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닥치고 따르라? 송담스님의 권위적 법문

담마다사 이병욱 2012. 4. 26. 11:31

 

 

닥치고 따르라? 송담스님의 권위적 법문

 

 

선사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전국민을 대상으로 매일 이른 아침 방송하고 있는 불교방송의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의 법문을 들어 보면 그 특징이 확연하게 드러나 보인다.

 

이 몸띵이를 관찰해 보면..”

 

송담스님은 라디오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인간이 부모로부터 이 세상에 태어 날 때 몸띵이를 받아 났습니다. .. 이 몸띵이는 지수화풍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몸띵이는 인연이 도래하면 그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으나 고장이 나면 순식간에 썩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믿을 것 없는 허망한 이 몸띵이인데, 아홉군데에서 더러운 것이 끊임없이 흘러 나오고 팔만 사천 땀구녁에서는 몇일간만 목욕을 안하면 더러워서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 아무리 좋은 화장품으로 아름답게 발라 놓았어도 그 껍데기 속을 들여다보면 참 다시는 정내미가 떨어지는 것 입니다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부정관이라 하는 것인데, 참 그 이 몸띵이를 관찰해 보면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6일자)

 

 

 

 

 

 

 

 

선사는 우리 몸에 대하여 몸띵이라고 하였다. 몸을 몸이라 말하지 않고 몸띵이라는 비속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 선사들이 그렇듯이 몸을 몸뚱이또는 몸뚱아리’, ‘몸뗑이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몸이 더러운 것이라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그 몸안에는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있는 허망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부처님이 설한 부정관

 

이와 같은 선사의 몸에 대한 부정적 표현은 부처님의 부정관에 따른다.  부처님은 이 설한 부정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 털, 손톱, 피부, , 근육, ,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 창자, 장간 막, 위장, 배설물,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관찰한다.

 

예를 들어, 수행승들이여, 양쪽 입구로 육도, 적미, 강낭콩, 완두콩, 기장, 백미와 같은 여러 종류의 곡식으로 가득 채운 포대자루가 있는데 그것을 열어서 사람이 눈으로 이것은 육도, 이것은 적미, 이것은 강낭콩, 이것은 완두콩, 이것은 기장, 이것은 백미라고 관찰하듯이, 수행승은 이 몸을 이와 같이 ‘이 몸속에는 머리카락, 몸 털, 손톱, 이빨, 피부, , 근육, ,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 창자, 장간 막, 위장, , 뇌수, 담즙, 가래, 고름, , , 지방, 눈물, 임파액, , 점액, 관절액, 오줌이 있다.’라고 발가락 위에서부터 머리카락 아래에 이르고 피부의 끝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의 오물로 가득한 것으로 관찰한다.

 

그는 이와 같이 방일하지 않고, 열중해서, 단호하게 수행한다. 그래서 재가생활에 뿌리를 둔 기억과 의도를 버린다. 그것을 버림으로써, 마음을 내적으로 안정되게 하고, 고요하게 하고, 하나가 되게 하고, 집중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몸에 대한 새김을 닦는다.

 

(몸에 대한 새김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9, 전재성님역)

 

 

이처럼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부정관을 하는 이유에 대하여 수행하기 위해서라 말씀 하셨다. 그래서 경전에 따르면 몸의 안과 밖에 대하여 관찰해야 하는데, 이는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보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몸이 있다라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진여’ ‘불성이라는 보물

 

그런데 선사는 몸띵이에 대하여 더럽고 혐오스런 것이라고 묘사한 이유가 경전의 내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법문에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런 몸띵이인데, 그 몸띵이 속에 세세생생에 쓰고도 남을 그런 보물이 들어 있을 줄이야! 부처님과 같은 성현이 아니고서는 참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 수천금 되는 금덩어리나 옥이 그 속에 들어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것어.

우리는 다행이 스승을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자부이신 그런 성인 가운데 성인이신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우리는 업이 많아서 말세에 태어 났다고 하지만 우리 몸띵이 속에 위대한 훌륭한 보물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게 되었습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6일자)

 

 

선사는 몸이 더러운 것이라는 부정관을 언급한 이유는 초기경의 내용과 달리 선사식의 표현을 빌면 몸띵이 안에 보물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더러운 몸은 썩어 문들어질지라도 몸띵이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이 있기 때문에 그 보물을 찾는 것이 삼계도사요 사생의 자부이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은 무엇일까. 선사는 방송에서 그 보물은 다름 아닌 진여’ ‘불성이라 말한다. 선사는 진여 불성을 언급하기 위해서 우리 몸을 몸띵이라는 비속어를 사용하여 허망한 것이라 하였고, 몸은 비록 사라지지만 진여 불성만큼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보물을 찾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말 하였다.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초기경을 보면 부처님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부처님은 부정관을 닦는 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누구든지 몸에 대한 새김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바탕으로 삼고, 정립하고, 공고히 하고, 잘 실천하면,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을 기대할 수 있다. 열 가지란 어떠한 것인가?

 

1) 불만과 만족을 극복한다. 불만이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게 하고 불만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한다.

 

2)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한다. 두려움과 공포가 자신을 정복하지 못하게 하고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극복한다.

 

3) 추위나 더위나 기아나 기갈이나 등에, 모기, 바람, 열기, 뱀과의 접촉, 매도하고 비방하는 말, 쓴 맛, 신 맛, 떫은 맛, 매운 맛, 불만, 불쾌, 목숨을 빼앗기는 것을 참아내는 것처럼 신체의 괴로움을 인내한다.

 

4)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난관이나 어려움이 없이 보다 높은 마음을 구성하는 네 가지 선정을 얻어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5) 여러 가지 신통의 종류를 체험한다. 하나에서 여럿이 되고 여럿에서 하나가 되고,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자유로운 공간처럼 장애 없이 담을 통과하고 성벽을 통과하고 산을 통과하고, 물속처럼 땅속을 들어가고, 땅위에서처럼 물위에서도 빠지지 않고 걸어 다니고, 날개 달린 새처럼 공중에서 앉은 채 날아다니고, 손으로 이처럼 큰 신비를 지니고 이처럼 큰 능력을 지닌 달과 해를 만지고 쓰다듬고, 하느님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육신으로 영향력을 미친다.

 

6)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귀로 멀고 가까운 하늘사람들과 인간의 두 가지 소리를 듣는다.

 

7) 자신의 마음으로 미루어 다른 뭇 삶이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고,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을 탐욕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을 탐욕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고,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을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분노에서 벗어난 마음을 분노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을 어리석음에 가득 찬 마음이라고 알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을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마음이라고 알고, 통일된 마음을 통일된 마음이라고 알고, 흐트러진 마음을 흐트러진 마음이라고 알고,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을 최상으로 노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최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을 치상으로 노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알고,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는 마음이라고 알고,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을 보다 높은 목표를 지향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알고,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알고,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을 삼매에 들지 못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고,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

 

8)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한다. 이를테면 ‘한 번 태어나고, 두 번 태어나고, 세 번 태어나고, 네 번 태어나고, 다섯 번 태어나고, 열 번 태어나고, 스무 번 태어나고, 서른 번 태어나고, 마흔 번 태어나고, 쉰 번 태어나고, 백 번 태어나고, 천 번 태어나고, 십만 번 태어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수많은 세계가 생성되고 수많은 세계가 파괴되고 생성되는 시간을 지나면서, 당시에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고, 나는 그곳에서 죽은 뒤에 나는 다른 곳에 태어났는데, 거기서 나는 이러한 이름과 이러한 성을 지니고 이러한 용모를 지니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맛보고 이러한 목숨을 지녔었다. 그곳에서 죽은 뒤에 여기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자신의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상세히 기억한다.

 

9)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으로 뭇 삶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 삶을 본다. 이를테면 ‘이 뭇 삶들은 몸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말로 악행을 저지르고 뜻으로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고 잘못된 견해를 지니고 잘못된 견해에 따른 행동을 저질렀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괴로운 곳, 나쁜 곳, 타락한 곳, 지옥에 태어났다. 그러나 이 뭇 삶들은 몸으로 선행을 하고 말로 선행을 하고 뜻으로 선행을 하였다. 그들은 고귀한 분들을 비난하지 않고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올바른 견해에 따른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육체가 파괴된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해서 인간을 뛰어넘는 하늘눈으로 뭇 삶을 관찰하여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천하거나 귀하거나 불행하거나 업보에 따라서 뭇 삶을 본다.

 

10) 번뇌를 부수어 번뇌 없이 마음에 의한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누구든지 몸에 대한 새김을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닦고 익히고 수레로 삼고, 바탕으로 삼고, 정립하고, 공고히 하고, 잘 실천하면, 이와 같은 열 가지 공덕을 기대할 수 있다.

 

(몸에 대한 새김의 경, 맛지마니까야 M1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부정관을 하면 열가지 공덕이 있음을 초기경에서 설하였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부정관을 함으로 인하여 진여 불성이라는 보물을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경전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 법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가 부정관을 언급한 것은 불생불멸의 진여 불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정관이라는 사마타 수행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합리화 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는 경전에 바탕을 둔 법문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자신의 방식대로 하는 법문을 말한다. 설령 경전의 내용을 인용한다고 하더라도 출처를 밝히는 일은 거의 없다. 이처럼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하는 법문은 선사들에게 있어서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현상이다.

 

요즘 세간에 논문표절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금메달을 딴 모 국회의원 당선자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있다. 그런 이유는 표절을 하였기 때문이다. 남의 논문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심지어 잘 못된 표현까지 고스란히 카피 한 것이다. 그래서 당으로부터 출당조치 되었고, 국회의원 사퇴 압력까지 받고 있다.

 

이처럼 탐진치치로 얼룩진 세속에서 조차 공인에 대하여 표절에 대하여 매우 엄격함을 알 수 있는데, 공중파로 방송된 선사의 수 많은 법문을 들어 보면 결코 경전적 근거를 밝히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 법문을 듣고 있는 수 많은 국민과 불자들은 마치 선사가 말한 것처럼 오해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선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표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표절 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가르침에 대한 왜곡이다.

 

모르고 지은 죄보다 알고 지은 죄가 더 크다고?

 

경전을 근거로 하지 않거나  설령 경전을 근거로 한다고 할지라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말한 것처럼 법문하는 선사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거나 어떤 목적을 설명하기 위하여 180도 다른 법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어지는 법문에서 송담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모르고 죄를 범한 것보다 알고서 죄를 범하는 죄가 더 무거운 것입니다. 세속에서 어떤 죄를 범해가지고 재판을 받을 때도 모르고 무의식 중에 저지른 죄는 경감을 해주지만, 알고서 고의적으로 범한 죄는 훨씬 더 크게 처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6일자)

 

 

선사의 법문을 들으면 불자들이 이제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불교상식을 깨는 듯한 발언을 종종 듣는다.  모르고 죄를 범한 것보다 알고서 죄를 범하는 죄가 더 무거운 것입니다라는 문구 역시 마찬가지 일 것이다. 불자들은 일반적으로 알면서 저지른 죄 보다 모르고 저지른 죄가 더 크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사는 이를 완전히 180도 바꾸어 거꾸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한 것을 세속에서의 법적용에 대한 것을 들고 있다. 우발적 범행은 정상이 참작 되어 형을 경감 받을 수 있지만, 조폭처럼 범죄를 목적으로 구성된 집단의 계획된 범죄는 중죄를 받아 처벌 받는 사회법을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세간에 적용되는 법이다. 출세간에 적용되는 법은 이와 다르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큰 이유

 

모른다라는 뜻을 한자어로 무지(無知)’라 한다. 이런 무지와 거의 동의로 쓰이는 말이 불교용어로서 무명(無明)’이 있다. 하지만 이 무지와 무명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이런 무지와 무명에 대하여 빠알리어로 아윗자(avijja)’라 한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모른다는 의미의 무지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초기경전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nāccasārī na paccasārī sabba vitathamidanti vītamoho,
So bhikkhu jah
āti orapāra urago jiṇṇamiva taca purāa.

 

치닫지도 않고 뒤쳐지지도 않아,

모든 것이 허망한 것임을 알고 어리석음을 버린 수행자는,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If someone gone beyond expectations and recollections, is free from delusion knowing the world as unreal.
He gives up this and the other world, like the snake that discards the decayed skin.

 

(우라가경-Uraga Sutta- The Snake-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전재성박사역)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우라가경(뱀의 경)에 실려 있는 13번째 게송에 대한 것이다.

 

이 게송에서 부처님은 어리석음을 버린이라는 말을 하였다. 이때 어리석음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 어리석음을 버린 -

 

초기 불교에서 어리석음은 곧 무명(無明)을 말한다.

그것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 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생성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명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해서 무지(無知)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조차 모른다.

 

그래서 그의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마찬가지로 그의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러한 중층적인 무지의 구조 때문에 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전재성박사, 우라가경-Uraga Sutta- The Snake-뱀의 경, 숫따니빠따 Sn1.1, 13번 게송 주해)

 

 

전재성님의 주석에 따르면 어리석음은 무명을 말하는 것이고, 그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모른다라는 뜻의 무지 역시 사성제를 모르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사성제를 몰랐을 때 어떻게 괴로움이라는 거센물결을 건널 수 있을까. 사성제를 모르는 무지로 인하여 세세생생 윤회한다면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런 무지는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중층적 무지이기 때문에, 모르고 짓는 죄가  알면서 짓는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이 몸띵이 속에 진여 불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귀가 따갑게..”

 

이것이 일반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는 세속적 형벌 기준을 예로 들어 모르고 짓는 죄 보다 알면서 짓는 죄가 더 크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유가 있다. 이어지는 법문을 들어 보면 알 수 있다.

 

 

이 몸띵이 중에 보물이 있는 줄 모르고 안 닦은 사람은 평범한 범부요 어쩔 수가 없지만, 그렇게 법문을 듣고 이 몸띵이 속에 진여 불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귀가 따갑게 듣고 닦을려고 하는 마음도 여러 번 목고 또 닦기 시작했으면서도 이리 핑계 저리 핑계 자꾸 뒤로 미루고 해태와 방일, 그리고 모든 것을 다 끓는 결단성, 용맹심이 부족해가지고 그럭 저럭 세월을 보내면 그건 참 대단히 부끄러울 일이고 염라대왕 앞에 가면 참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6일자)

 

 

선사가 모르고 짓는 죄 보다 알면서 짓는 죄가 더 크다고 말한 이유가 법문에서 나타난다.

 

자신이 설한 정법이자 최상승법인 진여’ ‘불성에 대한 법문을 입이 닳도록 말하였지만 이를 실천하지 않는 불자들을 질책하기 위해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정비구를 비방하면

 

이렇게 자신의 말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불가에서 예로부터 전승되어 온 무지의 죄가 더 크다든가 무명이 대죄다라는 말을 뒤엎은 것이다. 더구나 선사는 자신의 말을 실천하지 않은 신도들을 향하여 염라대왕이야기를 꺼내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일까.

 

 

사미승이 개의 몸을 받았던 것입니다. 인과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아라한 과를 증득한 성현을 비방했기 때문에 개의 과보를 받았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여. 아라한과를 증득한 성현이나 부처님이나 또 청정한 비구스님네를 비방한 죄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모략을 하고, 서로 같은 사람끼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생각 일으키면 그것은 한계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한마디 입밖에 나오면 좋은 말이건 궂은 말이건 추호도 어김 없이 그 다음 시간 언젠가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불법을 비방하거나, 부처님을 비방하거나, 또는 부처님의 제자를 비방하거나 이러면 그 과보는 말로서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큰 죄 가운데 오역죄라는 것이 있는데, 오역죄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 또 아라한을 죽인 죄, 또 부친 부모를 죽인 죄, 또 대중의 화합을 파괴한 죄 이런 것이 다 오역죄에 해당되는데, 이 죄를 범하게 되면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헤어날 기약이 없습니다.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데 그래도 부처님을 비방하고 불법을 비방하고 부처님과의 인연이 맺어져서 그런 비방하는 인연이지만 그래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맺어졌기 때문에 그 지옥고를 받고 나서는 언젠가는 불법으로 다시 돌아와서 결국은 견성성불하게 된다 이것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4-25일자)

 

 

선사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 그리고 청정비구를 비방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오역죄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무간지옥에 떨어져 기약 없는 세월동안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오역죄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문에서 선사가 말한 소승오역죄가 있고, 이와 별도로 대승 오역죄가 있다. 대승오역죄를 보면 다음과 같다.

 

 

대승5역죄 :
① 탑사를 파괴하여 경전과 불상을 불태우고 삼보의 물건을 빼앗고 혹 은 그와 같은 짓을 사람에게 시키고 기뻐하는것.

② 성문. 연각의 소승불법과 대승의 법을 비방하는것.

③ 출가자가 불법을 닦는 것을 방해하고 혹은 그를 죽이는것.

④ 소승의 오역죄중 한가지 죄를 범하는것.

⑤ 모든 업보는 없다고 생각하여 열가지 악한 일을 행하고 후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사람에게 그런 것을 가르치는 것.

 

 

대승오역죄에 따르면 대승의 법을 비방해도 오역죄에 들어 간다. 또 출가자가 불법을 닦는 것을 방해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오역죄를 저지르면 어떻게 될까. 선사의 말대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기약없는 세월동안 고통을 당할 것이라 한다.

 

비판과 비방은 다른 것이다

 

선사의 말에 따르면 승가를 비방하거나 승가의 화합을 깨치는 것, 또 청정비구를 비방하는 행위 모두 지옥고를 면할 수 없다. 승가나 스님에 대한 좋은 말이건 궂은 말이건간에 한마디입밖에 나오거나 심지어 한생각만 일으켜도 안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비방과 비난과 비판을 구분하지 못해서 법문한 것이라 보여진다.

 

비판과 비방은 다른 것이다. 비판(批判)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다. 비방(誹謗)은 ‘남을 비웃고 헐 뜯어서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용어로서 비난(非難)이 있는데 이는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비판과 비방과 비난은 서로 다른 것이다.

 

닥치고 따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사는 승가와 비구에 대하여 한생각 내는 것, 한마디 내는 것 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하다. “닥치고 따르라는 것과 같다. 스님들의 일탈행위와 비법을 설하는 것에 대하여 닥치고 따르면 되는 것일까.

 

최근 교계 인터넷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A 스님은 남성 성기를 비유하는 저속한 언어를 연상케 하는 건배사를 했다. A 스님은 “내가 먼저 ‘가’라고 선창하면 여러분은 ‘족같이’라고 후창해 달라”며 건배를 제의했다고 한다. 사석도 아닌 러시아 교민들이 함께하는, 한국 불교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나선 자리에서 말이다.

 

A 스님의 언행은 건배사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A 스님은 현지에서 템플스테이를 홍보하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여성에게 홍보용 조끼를 입히고 손수 단추까지 채워주는 친절을 베풀었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단추를 채워주는 스님의 과도한 친절에 해당 여성은 성적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A 스님의 음담패설은 러시아에 이어 일본에서도 벌어졌다. 불교문화상품 개발을 위해 진행한 사업단 연수에서도 성희롱 발언이 있었다. 한 언론에 따르면 사업단 여성직원들도 탑승한 차량에서 어떤 여자가 내 앞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검은색 속옷을 보여줬다는 등의 음담패설을 했다는 것.

A스님의 성희롱 발언과 행동은 러시아와 일본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해 공주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에서 열린 연수에서도 “이 손이 수백억 원을 주무르는 손”이라며 한 여성 직원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회식 자리에서 술을 따를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출가자의 음담패설 이대로 두고 볼건가, 불교닷컴 2012-04-24)

 

 

템플스테이를 책임지고 있는 실무국장 스님이 신도들 앞에서 성적 농담을 하는 가 하면 성추행도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스님들의 행위는 비판 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교계언론에서 비판기사를 쓰고 이슈화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비판이다. 비난이나 비방이 아닌 것이다.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비판에 대한 것은 반드시 스님들의 잘못된 행위에 한 한 것은 아니다. 법문중에 비불교적내용에 대한 것이 있다면 이를 바로 잡는 것도 일종의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과 비방을 구분하지 못하여 닥치고 따르라는 식이라면 이는 승복의 권위에 의존한 전근대적 방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비판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특히 잘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가기 위하여 건전한 비판은 격려하고 장려 해야 할 사항이다. 만일 건전한 비판이 상실되고 용비어천가만 부르는 식이라면  어느 조직이든지 금방 부패 하고 말 것이다.

 

방송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법문하였다면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인이 되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또 잘못을 하였을 경우 겸허하게 비판을 수용하여야 한다. 종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방송으로 전국민을 대상으로 법문하였다면 이는 공적인 행위에 속한다. 이름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듣고 새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법답지 않은 말을 하거나 심지어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왜곡하는 행위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자신의 말을 정당화 하기 위하여 지옥 운운하며 겁주는 말을 하였을 때 듣는 이로 하여금 불쾌감을 느끼게 한다면 좋은 법문이라 볼 수 없다. 또 법문 도중에 게송노래를 읊는 것도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안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좋은 법문이란

 

좋은 법문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철저하게 경전에 근거하여 법문하여야 한다. 그리고 경전적 근거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경전에 있는 말을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한다면 요새말로 표절에 해당된다.

 

표절하면 어떻게 될까. 이는 방송과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표절하면 중대한 범죄행위가 되기 때문에 퇴출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세속에서도 사회법으로 표절행위에 대하여 엄하게 다스리고 있는데, 하물며 가장 진실해야 할 종교계에서 표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경전에 근거하고, 반드시 경전적 근거를 밝히는 법문이 생활화 되어야 한다.

 

 

 

2012-04-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