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불교방송 법문을 듣고

담마다사 이병욱 2012. 3. 24. 12:12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불교방송 법문을 듣고

 

 

일을 하면서 방송을 듣는다. 주로 집중을 필요로 하지 않는 단순작업을 할  때이다. 요즘 유행하는 나꼼수이털남과 같은 팝캐스트 방송을 들으면 재미도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 하나 듣는 방송은 불교TV사이트이다.

 

선사들의 법문

 

불교TV사이트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올려져 있다. 법사들은 거의 대부분 스님들 차지이다. 교리도 거의 대승불교에 대한 것이다. 초기불와 관련 된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TV법회를 보아도 100% 선사들 법문이고, 100% 선불교에 대한 것이다. 이중 일반법회가 있다. 선사들을 모셔 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정기법회를 말한다.

 

이 법회에 법사로 참석하는 스님들은 정해져 있다. 법문을 잘 하기로 소문난 스님이거나 이름이 잘 알려져 있는 스님들이다. 그런데 종종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스님들이 법문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고 보는데 어느 스님의 경우 주어진 시간을 채우기도 벅찬 듯 하다. 전혀 준비가 안되 보이는 것이다. 불자들은 물론 전국민이 지켜 보는 TV법회에서 쩔쩔 매는 듯한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 까지 하다. 더구나 이웃채널에서는 쟁쟁한 목사들이나 신부들의 설교가 있지 않은가.

 

우리불자들이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불교TV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조용기목사 등의 설교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는데, 우리 스님들이 법문을 재미 없게 한다면 그들에게 채널이 돌아가고 말 것이다.

 

선사들이 불교TV사이트에서 법문하는 것을 보면 거의 대동소이하다. 거의 대부분 준비된 프린트 물 없이 즉석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법문이 일관성이 없다. 잘 가다 삼천포로 빠진 다는 말이 있듯이 주제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법문의 내용을 보면 경전에 근거한 것이라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 위주이어서 무언가 건질 것이 있을까 하고 메모를 준비해 보지만 그다지 적을 것이 없다. 그래서 일을 하면서 법문을 듣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TV에 종종 들을만한 법문도 있다. 법사들이 잘 준비한 법문은 한구절도 놓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일 하지 않고 메모하거나 녹취하게 된다. 그런 법문은 주로 초기불교에 대한 교리적 법문이다.

 

하루 종일 불교방송과 함께

 

사람사는 몰려사는 곳에 절이 없다 보니 불자들은 법문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다. 설령 일요법회등 법문을 하는 절이 있다고 할지라도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깊은 산중에 있을 때 거기까지 이동하는 수고로움이 있어서 법회에 참여하는 인원은 매우 적다고 한다. 그렇다면 선사들의 법문내용은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 불교가 임제종계통이기 때문에 선사들이 하는 이야기는 거의 비슷하다. 선에 관련된 이야기들로서 과연 현실에서 부딪치며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이렇게 절 구경하기도 힘들고, 더구나 법문 듣기도 힘든 세상에서 그나마 불자들이 불교를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방송매체일 것이다.  그 중 불교방송의 경우 불교TV와 달리 무료로 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불자들은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불교방송을 무척 아낀다. 그런 예로서 알고 지내는 법우님들 대부분이 하루 종일 불교방송과 함께 한다는 것을 들었다.

 

이처럼 불자들에게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불교방송을 들어 온지 8년째이다. 불교에 정식으로 입문한 이래 꾸준히 듣고 있는데, 주로 아침에 듣는다. 5시의 새벽예불부터 시작하여 6 40분에 경전공부’, 7시에 불교강좌를 듣는 것이 일과 중의 하나로 되었다.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의 법문

 

현재 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시간을 보면 인천 용화선원의 송담스님의 법문이 진행되고 있다. 용화선원에서 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법문에 대하여 불교방송을 이용하여 방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스님의 법문은 선불교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오리지날 정통선불교이다.

 

스님은 법문시작전에 또는 법문도중에 게송을 멋지게 읊는다. 사구게를 가락에 맞추어 길게 뽑은 다음 가장 마지막에 나무아니타불하며 마치는 형식이다. 이때 신도들 모두가 스님과 함께 나무아미타불을 합송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구게 가락송은 시도 때도 없이 법문 중에 불쑥 불쑥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큰스님들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

 

그런데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대표적인 대선사로 알려져 있는 송담스님의 법문을 듣다 보면 종종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금일(2012-03-24) 법문이 대표적이다.

 

송담스님은 금일 불교강좌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불교방송사이트에서 녹취한 것이다.

 

 

세상에는 성주괴공이 있고, 우리 몸에는 생노병사가 있고, 우리 생각에는 생주이멸이 있어 생겨났다 잠시 모습을 유지하다 얼마 안 가 그것이 변질이 되어 없어지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하고 믿을 수 없고 허망한 것인데, 그 속에서 변치 않는 영원성이 있는데, 그 영원성을 우리는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원성을 깨닫기 위해서 신심을 내고, 그것을 깨달음으로서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된다. 진리와 하나가 된다. 그래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그것이 바로 신심이요, 그것을 위해서 분심을 내고, 그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두가 다 떨어지는 꽃을 보는 것 같애.”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4일자 , http://www.bbsi.co.kr/)

 

 

 

 

 

 

 

 

스님은 법문에서 영원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영원과 하나가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였다. 영원히 변치 않는 어떤 것이 있어서 어떤 영원과 합일 되는 것이 깨달음이라 하는데, 부처님이 깨달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 한다. 또 바로 이전 법문에서 스님은 부처님의 출가에서부터 일대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참나이었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이런 법문은 초기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이십년전이라면 아무런 이의없이 받아 들여 졌을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원음이 가장 잘 보전 되어 있다는 니까야가 번역되어 유통 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본다면 영원과 하나가 된다느니 참나가 깨달음이라는 이야기는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주의를 배격한 부처님

 

부처님은 오히려 영원주의를 배격하였다. 모든 현상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질 뿐이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단지 원인(因)과 조건(緣)과 결과(果)에 따른 연기적 현상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였을 때 영원주의는 있을 수 없는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유물론적인 단멸론과 함께 고정불변의 영혼이 있어서 근원과 합일한다는 영속론을 삿된 견해로 간주하여 연기법으로 비판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브라만의 영속론과 육사외도의 단멸론, 숙명론 등을 연기법으로 비판하여 오늘 날 보는 불교가 성립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송담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마치 정통브라만교의 영속론으로 되돌아 가는 것 같다.

 

만일 스님의 법문이 브라만교와 다른 것이라면 영원성을 깨달아야 된다느니 내가 바로 영원과 하나가 된다느니 하는 것이 브라만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하여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영속론이 왜 삿된 견해일까

 

그렇다면 영속론이 왜 삿된 견해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D1) 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1.34

비구들이여,

그러면 네 번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가요 해석가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을 수반하며

자신이 스스로 규명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비구들이여, 이것이 네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하고 이것에 의지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한다.

 

( 브라흐마잘라경-범망경,디가니까야 D1, 각묵스님역)

 

  범망경(Brahmajala Sutta).docx  범망경_Brahmajala Sutta_.pdf

 

 

 

브라흐마잘라경에서 부처님은 영속론자들의 특징에 대하여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출현하기 전 인도에는 정통브라만교의 영속론에 따라 고정불변하는 아뜨만이 있어서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뚱이만 바꾸는 재육화에 따른 윤회를 믿고 있었고 궁극적으로 모든 존재의 근원인 브라만과 합일 하는 것이 해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영속론을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다시 브라만교로 되돌아 가버린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법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교방송에서 공중파를 이용하여 전불자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여 영속론을 실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승법이고 방편설이라고

 

이뿐만이 아니다. 방송에서 송담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불법을 생사윤회로 할지언정 소승삶을 바라지 말라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소승이라는 것은 세속의 허망한 것과 집착심을 떼기 위하여 임시적으로 설해진 방편설이지 불교의 구경법이 아닙니다.

 

어린애가 화택속에서 노는데 팔려가지고 불속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조그마한 양이나 사슴이 끄는 장난감를 만들어 불속에서 빨리 나오에 하기 위한 소승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 소승법인 장난감 수레는 어린애를 끌어내는 데만 필요한 것이지, 끌어낸 뒤에는 그 장난감 수레는 쓸모가 없어지는 것 입니다. 그 장난감 수레를 버리고 진짜 탈 수 있는 소가 끄는 수레에다 그 어린애를 옮겨 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이라 하는 것이고 참나로서 깨닫는 바른 공부를 시작 하는 최상승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인천 용화선원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3-24일자 , http://www.bbsi.co.kr/)

 

 

송담스님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법으로 규정하였다. 그것도 장난감수레로 비유 하였다. 법화경의 비유품에 실려 있는 화택유(火宅喩)를 적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장난감 수레로 비유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승법으로서 임시적이고 방편일뿐이라고 폄하한다. 그리고 진짜 수레를 타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것이 바로 대승이고 참나이고 최상승법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소승법으로 폄하하고 심지어 임시적이고 방편적인 가르침이라 하고 있는데, 불교방송이나 불교TV에서 선사들 특히 큰스님들의 법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불교TV와 불교방송에서 조치를

 

선사들의 법문을 듣고 있으면 마치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주로 한문으로 된 대승경전 위주로 어려운 한자용어를 써 가며 한 없이 어렵고 신비하게만 여겨지는 깨달음의 세계에 대한 법문이 그렇다. 더구나 법문 도중에 뜻을 알 수 없는 게송을 노래처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마치 대선사의 권위의 노래 처럼 들린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전세계가 글로벌화하고 정보통신기기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하여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화 되는 현실에서 선사들의 법문은 마치 그 옛날 한자문화권 시대를 옮겨 놓은 듯 하다.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면 정법을 훼손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 불교계의 현실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문경전과 한문게송, 그리고 대승의 최상승법을 주장하는 라디오 법문을 보면 시대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거부를 하는 듯하고, 더구나 시대에 저항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불자들은 이제 다양한 불교를 접하게 되었다. 수 많은 니까야 번역서들이 출판되고 인터넷 등을 통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게 됨에 따라 선사들이 말하는 깨달음과 부처님이 말씀 하신 깨달음의 차이도 알게 되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 맞추어 불교TV와 불교방송에서는 불자들의 가르침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2012-03-24

진흙속의연꽃

 

범망경(Brahmajala Sutt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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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망경_Brahmajala Sutta_.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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