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으려면, 정치지도와 종교지도로 한국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13. 12:44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으려면, 정치지도와 종교지도로 한국불교

 

 

 

 

지역감정과 지역차별

 

총선이 끝났다. 잔뜩 기대를 하였던 사람들은 실망이 너무 커서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인터넷시사만화가 눈에 띄었다. 그런 총선은 언제나 그렇듯이 동과 서로 확연히 갈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동서간의 지역감정이 존재한다. 이런 지역감정은 감정의 차원을 넘어 지역차별의 양상까지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런 지역감정과 지역차별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현상은 아니라고 한다. 어느 나라이건 간에 크고 작은 지역적 차별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동부와 서부의 지역차별이 존재하여 종종 영화의 대사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사항이다.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이탈리아 역시 지역적 차별이 있는데 잘사는 북부와 못 사는 남부로 갈린다.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는 어떨할까.

 

일본 역시 지역차별이 존재한다. 동서로 길게 누워있는 지형이다 보니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는데, 보통 도오쿄오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과 오사카-쿄오토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로 갈린다. 일드(일본드라마)를 보면 관서사람들은 관동사람들에 대하여 예의를 모르는 촌놈정도로 취급하는 장면을 종종 보게 된다.

 

이렇게 어느나라이든지 지역적 차별이 존재하는데 우리나라 역시 지역차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북으로 갈려 있는 남한에서 지역차별은 동서로 갈린다. 주로 경상도 지방과 전라도 지방에 지역적 감정 또는 차별이 매우 심하게 작용한다. 그러다보니 정치성향 또한 확연히 갈리어 동쪽의 경우 보수적이념을 지향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에 대항이라도 하듯이 서쪽에서는 보수기득권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진보성향의 정당이 매우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번 총선 역시 이런 구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 정치지형을 보면 동쪽은 대체로 보수적이고, 서쪽은 대체로 진보적이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지형은 종교지형과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초라한 성적표

 

이번 총선결과 불교관련 인터넷신문에서 불자국회의원에 대한 기사를 내보냈다. 19대 총선에서 불자후보 가운데 42명이 당선되었다고 한다. 새누리당 32, 민주통합당 9, 통합진보당 1명이라 한다. 이는 매우 초라한 성적표이다.

 

국민일보기사에 따르면 19대 국회의원 10명중 4명이 개신교 신자라 한다. 지역구 당선자 246명중 120명에 달한다. 이들 국회의원 중에는 우리나라를 기독교국가로 만들고 말겠다는 집념을 가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의원들이다.

 

 

1)정몽준(동작을):

그는 무엇보다도 아내와 자신, 가족들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꿈’을 이뤄드리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2)황우여(인천 연수구) 정세균(서울 종로구) 김진표(수원시정):

정당과 이념을 초월해 의회에서도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는 일에 적극 나서고 있다.

 

3)문대성(사하구갑):

불교세가 강한 부산에서 당선. 경기도 시흥에서 운영하는 ‘문대성 태권도학원’도 선교 사역의 일환이다

 

(출처: 19 국회의원 당선자 10 중 4명이 개신교 신자. 국민일보 2012-04-12)

 

 

개신교의 경우 전체 국회의원의 40%에 해당된다. 불교는 어떤가. 불자국회의원이 42명이라면 전체국회의원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국민 중 불교를 믿는 비율이 22.8%이고 개신교를 믿는 비율은 18.3%인데, 국회의원 비율을 보면 14% 40%로서 매우 불균형하다. 대체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정치지도와 종교지도

 

이번 총선을 한눈에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이른바 정치지도이다. 한반도를 정당의 상징색깔로 표시한 것이다. 보수이념을 지향하는 새누리당의 경우 빨간색이고, 진보이념을 지향하는 민주통합당은 노랑색이다.

 

종교지도라는 것도 있다. 개신교에서 우리나라를 복음화하기 위하여 만든 지도이다. 그 지도를 보면 시군구별로 개신교신자비율을 8단계로 구분하여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곳은 청색으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곳은 빨간색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치지도와 종교지도가 지역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색깔로 표시된 정치지도와 종교지도는 동서로 확연히 갈리고 있다.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지도와 종교지도

좌측이 19대 총선에서 정당별 구분이고, 우측은 개신교에서 작성한 복음화지도이다.

 

 

 

 

좌측이 19대총선 지도이고 우측이 개신교의 복음화지도이다. 지도를 보면 붉은색이 주로 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복음화지도에서 붉은 색은 개신교세가 약한지역이다.

 

 

개신교세가 약하다는 말은 불교가 강세지역이라는 말과 같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동쪽의 경우 불교의 영향이 매우 강하다. 실제로 통계자료를 보면 이를 증명한다.

 

 

 

 

 

 

 

2005년 인구총조사 자료(문광부)

 

 

2005년 인구총조사 자료에 따르면 불교의 경우 동고서저 현상이 매우 심하다. 반면 개신교의 경우 서고동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개신교측에서 작성한 복음화지도이다.

 

불교는 보수층의 종교일까

 

이렇게 동쪽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복음화지도 못지 않게 새빨갛게 도배를 한 것이 이번 2012 4 11일에 치루어진 총선지도이다. 총선지도 역시 동서가 색깔로 분명히 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종교지도와 정치지도만을 놓고 본다면 우리나라는 동쪽은 불교세가 강하고 동시에 보수이념을 지향하는 정당과 함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서쪽의 경우 개신교가 매우 강세이고 진보이념을 지향하는 정당과 함께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정당은 많이 가진 자들과 기득권층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벌겋게 물든 동쪽지방은 이땅의 보수적이고 동시에 기득권층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 역시 보수적이고 기득권층이 믿는 종교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깨진다. 대표적으로 이번 총선에서 서쪽지방에서 가장 믿는다는 개신교의원이 전체국회의원의 40%를 차지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동쪽지방에서 가장 믿는 다는 불교의 경우 고작 15%로서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는 단지 지역적으로만 보수기득권층에 속할 뿐이지 현실은 그와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이 극대화 된 곳이 서울이다.

 

서울의 정치지도를 보면

 

이번 총선에서 서울과 인천, 수도권도시에서 보수와 진보가 치열하게 경합하였다. 그런 이유는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서울의 경우 사는 곳에 따라 정치성향이 확연히 갈린다. 서울이라도 같은 서울이 아닌 것이다. 서울의 정치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9대총선(2012-04-11) 서울 의석분포

 

 

 

서울의 정치지형을 보면 지역적으로 뚜렷하게 갈린다. 붉은색 계통이 주로 강남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보수이념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런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어떤 것일까.

 

 

 

서울 4개구의 종교별 신자비율

 

불교

개신교

가톨릭

서초구

15.3%(3)

24.9%(1)

21.1%(2)

강남구

15.2%(3)

23.5%(1)

20.7%(2)

송파구

16.2%(3)

23.8%(1)

16.4%(2)

양천구

14.6%(3)

25.0%(1)

15.3%(2)

 

2005년 인구센서스 결과

출처: 승가대 김응철교수의 논문 포교와 신행, 구태를 벗어라

 

 

 

강남3구와 양천구 등 우리나라 중산층 이상이 몰려 사는 곳의 종교분포를 보면 한국불교는 3등에 지나지 않는다. 1의 개신교와 무려 10% 가까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보수 기득권층이 몰려 사는 곳에서 불교는 소수종교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전국의 종교지도를 보면 항상 보수정당에 표를 몰아 주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로 되어 있다. 이런 현상을 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빛 좋은 개살구

 

정치지형상으로 본 한국불교는 보수정당과 이념을 같이 하지만 실제적으로 보수적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아니다. 이는 강남3구 등 소위 중산층이 몰려사는 곳의 종교성향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적절한 말이 아마도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일 것이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그에 맞는 알찬 내용이나 실속이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불교는 1600년의 전통과 과거 화려한 역사를 자랑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보는 불교의 위상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보수이념으로 뭉친 정당을 지지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믿는 종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가 이땅의 기득권 종교인 것 처럼 보이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불교가 보수적 이미지인 것은 맞지만 보수층에서 믿는 종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모순적인 구조에 빠져 있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불교는 보수적 이미지이다. 이는 과거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따른 영향이라 보여 진다. 그렇다면 불교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수구적이고 보수적인 것일까.

 

혁명가 붓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가 출현할 당시 인도에서는 엄격한 사성계급에 의하여 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다. 지금의 유일신교와 매우 유사한 브라만교가 주류 종교이었고, 브라만교의 사제인 브라흐민이 무사계급인 크샤트리아 계급과 함께 기득권층이었다. 이처럼 보수 기득권층에 맞서 사상의 혁명을 일으킨 자가 부처님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부처님을 혁명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혁명가로서 부처님은 가장 먼저 기존 보수기득권층이라 볼 수 있는 브라만교를 부정하였다. 브라만의 창조론과 아뜨만의 영속론 등으로 대표되는 브라만교를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으로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브라만이 믿는 신이 허구임을 말하는 장면이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한다. 그 중 하나의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와셋타,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 중에 어느 누구도, 또한 그들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의 스승들 중 어느 누구도, 또한 그 스승들 중 7대를 거슬러 올라가 어느 누구도 브라흐마 신을 직접 본 사람이 없다.

 

베다 시구의 저자이며 암송자들인 고대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 선인들이 쓰고 암송한 것을 오늘날 브라흐민들은 전승된 그대로 정확하게 그대로의 어조로 암송한다.

 

전승을 그대로 암송하는 이들조차도 ‘브라흐마 신이 언제 나타나고 어떻게 나타나고 어디에 나타나는 지를 알고 본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민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은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브라흐마 신과의 하나되는 길을 가르친다. 그러면서 이것만이 해탈에 이르는 곧은 길이며, 바른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브라흐마 신과 하나됨으로 이끈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베다에 능통한 브라흐민들이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음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디가니까야  D13  떼윗자 경,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서)

 

 

부처님은 신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만들어 놓고 숭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질타하고 있다. 오로지 인간의 머리속에서만 만들어진 신을 만들어 놓고 이에 대하여 신이 존재함을 실증하려는 노력이 터무니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오면 누구나

 

혁명가로서 부처님은 사성계급을 부정하였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여러가지 계급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매우 확고하였다. 하지만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사성계급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가에 들어오면 누구나 출신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십시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성자,

고귀하고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있게 됩니다.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 Sundarikabharadvaja sutta, 숫따니빠따 Sn3.4, 전재성박사역)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Sn3.4).docx

 

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pdf

 

 

많은 격언을 암송하더라도 안에는 쓰레기로 더럽혀지고

위선으로 둘러싸여 있으면 가문이 좋다고 성직자가 될 수 없네.

귀족과 사제와 평민의 계급이나 노예와 천민의 계급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마음을 모으며 항상 견고하게 정진하면

위없는 청정을 성취하네. 오 바라문이여, 그대는 알아야 하리.

 

(쑷디까-Suddh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1.7, 전재성님역)

 

쑷디까경(S7.1.7).docx

 

쑷디까경(S7.1.7).pdf

 

 

부처님의 교단에 브라만, 끄샤트리아 계급은 물론 매우 미천한 신분인 이발사 출신의 우빨리, 마부 찬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가촉천민도 있었다.

 

이렇게 구성된 교단에서 출신성분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행위가 문제 되었다. 브라만 출신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도둑놈이 되듯이, 미천한 노예출신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고 정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다면 성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가르침에 여자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마음이 잘 집중되어 최상의 법을 보는 자에게

지혜가 나타난다면 여성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에게 나는 남자다 나는 여자다

그렇지 않으면 도데체 무엇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그는 악마일 뿐이리.

 

(소마경-Somāsutta- Bhikkhuni Soma, 상윳따니까야 S5.2, 전재성님역)

 

소마경(S5.2).docx

 

소마경(S5.2).pdf

 

 

부처님의 교단에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누군가 여자라고 하여 지혜가 손가락 만큼 얕아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악마의 말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불교와 마르크시즘

 

이와 같이 창조주를 부정하고 평등사상을 실천한 부처님은 종종 마르크스와 비교된다. 불교와 마르크시즘은 일견 비슷한 면도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하여 한양대 이도흠 교수는 법보신문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트레버 링, 유승무 교수와 필자의 연구를 종합하면, 붓다와 마르크스는 다른 점도 많지만 같은 점도 많다. 신적 존재를 부정하고 이 세계를 쉼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무상(無常)의 관점에서 파악하였으며, 기존질서와 논리는 물론 기존의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이고 해체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각자의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이타적이고 대자적인 실천을 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무엇보다도 붓다와 마르크스는 신분과 계급의 차별이 없이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이도흠교수, 자본주의 모순과 대안으로서 불교-4 자본주의식으로 사는 것은 반불교적 붓다와 마르크스 모두 평등사회 지향 , 법보신문 2011-10-26)

 

 

부처님의 사상과 마르크스 사상의 유사한 면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과 마르크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모든 현상에 대하여 해체하여 본다는 측면에서 같은 점이 있다. 또 가문과 신분 등 계급에 따른 차별없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꾼 것 역시 동일하다.

 

동몽이상(同夢異床)

 

하지만 다른 것도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차이도 분명하다. 붓다는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며 유심론의 입장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깨달음에 따라 새로 구성하고자 하였고, 마르크스는 이제 철학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며 유물론에 입각하여 세계를 바라보고 인간주체의 실천에 의해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붓다에게는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고, 마르크스에게는 노동이나 경제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을 물신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인간해방의 장애물이었다. 불교는 수행자에 의한 인정투쟁을 통해서 이상사회에 도달하려고 한 반면에, 마르크시즘은 노동자의 계급투쟁에 의해 이상사회를 건설하려고 한다.

 

(이도흠교수, 자본주의 모순과 대안으로서 불교-4 자본주의식으로 사는 것은 반불교적 붓다와 마르크스 모두 평등사회 지향 , 법보신문 2011-10-26)

 

 

부처님은 현상에 대하여 유심론적인 관점을 취하였지만, 마르크스는 유물론적으로 접근한 것이 다르다. 또 부처님은 수행으로 이상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지만  마르크스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으로 이상사회를 꿈꾸었다.

 

이처럼 부처님의 사상과 마르크스의 사상은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어서 이에 대하여 이도흠교수는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닌 동몽이상(同夢異床)의 관계로 표현 하였다. 즉 신의 부정과 계급타파 하는 것은 같은 꿈이지만 그 방법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다르기 때문에 동몽이상(同夢異床)’으로 본 것이다.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

 

우리나라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그것도 모든 규제를 철폐하고 완전한 자유경쟁체제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정책을 MB정권이 들어서면서 펴고 있다. 그러다보니 폐해도 많이 발생된다. 특히 많이 가진 자들이 유리한 체제가 되고 말았다.

 

신자유체제하에서는 자본이 많은 자가 이길 수 밖에 없는 불공정한 게임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정책에 대한 거센 저항이 일고 있는데, 그것은 1%의 탐욕스런 소수의 야만과 부패에 견디다 못한 99% 반발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마르크스 이론은 한물간 낡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체제가 존속하는 한 마르크시즘은 유용할 것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본주의적으로 산다는 것은 반불교적이다. 타인의 것을 빼앗아 자기 배를 불리고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이는 과도한 이익을 취하는 것에 대하여 도적질로 보고 탐욕을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불교도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불교도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소유하는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선남자에게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이 있다.

 

그는 ‘내게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이 있다.

 

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를 일러 소유하는 행복이라 한다.

 

(아나나경-Aanasutta - Not indebted-빚 없음 경, 앙굿따라니까야-A4.2.2.2, 대림스님역)

 

아나나경(빚 없음 경-A4.2.2.2).docx

 

아나나경(빚 없음 경-A4.2.2.2).pdf

 

 

부처님은 노동의 대가로 얻어 진 재물은 정당한 것이라 하였다. 이는 비난 받지 않고 재물을 모은 것을 말한다. 부동산투기나 불로소득으로 인한 재산의 증가는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피땀흘려 모은 재산을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재물을 누리는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선남자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로 재물을 누리고 공덕을 짓는다.

 

그는 ‘나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획득했으며 법답고 법에 따라서 얻은 재물로 재물을 누리고 공덕을 짓는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를 일러 재물을 누리는 행복이라 한다.

 

(아나나경-Aanasutta - Not indebted-빚 없음 경, 앙굿따라니까야-A4.2.2.2, 대림스님역)

 

 

부처님은 자신의 노력으로 법답게 획득한 재산에 대하여 공덕지을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사회에 봉사하라는 말과 같다. 그렇게 봉사하였을 때 행복의 기쁨을 누릴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1%의 탐욕스런 자산가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일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는 자본주의와 맞지 않는다. 가장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욕심을 적게 내고 주어진 조건에서 만족하며 사는 것이다. 이를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 한다.

 

소욕지족을 청정도론에서 '탐욕없음(不貪, 2장 두타행 84)'이라 규정하였다. 따라서 욕심을 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깨닫는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가장 부합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1%가 되기 위한 야만가의 종교가 될 수 없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지역적으로 많이 가진 자들과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정당의 아성으로 알려져 있고, 정치적으로는 이와 정반대로 보수기득권층에 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다.

 

한국불교는 지역적으로 주류일지 모르지만 정치-경제적으로는 주류가 아닌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서울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소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강남 등에서 불교는 3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이 나왔을 것이다.

 

한국불교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라 본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신의 속박에서 인간을 해방시켰고 출생이 아니라 행위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된다는 평등주의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불교는 매우 진보적인 종교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에 혁명가이었다. 부처님이 지금 한국에 나타났다면 역시 혁명가 역할을 할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현실이 부처님당시와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창조론으로 대표되는 유일신교가 주류로 잡아 정치, 경제, 사회 등 전분야 걸쳐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실이 그렇고, 1%의 야만스런 탐욕가들이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한국불교가 빛 좋은 개살구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는 혁명가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2012-04-1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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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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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나경(빚 없음 경-A4.2.2.2).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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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다리까 바라드와자의 경(Sn3.4).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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