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무대를 만든 이유는, 관음성지 기요미즈데라(淸水寺)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20. 15:07

 

무대를 만든 이유는, 관음성지 기요미즈데라(水寺)

 

 

(5)일본성지순례 2일차(2012-06-06): 기요미즈데라(水寺)

 

 

 

일본성지순례 둘째날은 쿄토(京都)이다. 일드(일본드라마)에서 막말의 시대극을 보면 쿄토를 ()’라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말로 하면 서울이라는 뜻이다. 그런 쿄토는 숙소 오사카에서 북동방향으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쿄토위치

 

 

 

일본성지순례 둘째날은 이번 순례에서 피크이다. 이날 기요미즈데라(청수사)를 시작으로 하여 니죠성, 긴가쿠지(금각사), 점심, 료안지(용안사), 도후쿠지(동복사), 오사카성, 페리승선 일정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

 

오사카에서 쿄오토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는 쉼 없이 일본의 문화와 역사, 전통  등 일본에 대한 모든 것을 마이크로 들려 주었다. 그런 이야기중에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이말은 일본에서 잘 통용되는 말이라 한다. 오직 한번뿐인 기회를 말한다. 실제로 일본인은 이런 정신으로 살아간다고 한다. 이런 예로 스모를 들고 있다.

 

스모는 일본씨름 명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씨름과 달리 스모는 단판승부이다. 단 한번의 승부로 시합이 끝나는 것이다. 시합을 하여 졌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날 뿐 다시 시합하여 승부를 가르는 경우는 없다. 이에 비하여 우리나라의 씨름은 삼세번 또는 그 이상 하는 것이 보통이다. 유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업어치기 한판이면 승부가 끝나지 삼세번 하지 않는다. 모두 일본의 일기일회정신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본다.

 

일기일회의 정신은 일본문화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손님접대 또한 빼 놓을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일반적으로 단골손님과 뜨내기손님을 구별하여 차별 대우하는 경향이 있는데, 일본의 경우 단 한번 찾아 오는 손님일지라도 정성을 다해서 모신다는 것이다. 이런 서비스정신이 오늘날 경제대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쿄토는 어떤 도시

 

쿄토는 어떤 도시일까.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성격의 관광도시이긴 하지만 그 이상이라 한다. 첫째 인구가 150만명으로서 경주의 30만명과 비교하여 훨씬 많고, 둘째 세계적인 기업의 본사가 있는 산업도시라는 것이다. 그런 예를 쿄토 가는 길에 보았다. 쿄세라 본사 건물이다.

 

쿄세라는 세라믹 소재를 기반으로 한 세계적인 전자부품 회사이다. 이외 교토에 기반을 둔 세계적인 브랜드는 닌텐도’‘와코루등이 있다고 한다. 이처럼 교토는 역사와 관광도시로서의 이미지 뿐만 아니라 첨단산업기지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는데,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쿄토는 학술도시라는 것이다.

 

관동지방의 도쿄대학과 비교 되는 것이 쿄토대학이라 한다. 그래서 쿄토사람들은 쿄토대학을 도쿄대학 보다 더 인정한다고 한다. 이는 교토가 천년고도로서 문화의 중심지 이자 일본의 자부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현재 일본천왕이 메이지 유신이래 도쿄에 머물고 있지만 단지 출장 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보니 마이크로 버스는 쿄토에 진입하고 있다. 그런 교토는 철저하게 계획도시라고 한다. 그런 예로서 가로의 이름을 일조, 이조, 삼조 등으로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일조(一條)에는 천왕이 사는 궁이 있고, 이조(二條) 에는 사무라이 들이 사는데 이조에 니죠성(二條城) 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3-5조는 상인들의 거리, 7조는 서민들의 주거지, 8조는 역, 그외 9-10조의 거리로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쿄토지도

 

 

쿄토지도를 보았다. 장군이 거쳐했다는 2조에 니죠성이 있고, 목표지 기요미즈데라(청수사) 5조거리와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헤이안(平安)시대

 

쿄토는 마치 바둑판처럼 정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쿄토는 헤이안시대부터 시작 된다. 일본에서 헤이안 시대는 어떤 성격일까.

 

일본역사는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받은 아스카시대(592-710)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모국 백제가 멸망하고 나자 수도를 나라로 옮긴다. 그곳에서 새로운 일본역사가 시작되는데 이를 나라시대(710-794)라 한다.

 

나라시대는 한반도에서 독립하여 진정한 일본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 되는데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당으로부터 직접 문물을 받아 들이는 시기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당의 문화와 관련 되어 있EK. 그러다 보니 사찰규모도 매우 커졌다. 당의 영향을 받아 도다이지(동대사)와 같은 거대사찰이 지어지고 또한 거대한 불상이 주조 되었다. 이런 나라시대는 불교문화의 전성기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794년 나라를 버리고 북쪽에 있는 쿄토로 수도를 이전한다. 그래서 쿄토에 기반을 둔 시대를 일본역사에서 헤이안(平安, 794-1185)시대라 한다.

 

헤이안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가이드설명에 따르면 일본식문화가 꽃피운 시기라 한다. 그 이전 아스카시대는 한반도의 문화를 받아 들여 한반도식 문화를 이루었고, 이후 나라시대의 경우 중국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쿄토를 기반으로 한 헤이안시대에는 일본식 궁중귀족문화가 활짝피었다고 한다.

 

하지만 헤이안시대 이후의 일본역사는 무인시대로 접어든다. 그것도 무려 700년간이나 지속된다. 천왕은 단지 명목상 존재하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하고 실권은 힘이 있는 무사가 장악하여 막부정치를 하게 된다. 그런 사무라이시대는 메이지유신이 성립되면서 막을 내린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쿄토에 기반을 둔 헤이안시대야말로 진정한 일본문화가 꽃핀 시대라 볼 수 있다. 그런 곳 중의 하나가 이번 순례에 포함된 기요미즈데라(水寺)이다.

 

순일본식 발음 기요미즈데라(水寺)

 

기요미즈데라는 순일본식 발음이다. 이런 발음을 훈독이라 한다. 뜻으로 읽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음독이 있는데 이는 한자음를 읽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일본어는 훈독과 음독을 혼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주식회사(株式)’를 들 수 있다.

 

주식회사(株式)를 일본어로 읽으면 카부시키가이샤 (かぶしきがいしゃ )가 된다. 여기서 주()카부(かぶ)’라 하는데, 이는 그루, 포기라는 뜻으로 순 일본말이다. ()은 음독으로 읽어 시키(しき)가 된다. 그래서 주식(株式)이라는 말은 일본어에서 훈독과 음독이 혼합되어  카부시키라고 읽는 것이다.

 

언덕배기 길

 

기요미즈데라(청수사)로 올라가는 길은 언덕배기 길이다. 그리고 긴 길인데 길 양옆으로 수 많은 상점이 도열해 있다.

 

 

 

 

 

 

 

 

 

 

 

 

 

 

 

 

쿄토 관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필수코스가 기요미즈데라라고 한다. 다른 곳은 못 보아도 이곳만은 꼭 본다는 쿄토의 명소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수 많은 글과 사진이 블로그나 카페에 올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요미즈데라 입구길에 상점이 즐비 하다 보니 쇼핑하느라 정신이 없어 정작 보아야 할 절은 뒷전에 밀릴 수 있다는 경고의 글 또한 볼 수 있다.

 

 

히가시야마(東山) 36

 

기요미즈데라(청수사)는 쿄토 동쪽에 위치 하고 있다. 쿄토 동쪽에는 북에서 남쪽으로 산이 연이어 있는데 이를  히가시야마(東山) 36이라 한다. 동쪽에 있는 ‘36개의 봉우리라는 뜻이다. 그런 36봉 중의 하나에 기요미즈데라가 있는 것이다.

 

 

 

 

 

 

히가시야마 36봉은 그다지 높지도 않고 험준하지도 않다. 봉우리가 있는지 없는지도 조차 모를 정도로 연이어 있는데, 히가시야마 36봉이 유명해진 이유가 있다. 그것은 소설때문이다.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료타로(司馬 遼太)

 

일본의 국민작가라 부르는 시바료타로(司馬 遼太, 1923-1996)’가 쓴 책이 있다.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쓴 료마가 간다(がゆく)라는 역사 소설이다. 에도막부 말기 도사번에서 탈번한 낭사 사카모토 료마의 일대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제국의 아침또는 영웅의 조건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대하소설이다. 이 책을 오래 전에 읽었다. 소프트방크를 창업한 손정의도 실의에 빠질 때 마다 읽었다는 그 책이다. 그 책을  세 번이나 읽었다.

 

작자의 서문에 의하면 이책은 패전후 일본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하여 집필하게 되었다고 써 놓았다. 그래서일까 활달하고 명랑하고 때로는 엉뚱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가 막말 사츠마와 죠슈 동맹을 성사 시켜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에 대하여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일개 낭사에 지나지 않는 떠돌이 무사를 영웅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렇게 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영웅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루게 한 초석의 인물로서 일본에서 인기투표를 하면 항상 1-2위를 다투는 영웅이다.

 

초목도 잠든 오밤중에 칼부딪치는 메아리가..

 

시바료타로의 책 료마가 간다에는 히가시36봉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그 내용에 대한 것을 일본야후에서 찾을 수 있었다 

 

 

東山三十六峰草木

たちまちこる剣撃き……

(히가시야마 36, 초목도 잠든 오밤중에

순식간에 일어나는 칼부딪치는 메아리가..)

 

(坂本龍馬新選組)

 

 

19세기 중엽의 쿄토는 치안부재 상태이었다. 미국 페리함대의 내항으로 인하여 도쿠가와 막부 권위가 무너지자 그 동안 막부의 위세에 억눌려 지내던 제번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에 따라 막부를 타도 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는 존왕양이파가 나타났고, 반면 막부를 중심으로 하여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세력과 다툼이 쿄토를 중심으로 하여 펼쳐졌다.

 

이렇게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려는 세력과 시대의 흐름을 막아 보려는 두 세력간의 갈등이 쿄토를 중심으로 하여 펼쳐 졌는데, 일본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속에서 주요 소재이다. 일본 드라마에서 NHK가 제작한 대하시대드라마 신센구미(新選組, 2004)와 료마덴(龍馬傳, 2010)이 대표적이다. 

 

특히 신선조(新選組)의 경우 막부에서 고용한 낭사조직으로서 무사도를 어기면 할복이라는 법도를 만들어 철의 결속을 자랑하며 교토의 치안을 담당하였는데, 이들 신선조와 존왕양이파와의 쫒고 쫒기는 이야기가 소설과 영화, 드라마의 단골소재 이기도 하다.

 

 

 

 

 

신센구미(新選組, NHK 2004) 25

 

 

 

이렇게 혼란 스런 시기에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사들과 떠돌이 무사들까지 교토에 모여 들어 교토에서는 매일 밤 어디에선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 것이다. 이를 묘사한 것이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 속에서 말하는 히가시야마 36봉이라 한다. 그래서 무성영화시대 변사들이 히가시야마 36, 초목도 잠든 오밤중에 순식간에 일어나는 칼부딪치는 메아리가..”로 시작 되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관음영험도량

 

청수사는 쿄토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절이고 또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관광지이다. 자료에 따르면 본존불은 천수관음이고, 일본 법상종에 속해 있다.  일본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관음영험도량이기도 한 기요미즈데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다.

 

 

 

 

 

 

 

 

 

 

 

 

 

 

 

 

 

 

 

 

기요미즈데라는 778년에 창건된 절이다. 헤이안시대에 건립된 것이다.

 

창건 설화

 

그런 기요미즈데라는 관음영험도량인데, 이에 대한 창건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宝亀9778)、大和興福寺子島寺[1]修行していた賢心改名)は、のおげでかい、山城愛宕郡八坂東山水寺である音羽山った。金色水流見出した賢心がそのをたどっていくと、そこにはこのってい、千手けている行叡居士(ぎょうえいこじ)という白衣修行者がいた。200になるという行叡居士賢心に「はあなたがるのを長年待っていた。自分はこれから旅立つので、む」とし、っていった。行叡化身であったとった賢心は、行叡していった千手音像み、行叡安置した。これが水寺まりであるという。

 

옥구 9년(778년), 대화국 흥복사의 승으로서 자도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현심은 꿈에서 말한대로 북쪽을 향하였다. 산성국애탕군 팔판향의 동산, 지금의 청수사의 땅이 있는 음우산에 이르렀다.

 

금색의 수류를 발견한 현심이 그 원류를 더듬어 가자 거기에는 그 산의 하천에서 롱행 (, 물속에 들어가 수행하는 것) 하며 천수관음을 계속 염하고 있는 행예거사라는 하얀 옷을 입은 수행자가 있었다. 

 

연령은 200살정도 되어 보이는 행예거사는 현심에게 나는 당신이 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렸다. 나는 이곳으로부터 동국을 여행하기 때문에 뒷일을 부탁한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렸다.

 

행예가 관음의 화신임을 깨닫게 된 현심은  행예가 남겨 놓은 영목에 천수관음을 조각하고 행예의 옛날암자에 안치 하였다. 이것이 청수사의 시작이라 한다.

 

(水寺, 일본 위키백과)

 

 

마치 우리나라 관음설화를 읽는 듯 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의상대사의 관음보살 친견기가 대표적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해변의 굴 안에 머무신다는 말을 듣고 그로 인해서 낙산이라 했다. 스님은 재계(齋戒)한 지 7일만에 좌구(坐具)를 새벽 물 위에 띄웠더니 용중(龍衆)과 천중(天衆) 8부 시중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했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 주었고 동해의 용왕 또한 여의보주를 바쳤다.

 

의상법사는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관음을 보았다. 관음보살이산꼭대기에 한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말했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대가 땅에서 솟아 나왓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원만한 얼굴과 고운 자질이 마치 천연적으로 나온것 같았다. 그리고 그 대는 없어 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전신(眞身)이 거주함을 알았다. 『삼국유사』권3

 

(동해에 빛 떠오르니 관음보살 붉은 연꽃 위에 대자비로 나투시네, 월간 불광)

 

 

이와 같은 관음보살 친견기는 여럿 전해 온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관음친견기가 있었음을 기요미즈데라 창건기를 통하여 알 수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듯 절벽에

 

이처럼 관세음보살과 관련된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기요미즈데라의 본존불은 관음보살이다. 그 본존불이 위치하고 있는 본관은 마치 공중에 떠 있는 듯이 보인다. 건물을 절벽에 세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관 건물은 778년의 창건당시 건축물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여러 차례 소실과 재건을 거쳤고 마지막으로 재건 된 때가 1633년 에도시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川家光)’기부에 따라 지어 졌다고 한다.

 

하지만 기요미즈데라를 실질적으로 중흥한 것은 근대의 일이라 한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대서양경(大西良慶, 1875-1983)이 주지직에 취임하면서 오늘날의 기요미즈데라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107세까지 살면서 70년 가까이 기요미즈데라를 위하여 봉사하였는데, 그를 실질적인 중흥조로 보고 있다.

 

청수의 무대(舞台)

 

기요미즈데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본당 건물이다. 에도시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 의하여 재건된 본당 건물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은 청수의 무대(舞台)’ 라 한다. 왜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본당의 반 가량이 산의 경사면에 걸터 앉아 있기 때문이다. 장대한 느티나무(ケヤキ) 기둥 139개를 세워서 무대라 불리우는 부분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를 현조(懸造, かけづくり)’라 한다.  또는 무대조(舞台造)’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와 같은 건축물을 짓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音菩薩補陀洛山(ふだらくさん)にわれるという『法華』「世音菩薩普門品」()のづくものである。なお、じくである長谷寺石山寺本堂の「懸造」である

 

 관음보살은 보타락산에 나타난다고 하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관음경)의 이야기를 근거로 만든 것이다. 같은 관음영장인 장곡사나 석산사의 본당도 같은 모양의 현조이다.

 

(水寺, 일본 위키백과)

 

 

기요미즈데라의 본당을 무대식으로 만든 것은 법화경에 실려 있는 관세음보살 거처인 보타락가산을 모델로 하였다는 것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렇다면 이에 관한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경전을 찾아 보았다. 하지만 보문품에 보타락가산에 대한 언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타락가산에 대한 것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있다. 입법계품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남자여,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보타락가산이 있는데, 거기에 관자재보살이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보살이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보살도를 닦느냐고 물으라.”

 

(법정스님, 신역화엄경, 동국역경원)

 

 

보타락가산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비슬지라거사가 한 말이다.

 

이렇게 경전에서  단 한줄로 보타락가산에 대한 언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후대 동아시아에서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바닷가가 면한 곳에 관음성지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동해 낙산사, 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 강화 보문사 등이 관음성지로 유명하다.

 

그렇다면 바다가 없는 곳은 어떠할까. 티벳의 경우 바다가 없다. 그러다 보니 높은 언덕에 건축물을 지어 놓고 보타락가산이라는 의미의 포탈라궁을 만들었다. 그곳에 주석한 달라이라마는 티벳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기요미즈데라 본당 역시 절벽에 건물을 세움으로서 바다에 면한 관세음보살의 거처 보타락가산을 나타내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 많은 참배객들이

 

기요미즈데라는 관음도량이다. 그래서 일까 수 많은 참배객들이 몰려 들고 있다. 특히 수학여행철을 맞이 하여 학생들로 넘쳐 난다.

 

 

 

 

 

 

 

 

 

 

 

 

 

 

 

 

 

 

 

 

 

 

쿄토시내의 절반이 한눈에

 

본당에서 본 경치는 탁 트여 있다. 높은 지대에 있다 보니 쿄토시내의 절반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본당 아래로 내려 갔다. 일본의 경우 어느 곳이든지 순로가 있다. 입구와 출구를 달리 하여 부딪치는 일이 없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본당 아래로 내려 갔다. 일본의 경우 어느 곳이든지 순로가 있다. 입구와 출구를 달리 하여 부딪치는 일이 없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뛰어 내렸을까

 

기요미즈데라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을 대표하는 관광지이다. 특히 절벽에 세워진 무대라 불리우는 본당이 매우 독특한데, 이와 관련하여 속담이 하나 있다고 한다.

 

 

舞台からりるつもり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각오로

 

 

이를 단순하게 번역하면 청수의 무대에서 뛰어내릴 작정으로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이말을 결단할 때 쓰는 관용구라 한다. 일본어 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きよみずのぶたいからとびおりる

(기요미즈노부다이까라도비오리르)

사생 결단하다, 큰 결심을 하다

  

 

큰 결심 또는 사생결단을 하였을 때 흔히 하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청수의 무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뛰어 내렸을까.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694년 부터1864년 까지 234건이 있었다고 한다. 생존률은 85.4%라 한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1872년 정부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금지하고 목책을 확장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고 한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들과 딸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2012-06-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