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자신들의 권위는 커지고,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3. 10:54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자신들의 권위는 커지고,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들을 때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말’을 할 때이다. 이른 아침 BBS불교방송에서 불교강좌시간에 법문을 하고 있는 송담선사도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선사는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때 천상에서 또 부처님께 여쭙기를 ‘이 많은 중생가운데에는 정법의 인연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부처님께서 ‘방편’따라 법을 설하시면 차츰 근기가 수승해지면 반드시 부처님의 최고의 진리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중생근기따라서 방편을 설하셨습니다.

 

차츰 차츰 근기 따라서 소승법으로부터 중승법, 대승법, 그래가지고 최상승법에 이르기까지 법을 차츰 차츰 근기따라 설해가지고 마침내는 위 없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 주십시요’ 이렇게 간청을 해가지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는 최초에 깨달으신 뒤 그 침묵한 가운데에 21일간에 걸쳐서 화엄경을 설하셨습니다.

 

(송담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송담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4-23일자)

 

 

부처님이 무상정득각을 이루고 난 후 ‘범천 사함빠띠(brahmā sahampati)’가 청원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선사는 천상의 존재가 부처님에게 ‘부처님께서도 방편문을 열어 주십시요’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세존이시여,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아야짜나경(청원경, S6.1.1)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desetu bhante bhagavā dhamma

desetu sugato dhamma.

Santi sattā apparajakkhajātikā.

Assavaatā dhammassa parihāyanti.

Bhavissanti dhammassa aññātāro

 

[싸함빠띠]

“세존이시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께서는 진리를 가르쳐주십시오.

태어날 때부터 거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뭇삶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못하면 쇠퇴합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Venerable sir,

Blessed one, well gone one,

preach the Teaching,

there are beings with few defilements,

they would deteriorate not hearing the Teaching.

There will be those who understand the Teaching.”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아야짜나경(청원경-S6.1.1).docx 아야짜나경(청원경-S6.1.1).pdf 

 

 

 

범천 사함빠띠는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그 진리는 빠알리어로 담마(dhamma)’로 표현 되어 있다. 담마를 한자어로 ()’이라 한다.

 

사함빠띠는 부처님에게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지 방편을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Paisotagāmi-빠띠소따가밍)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 아야짜나경(청원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icchena me adhigata1 halandāni pakāsitu,
R
āgadosaparetehi nāya dhammo susambudho.
Pa
isotagāmi nipua gambhīra duddasa au,
R
āgarattā na dakkhinti4 tamokkhandhena āvutāti.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고 오묘하고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I attained this with difficulty, why should I preach
By those overcome by greed and hate, this is not easy to realize.
It's clever, deep, difficult to see, subtle and goes against the stream.
The passionate do not see it, covered by a mass of darkness.”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참으로 어렵게 진리를 성취하였다고 하였다. 그런 진리를 누가 알아 들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한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거꾸로 (Paisotagāmi-빠띠소따가밍, against the stream)가는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놓아 버렸을 때 성취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등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진리는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역류도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하고 의문한 것이다. 그러자 사함빠띠는 생사에 지배받는 슬픔에 빠진 뭇삶을 보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비록 탐진치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중에 부처님의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뭇삶에 대한 자비심(kāruñña-까룬냐)’ 때문에

 

사함빠띠가 간청하자 부처님은 진리를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 이 부분에 대하여 초기경에서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viditvā sattesu ca kāruññata , out of compassion for the world)”라고 표현하였다. 부처님이 법을 펴기로 결심한 것은 자비심(kāruñña-까룬냐, compassion)’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이해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 부분에 대하여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삶을 살아가는 사람중에는 여러 종류가 있음을 말한다. 오염, 감각, 모습, 학습, 내세와 죄악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 이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부처님은 마침내 진리를 설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 하였다.

 

 

Apārutā tesa1 amatassa

dvārā ye sotavante pamuñcantu saddha,

Vihisasaññī pagua na bhāsi dhamma

paīta manujesu brahmeti.

 

[세존]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The door to deathlessness is open.
May those who have ears be released out of faith!
My perception is not hurting and will not speak straightforward words
Brahma,

the exalted Teaching is available to humans.”

 

(아야짜나경-Āyācanasutta-청원경, 상윳따니까야 S6.1.1, 전재성박사역)

 

 

부처님은 불사의 문이 열렸음을 선언하였다. 그것은 듣는 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버렸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제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해 온 것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의 브라만과 아뜨만으로 대표되는 영속론과 육사외도의 단멸론 등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갔을 때 열반은 성취 될 것이라 하였다.

 

침묵속에서 설하셨다고?

 

이렇게 초기경에서 부처님이 명백히 진리를 설하심을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사는 부처님이 설한 것은 방편문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은 언어나 문자로 표현 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오로지 뜻과 마음으로 진리는 전달될 뿐이라 한다. 그래서 이어지는 법문에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화엄경은 입을 열어서 설하신 경전이 아니고 최초에 부처님이 성불하시자 마자 침묵한 가운데 설해진 경전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를 들으라고 설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해진 경전이 아니고 오직 ‘자내증’의 경, 당신이 깨달은 바를 그대로 침묵속에서 설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서 아함경12년과 방등경8년과 21년간에 걸쳐서 반야경을 설하시고, 마지막 8년간은 법화경을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49년동안을 8만4천 법문 12부 경전을 설하셔가지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습니다만은,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하신 법은 근기따라 그렇게 많은 법을 설하셨의되 실지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적멸하신채 침묵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 일부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따라서 조금 열어 주신 것 뿐입니다.

 

(송담스님, BBS불교방송 불교강좌, 송담스님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4-23일자)

 

 

선사가 말하기를 부처님은 오직 침묵속에서 법을 설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21일동안 설하신 화엄경이라 한다. 하지만 이를 이해 하는 중생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편설로서 아함경, 방등경 등 순으로 설하였다고 한다. 이런 구분방식은 중국 천태지의대사(538-597, 수나라)의 교상판석론에 따른 것이다.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는 것처럼

 

물론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에 따른 대기설법을 설하였다. 이는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기질이나 성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일반적으로 전생의 업이 다양하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도 (1) 탐하는 기질, (2) 성내는 기질, (3) 어리석은 기질, (4) 믿는 기질, (5) 지적인 기질, (6) 사색하는 기질의 여섯 가지 기질로 분류하고 있다. 이렇게 중생들의 다양한 근기에 맞게 설하진 부처님의 법문을 방편설(方便說), 또는 대기설법(大機說法 pariyāya-desanā)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의 담마가 대기설법 또는 방편설이라고 하여 선사가 “침묵속에서 설하신 그 법의 극 일부에 지나지 못한 것을 근기따라서 장소와 때와 근기따라서 조금 열어 주신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45년동안 있는 그대로 설법하였고, 그런 설법은 모두 빠알리 니까야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는 부처님의 비밀스런 가르침이 별도로 있는 것처럼 말한다.

 

 

법은 세존에 의해서

 

부처님이 말씀으로 전한 가르침 이외 또 다른 가르침이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제자들 몰래 비밀리에 또 다른 가르침을 펼치셨을까. 부처님의 담마에 대하여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svākkhāto bhagavatā dhammo       스왁카또 바가와따 담모

sandiṭṭhiko                       산딧티꼬

akāliko                          아칼리꼬

ehipassiko                       에히빳시꼬

opaneyyiko                       오빠네이꼬

paccatta veditabbo viññūhī     빳짜땅 웨디땁보

 

법은 세존에 의해서

1)잘 설해졌고,

2)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3)시간이 걸리지 않고,

4)와서 보라는 것이고,

5)향상으로 인도하고,

6)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The Dhamma is well proclaimed by the Blessed one,

visible here and now,

not delayed (timeless),

inviting of inspection,

onward-leading,

and directly experienceable by the wise”

 

 

(청정도론, 7장 여섯 가지 계속해서 생각함(隨念),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 68)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법수념에 대한 것이다. 이 게송의 근거는 맛지마니까야 왓투빠마경(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 Vatthūpamasutta, M9)’에 실려 있다.

 

왓투빠마경(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M9).docx  왓투빠마경(옷감에 대한 비유의 경-M9).pdf

 

여기서 잘 설해졌다는 것은 교학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다섯가지는 출세간법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담마에 비밀이 있다거나 비밀스런 가르침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은 항상 참나

 

그렇다면 선사는 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단지 방편문에 불과하고 소승법이라고 폄하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최상승법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최상승법을 설명하기 위하여 소승법, 중승법, 대승법등으로 분별한 것이다.

 

그런 최상승법은 어떤 것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선불교의 참나를 말한다. 참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한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다름아닌 참나라고 말한다. 법문을 듣고 있다보면 결론은 항상 참나로 귀결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승의 빈주먹

 

부처님의 가르침에 비밀스런 가르침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담마에 대하여 와서 보라(ehi passika, 에히빳시까)”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부처님의 담마는 초대할만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무슨 이유로 초대할만할까. 그것은 청정하기 때문이라 한다. 만일 부처님의 담마가 청정하지 않다면 와서 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무슨 큰 비밀이나 있는 것처럼 말한다면 이는 스승의 주먹을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스승이 주먹을 쥐고 그 안에 마치 비밀스런 그 무엇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비밀스런 그 무엇은 제자들을 붓들어 매기 위한 황금일 수도 있다. 또는 비밀스런 가르침일 수 있다.

 

하지만 수승은 제자들에게 결코 자신의 주먹을 펴 보이지 않는다. 와서 볼만한 것이라면 자신있게 주먹을 펴 보일 수 있지만, 주먹을 끝까지 펴 보이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그 주먹 안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 불리우는 브라만, 모든 존재에 영혼이 있다는 아뜨만 등 실체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스승의 빈주먹과도 같은 것이다. 실제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먹을 꽉 움켜 쥐고 있는 것이다. 가르쳐 줄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의 빈주먹일 뿐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와서 보라! (ehipassika)”고 하였다. 아무런 비밀도 없고 아무런 비밀스런 가르침도 없기 때문이다.

 

둘째, 끝까지 주먹을 쥐고 있는 그 손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 안에 똥이 들었는지 오줌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방편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고 있는 사주, 관상, 천도의식 등 온갖 비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비법은 냄새가 나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기 때문에 주먹을 펼 수 없다. 그 주먹 안에 갖은 오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청정하지 않아 주먹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먹을 펴기는커녕 풀이나 나뭇잎으로 가리기에 급급한 것이다.

 

부처님의 담마는 스승의 빈주먹처럼 실체가 없는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라 출세간법으로서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유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의 담마는 와서 보라고 초대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깨끗하고 청정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주먹을 쥐지 않는다.

 

그러나 주먹을 꽉 움켜 쥐고서 결코 주먹을 펴지 않는 스승의 주먹은 빈주먹이나 똥이나 오줌으로 가득찬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와서 보라고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자신들의 권위는 커지고

 

선사는 참나를 위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방편문으로 폄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소승법으로 규정하였다. 더구나 경의 내용을 왜곡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있다. 법문의 경에 대한 설명을 보면 거의 창작수준에 가깝다. 경의 근거도 밝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을 왜곡하고 경을 창작하는 듯한 법문을 듣다 보면 불편하기 그지 없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모를까 경에 대하여 조금 아는 것이 또 이렇게 ‘구업(口業)’을 짓게 만든다. 세존사이트를 운영하는 성법스님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신도들이 무지 할수록 자신들의 권위는 커지고,

또한 먹고 사는 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성법스님, 세존사이트 게시판, http://www.sejon.or.kr/)

 

 

 

 

 

 

 

priest's robe

 

 

 

성법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신도들은 종교의 본질을 모르고 자신의 종교를 믿는다고 한다. 이런 ‘무개념’의 신앙의 피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 올 것이라 한다.

 

하지만 종교지배계층은 신도들의 이런 신앙행태에 대하여 결코 걱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조장하기 까지 한다. 그래서 신도들이 무지하면 무지할수록 활동영역이 넓어지는 것으로 본다.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이런 현상에 대하여 성법스님은 지난 1월부터 지금까지 조계종의 기관지라 볼 수 있는 불교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고 있다고 한다. 

 

 

제목: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1.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그토록 비난하셨던 바라문교 보다 한국불교를 더 질책하실 것입니다. 이제, 한국불교는 업과 윤회의 해석에서 자이나교와의 차이점을 붓다께 분명히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이 신격화 된 것에 놀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마지막 당부를 재차 확인시켜주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신() 아니라,

바른 법과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했다’.


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의 몇 대 제자라 자칭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 제자라면 내 가르침을 우선해야 하거늘

어찌하여 조사(祖師) 선사(禪師) 말을 의지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주지 자리가 말썽 덩어리인 본사나 큰 절에 거처를 마련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붓다께서는 문중도 없고, 계파에 속하지도 않았고, 절에 연고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5.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신도에게 보시를 강요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내가 머물던 기수급고독원은 이름 그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를 베풀던 곳 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6.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신도보다 호의호식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재가자가 너를 공경하는 것에 오만하지 말라.

너는 나에 대한 공경을 대신 받고 있는 것 뿐이니라

 

라고 말입니다.


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천도재와 영구위패로 신도들을 현혹하는 출가자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 침묵했거늘

너희는 어찌 영혼의 구제까지 확언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8.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재가 신도 위에 군림하는 출가자들에게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나는 거의 천 년 동안 이어온 4성제 계급제도를 철폐했거늘

너희는 어찌 바라문처럼 행동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9.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이 붓다에 버금가는 깨달음을 성취한 듯 언행하는 출가자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미 깨달은 사문이 아니라

깨달음을 향해 가는 사문일 뿐이다

 

라고 말입니다.


10.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해 전법하는 한국의 승가에 호통을 치실 것입니다.

 

나는 너희 자신이 아니라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바른 법을 전하라고 했다

 

라고 말입니다.


11.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승단과 절의 부() 대한 집착에 한숨을 쉬실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반역자로 단정하는 제바닷다는

사원에서 음식물을 저장하는 일조차 사치라고 여겼다

 

라고 호통하실 것입니다.


12.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절의 경제적 해결이 우선한다며 신도를 기만하는 출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들의 행위가 방편으로 용납된다면,

재가자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한 비도덕적 행위도 비난할 수 없느니라

 

 

13.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방편이란 명목으로 미신을 조장하고 중생을 불안하게 하는 출가자에게 일갈하실 것입니다.

 

그 방편이라는 것이 실제로 중생을 안심시키느냐?

아니면 너희들에게 이익만 생기느냐?

 

라고 말입니다.


1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전생의 업이 현세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라고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바라문들에 의해 사성제 계급제도에

악용되는 전생의 업을 오히려 부정하였다

 

라고 말입니다.


15.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기도는 모든 것을 이루어 준다’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는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 아니라,

바른 소원인가를 확인하게 해주고,

결과에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16.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12연기는 붓다께서 설하신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단지 연기의 관계성을 말했을 뿐이지,

연기를 12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지 않았다

 

라고 말입니다.


1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영험설화나 신비주의를 말하는 이들에게

 

그렇다면 내가 깨달음을 성취한 일도 영험하고 신비스러운 일이냐?

내가 세상에 출현해 고행 끝에 깨닫고,

중생을 교화한 일은 엄연한 사실이니라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성법스님, 세존게시판, http://www.sejon.or.kr/)

 

 

 

 

2012-04-2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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