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정치가 정기적으로 심판 받듯이 종교도, 승복의 권위와 추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4. 12:08

 

정치가 정기적으로 심판 받듯이 종교도, 승복의 권위와 추문

 

 

 

 

금빛승복

 

한국불교 최고지도자대회라는 프로를 보았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프로는 우리나라 메이져 종단을 제외한 군소종단의 종정스님이나 총무원장 스님 등이 출연하여 인사말과 축사를 하는 프로이었다. 이 프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스님들의 복장이었다. 종단이 다양해서일까 각 종단을 대표하는 스님들의 승복 또한 매우 다양하였다.

 

어느 스님의 경우 금빛승복만 입고 있는가 하면, 또 어느 스님은 금빛승복에 선홍색 붉은가사를 입고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어느 스님은 금빛 승복에 위가 길쭉한 금빛 모자를 쓰고 있었다. 군소종단일수록 승복이 화려하기 그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권위를 상징하는 옷의 특징

 

우리나라 스님들의 승복은 한복과 유사한 전통복식이다. 특히 장삼이라 불리우는 승복을 보면 두루마기 형식으로서 무척 길다. 더구나 소매의 폭이 무척 넓어  거의 장삼길이에 다다른다. 그 위에 입는 괴색 가사는 단지 걸치고 있는 정도로 보인다.

 

이렇게 스님들의 승복은 위아래가 길고 소매폭이 넒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복식은 스님들에게만 한정된 것 같지 않다. 천주교사제나 수녀들의 복장에서도 공통적인 특징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목사들도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을 종종 보는데, 목사들 가운 역시 위아래가 길고 소매 폭이 무척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런 복식은 종교의 성직자들에게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졸업식때 총장 등 교수들이 입는 가운에서도 볼 수 있고, 재판소에서 판사들이나 검사들 복장역시 가운 형식으로 되어 있다. 영화나 TV의 드라마에서 왕이나 왕비, 대신들이 입는 복장 역시 치렁치렁한 가운에다 긴소매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런 면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한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복장이 권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특히 긴가운과 폭이 넓은 소매가 그렇다. 복장으로 권위를 나타내는데 있어서 종교인과 세속적 권력과의 구분이 없는 것이다.

 

스님들이 입는 가사와 장삼 역시 권위의 상징이다. 소매폭이 넓은 긴장삼과 가사는 오로지 스님들만이 입을 수 있는 것으로서 복장 그 자체가 권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승복의 권위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조계종 고위급들의 추문

 

승복은 성과 속을 가르고 출가와 재가를 가른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은 승복을 입은 스님들에 대하여 삼보중의 하나로서 귀의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승복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되는 것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불자들은 못 본척하거나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스님들의 허물을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커다란 실례로 보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일탈하여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참회하여 다시 제자리로 돌아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로 돌아 가지 않고 계속 일탈 행위를 지속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종단의 소임을 맡고 있는 중진스님들이 계속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스님들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불교자체의 위기가 될 수 있다. 최근 법응스님은 불교닷컴에 다음과 같은 기고문을 올렸다.

 

 

지적하고자 하는 바는 조계종의 고위급들이 추문에 회자되고 있다. 그런데도 ‘아니다’라는 부정은 고사하고 해명조차도 없으니 산지사방에 의혹만 증폭되고 종단위상은 말이 아니다.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소나기를 피해간다고 능사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면 ‘아니다’라고 명확히 해야 의혹이 해소되고 종단의 건강성이 유지된다. 그래야만 대중은 흔들림 없이 정진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회자된 소문이 사실이라 한다면 조계종은 간판을 내려야 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종단 고위급들에 대한 추문(소문)자체만으로도 한국불교와 조계종에 대한 사형선고와 다름 아님을 깊게 깨달아야 한다.

절대 아니기를 바라나 사실로서 언젠가 불거진다면 조계종은 종정예하와 모든 원로대종사 그리고 전 교구본사주지는 물론 전 출가자가 나서서 대 참회를 한다 해도 실추된 권위와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을 것이다

 

(법응스님, 조계종을 망칠 소지가 있는 교역직은 나가야 한다, 불교닷컴 2012-04-23)

 

 

스님은 조계종의 고위급 스님들에 대한 추문을 거론하고 있다. 그 추문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성’에 대한 것이다. 독신승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조계종단에서 고위층이 성문제 연루 되어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은처’문제이다. 숨겨 놓은 처에 대한 것이다. 여신도와 관련된 탈선으로 인하여 정식결혼은 아닌 형태로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를 유혹하는 여자들

 

이런 은처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순례법법회 당시 노보살님에게 물어 보았다. 스님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스님들의 경우 여신도와 그렇고 그런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런 경우 신도들은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한다고 한다.

 

그런데 더 나쁜 것은 출가자를 유혹하는 여자들이라 한다. 신도중에는 스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출가자에게 있어서 항상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Anagāriyupetassa bhikkhacariya jigisato1,
Muni pabr
ūhi me puṭṭho moneyya uttama pada.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난다.

아낙네는 해탈 자를 유혹한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말라.

 

 The mind reaches highs and lows like flames in the forest

Women seduce sages, do not be seduced by them.

 

(위자야경-승리의 경, 숫따니빠따 Sn3.11, 전재성님역)

 

 

아낙네들은 숲속에 사는 해탈한 자(성자)를 유혹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낙네는 신도들이 아니라 숲속에 놀러오거나 뗄감을 구하러 온 여인들이라고 주석이 되어 있다.

 

이처럼 해탈한 성자들도 유혹하는데 혈기왕성한 젊은 출가자들 역시 유혹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로 불량신도가 유혹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노보살님 이야기에 따르면 스님이 손을 잡으려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라 한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거론한다면

 

이렇게 종단의 고위급이 추문에 휩싸여 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비록 불교내부에서 일어난 문제일지라도 언제든지 사회문제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 은처문제에 대하여 거론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하고 남을 것이다. 그래서 법응스님은 글에서 ‘조계종 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조계종을 풍비박산날 정도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은처문제가 매스콤을 타게 되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이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최소 일백만 불자는 감소하고 불교학자, 불교문학인, 불자공직자, 불자연예인은 물론 모든 불자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불과 몇 해전 종단사의 교훈에서 경험한 바가 있다.

 

(법응스님, 조계종을 망칠 소지가 있는 교역직은 나가야 한다, 불교닷컴 2012-04-23)

 

 

은처문제등 종단 고위층의 추문이 연일 방송과 신문에 보도 되면 약 백만명 정도의 신도가 이탈할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리고 불자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 될 것이라 한다.

 

회복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

 

현재 한국불교의 신자수는 정부통계에 따르면 약 천만명 정도로 보고 있다. 하지만 명목신자를 제외하면 그 보다 훨씬 못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모 불교학자의 발표에 따르면 조계종단의 신자는 약 사오백만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이는 500만명이 넘는 단일종단의 천주교에 못 미치는 숫자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백만명이 빠져 나간다고 생각하면 조계종단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다. 더구나 정서적 불자, 잠재적 불자 들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수백만명에 달하여 회복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불자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라 한다. 다종교사회인 우리나라에서 가족들간에 종교가 다르고, 직장이나 단체에서 종교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인데 종단 최고위층의 추문이 터졌을 때 부끄러워 자신이 불자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진짜 이런 현상이 발생한다면 이는 1998년 종단사태보다 더 심각한 것이 될 수 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조계종단

 

1998년에 일어난 종단사태는 종권다툼에 대한 것이었다. 총무원청사만 점거하면 성공한 쿠데타로 여기던 시절에 발생한 이권다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추문관련 이야기는 종단의 도덕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 파괴력이 매우 크다. 

 

이런 종단의 모습에 대하여 세존사이트의 성법스님은 불교닷컴 기사의 댓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승가의 부패와 자정이 이루어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종단의 원로회의 스님들이니 큰 절들의 어른스님들이, 종단의 구성원의 자질에 대한 경고나 명백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벗어난 행위를 보시고도 침묵을 지키십니다.
(성법스님, 불교닷컴 댓글에서)

 

 

성법스님은 현 조계종단의 자정능력이 없음을 질타하고 있다. 스스로 정화능력이 없다는 지적은 수경스님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종단 내의 부정과 비리는 이미 자정 능력을 넘어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이 아닌가. 일부 부도덕한 스님들뿐만이 아니라 종단 내 지도급 스님들의 속인을 능가하는 범죄적 작태들이 권력 암투나 치부의 전형으로 하나 둘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종단이 치유불능의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굳이 승속의 갖가지 풍문들을 믿고 싶지는 않지만, 정치권보다 더 치졸한 권력다툼과 폭력과 해외원정 골프, 도박, 은처, 매관매직, 고급 룸살롱 출입뿐만이 아니라 종회의원 선거에서의 6억 원을 쓰면 당선되고 4억 원을 쓰면 떨어진다는 ‘6당4락’ 등이 진정 악성 루머일 뿐인가.

 

(수경스님, 佛法위한 도량인가, 不法의 소도인가, 법보신문 2006-10-20)

 

佛法위한 도량인가 不法의 소도인가-수경스.docx  佛法위한 도량인가 不法의 소도인가-수경스.pdf

 

 

 

2006년 당시 마곡사 국고보조금 횡령사건과 관련하여 작성한 기고문에서 스님은 조계종단이 치유불능의 중병을 앓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는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10.27법난과 같은 상황을 자초하고 말것이라 경고 하고 있다.

 

외부의 개입을 자초 하는 결과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스님들의 한결 같은 주장은 자정능력이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못을 지적하여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듯 스스로의 힘으로 개혁이 되지 않음을 말한다.

 

국민들과 재가불자의 희망이 되어야할 종단이 오히려 부정과 부패, 비리집단으로 낙인 찍혀  절망의 대상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외부의 개입을 자초 하는 결과로 될 것이다. 법응스님의 글이 마치 그런 전조처럼 보인다.

 

법응스님의 글에 따르면 현재 한국불교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 종단의 최고위급에서부터 중진스님에 이르기까지 추문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 그것이다.

 

스스로 물러나야

 

방송과 신문에서 언제 터뜨리느냐의 택일 문제만 남은 것 같다. “~”하고 불면 한방에 가버릴 것 같처럼 보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신으로 인해 조계종을 망칠 소재가 있는 교역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양심이며, 그동안 먹은 탁자 밥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예다.

 

(법응스님, 조계종을 망칠 소지가 있는 교역직은 나가야 한다, 불교닷컴 2012-04-23)

 

 

한국불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종단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문제있는 스님들은 자발적으로 나가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나가지 않고 버틴다면 그것은 승복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선종의 존립근거가 되는 경?

 

승복은 몸을 가리는 의복이기도 하지만 신도들에게 있어서 권위의 상징이다. 그런데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럴 경우 부처님은 무어라고 말씀 하셨을까. 가사를 키워드로 하여 초기경전을 검색하여 보았다.

 

초기경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형구는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로 들어갔다.”라는 문구이다. 탁발하러 갈 때 반드시 가사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탁발승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초기경에 승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벗이여, 세존께서는 깔아놓은 자리에 앉으셨다. 벗이여, 앉으셔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내게 말씀하셨다. '깟싸빠여, 이 헝겁조각을 이어 만든 하의는 꽤 부드럽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헝겁조각을 이어 만든 하의를 받아주십시오'

 

'깟싸빠여, 그대는 내가 입고 있는 삼베로 된 분소의를 받아라'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입고 계신 삼베로 된 분소의를 삼가 받겠습니다.'

 

벗이여, 그래서 나는 부드러운 헝겁조각을 이어 만든 하의를 세존께 드리고 나 또한 세존께서 입고 계셨던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찌와라경-Cīvarasutta-가사경, 상윳따니까야 S15. 1. 11, 전재성님역)

 

찌와라경(가사경-S15.1.11).docx

찌와라경(가사경-S15.1.11).pdf

 

 

두타제일이라 불리우는 깟사빠 존자와 아난존자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고 난 후라 한다. 깟사빠상윳따에 실려 있는 이 대화가 중요한 이유는 깟사빠 존자가 부처님의 분소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선종에 따르면 부처님의 법이 마음으로 깟사빠존자로 전달 된 것으로 본다. 그 때 상징물이 부처님의 옷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찌와라경에 묘사된 부분이 선종으로 보았을 때 선종의 존립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삼의(三衣)란 무엇인가

 

경에서 부처님이 깟사빠존자에게 준 것은 누더기와 같은 분소의이다. 분소의는 공동묘지나 쓰레기더미 등에 버려진 옷조각을 모아 꿰메어 만든 옷을 말한다. 부처님이 입었던 옷이 바로 그런 분소의이다.

 

이런 분소의는 하나의 수행의 상징이다. 그래서 13가지 두타행 중에 분소의를 입는 것이 가장 첫번째 항목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분소의와 함께 출가자의 의상은 삼의(三衣)’로 대표된다. 이는 현재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 그 삼의는 어떤 것일까.

 

 

첫째, 안따라와사까(antaravāsaka)라 한다. 이를 아랫가사라 하는데, 배꼽으로부터 15센치 정도 위까지 가리는 높이와 본인의 양손을 펼쳐 닿을 정도의 가로 폭이 있는 직사각형의 하반신을 감싸는 하의라 한다.

 

 

 

 

 

안따라와사까(antaravāsaka, 아랫가사)

 

 

 

 

둘째, 웃따라상가(uttarāsaga)라 한다. 이를 윗가사라 하는데, 서서 손을 높이 올려 잡을 정도의 높이와 양손을 벌린 길이의 1.5배의 가로 폭이 있는 직사각형의 몸에 감는 상의라 한다.

 

 

 

 

 

웃따라상가(uttarāsaga, 윗가사)

 

 

 

셋째, 상가띠(saghāi)라 한다. 이를 중복가사라 하는데, 윗가사와 같은 길이와 폭으로 옷감이 2매 겹침이 되어 있는 큰 옷(大衣)를 말한다.

 

 

 

 

 

 

 

상가띠(saghāi, 중복가사)

 

 

 

이런 삼의가사에 그 어떤 승복의 권위를 찾아 볼 수 없다. 부처님당시의 모습과 최대한 가까이 보이려는 것 같다. 이는 우리나라 스님들의 기다란 가운형식의 장삼과 폭이 넓은 소매와 비교된다.

 

가사를 목에 닿도록 입고 있었지만

 

가사만 걸쳤다고 해서 권위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법구경에 가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인연담이 있다.

 

 

게송 307 악행 때문에 고통받는 뻬따 이야기

 

부처님께서 웰루와나 수도원에 계시던 어느 때, 마하목갈라나 테라가 인간의 형상을 한 뻬따 몇을 본 일과 관련하여 게송 307번을 설법하시었다.

 

어느 때 마하목갈라나 테라는 락카나 테라와 함께 깃자꾸따(영축산) 언덕을 내려오다가 뻬따(아귀) 몇을 보았다. 두 테라는 그 길로 부처님이 계시는 수도원에 도착하였는데, 마하목갈라나 테라는 부처님 앞에서 락카나 테라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해 주었다. , 자기는 깃자꾸따 언덕을 내려오면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해골 귀신인 뻬따들을 보았으며, 그와 함께 빅쿠 몸을 한 뻬따도 보았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자 목갈라나 테라의 말을 들으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빅쿠들이여, 그 빅쿠 뻬따들의 몸이 불에 타고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저지른 악행의 과보이니라. 그들은 과거 까싸빠 부처님 당시에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고 신자들의 시주를 받아 편안히 먹고 입으며 여러 가지 악행만 저질렀기 때문에 이제는 뻬따의 몸을 받아 그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노란 까사를 목에 닿도록 입고 있었지만

많은 남자들이 지옥에 태어났다.

나쁜 기질을 가져

자기의 행동과 언어를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법구경, Dhp307, 거해스님역)

 

 

인연담에서 뻬따는 아귀를 말한다. 과거 까사빠 부처님 당시 어느 비구들이 수행은 하지 않고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호의호식만 하며 여러가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그에 대한 과보로서 아귀(뻬타)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 비구들은 노란 가사를 목에 닿도록 입고 있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목에 닿도록 입는 다는 것은 가사를 목에 휘감아 목까지 감싸기 때문이다.

 

아무런 공덕이 없는 경우

 

가사와 관련하여 법구경에 또 다른 게송이 있다.

 

 

Anikkasāvo kāsāva        아닉까사오 까사왕

yo vattha paridahissati  요 왓탕 빠리다히싸띠

apeto damasaccena          아뻬또 다마삿쩨나

na so kāsāvamarahati.      나 소 까사와마라하띠.

 

번뇌에 싸여 청정치 못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면

비록 노란색 가사를 입었다 해도

아무 공덕도 없다.

 

 

Yo ca vantakasāv'assa      요 짜 완따까사와싸

silesu susamāhito          실레수 수사마히또

upeto damasaccena          우뻬또 다마삿쩨나

sa ve kāsāvamarahati.      사 웨 까사와마라하띠.

 

번뇌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엄정하게 계행을 지키며

자기의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면

노란색 까사는 실로 고귀한 것.

 

(법구경, Dhp9-10, 거해스님역)

 

 

청정하지 못한 자가 가사만 걸쳤다고 해서 그런 자에게 공양을 해도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 계율을 지키며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출가자에게 보시한다면 그 공덕은 매우 클 것이라는 말이다.

 

정치가 정기적으로 심판 받듯이 종교도

 

현재 한국불교에서 승복을 입고 가사만 걸쳤지 전혀 스님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는 자들이 있다. 비록 그가 가사를 걸치고 승복의 권위를 내세우고 있지만 은처 등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다면 심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방송과 매스컴에서 떠들기전에 불자들로부터 먼저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일까 성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장 저속하다는 정치인보다 종교인이 낫다는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다. 정치가 정기적으로 심판 받듯이 종교도 종교인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심판하는 주체는 역시 종교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수요자인 신도이어야 함은 물론입니다.”

 

(성법스님, “저속한 정치인보다 종교인이 낫다 못해" 불교닷컴 2012-04-19)

 

 

성법스님은 정치인을 투표로 심판하듯이 종교인도 심판하는 제도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 주체는 신도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승복의 권위만 내세우고 개판치는 스님들을 어떻게 심판하여야 할까. 그것은 재가불자들이 주체가 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문제를 일으키고 개판치는 스님들에게 공양을 하지 않고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도 분소의를 입으셨거늘

 

하지만 문제를 일으키는 스님들은 이미 막대한 재산의 소유자들이다. 재가자의 보시나 공양이 없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그냥 놓아 둘 수 없다. 교단에서 스스로 자정하지 않으면 10.27법난처럼 반드시 외부의 힘이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과 신문에서 종단 최고위층과 중진스님들의 은처 등 추문에 대하여 떠들어 댄다면 법응스님의 글처럼 한국불교는 조계종단이라는 간판을 내려야 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할지 모른다.

 

마치 칼을 빼어 들고 발표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를 보았을 때 불자들이 해야 할일은 무엇일까. 하루 빨리 이들 문제되는 스님들이 떠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한국불교를 살리는 길이다.

 

승복의 권위에만 의존하여 불교를 파멸로 몰아 넣는 스님들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되씹어 할 일이다.

 

 

마라의 군대를 항복받기 위해 분소의를 입은 수행자는

전쟁터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왕족처럼 빛난다.

 

세상의 스승께서도 까시의 비단 옷 등을 버리고

분소의를 입으셨거늘 누가 그것을 입지 못할까?

 

그러므로 비구는 스스로 서원한 말을 기억하여

수행자에게 적합한 분소의 입는 것에 즐거워할지어다.

 

(청정도론, 2장 두타행, 22)

 

 

2012-04-2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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