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저 높은 바위산을 보면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7. 18:04

 

저 높은 바위산을 보면서

 

 

 

관악산 국기봉

 

눈 부시게 빛난 오월의 신록이다. 불과 몇 주 만에 세상이 완전히 뒤 바뀐 듯 하다. 이제 갓 피어난 연두색 잎사귀로 산하 대지가 삽시간에 뒤 덥혔다. 이런 것을 두고 아마도 드라마틱한 반전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자연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뒤 바꿔 놓는 듯한 모습을 종종 연출한다.

 

눈부시게 빛 나는 날 산으로 나섰다. 늘 그렇듯이 도보로 관악산을 향하였다. 관악산 남사면을 향해서 보면 저 멀리 관악산이 보인다. 하지만 보이는 봉우리는 관악산 정상은 아니다. 국기봉이라 하여 관악산 정상에서 산줄기가 남쪽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돌출된 봉우리이다. 그 봉우리에 항상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고 해서 국기봉이라고 한다.

 

 

 

 

 

 

 

 

 

수수부꾸미

 

관악산 등산로가 시작 되는 산림욕장 입구에 이르면 늘 보는 장면이 있다. 더우나 추우나 사시사철 그 자리에서 먹을 것을 파는 노점이다. 벌써 수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은 나이 드신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떡과 음료수 등 간단한 먹을 거리를 팔고 있는데, 그 중에 특별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수수부꾸미이다. 감자와 수수를 버무려 후라이팬에 붙이는 일종의 부침개인데 안에 팟고물이 들어 있어서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특징이다. 한 개 오백원으로서 뜨끈 뜨끈한 상태에서 먹으면 속이 든든하다.

 

폐허가 된 비닐하우스

 

수수부꾸미를 파는 행상 바로 오른편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한때 연못에는 물이 가득하여 낚시터로도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거의 폐허화 되어 있다. 연못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잡초만 무성한 채로 방치 되어 있다. 그 연못 한켠에는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시뻘겇게 불타는 듯한 꽃이 피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못은 잘 관리 되어 있었다. 나이 드신 노부부가 연못 바로 옆에서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노부부는 닭과 오리를 키우고 있었고 등산객들을 대상으로 하여 간단한 음료와 술과 안주등을 팔고 있었다. 비닐하우스 바로 옆 노천에 테이블 두 개를 놓고 장사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 따라 닭과 오리 또한 보이지 않게 되었고 연못도 관리가 되지 않아 방치 되다시피 하였다.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게 된 그 비닐하우스집은 할머니가 나이 어린 손자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등산객들을 상대로 간단한 음료와 주류, 그리고 컵라면, 부침게등을 팔긴 팔고 있었으나 장사를 하지 않은 때가 더 많아 보였다.

 

그런 모습을 몇 년간 보았는데, 이번 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비닐하우스는 찢겨져 있고 , 비닐 하우스안에는 선풍기, 주전자 등 몇 가지 살림도구가 흐트러져 있었다. 할머니와 손자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노부부가 보이지 않는 연못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진달래가 한창이다. 그리고 불두화가 작은 육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하여 핀다는 불두화는 앞으로 일주일 후가 되면 탐스런 모습과 함께 연못 주변에서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인생무상

 

흔히 인생무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무상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이다.  꽃은 때가 되면 피고 지지만 한 번 간 사람은 다시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에 무상을 실감하게 하는 말이다.

 

누구나 무상함을 느낀다. 늘 변하고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 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지금 행복한 사람이라면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지금 젊은 사람이라면 이 빛나는 청춘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월은 이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부자와 가난뱅이, 행복한자와  불행에 빠진자, 늙은이와 젊은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시간은 인정사정 봐 주지 않고 사정 없이 흘러가 젊은이를 늙은이로 만들어 놓고, 지금 행복이 영원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변화하고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다는 것은 진리이다.

 

이런 진리를 사람들은 알고 있다.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자연의 변화를 통해서 또는 사람들의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서 알 고 있다. 따라서 세월이 흘러가 변화된 모습을 보았을 떄 인생과 자연에서 무상함을 느끼는데, 이를 불교용어로 제행무상이라 한다.

 

나약한 감상(感傷)주의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아는 진리는 여기까지이다. 무상함을 느끼긴 느끼되 내()가 무상함을 느낀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생무상을 느껴도 내가 무상함을 느끼고, 무성한 나무가 낙엽이 되어 떨어져도 나의 마음이 무상함을 느낀다.

 

이렇게 사람들은 철저하게 나를 기반으로 무상함을 느끼기 때문에 때로는 감상적(感傷的)’으로 된다.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쉽게 감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를 알게 되면 감상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하여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보면 무상함도 느끼지만 동시에 그것이 무아이고, 결국은 괴로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감상주의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게 되면 나약한 감상주의에 빠져 있을 겨를이 없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상, , 무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무상(無常,  anicca, 아닛짜)

 

[Sabbe sakhārā anicca] ti       [삽베 상카라 아닛짜]띠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싸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아닛짜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All conditioned things are impermanent”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  dukkhā, 둑카)

 

[Sabbe sakārā dukkhā] ti        [삽베 상카라 둑카]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사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조건지어진 현상은 둑카라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해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All conditioned things are unsatisfactory”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무아(無我, anattā, 아낫따)

 

[Sabbe dhammā anattā] ti         [삽베 담마 안앗따]

yadā paññāya passati             야다 빤냐야 빠싸띠

atha nibbindati dukkhe           아타 닙빈다띠 둑케

esa maggo visuddhiyā             에사 막고 위숫디야.

 

모든 담마에는 자아가 없다고

내적 관찰의 지혜로써 이렇게 보는 사람은

둑카에 대하여 싫어함을 갖나니

오직 이것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

 

“All things are not-self”

- when one sees this with wisdom,

one turns away from suffering.

This is the path to purification.

 

(법구경, Dhp 277~279, 거해스님역, 영문 번역)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무아임을 통찰하라고 하였다. 이는 보통사람들이 나를 기반으로 하여 무상함을 느끼는 것과 다른 것이다. 불교에서는 제행이 무상함을 느끼긴 느끼되 나가 개입되지 않는 무상함을 말한다. 제행이 무상할 뿐만 아니라 그 무상함을 바라 보고 있는 나 역시 무상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를 무아라 한다.

 

마음을 항상 현재로

 

이처럼 찰나 찰나 조건에 따라 존재하는 연기적 존재로서 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현상을 연기법적으로 본다면 감상에 젖어 있을 수 가 없다. 그런 마음은 항상 현재로 향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초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īta nānvāgameyya,            아띠땅 난와가메이야

nappaikakhe anāgata;         납빠띠깐케 아나가땅

yadatīta pahīna ta       야다띠땅 빠히낭 땅

appattañca anāgata.            압빳딴짜 아나가땅

 

Paccuppannañca yo dhamma,      빳쭙빤냔짜 요 담망

tattha tattha vipassati;         땃타 땃타 위빳사띠

asahīra asakuppa,         아상히랑 아상꾹빵

ta vidvā manubrūhaye.          땅 위드와 마누브루하예

 

Ajjeva kiccamātappa,           앗제와 낏짜마땁빵

ko jaññā maraa suve;          꼬 잔냐 마라낭 수웨

na hi no sagara tena,         나 히 노 상가랑 떼나

mahāsenena maccunā.              마하세네나 맛쭈나

 

Eva vihāri ātāpi          에왕 위하링 아따삥
ahorattamatandita
;             아호랏따마딴디땅

ta ve bhaddekarattoti,         땅 웨 밧데까랏또띠

santo ācikkhate muni             산또 아찟카떼 무니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Do not recollect the past,

nor desire the future,

The past is over,

the future has not come.

 

These things of the present,

see them with insight as they arise

Not faltering and not moved,

think about them.

 

Today itself the dispelling should be done,

Tomorrow death might come?

We will not have any associations

with Death and his great army.

 

You should abide dispelling thus,

day and night zealously,

This is the single auspicious attachment,

the appeased sage tells.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 A Single Auspicious Attachment- 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맛지마니까야 MN131, 전재성역)

 

  밧데까랏따경(MN131)-전문.docx  밧데까랏따경(MN131)-전문.pdf

 

 

 

부처님은 마음을 과거나 미래에 두지 말라고 하였다. 과거는 이미 지나 간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과거를 생각하면 좋았던 일 보다 좋지 않았던 일이 더 많이 떠 오르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후회 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후회해 보았자 마음이 편안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미래에 가 있으면 주로 걱정거리가 많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하여 근심과 걱정을 해 보아야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두라고 하였다.

 

땃타 땃타 위빳사띠 (tattha tattha vipassati,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마음이 현재에 머물러 있으면 후회와 걱정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할까. 부처님은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하라 하였다.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는 무슨말일까. 이 부분과 관련하여 빠알리어는 땃타 땃타 위빳사띠 (tattha tattha vipassati)”이고, 영문은 “see them with insight as they arise”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보면 각각의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된다고 되어 있다. 이는 한 마디로 일어나는 모든 법(dhamma)에 대하여 무상, , 무아라고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법을 통찰 하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은 탐욕 등의 번뇌로부터 정복되거나 흔들리지 않을 것(아상히랑 아상꾹빵, asahīra asakuppa)’ 이라 하였다.

 

전망대

 

연못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 되었다. 관악산 남사면의 경우 다른 등산로와 달리 능선길이다. 계곡을 타는 것이 아니라 산의 능선을 타기 때문에 전망이 좋다.

 

능선을 타기 위해서는 첫 번째 관문을 넘어야 한다. 매우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파른 길을 올라 가다 보면 전망이 탁 트인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서면 시가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그런 시가지는 뿌였게 보인다. 랜드마크라 불리우는 빌딩이 보여서 그곳이 어디인지 알게 해 준다.

 

 

 

 

 

 

 

 

 

가벼운 마음으로 산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망대까지 올라간다. 전망대 이후 부터 본격적인 관악산 등반이 시작 되기 때문이다. 다음코스는 전망대에서 국기봉까지이다.

 

국기봉을 향하여

 

전망대를 지나면 평탄한 길의 연속이다. 바위로 된 급경사길이 나오기 전까지 코스이다. 평탄한 길이 끝난 지점에 암반이 형성되어 있어 급격한 경사를 이룬다. 그래서 본격적인 등산을 하기 전에 쉬어 가는데, 그런 길목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노점상이다. 언제부터인지 쉬어 가는 길목에 노점상이 생겨서 음료와 간단한 주류 등을 팔고 있다.

 

 

 

 

 

 

 

 

 

국기봉으로 가는 길은 매우 험준하다. 모두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두발, 두손을 사용하여 올라가는 곳이 많다. 하지만 우회로를 이용하면 시간은 좀 더 걸릴지 모르지만 힘은 덜 든다.

 

국기봉 가는 길에 보는 신록은 이제 막 시작 되었다. 갓 잎사귀가 돋아 난 신록의 색깔은 연두색 빛깔이었다.

 

 

 

 

 

 

 

 

깔딱고개

 

어느 산이든지 깔딱고개는 다 있다. 가파른 계곡길을 기진맥진 하여 올라가기 때문에 깔딱 숨이 넘어갈 정도라 하여 깔딱고개라고 이름한다.

 

국기봉 가는 길 역시 깔딱고개라 부를 만 하다. 초입에 힘든 고비가 있었지만 그것에 비하면 비교 대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험준한 코스이다. 국기봉을 앞둔 깔딱 고개는 두 번째 관문이라 볼 수 있다.

 

깔딱 고개에 올라서면 발 아래 장관이 펼쳐진다. 바위와 신록이 어우러져 있는 광경을 보면 시원해진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는 바람이 매우 드세어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정도이다.

 

 

 

 

 

 

 

 

 

관악산 불성사

 

관악산에는 절이 여러 곳 있다. 그 중에서 자주 보는 곳이 불성사이다. 불성사는 국기봉 고개를 넘으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에 등산객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절이다.

 

 

 

 

 

 

 

 

 

 

불성사는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는 아담한 절이다. 특히 5월 부처님오신날을 전후하여 꽃 피는 계절의  불성사는 마치 꽃대궐 같은 느낌이 든다.

 

 

 

 

 

 

 

 

 

 

 

 

 

 

정상을 향하여

 

불성사를 뒤로하고 다시 관악산 정상을 향해 나아 갔다. 수 없이 다닌 길이지만 몇 년만에 다시 오니 오르기가 쉽지 않다. 우회길이 있지만 주로 바위길이어서 두발과 두손을 이용해야만 갈 수 있는 코스이다. 마침내 관악산 송신탑이 보였다. 송신탑이 보이는 것을 보니 정상이 머지 않은 것이다.

 

 

 

 

 

 

 

 

 

관악산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바위와 계곡이 어우러져 있는 관악산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산세는 깊고도 크다. 그래서 서울과 수도권에 사는 수 많은 시민들이 찾기 때문에 마치 허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산이다.

 

바위산에 대한 비유

 

멀리서 본 바위산은 굳건해 보인다. 그래서 바위산에 대한 비유가 초기경전에 많이 등장한다. 비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솟아 있는 바위산을 비유로한 게송이 법구경에 있다. 

 

 

Asubhānpassim viharanta  아수바누빠싱 위하란땅

indriyesu susavuta     인드리예수 수상유땅

bhojanamhi cā mattaññu   보자남히 짜 맛딴늉

saddha āraddhavīriyam    삿당 아랏다위리양

ta ve nappasahati Māro   땅 웨 납빠사하띠 마로

vāto selava pabbala    와또 셀랑와 빱바땅

 

쾌락을 쫓지 않고

감각을 잘 다스리고 음식을 절제하며

믿음이 확고한 수행자는

마라도 감히 어쩌지 못한다.

마치 폭풍이 큰 바위산을 흔들지 못하듯이

 

Just as a storm cannot prevail

against a rocky mountain,

so Mara can never overpower the man

who lives meditating on the impurities,

who is controlled in his senses,

moderate in eating,

and filled with faith and earnest effort.

 

(법구경 Dhp8, 거해스님역)

 

 

Selo yathā ekaghano        셀로 야타 에까가노

vātena na samīrati         와떼나 나 사미라띠

eva nindāpasasāsu      에왕 닌다빠상사수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나 사민잔띠 빤디따.

 

큰 바위가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다.

 

Just as a solid rock is

not shaken by the storm,

even so the wise

are not affected

by praise or blame.

 

(법구경 Dhp81, 거해스님역)

 

 

감각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수행자에 대하여 큰 바위산(sela-pabbata, 셀라빱바따)’에 비유하였고, 어떤 칭찬과 비방에 흔들리지 않는 현자에 대하여 굳건한 바위(sela,셀라)’에 비유하였다.

 

깃자꾸따(gijjhakūa)

 

상윳따니까에서 바위와 관련하여 어떤 비유가 있을까. 바위를 키워드로 하여 찾아 보니 가장 앞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매우 짤막한 경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의 깃자꾸따 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밤의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바깥에 앉아 계셨는데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세존께 머리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일으키려고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바위를 부수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저것은 악마 빠삐만이다'라고 알고 악마 빠삐만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그대가 모든 깃자꾸따 산을 통틀어 뒤흔들더라도

올바로 해탈한 깨달은 이는 결코 흔들림이 없다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나에 대해 알고 계신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곧 사라졌다.

 

(빠사나경- Pāsāasutta-Rocks-바위경, 상윳따니까야 S4.2.1, 전재성님역)

 

 

깃자꾸따산(gijjhakūa)은 한자어로 영취산이라 한다. 부처님당시 마가다국의 있는 산이름으로서 독수리봉우리라는 뜻이라 한다. 

 

 

 

  

The Vultures Peak: Gijjhakuta( 산)

 

 

 

깨달음을 성취한 해탈자는 깃자꾸따산처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1겁의 시간은 얼마나 깁니까?”

 

바위산과 관련하여 시간의 비유로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1겁의 시간은 얼마나 깁니까?"

 

[세존]

"수행승이여, 겁은 참으로 길다. '그것은 몇 겁 동안이다. 그것은 몇 백 겁 동안이다. 그것은 몇 천 겁 동안이다. 그것은 몇 십만 겁 동안이다' 식으로 쉽게 계산할 것이 아니다."

 

[수행승]

 "세존이시여, 비유를 들어볼 수는 없습니까?"

 

'수행승이여, 가능하다' 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이여,

예를 들어 큰 바위산이 하나 있는데 길이가 1요자나이고, 넓이가 1요자나이고, 높이가 1요자나이며, 간격이 없고 균열이 없고 견고하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백년에 한 번씩 베나레스의 비단 옷으로 스치고 지나간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큰 바위산이 그러한 방법으로 소모되어 없어져버리는 것보다도 1겁은 긴 시간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여, 겁은 긴 시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긴 겁이지만 수 겁을 윤회하고 수백 겁을 윤회하고 수천 겁을 윤회하고 수만 겁을 윤회해온 것이다.

 

(Pabbata - A Rock – _겁의 비유, S14.1.5, 전재성님역)

 

  아나마딱가 상윳따(S15).docx  아나마딱가 상윳따_S15_.pdf

 

 

 

1겁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제자의 질문에 부처님은 큰 바위산을 비유하여 1겁이 얼마나 긴시간인지 설명하고 있다.

 

 

1 요자나는 얼마나 되나

 

경전에서 큰 바위산은 요자나(yojana)라는 단위로 계산된다. 그렇다면 1요자나는 어느 정도의 단위일까.

 

요자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한글 빠알리어 사전에 따르면 한자어로 유순(由旬)이라 하고, 14km정도라 한다. 영역된 경을 보면 7마일(seven miles)로 되어 있는데, 1 마일은 1.609344km이기 때문에 11.85km이다.

 

대림스님이 편역한 청정도론의 주석에 따르면소에 멍에를 메어 쉬지 않고 한번에 갈 수 있는 거리이며 대략 7마일 즉, 11km정도의 거리라고 한다(PED)”라고 되어 있다.

 

어느 것이 맞는 것일까. 요자나를 키워드로 검색하여 보았다.

 

요자나에 대한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요자나는 고대인도에서 거리를 측정할 때 사용되던 베딕(Vedic)단위라 한다. 정확한 단위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있지만 6~15km(4~9마일)이라 한다.

 

현대 네팔어나 힌두어에서 요자나는 계획또는 청사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고,  거리의 데카르트 개념으로서 흥미 있는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시간단위로서의 요자나는 약 11km로 보인다 

 

부처님이 큰 바위산을 비유로 든 것은 윤회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에서 뭇삶들은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여 왔으므로,  그 과정에서 오랜 세월 동안 괴로움과 아픔,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켜 왔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한량 없는 세월에 대한 비유로서 요자나길이의 큰바위산을 예로 든 것이다. 

 

어느새 송신탑이

 

바위 투성이의 능선을 따라 가다 보니 어느새 송신탑이 가까이 보인다. 송신탑 못 미쳐 간단한 음료와 주류를 파는 간이 행상이 보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더구나 그곳에서 먹고 자고 한다고 하니 더욱 놀라웠다. 연주암까지 얼마나 되는지 물어 보니 송신탑만 돌면 된다고 말한다.

 

 

 

 

 

 

 

 

송신탑에 도착하였다. 이런 곳에 수십미터 높이의 송신탑이 설치 되어 있다니 불가사의 해 보였다. 송신탑을 돌아가니 더 이상 높은 곳은 없다. 연주암을 목표로 하였을 때 내려 갈 일만 남은 것이다.

 

연주암에 도착하여

 

연주암에 도착 하였다. 오랜만에 본 연주암은 예전 그대로 변함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관악산을 등산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밖에 없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연주암은 쉼터와 같은 곳이다.

 

 

 

 

 

 

 

 

 

연주암은 무료 점심공양으로 유명한 곳이다. IMF가 터졌을 때 직장을 잃은 수 많은 사람들이 직장 대신 관악산으로 몰려 들었을 때 무료 점심공양으로 장사진을 치기도 하였다. 그런 연주암 툇마루에 등산객들이 앉아 한가로이 쉬고 있다.

 

 

 

 

 

 

 

 

하산길은 과천길을 택하였다. 더 이상 오르막길 없이 때문에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다고?

 

산은 가까이에서 볼 때 보다 멀리서 볼 때 더 높아 보인다. 멀리서 바라본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산의 큰 바위를 보고서 흔들림 없는 현자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였고, 또한 한량없는 시간의 비유로서 활용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편으로 움직이지 않는 산을 보고서 영원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있다.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Brahmajala Sutta, 디가니까야 D1, 1.32, 각묵스님역)

 

범망경(Brahmajala Sutta).docx  범망경_Brahmajala Sutta_.pdf

 

 

 

움직이지 않는 산을 보고서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다는 착각에 빠진 것이다. 어떻게 착각한 것일까.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Brahmajala Sutta,디가니까야 D1, 1.32, 각묵스님역)

 

 

중생들은 이곳 저곳에서 태어나고 죽지만 움직이지 않는 산이나 성문앞 나무기둥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저 산처럼 자아와 세상 역시 영원할 것 처럼 보이는 것이다.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느 것 하나 변화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저 높은 바위산도 언제가 가루가 되어 없어질 것이다. 따라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는 영속론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견해이다.

 

그래서 초기경에서 부처님은 산의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네 번째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무엇에 의거해서

영속론자가 되어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 존자들은 논리가해석가이다.

그는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을 수반하며

자신이 스스로 규명하여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상은 영속하나니

그것은 생산함이 없고 산꼭대기처럼 움직이지 않으며

성문 앞의 기둥처럼 견고하게 서 있다.

 

중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치달리고 윤회하고 죽고 태어나지만 

이 자아와 세계는 영속 그 자체인 것처럼 존재한다.’라고.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Brahmajala Sutta, 1.34, 각묵스님역)

 

 

영속론자들은 논리가이자 해석가라고 하였다. 그들은 머리 속에서 갖가지 방법으로 추론하고 해석하여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말한 것이다.

 

있는 그대로  알면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는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안 뒤

여래는 취착없이 해탈한다.

 

(브라흐마잘라경- 범망경-Brahmajala Sutta, 1.36, 각묵스님역)

 

 

부처님은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제행무상임을 말씀하였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알라고 하셨다. 이는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통찰하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자아와 세상은 영속한다는 견해는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저 높은 바위산을 보면서

 

지금 저 산이 움직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그 자리에 영원히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모든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저 높은 바위산도 언젠가는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저 산을 보면서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고 보는 자들은 삿된 견해를 가진 영원론자들이고, 저 산을 보면서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 , 무아로 본다면 이는 바른 견해를 가진 부처님의 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2012-05-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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