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질렀을까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킨카쿠지(金閣寺)
(7)일본성지순례 2일차(2012-06-06): 킨카쿠지(金閣寺)
일본성지순례 두번째날 세번째 코스는 킨카쿠지(金閣寺)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쿄토에서 꼭 가보야 할 곳 한군데만 들라 한다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준다는 기요미즈데라(청수사)라 한다. 다음으로 한군데만 더 들라면 킨카쿠지라 한다. 이렇게 쿄토관광에서 기요미즈데라와 킨카쿠지는 빼놓을 수 없는 명소 중의 명소라 한다.
공식적으로 ‘녹원사(鹿苑寺)’
킨카쿠지에 도착하였다. 지도로 본 킨카쿠지는 니조성 바로 위에 있었다. 지도에는 녹원사(鹿苑寺)로 표시 되어 있다.
킨카쿠지를 왜 공식적으로 ‘녹원사’라 할까. 일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녹원사는 임제종상국사(臨済宗相国寺)파의 절이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킨카쿠지(金閣寺, きんかくじ)로 통칭된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위키피아에 실려 있는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건물의 내외에 금박이 입혀진 3층의 누각건축인 사리전(통칭금각)은 무로마치시대 전기의 북산문화를 대표하는 건축이었지만 1950년에 소실되고 그후 재건 되었다. 절은 1994년에 ‘고도경도의 문화재’의 구성요소로서 세계유산(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사리전을 금각, 사원전체를 금각사라 통칭한다.
(金閣寺)
금박이 입혀진 3층 누각건축이 널리 알려지다보니 녹원사라는 본래의 명칭보다 일반적으로 ‘킨카쿠지(금각사)’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그런 킨카쿠지의 사리전은 1950년에 소실되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사리전은 복원된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킨카쿠지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교과서에서 본 것 하고 똑같네!”
킨카쿠지(금각사)는 학생들의 수학여행코스이다. 수학여행철을 맞아 많은 학생들로 붐비고 있는 킨카쿠지(금각사)에 대하여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교과서에서 본 것 하고 똑같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본 교과서에 킨카쿠지(금각사) 사진이 실려 있는 모양이다.
킨카쿠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주로 일본을 소개 할 때 후지산과 더불어 금박이 입혀진 금빛 모양의 사리전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각
이처럼 일본국내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킨카쿠지의 금빛 누각은 사실 옛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금빛 누각의 금각(사리전은) 어떤 것일까.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를 번역하였다.
通称「金閣寺」の由来となった金閣は、漆地に金箔を押した三層宝形造の建物で、正式には舎利殿と称する。初層・二層・三層のそれぞれに異なる様式を採用した特異な建築である。初層は寝殿造風で「法水院」(ほっすいいん)と称し、中央に宝冠釈迦如来像、向かって左に法体の足利義満坐像を安置する。二層は書院造風(武家造)で「潮音洞」(ちょうおんどう)と称し、岩屋観音坐像と四天王像を安置する。三層は禅宗様の仏殿風で「究竟頂」(くっきょうちょう)と称し、仏舎利を安置する。屋根は椹(さわら)の薄い板を重ねた杮葺(こけら葺)で、頂上には金銅製の鳳凰が飾られている。なお、金箔は二層および三層に貼られている。
통칭 금각사의 유래로 된 금각은 칠지(漆地, 옻)에 금박을 압착한 3층보형조(宝形造)의 건물이고, 정식으로는 사리전이라 부른다. 초층, 2층, 3층의 각각 다른 양식을 채용한 특이한 건축이다.
초층은 침전조(寝殿造)풍이고 법수원(法水院) 이라 칭하고, 중앙에 보관석가여래입상을 향하여 좌에 법체의 족리의만좌상을 안치하고 있다. 2층은 서원조풍(무가조)이고 조음동(潮音洞)이라 칭하고, 암실관음좌상과 사천왕상을 안치하고 있다. 3층은 선종양식의 불전풍으로 구경정이라 부르고, 불사리(仏舎利)를 안치하고 있다.
지붕은 화백나무의 얇은 판을 중첩한 와즙(杮葺)이고, 정상에는 금동제의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즉 금박은 2층과 3층에 붙여져 있다.
(金閣寺)
위키피디아의 설명문을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하다. 금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仏舎利)가 모셔져 있는 건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사리함 또는 사리함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지만 킨카쿠지에서는 3층 누각건물에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것이다. 그런 누각은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겉에서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사리는 볼 수 없었다.
1950년 금각에서 어떤 일이
이처럼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각은 옛날의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鹿苑寺金閣は国宝保存法により国宝に指定されていたが、1950年(昭和25年)7月2日未明、学僧・林承賢(当時21歳)の放火により炎上(金閣寺放火事件)。国宝金閣(舎利殿)は全焼、国宝足利義満坐像、伝運慶作の観世音菩薩像、春日仏師作の夢窓疎石像等10体の木像等も焼失した。なお、頂上にあった鳳凰及び「究竟頂」の額は火災以前に取り外されていたため、焼失を免れて現存し、このうち金銅鳳凰は、1999年(平成11年)に京都市指定文化財に指定されている。林は寺の裏山で自殺を図った。彼の母親は事情聴取のために京都に呼ばれ、その帰りに保津峡で投身自殺した。この事件は三島由紀夫の小説『金閣寺』、水上勉の小説『五番町夕霧楼』・『金閣炎上』の題材にもなっている。
녹원사금각은 국보보존법에 따라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1950년 7월 2일 미명에 학승 임승현(林承賢, 당시 21세)의 방화에 따라 불꽃이 일어났다.
국보금각(사리전)은 전소되고 국보족리의만좌상, 전운경작의 관세음보살상, 춘일불사작의 몽창소석상 등 10개의 목상 등이 소실 되었다. 정상에 있었던 봉황 및 구경정의 현판은 화재이전에 떼어져 밖에 있었기 때문에 소실을 면하여 현존하고 있고, 그 속의 금동봉황은 1999년 쿄토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하야시(임승현)는 절의 뒷산에서 자살을 시도하였다. 그의 모친은 사정청취를 위하여 쿄토에 불리워졌는데 귀가길에 보진협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이 사건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소설 금각사(金閣寺), 미즈가미 츠토무(水上勉)의 소설 오번정다무루(五番町夕霧楼-금각염상(金閣炎上)의 소재로도 활용되었다.
(金閣寺)
금각방화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당시 21세의 학승이 저지른 방화사건은 1950년 당시 일본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준 것 같다. 이 방화사건을 소재로 하여 유명작가의 소설이 쓰여지고 영화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왜 불질렀을까
그렇다면 21세의 학승 하야시는 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불질러 버렸을까. 이에 대하여 일어판 위키피디아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逮捕当初の取調べによる供述では、動機として「世間を騒がせたかった」や「社会への復讐のため」などとしていた。しかし実際には自身が病弱であること、重度の吃音であること、実家の母から過大な期待を寄せられていることのほか、同寺が観光客の参観料で運営されており僧侶よりも事務方が幅を利かせていると見ていたこともあり、厭世感情からくる複雑な感情が入り乱れていたとされる。
そのため、この複雑な感情を解き明かすべく多くの作家により文学作品が創作された(詳細は後述)。一例として、三島由紀夫は「自分の吃音や不幸な生い立ちに対して金閣における美の憧れと反感を抱いて放火した」と分析したほか、水上勉は「寺のあり方、仏教のあり方に対する矛盾により美の象徴である金閣を放火した」と分析した。
また、服役中に統合失調症の明らかな進行が見られた(詳細は後述)ことから、事件発生当時既に統合失調症を発症しており、その症状が犯行の原因の一つにな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指摘もある。
체포당시 취조한 공술에 따르면 방화동기로서 “세간을 소란스럽게 하고 싶었다” 든가 “사회에 복수를 위하여” 등의 말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이 병약하다는 것, 중증의 걸음(吃音, 말이 연속해서 나오지 않는다든가 일시적으로 무음상태 등의 언어장애)이라는 것, 실가의 어머니로부터 과대한 기대를 받은 것, 그 외 동사가 관광객의 참관료로 운영되고 있어서 승려보다도 사무방이 더 위세를 부리는 것을 목격함과 함께 염세감정으로 인한 복잡한 감정이 들어가 뒤숭숭해져 있었던 상태라 보여 진다.
그 때문에 그 복잡한 감정을 풀고 해명하기 위하여 수 많은 작가들이 문학작품을 창작하였다. 일례로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자신의 언어장애(吃音)나 불행한 성장과정과 대비하여 금각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과 반감이 포함되어 방화하였다”라고 분석하였지만, 미즈가미 츠토무(水上勉)는 “절의 현실, 불교의 현실에 대한 모순에 따라 아름다움의 상징인 금각을 방화하였다”라고 분석하였다.
또 복역중인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이 명확하게 보여짐에 따라, 사건발생당시에 통합실조증을 발증하고 있었고, 이 증상이 범행의 원인의 하나로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지적이 있다.
(金閣寺放火事件)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방화동기가 매우 복합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원인으로서 범행자가 언어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이고, 그 때 당시 불교계의 모순과 복잡한 감정이 얽혀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켜 소설로도 발표 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금각사(金閣寺)’와 미즈가미 츠토무(水上勉)의 금각염상(金閣炎上)이 유명하다고 한다. 이중 금각염상은 ‘염상(炎上)’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 졌다.
불타는 금각
염상은 1958년 작으로서 우리말로 번역하면 ‘불꽃’이다. 영화 염상에 대한 줄거리 설명은 다음과 같다.
말더듬이 소년 미조구치는 부친이 사망하자 금각사로 들어가 승려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금각사의 장엄한 미는 소년의 열등감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치유해주지만, 금각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어느 순간 도를 넘어선다. 이치가와 곤의 첫 와이드스크린 영화로 대미를 장식하는 화재 장면이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아름답다.
영화 염상에서 금각이 불타는 장면은 다음과 같다.
영화 금각염상(金閣炎上)
금 20kg가 투입되고
이와 같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금각은 복원 되었다. 어떻게 복원 되었을까. 일본어판 위키피디아를 보면 다음과 같다.
現在の金閣は、1904年(明治37年)から1906年(明治39年)の解体修理の際に作成された旧建物の詳細な図面や写真・古文書・焼損材等の資料を基に、1952年(昭和27年)から3年を掛けて復元再建されたもので[6]、1955年(昭和30年)10月10日に落慶法要が営まれた。その後、再建から10年あまりで金箔が剥落して下地の黒漆が見えるようになり、その漆も紫外線で劣化するようになったため、1986年(昭和61年)2月から1987年(昭和62年)10月まで1年8ヶ月、総工費約7億4千万円(当時)を投じて「昭和大修復」が行われ、漆の塗り替えや金箔の貼り替え、天井画の復元等の修復工事が行われた。この修復工事に際し、金箔は通常(約0.1µm)の5倍の厚さ(約0.45〜0.55µm)の「五倍箔」[7]約20万枚(約20kg)、漆は国産の「浄法寺漆」約1.5トンが使用されている。
현재의 금각은 1905년부터 1906년의 해체수리 할 때 작성된 구건물의 상세한 도면이나 사진, 고문서, 소손재료를 기초로 1952년부터 3년에 걸쳐서 복원재건 된 것으로 1955년 10월 10일에 낙경법요가 개최 되었다.
그 후 재건으로부터 10년 정도 되자 금박이 떨어지고 하지에 검은 옻칠이 보여지고, 그 옻칠도 자와선으로 열화 되었기 때문에 1986년 2월부터 1987년 10월까지 1년 8개월 총공사비 7억4천만엔(당시)을 투입하여 소화대수복이 행해졌다. 옻칠을 바꾸고 금박 붙은 것을 교체하고 천정화의 복원등의 수리공사가 행해졌다.
수복공사할 때 금박은 통상(0.1um)의 5배의 두께(약0.45-0.55um)인 5배박으로서 약 20만매(약20kg), 옻칠은 국산의 쟁법사의 옻으로서 약 1.5톤이 사용되었다.
(金閣寺)
1955년 복원된 금각은 그 후 10년이 되었을 때 전면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이는 옛날 모습으로 완전히 복원하는데 실패 하였음을 말한다. 더구나 보수 하는 과정에서 원래 보다 5배의 금이 더 들어 갔다고 하니 현재 보는 금각은 그야말로 금으로 뒤덥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성요소 하나 없이 세계유산에
이와 같이 복원된 금각은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1994年(平成6年)12月、当寺が構成要素のひとつとなった世界遺産(文化遺産)「古都京都の文化財」が登録された。
1994년 12월 당사가 구성요소 하나 없이 세계유산(문화유산) 고도쿄토의 문화재(古都京都の文化財)에 등재 되었다.
(金閣寺)
킨카쿠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긴 하였지만 구성요소 하나 없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도쿄토의 문화재(古都京都の文化財)는 어떤 것일까.
세계유산에 등재된 쿄토문화재 17곳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따르면 고도쿄토의 문화재는 쿄토부 일원에 분포 되어 있는 절등으로 구성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 한다. 1994년 일본에서 다섯번째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그 때 당시 등록된 문화재리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다.
賀茂別雷神社(上賀茂神社)
賀茂御祖神社(下鴨神社)
教王護国寺(東寺)
現在は分離している地主神社を含む
西芳寺(苔寺)
鹿苑寺(金閣寺)
慈照寺(銀閣寺)
(古都京都の文化財)
현재 17건이 고도쿄토문화재로 등재 되어 있다. 그 중에 킨카쿠지(금각사)도 포함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문화재와 함께 묻혀서?
하지만 금각은 구성요건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타버린 것을 복원한 것에 지나지 않은데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다른 문화재와 함께 묻혀서 함께 등록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불탄 것을 재건하였다고 하여 국보로 지정된다든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면 지난 2008년 불탄 남대문의 경우는 어떠할까. 현재 한창 복원공사가 진행중인 남대문에 대하여 과거에 적용하였던 국보로서의 위치를 다시 찾고, 더구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성요소 하나 갖추지 못한 킨카쿠지가 어떻게 하여 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이 일본어판 위키 피디아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킨카쿠지는 세계유산 등록기준 2번항과 4번항을 만족한 것으로 나온다. 2번항과 4번항은 다음과 같다.
2) ある期間を通じてまたはある文化圏において、建築、技術、記念碑的芸術、都市計画、景観デザインの発展に関し、人類の価値の重要な交流を示すもの。
4) 人類の歴史上重要な時代を例証する建築様式、建築物群、技術の集積または景観の優れた例。
2)어느 기간을 통하여 또는 어느 문화권에 있어서 건축, 기술, 기념비적 예술, 도시계획, 경관디자인의 발전에 관하여 인류의 가치의 중요한 교류를 나타내는 것.
4) 인류의 역사상 중요한 시대를 예증하는 건축양식, 건축물군, 기술의 집적 또는 경관이 뛰어난 예.
(古都京都の文化財)
소실되어 복원한 경우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단지 특정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 뿐만 아니라 건축양식, 기술 등 무형의 자산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위 등록기준의 2번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쿄토는 8세기부터 17세기까지 종교, 비종교건축과 정원설계 진화의 주요중심지이었다. 이와 같이 쿄토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의 창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특히 정원의 경우 19세기 이후 세계 각지에 뜻 깊은 영향을 끼쳤다.
(古都京都の文化財)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도 세계유산에 포함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킨카쿠지이다.
만약 킨카쿠지가 단독으로 등재 요청으로 하였다면 과연 세계유산에 등록 될 수 있었을까. 킨카쿠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문화재와 함께 포괄적으로 함께 등재 요청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보여 진다.
2012-06-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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