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영혼이라는 산냐를 부수기 위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19. 11:27

 

 

영혼이라는 산냐를 부수기 위해

 

 

 

 

뜰 앞의 벚나무

 

벚꽃이 절정이다.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 앞에 핀 벚꽃이 필 때면 사람들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 내미는 광경을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반드시 하동 쌍계사 벚꽃이나 여의도 윤중로 벚꽃을 찾아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봄의 정취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꽃들이 동시에피는 현상

 

올해 벚꽃은 늦게 피었다. 예년 보다 약 일주일 정도 늦은 편이다. 지난 2006년 이래 디카를 이용하여 매년 벚꽃이 필 무렵 아름다운 벚꽃을 담았는데 올해의 경우 더 늦어 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일찍 피는 꽃들이 동시에피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3월 말에 목련이 피고, 이어서 개나리가 3월말에서 4월초에 노랗게 장식하고, 그 다음에 벚꽃이 피는 순으로 되어 있으나 올해의 경우 동시에 피었다.

 

봄에 피는 꽃들은 시차를 두고 차례로 피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요즘의 꽃소식은 이런 원칙을 무너뜨리고 뒤죽박죽이 된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이상기후와 환경변화에 따른 영향일 것이다.

 

 

 

 

 

 

 

 

 

청춘과도 같은 봄

 

화무십일홍이라 하였다. 아무리 예쁜꽃일지라도 10일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동시에 핀 꽃들 역시 10일이 지나면 모두 지고 말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무상함을 느낀다.

 

저 아름다운 꽃이 좀 더 오래 피어서 그 꽃을 바로 보고 즐기기를 원하지만 마치 꽃비를 내리듯이 마치 붉은 피를 뚝뚝 흘리듯이 꽃은 지고 만다. 하지만 이어서 이파리가 돋고 열매가 맺기 때문에 무상감은 덜하다.

 

가장 무상함을 느낄 때는 벌겇게 물든 낙엽이 질 때 이다. 낙엽이 지면 그야말로 앙상한 가지만 남고 날씨 또한 무척 추워 더욱 더 움추리게 만든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오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데, 이에 반하여 봄의 경우 꽃이 져도 그다지 우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양의 기운이 뻗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춘(靑春)’이기 때문이다.

 

봄은 인생주기로 본다면 청춘이다. ‘푸른 계절’이라는 뜻이다. 그런 청춘은 아름답다. 아무 옷이나 걸쳐도 폼나고 맨 얼굴이라도 빛이 난다. 청춘과도 같은 봄의 한 가운데 있다. 춥지도 덥지도 않고 좋은 날씨이다. 꽃은 피어 있고 바람은 부드럽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마음도 너그로워지는 것 같다. 이렇게 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벚꽃나무의 성불

 

일년에 한 번 피는 꽃은 자신을 한 껏 드러내 보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라는 듯이 활짝 드러내는 것이다. 더구나 향내까지 발산하면 시각적으로 후각적으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럴 때 사람들은 비로서 쳐다 본다.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다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 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이다. 이런 꽃은 자신의 할 바를 다한 것이다.

 

벚꽃나무가 봄이 되어 꽃을 피워 내는 것은 자신의 할 도리를 다한 것이다. 꽃이 피지 않는 벚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초목이라도 자신의 할 바를 다 했을 때 대승불교에서는 ‘성불’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붙여 주었다. 때가 되어 꽃을 피워낸 벚꽃나무도 ‘성불’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성불개념은 산천초목 모든 것에 다 적용 될 수 있다.

 

산천초목두두물물 부처아닌 것이

 

그렇다면 바위도 성불할 수 있을까. 답은 그렇다이다. 왜 그럴까. 불교tv에서 김종욱 교수의 강의에 따르면 그것은 바위가 바위답게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성불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벚꽃나무는 벚꽃이라는 고유의 꽃을 피워냈기 때문에 성불한 것이고, 바위는 가장 바위 다울 때 고유성이 드러나기 때문에 성불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뜰 앞의 잣나무도 마찬가지라 한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괴로워 하다 아침이 되어서 뜰 앞에 잣나무를 보았을 때 잣나무는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 잣나무를 보고서 그 자리에 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 잣나무는 잣나무만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그 자신만의 고유성을 잘 드러낼 때  성불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산천초목두두물물 부처아닌 것이 없게 된다. 이것은 고유성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고유성을 발현하면

 

대승불교에서는 인간뿐만아니라 산천초목도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 그것을 고유성발현으로 설명한다. 그런 고유성은 어떤 것일까.

 

고유(固有)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어느 사물에만 특별히 있거나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각 나라마다 고유음식이 있고 민족 고유의상이 있듯이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 ‘[특유] characteristics; peculiarity; [천성] inherence; [본질] essence’  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자신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명칭을 붙이면 고유명사가 된다. 그런 고유명사의 사전적인 정의는 무엇일까. 인터넷사전을 참고 하였다.

 

 

고유 명사 [固有名詞]

 

[언어] 같은 종류에 속하는 사람이나 사물 가운데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유의 기호를 붙인 이름.

 

문법에서는 명사의 하나이며, 영어에서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쓴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해’, ‘달’ 따위는 다른 것과 구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고유 명사에 속하지 않는 반면, ‘홍길동’과 같은 인명은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있는 경우라도 고유 명사에 속한다. 인명이나 지명, 국호, 상호 따위가 있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구별하기 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 이름 붙여진 모든 것은 고유명사라 볼 수 있지만 해나 달과 같이 너무 뚜렷하여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은 제외라 한다.

 

이렇게 고유명사로 불리워지면 그 것만의 고유성이 있는 것이다. 홍길동은 홍길동만의 독특한 고유성이 있고, 벚꽃나무는 벚꽃나무만의 고유성이 있는 것이다. 바위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산천초목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고유성은 없을까.

 

실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삼라만상두두물물의 특징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가지라도 고정됨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저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커다른 바위 덩어리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만다. 하물며 지금 핀 하얀 벚꽃 역시 10일만 지나면 모두 지고 말 것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처럼 무상함을 특징으로 하는 모든 현상은 또한 자신만의 고유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를 고유성(svabhava)’ 또는 자성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고유성과 무상함을 갖는 것에 대하여 구경법(Paramatta-dhamma)’이라 한다. 이 구경법을 궁극적 실재라고도 하는데 다음과 같이 정의 된다.

 

 

궁극적 실재(勝義, paramattha)

 

일반적으로 법은 이 궁극적 실재를 뜻하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12연기十二緣起,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 등이다.

 

그리고 이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을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고유의 특성이란, 특정 법이 가지는 자신에게만 있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예를 들면, 탐욕(lobha)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탐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대상을 탐하고 거머쥐는 탐욕만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성냄(dosa)이라는 심리현상을 성냄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상에 대해서 분노하고 적개하고 밀쳐내는 등의 성냄만의 고유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탐욕이라는 법과 성냄이라는 법은 그 성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탐욕이 가지는 거머쥐는 성질과 성냄이 가지는 밀쳐내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이 다른 것은 그 고유한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아비담마는 설명한다.

 

(주해 모음, 김한상 번역 및 역주, 1. 마하시 사야도의 초전법륜경, 2. 마하시 사야도의 십이연기, 3. 위빠사나 수행의 기초)

 

 

법(담마)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 법,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이다. 여기서 부처님 가르침으로서의 법은 경전에서 볼 수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고, 존재일반으로서의 법은 개념과 실재로 나누어진다.

 

개념으로서의 법은 명칭과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법을 말하고, 실재로서의 법은 오온 십이처 등과 같이 실재하는 법이다. 이렇게 실재하는 법을 궁극적 실재 (paramattha, 빠라맛따)라 한다.

 

그런데 실재한다고 하여 항상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현상은 무상하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 역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런 궁극적 실재는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성냄도 궁극적 실재 중의 하나인데, 성을 내었을 때 성내는 현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밀쳐내는 고유성질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냄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음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다음 마음이 일어 났을 때 성을 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법

 

이처럼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은 모두 82가지로 분류 된다. 이것이 82법이다. 82법을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82(궁극적 실재, 구경법)

구경법
(82
)

오온
(panca-kkhandha
빤짜칸다)

12
(ayatana,아야따나)

18
(dhatu, 다뚜)

물질 (28)

1. 색온(色蘊)

1. 안처

거친

1. 안계

거친

2. 이처

물질

2. 이계

물질

3. 비처

(12)

3. 비계

(12)

4. 설처

4. 설계

5. 신처

5. 신계

6. 색처

6. 색계

7. 성처

7. 성계

8. 향처

8. 향계

9. 미처

9. 미계

10. 촉처 (, , 풍의 3물질)

10. 촉계 (, , 풍의 3물질)

11. 마노의 대상 (法處)

미세한

11. 마노의 대상 (法界)

미세한

마음부수 (52)

2. 수온(受蘊)

물질 (16)

물질 (16)

3. 상온(想蘊)

마음부수

마음부수

4. 행온(行蘊)

(52)

(52)

열반(1)

없음

열반

열반

마음 (1)

5. 식온(識蘊)

12. 마노의 감각장소

12. 안식계

(意處)

13. 이식계

14. 비식계

15. 설식계

16. 신식계

17. 의계

18. 의식계

 

 

 

 

 

이것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법(구경법)이다. 이런 근본법은 우리의 눈과 귀 등을 통하여 모두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실재도 연기법에 따라 찰라생 찰라멸하고 조건(paccaya)을 남긴다. 그 조건에 따라 또 다음 법이 일어나곤 한다.

 

영혼이라는 산냐를 부수기 위해

 

82법을 보면 오온, 12, 18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초기경전에서 강조하던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처럼 분별하고 분석하여 놓았을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을 참고 하면 다음과 같다.

 

 

더군다나 외도들이 주장하는 자아라는 것은 고유성질로 볼 때 없지만 이 요소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고유성질을 지니기 때문에 요소라 한다.

 

세간에서 공작석, 비석 등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암석의 요소를 다뚜(요소)라고 부르듯이 이들도 다뚜와 같기 때문에 다뚜(요소)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혜와 알아야 할 대상의 구성성분이기 때문이다. 혹은 체액과 피 등은 몸이라 불리는 것의 성분(요소)이며, 특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서로 차이가 난다. 일반적으로 그들을 일러 다뚜라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라 불리는 몸의 요소 등에도 다뚜라는 용어가 사용된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 눈 등도 특징이 달라서 서로서로 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요소는 영혼이 아닌 것의 동의어이다. 세존께서 “비구여, 이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를 가졌다.”라는 등에서 영혼이라는 산냐를 부수기 위해 요소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 그러므로 이미 설명한 뜻대로 ‘눈이 곧 이 요소이기 때문에 눈의 요소이고 … 마노의 알음알이가 곧 이 요소이기 때문에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이다’라는 뜻에 따라 판별을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제 15장 감각장소와 요소, 21-22절)

 

 

부처님이 오온, 12, 18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은 외도들의 교리를 논파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외도들이라고 하면 부처님당시의 정통브라만과 육사외도를 말한다.

 

특히 오늘날 유일신교의 교리와 유사한 브라만교의 교리에 대하여 비판하였는데, 아뜨만이라 불리우는 영혼이 없음을 논파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분별하고 분해하고 분석하였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산냐를 부수기 위해 요소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라고 청정도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요소라는 것이 18계를 말하는데, 이는 모든 구경법을 아우르는 것이다.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

 

부처님은 영혼이라는 산냐(인식)를 부수기 위하여 요소로 나누어 법을 설하였다.  그렇다면 영혼, 아뜨만, 브라만, 자재천, 창조주와 같은 산냐는 왜 실재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 추가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안다는 고유성질을 가진 것이 알음알이인데 그것에 대해 영혼이라는 산냐를 굴리는 자들의 산냐(인식)를 제거하기 위해 오직 18가지 요소를 설하셨다. 왜냐하면 안다는 고유성질을 가진 알음알이에 대해 영혼이라는 산냐를 굴리는 중생이 있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이들에게 눈의 알음알이의 요소(안식계), 귀의 알음알이의 요소(이식계), 코의 알음알이의 요소(비식계), 혀의 알음알이의 요소(설식계), 몸의 알음알이의 요소(신식계), 마노의 요소(의계),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의식계)를 분류하여 이것들의 다양성을 드러내셨다.

 

그리고 이것들은 눈과 형상 등의 조건을 의지하여 존재하기에 무상하다는 것을 드러내시어 오랫동안 잠재해왔던 영혼이라는 산냐를 제거하시려고 이들 18가지 요소를 설하셨다.

 

(청정도론, 15장 감각장소와 요소, 32)

 

 

부처님이 법을 설한 가장 중요한 목적은 부처님 당시 신의 속박으로부터 중생을 해방시키기 위해서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동시에 계급의 해방이고 평등사회의 구현이기도 하다.

 

고유성이 없는 것은 실체가 없다!

 

지금도 유일신교와 마찬가지로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교에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 보는 브라만과 변치 않는 영혼이라 볼 수 있는 아뜨만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런 것들이 모두 거짓이고 실체가 없다고 하였다. 왜 그럴까. 그것은 고유성(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고유성이 없는 것은 실체가 없다. 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고유성(자성)이 없다. 부처님이 수레의 비유에서

 

 

“부품들이 모였을 때

수레라는 단어가 있듯이

무더기들이 있을 때

중생이라는 일상적인 말이 있다“

 

 

라고 말씀 하였는데, 이때 수레가 개념이다. 이름과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집이나, 인간, 자재천, 브라만, 창조주, 야훼, 진아 도 마찬가지이다. 고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고 또한 실체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오온, 12, 18계는 실재한다. 그것도 고유성을 가지고 실재하는 것이다. 실재하되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생멸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원인과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공통적인 특징(공상)과 고유의 특징(자상)을 가지고 있을 때 이를 실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 이외는 모두 개념으로서 이름과 명칭으로만 이야기 될 뿐이다.

 

진정한 성불이란?

 

벚꽃이 피었을 때 벚꽃이라는 고유의 특질이 발현 되었을 때 벚꽃은 성불한 한 것이다. 바위가 딱딱함이라는 고유의 성질을 가졌을 때 역시 성불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자신만의 독특한 고유한 특질을 발현하였을 때 산천초목두두물물 부처아닌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넒은 의미의 세계관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자신의 인식의 산물이다. 눈으로 꽃을 보고, 코로 향내를 맡았을 때 아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다면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 꽃을 보았을 때 그 꽃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모두 지고 만다. 이럴 때 사람들은 무상하고 허망하고 허무한 느낌을 갖는다. 이런 느낌은 불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무상함을 느끼는 것은 불자들이나 일반인들이나 똑 같은데 왜 일반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라고 하는 아상 때문이다. 꽃이 피어 즐거움을 느끼는 것도 나가 있어서이고, 꽃이 져서 무상함을 느끼는 것도 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기뻐도 내가 기쁜 것이고 슬퍼도 내가 슬픈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상 뿐만 아니라 고와 무아도 설하였다. 기뻐도 내가 기쁜 것이 아니라 조건이 기쁜 것이고, 슬픔도 조건이 슬픈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현상에 대하여 아닛짜(anicca, 무상), 둑카(dukkha, ),아낫따(anatta, 무아)로 보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바로 이점이 나를 기반으로 무상을 느끼는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이다.

 

모든 현상을 무상, , 무아로 보면 감상적인 느낌에 빠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에 세상이 허무하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감정에 치우칠 겨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으로 보았을 때 지금 화려한 꽃이 피어 눈을 즐겁게 하였다면 , 아름다운 꽃이 피었구나하고 말면 그 뿐이고, 꽃이 져서 지저분해져도 , 꽃이 졌구나하고 알아차리면 그만이다. 이는 철저하게 무아의 입장에서 연기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아닛짜(anicca, 무상), 둑카(dukkha, ), 아낫따(anatta, 무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유성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참나를 아는 것이 성불이 아니라, 이런 고유성을 알았을 때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불이 아닐까.

 

 

 

2012-04-1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