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님의 가르침에 종교다원주의는 있을 수 없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2. 5. 9. 13:46

 

부처님의 가르침에 종교다원주의는 있을 수 없다!

 

 

 

 

불교판 종교다원주의자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등산로를 통해 산봉우리에 오른다. 중턱쯤에서는 풍경의 전모가 보이지 않고, 자신이 올라온 등성이의시야만 보인다. 정상에서 서로 다른 길들은 만날 것이며, 그리고 풍경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할 것이다.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했으되, 우리는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악수하고 부둥켜 안을 것이다.

 

(한형조 교수,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 불교신문 2011-09-14)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한형조.docx  불교 밖에도 불교가 있다-한형조.pdf

 

 

 

불교학자 한형조 교수의 글이다. 지난 해 아쇼카선언 초안이 발표 되었을 때 이를 지지하는 글을 불교신문에 특별 기고 한 것이다.

 

이글에서 한교수는 정상에서 만나는 감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 서로 다른 길을 걸어 왔지만 정상에서 만나서 서로 부등켜 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는 취지의 말이다. 이런 글에 대하여 불교판 종교다원주의자라 부를 만 하다.

 

길희성교수의 3의 길

 

최근 휴심정사이트에 길희성교수의 글이 실렸다. 제목은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이다. 이는 글을 소개하는 제목이고 원제목은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이다.  

 

이 글에서 길교수는 종교다원주의자로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 놓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한형조 교수의 산의 비유도 물론 언급 되어 있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자가 본 종교다원주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길교수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의를 소개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또 종교들이 상이한 교리에도 불구하고 심층적으로 혹은 궁극적 차원에서 만나거나 일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다원주의는 비교적 최근에 일부 서구 종교학자, 신학자, 철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사상으로서, 종교적 초월을 부정하는 세속주의도 아니고 자기 종교만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배타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docx

 

 

 

길교수는 종교다원주의가 제3의 길이라 하였다. 그런 제3의 길은 마치 정치판에 있어서의 제3의 길처럼 보인다. 좌와 우를 떠나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제3의 길은 이처럼 자연스럽게 중도를 떠올리게 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불교적 중도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길교수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중도에 가깝다. 불교의 사성제와 팔정도로서의 중도가 아니라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중도를 말한다.

 

그래서 길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하여 세속주의도 아니고 배타주의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를 제3의 길이라 하였는데, 이를 또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중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흔히 정치판에서 제3의 길은 중도라고 칭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와 궁극적 실재

 

종교에 있어서 제3의 길을 제창하고 있는 길교수는 종교다원주의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매우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기독교신학자로서의 길희성 교수가 비록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제3의 길을 말하고 있지만 끝까지 고수 하는 것은 바로 이 궁극적 실재이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이 궁극적 실재하느님이라 하였다.

 

길희성교수가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결국 궁극적 실재(하느님)’를 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궁극적 실재를 어떻게 접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종교도 실재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며 다만 주어진 문화 전통과 환경의 영향 아래 불완전한 방식으로 접할 뿐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길교수는 어떤 종교도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없을 것이라 하였다. 다만 종교문화적 전통에 따라 부분적으로 접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를 알 수 있을까.

 

존 힉(John Hick)과 폴 니터(Paul Knitter)

 

종교다원주의와 궁극적 실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에게 있어서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종교다원주의라는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 신학자들이다. 그 중에서도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신학자를 들라면 존 힉(John Hick)과 폴 니터(Paul Knitter)이다

 

이 두 신학자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길교수는 이 두 신학자가 추구하는 바가 약간 다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다원주의에 있어서 존 힉과 폴 니터의 비교

이름

구 분

 

키워드

존 힉(John Hick)

신학적 종교다원주의

-이론/사상적 차원

에서 전개하는 종교다원주의

-실재 중심’(Reality-centered)의 종교다원주의론을 전개

-등산의 비유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

궁극적 실재(하느님)

폴 니터(Paul Knitter)

실천적 종교다원주의

-철학적/인식론적 입장에서 전개하는 종교다원주의

-궁극적 실재(Reality)나 진리(Truth) 대신 구원/해방이라는 가치를 모든 개별 종교를 초월하는 상위 질서로 내세움

- 사랑이 곧 진리이다

사랑

 

 

이처럼 종교다원주의는 두 개의 큰 흐름이 있는데, 신학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그래서 신학적 다원주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 하고 있고, 실천적 다원주의는 사랑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느님 대신 대문자 “R”

 

신학적 종교다원주의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존 힉은 처음에 하느님(Go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즉 하느님 중심적 종교다원주의를 전개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유일신교에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때문이지 몰라도 그 용어를 실재(Reality)’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 대신 대문자 “R”을 사용한다고 한다. 존 힉에게 있어서 “R”이 하느님이고 궁극적 실재인 것이다.

 

궁극적 실재를 상정한 이유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느님 또는 궁극적 실재가 없이 이론을 주장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어느 종교이든지 궁극적 실재로 여길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길교수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

 

 

첫째, 세계 종교들에서 발견되는 사상이나 교리, 그리고 종교적 경험에 어느 정도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등산의 비유를 계속하자면, 산정에 대한 묘사들이 비록 부분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제법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구한 전통을 지닌 위대한 종교들의 신자들이 보여주는 대등하고 유사한 도덕적, 영적 힘은 자연스럽게 그러한 가설을 요구한다. 이 힘은 결국 동일한 원천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셋째, 위대한 종교 전통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은 공통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여럿이 아니라 ‘하나’로 여긴다. 형이상학적 일원론(metaphysical monism)이든 유일신 신앙(monotheism)이든 이들 종교전통들은 모두 잡다한 현상세계의 배후나 근저, 혹은 그 너머로 ‘하나’의 통일적이고 궁극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있다.

 

비록 이 실재가 다양한 이름(, Brahman, 太極, 하느님, 혹은 法身)으로 불리고 있지만 결국 동일한 실재를 달리 부르고 있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 반대의 가설, 즉 각기 다른 실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가설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길교수가 궁극적 실재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예를 든 것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 전세계의 종교가 모두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종교문화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도, 브라만, 태극, 하느님, 공 또는 법신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을 뿐이라 한다.

 

이나 법신도 궁극적 실재라고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것이다. 길교수는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데 있어서 불교에 대하여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의 유일신 범주에 집어 넣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서 불교에서 말하는 이나 법신이 타종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실재 개념인 하느님, 도 등과 유사한 것으로 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 어떻게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같은 개념일까. 이에 대하여 길희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특별히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불교의 공사상이 형이상학적 일원론의 범주에 속하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공이 일단 일체의 차별성과 분별을 넘어선 실재를 지칭하는 개념임은 확실하다.

 

궁극적 실재가 하나이고 하느님도 한 분이고 인류도 하나라면, 인류가 추구하는 구원/해방도 궁극적으로는 하나일 것이라는 가설은 거의 자명한 일처럼 보인다.

 

비록 등산 중에 바라보는 산정의 모습들이 아직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해서 다를 수밖에 없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동일한 실재를 지향하고 있을 것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길교수는 불교의 공사상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공사상이 실재를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발언은 놀라운 것이다. 이제까지 불자들은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이고 또 무아의 종교라고 알고 있었으나 종교다원주의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사상은 유일신교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인 궁극적 실재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교수는 모든 종교마다 궁극적 실재는 오로지 하나일 것이기 때문에 비록 길은 다르지만 정상에서 모두 만날 것이라는 산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이는 지난해 한형조 교수가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을 발표 하였을 때 불교신문에 기고한 글 중에서 서로 다른 길에서 출발했으되, 우리는 서로 같은 곳을 향해 왔다는 것을 알고 악수하고 부둥켜 안을 것이다.” 100%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불교학자와 기독교신학자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 한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 실재가 거짓인 이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대승불교에 한정 된 것이다. 길교수가 자신의 글에서 불교라고 지칭하였지만 이는 대승불교를 말한 것이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담겨 있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 대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에 브라만교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길교수가 언급하였듯이 브라만은 하느님과 함께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들어 간다. 하지만 부처님은 브라만사상을 연기법으로 논파하였다. 변치 않는 고정된 자아로 대표되는 아뜨만과 이 아뜨만의 근원이라 불리우는 브라만에 대하여 영속주의로 보고 상견(常見)’으로 간주 한 것이다. 이런 상견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말하는 단견(斷見)’과 함께 삿된견해(사견, 邪見)’에 속한다.

 

그렇다면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하는 것과 죽으면 끝이다라고 보는 견해가 왜 사견(邪見)일까.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혹은 먼저 것은 단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결과가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원인들이 끊어지지 않은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나중 것은 상견을 뿌리 뽑기 위해서 설했다. 일어난 것들의 늙고 죽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17장 통찰지의 토양, 286)

 

 

청정도론(Visuddhimagga)는 부처님이 설한 5부 니까야에 대한 주석서이자 동시에 수행지침서이다. 5세기 스리랑카에서 붓다고사 테라에 의하여 저술 되었고 현재 테라와다불교에 있어서 부동의 준거틀로서 활용되고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상견과 단견이 논파되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으면 끝이다라고 말하는 단견은 법이 조건에 따라 결과가 일아나는 것을 보면 거짓임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궁극적 실재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상견 역시 이미 일어난 법들이 어느 것 하나 영원히 계속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법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상견과 단견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연기법만이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근원이라 부르고 창조주라 불리 우는 브라만은 거짓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대신 부처님은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를 소멸하여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고 하였다.

 

열반이 궁극적 실재가 아닌 이유

 

이렇게 초기불교 가르침은 대승불교와 완전히 다른 것이기에 길희성 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궁극적 실재라고 불리우는 도(), 브라만( Brahman), 태극(太極), 하느님, () 혹은 법신(法身) 등을 나열하였지만 열반은 포함 하지 않았다.

 

만일 길교수가 열반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집어 넣었다면 아마도 무식을 스스로 폭로한 결과로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길교수가 열반을 궁극적 실재 범주에 포함 하지 않은 것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대승불교와 초기불교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라는 것에서 갈린다. 공이나 법신은 궁극적 실재에 들어 가지만, 열반은 결코 궁극적 실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길희성, 한형조, 존 힉, , 니터 등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에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는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두 개의 종교 그룹

 

이렇게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종교 그룹이 존재한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하느님)를 인정하는 종교와 이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를 말한다. 이는 또 불교와 비불교로 나눌 수 있다. 이때 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장하지 않는 종교를 말하고, 비불교는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모든 종교를 말한다. 길희성교수가 언급 한대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대승불교), 유교, 도교 등이 이에 해당 된다. 

 

길희성교수가 언급한 불교는  대승불교를 말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를 제외한 초기불교도와 테라와다불교도들에게 있어서 종교다원주의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난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화쟁위원회에서 발표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 초안은 단지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발표한 것일 뿐 전불교를 대표했다고 볼 수 없다. 초안을 발표 함으로서 대승불교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시켜 준것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는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는 있기나 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길희성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힉에 의하면 경험이란 언제나 ‘......으로서의 경험’(experience-as), 즉 해석된 경험이다. 신 혹은 실재 그 자체를 접하는 순수한 종교적 경험은 인간이 지상에 사는 한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문화의 틀을 통해 사물이나 실재를 경험하고 해석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힉은 이러한 입장에 따라서 인류의 종교적 경험의 두 가지 큰 유형에 주목한다.

 

하나는 궁극적 실재를 유일신 신앙의 종교에서처럼 인격적(personal)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 유교, 도가 사상, 그리고 일부 힌두교 사상에서처럼 탈 인격적(impersonal) 실재로 경험하는 유형이다. 힉은 이 두 유형의 차이는 결국 실재를 접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이 속한 문화적 전통과 환경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실재 그 자체는 이 두 범주를 초월하기 때문에 무어라 규정할 수 없다. 어떤 종교도 실재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며 다만 주어진 문화 전통과 환경의 영향 아래 불완전한 방식으로 접할 뿐이다. 종교들은 모두 진리의 빛을 발하고 있지만 역사적/문화적 조건의 제약 하에 굴절된 형태로 반사할 따름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길희성 교수는 존 힉의 말을 빌어 순수한 종교적 경험은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 브라만, 하느님, 공 등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해 놓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전체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궁극적 실재는 우리의 인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라 한다. 다만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산의 비유를 들었다.

 

산의 비유

 

종교다원론자들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 대하여 등산로만 다를 뿐 같은 산을 오르고 있으며 결국 정상에서 만날 것이라 한다. 이것이 산의 비유이다. 왜 이와 같은 비유를 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직은 아무도 산 정상을 본 일이 없고 각자 자기가 오르고 있는 등산로에서 가끔씩 산정을 쳐다보면서 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본 산의 부분적 모습을 전부라 생각하거나 절대화해서는 안 되고 서로 옳다고 다툴 필요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대화를 통해 경험과 정보를 나누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제각기 열심히 오르다 보면 결국 모두가 한 산정에서 만날 것이라는 비유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아직 아무도 산 정상에 올라 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세천년동안 신학자들이 신이 존재함을 증명하려 하였으나 결국 이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 선방에서 선사들이 10, 20, 30, 평생 화두를 들었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말과 같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

 

길교수의 글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는 알 수 없고 다만 경험에 따라 부분적으로 알 수 있고 추론 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또 하나의 비유를 든 것이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비유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두가 장님이라면 코끼리 전체를 본 자가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장님들이 같은 코끼리의 다른 부분들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냐는 것이다. 누구도 그러한 인식상의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마치 누군가가 -실제로 자기들이!-  종교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양 착각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는 불교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초기경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니 열반경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이때의 열반경은 대승열반경을 말한다. 대승열반경의 맹인모상(盲人模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에 나오는 대사이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자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주장하며 싸울 때,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우매함을 꾸짖는 교훈적인 내용이며, 한편으론 자기 마음대로 부처를 단정짓지 말라는 불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한다

 

하나의 추정 내지 가설(hypothesis)

 

종교다원주의자 길희성 교수는 대승 열반경에 실려 있는 장님 꼬끼리 만지기 비유를 들어 궁극적 실재를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산의 비유와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목적은 궁극적 실재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전부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길교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일원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이상학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궁극적 실재는 오로지 사유나 직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궁극적 실재는 실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길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이한 종교들이 동일한 궁극적 실재 내지 진리를 여러 각도에서 반사하고 있다는 이론은 다원주의자들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하는 주장이 아니다.

 

누군가가 산 정상에서 여러 등산로를 조망해 보았기 때문에 하는 초월적 주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의 추정 내지 가설(hypothesis)이다. 아직은 어느 종교도 산정을 있는 그대로 본 일이 없다. 그럼에도 여러 종교들이 거기서 만날 것이라는 가설을 제시하는 데는 이를 뒷받침해 줄만한 몇 가지 정황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궁극적 실재(하느님)는 하나의 추정내지 가설(hypothesis)이라 한다. 누구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마치 죽어서 돌아온 자가 없기에 사후에 대하여 누구든지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실천적 다원주의란 무엇일까

 

이처럼 존 힉이 신학적 측면에서 이론과 사상적으로 궁극적 실재를 규명하려고 하고 있음에 반하여, 폴 니터는 다른 각도에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하고 있다. 이를 실천적 다원주의라 한다. 그렇다면 실천적 다원주의란 무엇일까. 길희성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궁극적 실재(Reality)나 진리(Truth) 대신 구원/해방이라는 가치를 모든 개별 종교를 초월하는 상위 질서로 내세운다. 정의, 평화, 사랑, 자유, 해방, 자연/인간의 복리라는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구원의 이상이다. 그 앞에서는 어떤 종교든 한계와 부족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화될 수밖에 없다.

 

실천적 다원주의는 만인의 자유, 평등, 인권에 기초한 근대 민주사회의 질서, 나아가서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공생관계를 절대적 가치로 존중한다. 아니, 존중 정도가 아니라 이 가치들이 사실상 종교의 존재 이유이며 개별 종교들의 특수한 진리 주장에 우선한다고 본다.

 

종교가 분쟁과 다툼을 유발하고 사회의 분열을 조장한다면 종교의 본질적 사명과 존재 이유를 배반하는 것이기에 비판 받아 마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실천적 다원주의자들은 말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실천적 종교다원주의는 진리보다 사랑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셈이다. 아니, 사랑이 곧 진리이다. 따라서 만약 어떤 종교의 진리 주장이 증오와 폭력을 유발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닐 것이다.

 

얼마나 많은 독선과 폭력이 종교적 진리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수긍이 되는 입장이 아닐까? 도대체 종교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기에 신앙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고 마구 생명을 죽인다는 말인가? 실천적 다원주의자들은 묻는다.  

 

(길희성교수,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이해, “진리라고 말하는 신앙조차 모두 불완전하다”, 휴심정 2012-05-04)

 

 

종교다원주의에 또 한 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길교수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나 진리 대신 인간의 구원과 해방에 대하여 가치를 두는 것이라 한다. 구체적으로 정의, 평화, 사랑, 자유, 해방 등이라 한다.

 

폴 니터가 주장하고 있는 이와 같은 실천적 다원주의에 대하여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이라 한다. 종교간의 분쟁과 다툼, 사회적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서 궁극적 실재나 진리 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사랑이라 한다. 그래서 사랑이 곧 진리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진제선사와의 대담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하는 폴 니터는 조계종 종정스님이 된 진제선사와 대담하기도 하였다. 그 때 당시 폴 니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이웃은 물론 적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는데 이들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고 이는 예수님의 복음과 어긋난 것이라 생각한다.”면서 “예수님의 근본적 가르침인 정의, 평화, 사랑의 가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자신의 다원주의적 종교관의 핵심을 피력했다.

 

( [갈등의 시대, 해법을 논하다] ‘부디스트 리스찬’ 니터 & ‘한국의 고승’ 진제 대선사, 서울신문 2011-01-01)

 

 

 

 

 

폴 니터와 진제선사

▲ 대구 도학동 동화사에서 31일 열린 ‘생과 화합을 위한 종교 간의 대화’에 참가한 폴 니터(왼쪽) 미 유니온 신학교 교수와 동화사 조실 스님인 진제 대선사가 환담을 나누고 있다.

출처: 서울신문

 

 

  

  

신문기사에 따르면 폴 니터의 종교다원주의사상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다원주의이다. 종교다원주의의 특징이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폴 니터 역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믿는 종교의 하느님인 것이다.

 

조건부 사랑

 

폴 니터가 말하는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말한다. 기사에서 예수님의 근본적 가르침인 정의, 평화, 사랑의 가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말한 것이 이를 증명해 준다. 이와 같은 표현에 대하여 기사에서는 폴 니터의 종교관에 대한 핵심이라고 표현하였다.

 

폴 니터와 같은 실천적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내세우는 사랑은 궁극적 실재에 의한 사랑이다. 기독교라면 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며, 이슬람교라면 알라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대승불교라면 신격화되고 초월적 존재로 바뀐 부처님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철저하게 궁극적 실재라 불리우는 사랑을 말한다.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랑에 대하여 조건부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부처님이 말한 사랑은

 

하지만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조건부 사랑은 있을 수 없다. 보편적인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사랑에 대하여 어떤 말을 하였을까.

 

 

촌장이여,

그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탐욕을 떠나고

분노를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

바로 알고

마음에 새겨

자애로운 마음으로

한쪽 방향을 충만시키고

마찬가지로 두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세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네 번째 방향을,

마찬가지로 위로 아래로 옆으로

모든 경우 모든 곳에

일체의 세계를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원한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충만시킵니다.

 

(빠딸리야경-Pāaliyasutta, 상윳따니까야 S41.1.13, 전재성님역)

 

빠딸리야경(촌장-S41.1.13).docx

빠딸리야경(촌장-S41.1.13).pdf

 

 

 

상윳따니까야 빠딸리야경(촌장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자애로운 마음 (mettāsahagatena)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멧따(mettā, 자애)에 대한 뜻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애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빠알리어로 멧따(mettā)라 한다. 하지만 멧따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다르다. 왜냐하면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브라만과 같은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 같은 궁극적 실재에 의한 조건부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처님이 말하는 멧따(자애)는 무한정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사방, 위와 아래, 모든 곳에 무량하고 원한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낼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 멧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멧따에 대한 뜻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자애(loving-kindness),

친절(friendliness),

자비심(benevolence),

우호(amity),

우정(friendship),

선의(good will),

사랑(love),

동정(sympathy),

친밀함(close mental union)

 

 

위키피디아에 소개된 멧따(mettā)에 대한 용어설명에 대한 것이다. 멧따의 뜻이 자애나 사랑 뿐만 아니라 우정, 동정, 친절 등 실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멧따라는 용어를 단지 자애나 사랑으로 부르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 멧따라는 원어로 불러 주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빠알리어 자막판 자애송(Metta, 자비송)

 

음성

巴利文

Imee Ooi(黃慧音 )

  자애송(The chant of metta)_진흙속의연꽃_101005.docx 자애송_The chant of metta__진흙속의연꽃_101005.pdf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이처럼 초기불교에는 궁극적 실재가 없어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매우 구체적으로 명기 되어 있다. 특히 청정도론에 매우 구체적으로 자애수행방법까지 제시 되어 있다. 그런 자애수행의 가장 핵심어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        

(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모든 님들은 행복해지이다.

 

 

 

 

 

 

 

빠알리어 자막판 까라니야멧따경(필수자애경, Sn 1.8)

Imee Ooi(黃慧音 )

  자애경_빠알리어_101213_진흙속의연꽃.docx  자애경_빠알리어_101213_진흙속의연꽃.pdf

 

 

 

 

숫따니빠따의 까라니야멧따경(Karaniya Metta Sutta-필수자애경, Sn 1.8) 에 실려 있는 네 번째 게송에 대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삽베 삿따 바완뚜 수키땃따)를 바라는 것이 멧따의 근본이다. 이와 같은 멧따는 하느님이나 하나님, 브라만, 법신불의 사랑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 자신부터 사랑하라고 하였다.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남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 자신부터 시작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 그리고 좀 더 관계가 먼 사람 등으로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라고 하였다. 이를 순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자기자신à가족à친구à스승à나와 무관한 사람à적이나 원수à모든 존재들

 

 

 

훨씬 더 포괄적인 사랑

 

이렇게 자애(사랑)의 마음을 내었을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 가장 먼저 성냄이 사라질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낼 때 성냄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딸리야 경에서 부처님은 탐욕을 떠나고 분노를 떠나고 어리석음을 떠나라는 표현을 하였다. 이는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탐진치라는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탐진치가 물러간 자리에 채워지는 것은 관용자애지혜이다.  이는 탐욕의 자리에 관용이, 성냄의 자리에 자애(멧따), 어리석음의 자리에 지혜가 자연스럽게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 실천적 종교다원주의자인 폴 니터가 말하는 예수님의 근본적 가르침인 정의, 평화, 사랑의 가치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말하는  궁극적 실재에 의한 조건부 사랑보다 훨씬 더 포괄적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종교다원주의는 있을 수 없다!

 

아직까지 누구도 보지 못한 존재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종교다원주의이다. 그런 다원주의 안에 불교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불교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의 논리로 파기한 뒤, 새로 공의 논리로 재해석하여 성립한 대승불교를 말한다. 그런 측면에 있어서 대승불교와 종교다원주의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절대로 종교다원주의와 함께 할 수 없다. 그것은 종교다원주의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 궁극적 실재(하느님)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종교다원주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012-05-0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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