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라도,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제도한 부처님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14. 22:46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라도,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제도한 부처님

 

 

 

 

엽기적인 살인사건

 

수원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살인사건으로 인하여 온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 그것도 아무 인연도 없는 지나가는 여인을 붙잡아 강제로 성폭행한 후 시신을 토박내어 살인한 것이다. 일간지에 따르면 가해자는 시신을 마치 짐승을 ‘도축’하듯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핸드폰을 이용하여 112로 구조요청을 하였으나 경찰의 안이한 대응으로 인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더구나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한 시도까지 하였다고 한다.

 

구조를 요청해도 경찰이 지켜 줄 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흉악범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 마치 무법천지를 보는 듯 하다.

 

법륜스님의 인권론

 

수원 토막살인사건과 관련하여 정치인과 종교인의 대화에 대한 기사가 인터넷신문에 실렸다. 사건이 일어난 지자체의 장인 김문수경기도지사와 법륜스님과의 대화이다. 이 대화에서 정치인지사는 흉악범에 대하여 가혹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본보기로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륜스님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들어 반대하였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흉악범에 대해 사형을 집행한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느냐"고 반문한 뒤 "인권 차원에서 사형제는 반대한다"고 응수했다.
 
그는 이어 "사형제 집행을 한다면 이는 죄수를 공개 처형하는 북한과 50보, 100보라는 생각이 든다"며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인권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김문수지사-법륜스님 '살인마 오원춘' 사형놓고 '이견', 아시아경제 2012-04-13)

 

 

법륜스님은 흉악범의 사형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아무리 죄를 많이 저지른 자일지라도 인권적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다.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살생하지 말라고 하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장자여,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자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침으로써 현재의 삶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미래의 세상에서도 원한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며 마음속에 괴로움과 슬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이와 같은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는 일을 삼감으로써 그 원한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다.

 

(빤짜바야웨라경-Pañcabhayaverasutta-The Five Fears –다섯 가지 원한과 두려움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5.1, 전재성님역)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docx  빤짜바야웨라경(다섯가지원한과 두려움의 .pdf

 

 

 

부처님은 생명이 있는 것을 해치는 것은 원한과 두려움을 일으킬 것이라 하였다. 이는 현세 뿐만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라 한다.

 

어떤 자가 우발적이든 계획적이든 살인을 하였을 경우 그 살인을 한 행위는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 설령 완전범죄를 하여 남의 눈을 속이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양심은 속일 수 없다. 그래서 그 사건이 떠 올릴 때마다 마음은 불안하고 두렵고 슬플 것이다.

 

이런 마음은 숨아서 살거나 징역살거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죄를 저질렀다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정신적 고통을 겪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런 정신적 고통은 매우 무거운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신구의 삼업 중에 몸으로 지은 업이 가장 무거운 것인데, 이는 다음 생을 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 한다. 그래서 임종순간에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떠 오르게 되는데, 그 마음을 대상으로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럴 경우 대부분 괴로운 곳, 나쁜 곳, 비참한 곳이라 한다. 즉 지옥, 축생, 아귀와 같은 악처로 떨어지는 것이다.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이처럼 살생업을 저지르면 현세는 물론 내세도 고통에 빠진 다고 하는데, 법구경에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게송 15 쭌다수까리까 이야기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수도원에서 계시던 어느 때, 돼지 백정 쭌다와 관련하여 게송 15번을 설법하시었다.

 

한때, 웰루와난 수도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에 아주 잔인한 성격을 가진 돼지 백정 쭌다가 살고 있었다. 이토록 긴 세월 동안 돼지를 잡아 그 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동안 별반 착한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없었다.

 

그가 죽음에 가까웠을 때 그는 살생의 과보로 손이 돼지 발처럼 안으로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무릎과 손등으로 기어다니면서 돼지가 죽을 때처럼 몸부림을 쳤다. 그는 죽어가는 돼지의 단말마를 내질렀으며, 이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이레 동안이나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아 있는 상태로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를 온 가족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런 뒤 죽어서 그는 곧바로 아비지옥1)

에 태어났다.

 

이 같은 사실은 자신의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과보가 따른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어떤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어떤 종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간에 그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과보는 정해지는 것이다. 이같은 진리와 관련하여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이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지고

다음 세상에서도 그는 비탄에 빠진다.

이처럼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양쪽 세상 모두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그가 더욱 괴로운 것은

고통을 겪으며 자기 악행을 보고 되새기는 것이다.

 

(법구경, Dhp15, 거해스님역)

 

 

아주 잔인한 성격을 가진 백정 쭌다수까리까가 죽음에 이르러 고통받는 장면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지은 살생업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는데, 이는 죽어서 받는 것 뿐만 아니라 살아서도 받는 다는 것이다. 자신의 악행이 보고 되새길 때마다 고통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고통 받고 저 세상에 가서도 고통 받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사람을 살인하여 토막 낸 살인마는 징역을 살건 살지 않건 간에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에 저 세상에 가서 지옥고를 겪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자에게 사형을 집행한다고 하여 과보가 면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온 국민이 분노하는 엽기적인 토막살인을 저지른 자는 일벌백계로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를 사형한다고 해서 그런 범죄자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과거에도 그런 범죄는 있었고 미래세 역시 마찬 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엽기적인 범죄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

 

부처님 당시에 육사외도가 있었다. 그 중에 뿌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가 있었다. 뿌라나 깟싸빠는 도덕부정론자이다.  그래서 도덕적 인과성을 부정한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사후도 부정된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세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허무론에 가깝고 넓은 의미로 단멸론으로 불리운다. 넓은 의미에 있어서 우연론이나 숙명론 역시 허무론과 단멸론의 범주에 들어 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이 왜 문제일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참으로 업을 짓거나 업을 짓도록 시켜도, 도륙하고 도륙하도록 시켜도,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슬퍼하고 슬퍼하게 하여도, 피곤해하고 피곤하게 하여도, 전율하고 전율하게 하여도, 생명을 해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고, 가택을 침입하고, 약탈하고, 절도하고 노략질하고, 타인의 처를 겁탈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즈 강의 남쪽을 다니면서 살육하고 또한 살육을 시키며, 절단하고 절단하도록 사키며, 학대하고 학대하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갠지즈 강의 북쪽을 다니면서 보시하고 또한 보시하도록 시키고, 제사지내고 제사지내도록 시켜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 없으며 또한 공덕의 과보도 없다.

 

보시에 의해서도 수행에 의해서도 계행을 지키더라도 진실을 말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한 공덕이란 없으며 또한 그 공덕의 과보도 없다."

 

(까따로경-karoto- The Doer- 업을 짓거나경, 상윳따니까야 S23.3.1.6, 전재성님역)

  까따로경(업을 짓거나 경-S23.3.1.6).docx  까따로경(업을 짓거나 경-S23.3.1.6).pdf

 

 

 

이것이 초기경에 표현된 뿌라나 깟싸빠의 도덕부정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수원토막살인사건과 매우 유사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면도칼처럼 예리한 바퀴로써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조각조각 고깃덩이로 잘라도 그것으로 인한 죄악이 없으며, 또한 죄악의 과보도 받지 않는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에 따르면 수원 토막살인사건의 가해자는 도덕부정론자임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인과를 부정하는 단멸론자이기 때문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더 이상 내세는 없다라는 사고 방식을 가졌음에 틀림 없다.

 

그런 자에게 사형을 시킨다는 것은 오히려 그를 도와 주는 결과를 초래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자연사 할 때 까지 가두어 놓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게 하는 것이다. 법구경에서와 같이 자기 악행을 보고 되새기며 고통을 맛 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쪽 세상에서도 고통받게 하고, 저쪽 세상에 가서도 고통받게 하는 것이다.

 

선근이 남아 있는 한

 

부처님은 영속론의 정통브라만교 보다 단멸론의 육사외도를 매우 비판 하였다. 영속론의 경우 계율을 지키고 공덕을 쌓아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수 없지만, 단멸론자들의 경우 윤리적 삶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비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천인공노할 죄를 지은 자는 구제 받을 수 없는 것일까.

 

앙굴리말라 이야기가 있다. 법구경 인연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게송 173 앙굴리말라 테라 이야기

 

부처님께서 제따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앙굴라말라 테라와 관련하여 게송 173번을 설법하시었다.

 

앙굴리말라(Angulimala)는 꼬살라 국 빠세나디 왕의 왕실 제사장의 아들이었다. 그의 본 이름은 아힘사까(모든 새명을 해치지 않음)로서 부드럽고 자비심이 넘치는 성품에다 매우 영특하여 명성이 높았다. 아힘사까는 나이가 들어 당시 유명한 교육 도시였던 탁실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타고난 성품대로 스승에게 잘 순종햇다. 그 때문에 그는 스승과 스승의 아내로부터 큰 사람을 받았고, 또 공부에도 뛰어났다.

 

그가 그처럼 스승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공부도 잘하자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그들은 아힘사까를 모함하여 아힘사까가 스승 몰래 스승의 부인과 사랑을 나누고 있다고 스승에게 밀고했다. 학생들의 이런 말을 들은 스승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또 다른 여러 학생들이 그렇게 말해 오자 스승은 점차 아힘사까를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스승은 분노가 치밀어 아힘사까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하고 이를 다른 학생들 앞에 공언했다. 스승은, 자기가 직접 아힘사까를 살해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므로 교묘한 방법을 써서 결과적으로 그가 해를 입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힘사까로 하여금 엄청난 일을 저지르도록 사주함으로써, 그가 자기 앞에 사죄하든지, 자기의 결백이 증명될 때까지 투쟁하리라 결심했다.

 

어느 날 스승은 아힘사까를 불러 어렇게 말했다.

 

「아힘사까야, 나에게는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특별한 가르침이 있느니라. 너는 그것을 알고 싶지 않으냐? 그것은 참으로 희기한 것으로서, 아주 특별한 일을 해내는 자만이 쟁취할 수 있는 보배이니라.」

 

이런 스승의 충동에 마음이 움직인 아힘사까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귀중한 것을 배우기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저는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그에게 지시하는 것이었다.

 

「너는 지금부터 남녀를 가리지 말고 일천 명의 사람을 죽여야 한다. 그러면 나는 네게 값진 가르침을 주었다.」

 

아힘사까는 한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일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한 한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꼈지만, 값진 가르침을 열렬하게 원했기 때문에 마침내 스승의 지시대로 행동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아힘사까는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는데, 이제 그는 아힘사까가 아니라 힘사까(생명을 해침)인 셈이었다. 그 뒤 그가 사람을 죽인 숫자가 많아지자 그는 자기가 죽인 사람의 숫자를 기억하기 위해 죽인 사람의 엄지 손가락을 잘라 줄에 꿰어 목에 걸고 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앙굴리말라(손가락 목걸이)라고 불렀다. 그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대피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은 그에게 희생되었다.

 

이 소식은 꼬살라 국왕 빠세나디에게도 전해졌다. 앙굴리말라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왕은 본래 어질고 착하던 그가 필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더라도 그가 백성들에게 주는 피해가 엄청났던 만큼 왕은 곧 병사들을 동원하여 앙굴리말라를 체포하러 떠나려 했다. 이때 앙굴리말라의 어머니 만따니는 국왕이 병사들을 동원하여 자기 아들을 잡으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먼저 가서 아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국왕에 앞서 숲속으로 달려갔다.

 

이때 앙굴리말라의 목에는 구백아흔아홉 개의 엄지손가락이걸려 있었다. 그는 이제 한 개의 손가락만 더 채우면 목표를 달성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곤 했기 때문에 그는 아직껏 마지막 한 사람의 손가락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한편, 부처님께서는 이날 아침 일찍이 신통력으로 세계를 두루 살피시다가 앙굴리말라를 보시었다. 부처님께선는 그를 반조해 보시고 만약 그와 그의 어머니가 만나는 것을 막지 않으면, 그는 마지막 손가락 하나를 채우려는 욕심에 어머니까지 살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시었다. 그랬을 경우 앙굴리말라는 지옥에 떨어져 기나긴 세월 동안 큰 고통을 겪을 것이 뻔한 이치였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자비심을 내시어 앙굴리말라가 머물고 있는 숲으로 향하시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앙굴리말라의 잔인성을 이야기하며 위험하니 가셔서는 안 된다고 부처님을 말렸지만 부처님께서는「여래가 가지 않고는 그의 악행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찾아기시었던 것이다.

 

이때 앙굴리말라는 여러 날을 두고 잠을 자지 못하여 거의 지쳐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이제는 마지막 한 사람만 죽이면 목표를 달성케 되는 만큼 마음이 아주 흡족했다. 그는 스스로 <이제는 어느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이 나의 표적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를 죽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이런 생각을 다지며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부처님께서 다가오고 계시었다. 그는 주저 없이 큰 칼을 높이 쳐들고 부처님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뒤로 도시어 느린 걸음으로 걷기 시작하시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아무리 쫓아가도 부처님과의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달렸지만 도저히 부처님 가까이에 접근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말을 달리면 말을 쫓아갔고, 코끼리가 달리면 코끼리를 따라잡아 타고 있던 사람을 붙잡아 죽였는데, 저렇게 천천히 걸어가는 수행자 하나를 쫓아가 잡지 못하다니>하고 생각했다. 결국 지친 그는 부처님을 향해 다음과 같이 세 번을 소리쳤다.

 

 

 

 

 

 

 

앙굴리말라(Angulimala)

 

 

 

 

 

「사마나(수행자)여, 거기 멈추어 섰거라!」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돌아보시며 말씀하시었다.

 

그는 부처님께 물었다.

 

「빅쿠여, 그대는 멈추어 서 있지만 나는 멈추어 서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대답하시었다.

 

「앙굴리말라여, 여래가 멈추어 서 있다 함은, 여래는 모든 생명을 해치기를 그치고, 모든 생명을 잔인하게 다루기를 그쳐, 우주적인 자비와 인욕을 이루고 자신을 돌아보는 참된 지혜를 성숙시켰다는 뜻이니라. 그러나 너는 지금 사람 죽이기를 버리지 않고, 사람에게 잔인하게 대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자비와 인욕을 버리고, 너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구나. 그러므로 너는 멈추어 서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니라.」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이 말을 가만히 반조해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지극히 현명한 분의 말씀이다. 이 빅쿠는 실로 드물게 현명하며, 또한 두려움을 모르는 위대한 분이다. 이런 분은 많은 빅쿠들을 거느리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어 마땅하다 하겠다. 참으로 이분이야말로 천상과 인간들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부처님 바로 그분일 것이다! 아, 부처님께서 직접 나를 위해 이곳에 오시어 모든 악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자비와 지혜의빛을 보이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 앙굴리말라는 자기가 그동안 저지른 큰 악행의 과보에 공포를 느끼고 뉘우치는 마음이 생겼다. 그는 손에 든 칼을 땅속에 박고 피묻은 손가락들로 엮은 목걸이도 벗어 던졌다. 그런 뒤 부처님의 발앞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한편, 자기를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 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크나큰 자비심으로 그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시고, 그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었다.

 

부처님께서 그에게「빅쿠가 될지니라」하고 선언하시자 당장에 그의 머리카락이 저절로 깎이고 까사가 입혀졌다. 그리하여 앙굴리말라는 다시 예전의 아힘사까로 돌아가 어질고 착한 사람으로 변하여 부처님의 뒤를 공손히 따라 제따와나 수도원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부처님의 위신력과 대자대비에 탄복하는 한편, 자기들의 눈을 의심하였다.

 

한편 사왓티에서는 시민들이 왕에게 잔인한 앙굴리말라는 잡아 다스려야 한다고 성화가 대단했다. 그래서 왕은 오백 필의 말과 군사를 거느리고 앙굴리말라를 체포하려고 떠나면서 먼저 부처님을 뵈었다. 왕은 수레가 갈 수 있는데까지는 수레를 타고 간 다음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부처님께 갔다.

 

부처님께서 왕에게 물으시었다.

 

「대왕이여, 대왕은 왜 이토록 많은 군마를 동원하였소? 혹 빔비사라 왕이 국경을 넘어 공격해 온 것이오? 아니면 반란이라도 일어났소?」

왕이 사뢰었다.

 

「부처님이시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나타나 나라 안을 온통 공포 속에 몰아놓고 있기 때문에 그를 체포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왕에게 물으시었다.

 

「대왕이여, 만약 그 앙굴리말라가 지난날의 모든 악행을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으 깍고 까사를 입고 빅쿠가 되어 계행을 지키며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는 수행을 하게 된다면 그를 어떻게 대하시겠소?」

 

「부처님이시여, 그렇다면 저는 마땅히 인사를 올리고 일어나서 반갑게 맞이하여 자리를 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왕궁으로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며 머물 곳과 의복ㆍ음식ㆍ약품 등을 공급하면서 이치에 따라 보호하고 존경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시여, 악랄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해친 그 같은 자가 어떻게 엄정한 계행을 지키고 자신을 억제하여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가까운 곳에 조용히 앉아 좌선하고 있었는데, 빠세나디 왕의 대답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오른손으로 앙굴리말라를 가리키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대왕이여, 앙굴리말라가 저기 앉아 있소.」

 

그러자 빠세나디 왕은 깜짝 놀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처님께서는 왕을 위로하시며「빠세나디 왕이여, 무서워하지 마시오」라고 세 번이나 말슴하시었고, 그래도 왕이 안정을 찾지 못하자 다시「왕이여, 무서워할 것은 없소」라고 말씀하시었다. 그제서야 왕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몸과 마음이 안정되었다.

왕은 잠시 후 앙굴리말라에게 다가가

 

「존경하는 성자 앙굴리말라시여.」

 

「예, 대왕이시여.」

성자께서는 무슨 계급의 어느 자손이신지요?」

 

「대왕이시여, 제 아버니는 각가이며, 어머니는 만따니입니다.」

 

왕은 그가 진짜 앙굴리말라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이제부터 자기는 앙굴리말라의 신자가 되어 까사와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자기는 지금 가진 것만으로 만족한다면서 제안을 공손하게 사양했다.

 

빠세나디 왕은 부처님 곁으로 다시 다가가 부처님의 오른편에 앉아 합장으로 공경의 예를 표한 뒤에 이렇게 찬탄했다.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부처님께서는 실로 정복하지 못 할 자를 정복하시었고, 다스릴 수 없는 자를 다스리시었으며, 난폭한 자를 조용하게 만드시었고, 사나운 불과 같아서 꺼버릴 수 없는 자를 꺼버리시었으며, 저희로서는 창과 칼로도 다스릴 수 없는 자를 잘 다스리시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참으로 위대하시고 거룩하십니다!」

 

이렇게 최상의 찬사를 드리고 나서 왕은 할일이 많다면서 그곳을 떠나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앙굴리말라는 그 뒤로 열심히 수행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된 뒤의 어느 날, 그는 탁발 도중에 사람들이 서로 패싸움을 하는 곳을 자나가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돌맹이와 막대기 따위를 마구 던져댔기 때문에 그곳을 지나던 앙굴리말라는 본의 아니게 치면적인 부상을 입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성내는 기색이 없이 모든 것을 자기의 행위에 대한 과보로 여겼다. 그는 그런 와중에서 일심으로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며,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부처님이 계시는 수도원에 돌아왔다.

 

부처님게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여래의 아들이여, 너는 이제 모든 악을 다 멀리 던져 버린 사람이니라. 앙굴리말라여, 부디 인욕하라. 널러 용서하라. 네가 지나날 범한 악행으로 인해 너는 지금 이런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니라. 만약 이 일을 겪지 않을 진대 너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기나긴 세월을 니라야(지옥)에서 보내야 했으리라.」

 

부처님의 이 설법이 끝난 뒤 앙굴리말라는 평화롭게 빠리닙바나를 실현했다.

 

다른 빅쿠들이 부처님게 여쭈었다.

 

「앙굴리말라는 어디에 태어났습니까?」

 

「여래의 아들은 빠리닙바나를 실현하였느니라.」

 

그러자 빅쿠들이 그 말씀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잔인한 그가 어떻게 빠리닙바나를 실현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시었다.

 

「빅쿠들이여, 앙굴리말라가 그 같은 악행을 저질렀던 것은 그에게 진실한 벗(Kalyana-mitta : 善友 ; 선우)이 없었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그는 뒤에 훌륭한 벗을 찾았고, 벗들을 통해 담마를 알게 되었느며, 그 뒤로 열심히 수행하여 마음 집중을 잘 이루었느니라.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아라한이 되었나니, 그의 수행의 힘이 그가 지난날 저지른 모든 악행을 훨씬 능가했던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그가 행한 착한 공덕

이 과거에 지은 모든 악행을 압도했나니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남겼도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이 밝게 빛나듯이

 

(법구경, Dhp173, 거해스님역)

 

 

살인마 앙굴리말라는 1000명을 채우기 위하여 부처님까지 살해 하려 하였다. 이런 극악무도한 살인마에 대하여 부처님은 제도하기로 결심한다. 일반적인 형법에 따르면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 오게 한 것은 선근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999명에 대한 살인을 하였더라도 선근이 남아 있는 한제도가 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야망갈라가타( Jayamangala-gatha) 에서

 

이런 앙굴리말라에 대한 이야기는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수호경 또는 호신주로 불리우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 에도 등장한다. 자야망갈라가타 4번 게송이 그것이다.

 

 

4. 앙굴리말라(Angulimala)

 

Ukkhitta-khaggam-atihattha  sudāruanta     

욱킷따  칵감  아띠핫타  수다~루난땅

Dhāvan-ti- yojana-pathaguli-mālavanta      

다~완띠  요자나  빠탕굴리  마-라완땅

Iddhībhi-sakhata-mano jitavā  munindo

이디비  상카따  마노 지따와~무닌도

Ta-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떼자사~ 바와뚜 떼 자야  망갈라~니

 

살인자 앙굴리말라 손에 칼을 들고
흉포하게 덤비면서 달려들 때,
성자들의 제왕 마음에 갖춘 신통력으로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Jayamangala-gatha)

 

 

 

 

 

 

 

 

자야망갈라가타 4번 게송 - 앙굴리말라(Angulimala)

 

 

 

이 게송에서 부처님은 살인마 앙굴리말라에 대하여 신통력으로 섭수하였다고 표현되고 있다. 칼을 치켜 들고 100번째 희생물로 삼으려는 행위에 대하여 신통력으로 제압한 것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면

 

이렇게 부처님의 제자가 된 앙굴리말라는 결국 돌에 맞아 죽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가 나고 죽는 일이 없는 빠리닙바나(반열반)을 성취하였다고 선언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 날 수 있을까. 그것은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살인업을 많이 저지른 자일지라도 번뇌 다한 자가 되면 더 이상 과보를 받지 않는 것이다. 게송에 표현된 것처럼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면 과거에 지은 모든 악행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

 

유일신교와 불교의 내세관은 다르다. 유일신교의 경우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번 지옥이면 영원하다. 그래서 믿지 않는 놈, 보기 싫은 자를 지옥에 쳐 박아 놓고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의 지옥은 영원하지 않다. 때가 되면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악처에서 선처로]

악처에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을 쌓은 자에게 앞서 설한 방법대로 비난할 바가 없는 업이나 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어두운 측면을 밝은 측면으로 바꾸어서 모든 것을 앞서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악처의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와 현재의 대상을 가진 선처의 재생연결이 일어나는 모습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39절)

 

 

악처에서 비난할 바 없는 업을 쌓은 자는 악처를 빠져 나올 수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말일까. 악처에서 악행에 대한 과보가 다하면 남는 것은 ‘선업’밖에 없다. 아라한이 되어 번뇌가 다 하지 않는 한 중생들에게는 악업이든 선업이든간에 어떤 업이 남아 있어서 윤회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처에서 어두운 측면 즉, 악업이 소멸 되고 나면 과거의 언젠가 지었던 선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선업의 힘’으로 선처에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청정도론에서는 “과거의 대상을 가진 악처의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와 현재의 대상을 가진 선처의 재생연결”로 표현한 것이다. 반대로 선처에서 악처로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선처에서 악처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마는 현생에서도 고통받고 내생에서도 고통받을 것이라 하였다. 그런 내생은 나쁜 곳, 불행한 곳, 처참한 곳, 비참한 곳이다. 인간으로 살다 이와 같은 악처로 어떻게 떨어지는 것일까.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선처에서 악처로]

 

예를 들면, 욕계 선처 가운데서 악업을 지은 자가 임종의 자리에 누울 때 “[과거에 자기가 지은 악업이] 그 때 덮친다.(M.ii.164)”라고 시작하는 말씀 때문에 그가 쌓았던 그대로 악업 혹은 악업의 표상이 마노의 문을 통하여 나타난다.

 

[악업과 악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속행의 과정이 일어나고 그것은 등록의 마음으로 끝이 난다.

 

그 속행의 과정의 다음에 잠재의식의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죽음의 마음이 일어난다. 죽음의 마음이 그치면 나타난 업이나 업의 표상을 대상으로 악처에 포함된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

 

그 재생 연결식은 끊어지지 않은 번뇌의 힘에 떠밀린 것이다. 이것이 과거의 대상을 가진 죽음의 마음 다음에 과거의 대상을 가진 재생연결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136)

 

 

인간으로 살다가 임종을 맞을 때 과거에 지은 악업이 덥친다고 하였다. 이는 무거운 업이 떠 오르는 것이다.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살인 과정에서의 끔찍하였던 장면은 매우 강렬하였을 것이다. 평생가도 잊혀지지 않으 사건이기 때문에 수시로 마음속에 떠오르는데 임종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살인업이라는 것이 그만치 무거운 업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끔찍한 장면이 떠오르고 그 표상을 대상으로 다음생에 태어날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 경우 나쁜 곳, 불행한 곳, 처참한 곳, 비참한 곳으로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와 같은 악처가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라도

 

온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 났을 때 재발방지를 위하여 사형이라는 제도가 있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는 후진국을 제외하고 사형집행을 자제한다고 한다. 이는 사형수도 인권이 있기 때문이다.

 

사형을 시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다는 보장이 있다면 사형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형제도가 있건 없건 간에 엽기적인 사건은 끊임 없이 일어난다. 이는 법과 제도만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말이다. 한 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고 내생은 없다고 믿는 도덕부정론자, 인과부정론자, 단멸론자 들에게 있어서 현세의 고통만 감해 주는 결과로 될 수도 있다.

 

만일 유일신교 처럼 한번 지옥이면 영원한 지옥이 있어서 사형수를 그곳에 쳐박아 놓고 영원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으나 불교적 지옥관에 따르면 아무리 중죄를 저지른 자는 업이 남아 있는 한 빠져 나오게 되어 있다. 아무리 극악 무도한 살인마 일지라도 삶의 과정에서 선업을 지은 적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앙굴리말라를 제도 하였듯이 사형수일지라도 번뇌가 다한 아라한 되었다면 그 업이 더 크기 때문에 악업을 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극악무도한 살인자일지라도 사형을 시켜 영원히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은 악업을 상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편이 더 인도적이라는 것이다.

 

 

 

2012-04-1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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