘토를 차버리세요]의 H스님의 참나에 대한 글입니다. 스님은 바쁘시니 어느 분이든지 가르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 나’라는 것이 너무 막막합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요?

 

H스님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의식의 공간에서 생각과 감정이 올라옵니다. 하지만 잘 보세요.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들은 나와 상관없이 나왔다가 사라집니다. 화가 났을 때를 가정해 보죠. 화가 난다는 것은 무언가가 내게 화를 내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랑 상관없이 어느 순간 사라지죠. ‘화야, 너 사라져’ 해야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그 화는 나의 화가 아니기 때문이죠. 모든 감정이 나의 감정이 아닌데 우리는 ‘내 것’이라고 붙잡고 있는 겁니다.

 

‘참 나’는 누굴까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이러한 감정이 생기거나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화가 사라진 것을 어느 순간 알아차리는 존재가 있어요.

 

주시자는 생각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생각이나 감정에 더럽혀진 적이 없는 존재지요. ‘이놈’은 의식의 공간에서 뭔가 일어나면 즉시 알죠. 하지만 사람들은 그 존재를 모르죠. 맛도 없고 형태도 없거든요. 하지만 분명 살아있습니다. 감정에서 한발짝 떨어져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내가 화가 났구나’라고 아는 순간 우리는 이미 화 밖에 있는 것이지요.

 

(D법우님의 질문글)

 

 

D법우님이 인용한 글은  한겨레신문사이트( [청춘상담앱] “멘토를 차버리세요, 답은 안에 있습니다”)에 기사로 실려 있다.   

 

젊고 잘생긴 외모와 최고의 학력, 그리고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주햄프셔대에서 종교학 교수로 재직 중에 있는 H스님은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에게도 인기기 높다.

 

그런데 H스님의 말한 것 중에 지켜 보는 누군가또는 주시자라는 용어가 보인다. 내 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 보는 자, 그놈에 대하여 참나로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D 법우님의 질문에 대하여 M스님은 어떻게 답하였을까. 그 답변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답글이 늦었습니다.

 

H스님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외도의 사상이기에

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제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윌풀라 라훌라의 What the Buddha Taught나

<청정도론>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았다면,

‘나를 조종하는 그 놈이 있다’고 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니가르주나의 <중론>이나 <대지도론>을 한번이라도 읽어 보았다면,

외도의 가르침에 빠져 허우적 거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승복입은 외도 사문임이 분명합니다.

 

윌풀라 라훌라 스님의 저서 What the Buddha Taught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존재’라고 부르는 이러한 오온의 총체가 괴로움 그 자체(sankhara-dukkha,行苦性)이다. 이 오온의 너머에서 괴로움을 체험하는 그 어떤 '존재’나 ‘나’는 없다. 붓다고사(Buddhaghos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괴로움은 존재하지만, 괴로워하는 자는 발견되지 않는다.

행위는 있지만, 행위자는 발견되지 않는다.”(Visuddhimagga(PTS),p513)

 

감사합니다.

 

__()__

 

( M스님의 답글 )

 

 

M스님은 지켜 보는자 또는 주시자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오온을 경험하는 또 다른 자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스리랑카 윌풀라 라훌라 스님의 세계적인 저서 부처님은 무엇을 말였는가(hat the Buddha Taught)’를 인용하여 주시자와 경험자가 없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wh.pdf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w.docx

Dr_Walpola_Rahula_What_the_Buddha_Taught.pdf

 

 

지켜 보는 자, 주시자, 경험자, 참나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초기경전이나 주석서를 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을 고스란히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학적 바탕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경전에 근거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는데, 이는 우리나라 선사들에게 있어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다.

 

그러다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고~”라는 법문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습니다라는 식의 법문이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오온을 경험하는 자가 따로 있다는 식의 법문은 외도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나는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한바 없다?

 

선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방편설에 지나지 않는 임시적인 가르침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예로서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라는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대체 이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초기불교 경전에 보이지 않는 나는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에 대하여 검색하여 보았다. 자료를 찾아 보았다.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열 세살에 절에 들어왔는데 그 당시는 경전의 내용과 스님들이 하는 것이 달라서 이상스러웠어요. 그래서 불법도 두루 둘러보고 기독교, 천도교, 유교 등 각 종교를 두루 연구했는데 성에 차질 않아요. 이래서야 어찌 종교인이라고 하고 스승이라 하겠나 싶어서 다시 부처님 법을 되짚어 갔지.

 

과연 부처님께서는 49년 동안 뭘 가르치셨고, 뭘 지도하셨나 하고 살펴보다가 부처님께서 열반 하시며나는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한바 없다며 팔만장경을 부정하고 다시 삼처전심(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의 도리를 설했다는 것을 알게 됐지.

 

우리는 어떤 개인의 제자가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이니 부처님께서 설한 삼처전심의 도리를 정확히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선지식을 찾아서-OO 스님 (OO선원 선원장), 붓다피아, 2008-02-16)

 

 

글에서 OO스님은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기불교에서 그런 내용은 찾을 수 없다.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초기경전 디기니까야에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 D16)이 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전에 말씀 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 경에서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리는 말은 발견할 수 없었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볼 수 있다.

 

 

2.26.

아난다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들은

자을 섬으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自歸依]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法燈明], 법을 귀의처로 삼아[法歸依]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Tasmātihānanda,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ā anaññasaraā, dhammadīpā dhammasaraā anaññasaraā.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parinibbana Sutta-대반열반경,  디가니까야 D16, 각묵스님역)

 

  마하빠리닙바나경( 대반열반경- D16).pdf  마하빠리닙바나경(대반열반경)전문.docx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마치 부처님 사후에 벌어질 일을 미리 예견한 것 같다. “49년 동안 한마디도 설한 바 없다느니, 부처님의 깨달음은 참나라거나 하는 말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오직 자신(atta)과 가르침(Dhamma)에 대하여 의지하라고 말씀 하셨다. 왜 그렇게 말씀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에서 역시 마지막 유훈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자는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감수가 나이고 나의 것이 감수이고 나 가운데 감수가 있고 감수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감수는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감수가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지각이 나이고 나의 것이 지각이고 나 가운데 지각이 있고 지각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형성이 나이고 나의 것이 형성이고 나 가운데 형성이 있고 형성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 참사람을 보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의식이 나이고 나의 것이 의식이고 나 가운데 의식이 있고 의식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그에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물질이나 현재의 물질이나 모든 물질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감수는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감수나 현재의 감수나 모든 감수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지각이나 현재의 지각이나 모든 지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형성이나 현재의 형성이나 모든 형성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무상하고 변괴하고 사라지고 소멸하는 것을 알고 과거의 의식이나 현재의 의식이나 모든 의식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이다라고 여실하게 올바른 지혜로서 보면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끊어진다. 그것들을 끊어버리면 두렵지 않고 두렵지 않으면 지복을 얻게 된다. 수행승이 지복을 얻으면 '오로지 열반으로 향한 이' 라고 불린다."

 

(앗따디빠경-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21. 1. 5. 1, 전재성박사역)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docx  앗따디빠경(자신을 섬으로의 경- S21. 1. 5. 1).pdf 

 

 

 

 

 

Parinibbana

 

 

 

이것이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이다.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하는 것이다. 의지할 것은 오로지 자신과 부처님의 가르침뿐이라는 것이다.

 

스승이 없는 불자들에게 피난처

 

우리나라 불자수는 통계상 1200만명에 이른다. 이들 불자들 모두를 지도할 스승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일부 극소수의 수행자들을 제외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할 스승을 갖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불자들은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방송에서 법문하는 선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정도의 소승법으로 간주하고 진짜부처님, 참나를 찾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이라 말한다. 또 어느 스님은 지켜보는자, 주시자가 있는데, 그분을 아는 것이 불교라고 말한다. 이런 가르침에 대하여 불자들은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할까.

 

초기경에 따르면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이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마도 미래에 일어날 사항을 정확하게 예측한 것 같다. 현실적으로 스승이 없는 불자들이 의지할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밖에 없다. 따라서 불자라면 당연히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 이렇게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가는 성스런 상가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룬 성자들를 말한다.

 

이렇게 삼보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다른 말로 귀의한다라고도 한다. 되돌아가 의지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귀의라는 말에 대하여 영어로 ‘refuge’로 표현한다. 이때 refuge피난또는 피난처라는 말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피난처것이다.

 

어려움이 생겼을 때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다른 것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으로 피난가는 것이다. 그런 가르침이 초기경전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피난처로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것중에 법구경이 있다.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실려 있눈 법구경 51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부처님의 말씀이 귀의처이고 피난처이지, 다른 것이 귀의처가 될 수 없고 피난처가 될 수 없다.

 

 

 

 

담마빠다(법구경)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는 사람에게

원한은 가셔지지 않는다.(3)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

그는 나를 이기고 내 것을 빼앗았다.

이런 생각을 품지 않을 때

마침내 원한은 가셔진다.(4)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때

원한은 결코 가셔지지 않는다.

원한은 자애에 의해서만 가셔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이다.(5)

 

 

기분 좋은 대상에서 쾌락을 구하고

감각기관을 절제하지 않고

무절제하게 먹고, 게으르고, 열성도 없는 사람은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넘어 뜨리듯

악마가 쉽게 그를 넘어뜨린다.(7)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진실되지 못하면서도 가사를 입는다면

그는 가사 입을 자격이 없다.(9)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쓸어버리고

계행이 확고하고 자신을 절제하고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는 가사를 입을 자격이 있다.(10)

 

 

진실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하고

진실을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 잘못된 견해 때문에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11)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니라고 하고

진실을 진실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런 바른 견해로 인하여

진실에 도달한다.(12)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행하지 않은 마음에는 욕망이 스며든다.

잘 이은 지붕에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욕망이 스며들지 않는다.(13, 14)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울지라도

그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과 같아

깨달음의 대열에 들어갈 수 없다.(19)

 

 

경전을 조금밖에 외우지 못하더라도

그 가르침대로 행하는 사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버리고

번뇌에서 벗어니 현세와 내세의 집착을 끊아

깨달음의 대열에 들어간다.(20)

 

 

아름다운 빛깔의 사랑스런 꽃도 향기 없는 꽃이 있듯이

말은 그럴싸해도 실천이 없으면 쓸모없는 말이 된다.

매력적인 빛깔의 사랑스런 꽃이 감미로운 향기가 있듯이

말처럼 실천하는 사람의 말은 결실이 풍부한 말이 된다.(51, 52)

 

 

자기보다 훌륭하거나 비슷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거든

굳건히 혼자서 길을 갈 것이지 어리석은 자와 벗하지 말라.(61)

 

 

내 아들인데, 내 재산인데하면서 어리석은 자는 괴로워한다.

참으로 그 자신도 그의 소유가 아닌데

어찌 아들이나 재산이 그의 소유이겠는가.(62)

 

어리석은 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면

그는 지혜로운 자가 된다.

어리석은 자가 자신은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은 자다.(63)

 

 

단단한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81)

 

 

잘 길들인 말처럼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교만을 부수고 번뇌에서 벗어난

흔들림 없는 사람은 신들도 어여삐 여긴다.(94)

 

 

잘 수련된 조화로운 사람은

땅처럼 확고하며 남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는 인드라의 기둥처럼 견고하고

흙탕없는 호수처럼 맑고 깨끗하다.

이런 사람에게 더 이상 윤회는 없다.(95)

 

 

진리를 깨달아 온전히 해탈한 사람은

마음이 차분하고, 말이 차분하고, 행동이 차분하다.

그는 온전히 평화롭고 온전히 행복하다.(96)

 

 

천 마디의 공허한 말보다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의미 있는 한 마디 말이 훨씬 더 낫다.(100)

 

 

바록 전쟁터에서 백만 대군을 정복한다 해도

그러나 자신을 정복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승리자이다.(109)

 

 

어른을 항상 공경하는 사람에게

장수와 아름다움과 행복과 강건함의

네 가지 축복이 늘어난다.(109)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바르지 않게 백년을 사는 것보다

바르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것이 더 낫다.(110)

 

 

선은 서둘러 행하고

악에서 마음을 멀리하라.

선을 행하는데 느슨할 때

그 마음은 벌써 악을 즐기고 있다.(116)

 

 

악을 저질렀다면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말라.

악의 누적은 괴로움을 가져 올 뿐이니

악 속에서 즐거워하지 말라.(117)

 

 

선행을 하였다면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

선을 하겠다는 열망을 일으키라.

행복은 선의 누적의 결과이다.(118)

 

 

먼저 바른 행동으로 자신을 세운 후 다른 사람을 가르치라.

이런 지혜로운 이는 비난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158)

 

 

자기 자신은 진정 자기의 주인이다.

어떤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

자기 자신을 잘 다루는 사람은

얻기 어려운 의지처를 얻는다.(160)

 

금화가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인간의 욕망은 만족시킬 수 없다.

감각적 쾌락은 짧은 달콤함에 많은 고통이 따른다.(186)

 

 

이것을 아는 지혜로운 이는

천상의 쾌락조차 즐거워하지 않는다.

온전히 깨달은 분의 제자는

갈애의 소멸을 기뻐한다.(187)

 

 

배고픔은 가장 큰 병이며

이 몸은 가장 큰 괴로움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 때

최상의 행복, 열반에 이른다.(203)

 

 

건강은 가장 큰 이익이며

만족은 가장 큰 재산이다.

신뢰는 가장 친한 친척이며

열반은 최상의 행복이다.(204)

 

 

어리석은 이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은

오랜세월 괴로움이 따른다.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원수를 가까이 하는 것처럼 괴롭다.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 하는 것은

친척의 모임처럼 행복하다.(207)

 

 

그러므로 마치 달이 별의 궤도를 따르듯

지성을 갖추고, 지혜롭고, 두루 배우고, 성실하고, 훌륭한

지혜와 덕성을 갖춘 이와 가까이 하라.(208)

 

 

좋아하는 사람도 두지 말라

싫어 하는 사람과 두지말라.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지 못함도 괴로움이요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또한 괴로움이다.(210)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은 괴로움이므로

사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걸릴 것이 없다. (211)

 

 

사랑에서 슬픔이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에서 온전히 벗어난 사람은

슬픔이 없는데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212)

 

 

숙련된 마부가 달리는 마차를 고삐로 제어하듯

성내는 마음을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을

나는 진짜 마부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은 다만 고삐만 잡고 있다.(222)

 

 

사람들은 말 없이 조용히 앉아있어도 비난한다.

너무 많이 말해도 비난한다.

말을 조금해도 역시 비난한다. 오 아뚤라여,

이것은 지금만 있는 이야기가가 아니고 예로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이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227)

비난만을 받는 사람도 없으며, 칭찬만을 받는 사람도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228)

 

독경하지 않으면 경전이 녹슬고

계속적인 손질이 없으면 집이 녹슬고

게으르면 아름다움이 녹슬고

태만하면 깨어있는 마음이 녹슨다.(241)

 

 

남의 잘못은 보기 쉬워도 자기 잘못은 보기 어렵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겨를 까부르듯이 흩어버리고

자신의 잘못은 능란한 들새 사냥꾼이

변장하여 자신을 숨기듯, 그렇게 숨긴다.(252)

 

 

전쟁터에서 코끼리가 화살을 맞고도 견디는 것처럼

나도 온갖 욕설을 참고 견디리라.

참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련되지 않았다.

욕설을 참아내는 데 잘 단련된 사람은

사람 가운데 으듬이다.(320, 321)

 

 

행동이 바르고, 지혜롭고, 그대에게 적합한

분별있는 친구를 만났거든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기쁘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328)

 

 

행동이 바르고, 지혜롭고, 그대에게 적합한

분별있는 친구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정복한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왕처럼

숲에 사는 코끼리처럼 그렇게 혼자서 가라.(329)

 

 

눈을 절제함은 훌륭하며, 귀를 절제함은 훌륭하며,

코을 절제함은 훌륭하며, 혀를 절제함은 훌륭하며,

행위를 절제함은 훌륭하며, 말을 절제함은 훌륭하며,

마음을 절제함은 훌륭하며, 모든 것을 절제함은 훌륭하다.

모든 것을 절제하는 수행자는 슬픔에서 벗어난다.(360, 361)

 

감각기관을 절제하고, 만족할 줄 알고, 계율에 따라 절제하고,

청정한 삶을 사는 훌륭하고 열성적인 친구와 가까이 하는 것이 지혜로운

수행자가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다.(375)

 

 

(일아스님의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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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라따나(Tiratna, 三歸依偈)

 

 

 

Tiratana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a sambuddhassa

 

Yo vadatam pavaro manujesu

Sakyamuni bhagava kata kicco

Para gato bala viriya samangi

Tam sugatam saranattha mupemi

 

Raga viraga maneja-masokam

Dhamma-masankhata mappati kulam

Madhura mimam pagunam suvibhattam

Dhamma-mimam saranattha mupemi

 

Yattha ca dinna mahapphala-mahu

Catusu sucisu purisa yugesu

Attha ca puggala dhamma dasate

Sangha-mimam saranattha mupemi

 

 

 

 

 

 

2012-03-26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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