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후쿠지(東福寺)에서 발견한 한국 흔적 두 가지
(9)일본성지순례 2일차(2012-06-06): 토후쿠지(東福寺)
주마간산 여행
여행은 떠나기 전의 설레임, 여행지에서의 보는 즐거움, 그리고 돌아 와서 회상하는 것이라 한다. 이를 여행의 세가지 즐거움이라 하는데, 특히 외국여행의 경우 비싼 경비와 시간을 투자하여 마음 먹고 다녀 온 것이라 더욱 더 즐거움은 큰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다녀온 외국여행의 경우 ‘주마간산’격이 되기 쉽다. 늘 시간에 쫒기다보니 대충 겉모습만 보고 “아, 참 건물 크나” “아, 아름다운 광경이다”라는 감탄사만 연발하다가 오는 경우가 많다.
단체로 가는 패키지여행에서 하루에도 여러 군데 방문하다 보니 주어진 시간은 1시간을 넘지 않는다. 그 1시간 이내에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 그저 대충 둘러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대로 볼려면 몇 날 몇 일에 걸쳐서 역사와 문화등을 공부하며 보거나 전문해설사의 설명을 들어야 하나 대게 사진 몇장 찍고 서둘러 빠져 나오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겉모습만 볼 뿐 나중에 남는 것은 단편적인 이미지만 남게 된다.
마을 전체가 절
일본성지순례 둘째날은 이번 여행의 절정이다. 이날 하루만 모두 4군데의 사찰과 2군데의 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중 네 번째로 본 절이 ‘토후쿠지(東福寺)’이다. 그런 토후쿠지는 지금까지 보아 온 절들과 달랐다. 한마디로 무척 큰절이라는 것이다. 마치 하나의 큰 마을을 보는 것 같다. 토후쿠지 경내도를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토후쿠지(東福寺) 경내도
토후쿠지는 매우 큰 절이다. 마치 마을 하나가 온통 절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런 토후쿠지는 쿄토오산 중의 제4위의 선종사찰이라 한다. 그래서 일본 중세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 영화를 누렸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시대 폐불훼석 정책에 따라 규모가 축소 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토후쿠지는 25개의 탑두(塔頭. 산내사원)를 갖고 있는 대사원이다.
토후쿠지(東福寺)는 선종사찰로서 임제종동복사파로서 대본산이다. 본존은 석가여래이고, 창립자는 엔니(円爾, 1202-1280)스님으로 되어 있다. 엔니스님은 가마쿠라시대 중기 임제종의 승려로서 일본에서는 성일국사(聖一国師, しょういちこくし)라 부른다.
경내로 들어 가는 길에
토후쿠지 경내로 들어 가는 길은 마치 주택가를 지나 가는 것 같다. 이 골목 저 골목을 지나가는데 주택 보다 절이 더 많은 것 같다.
모두 25개의 절들로 구성 되어 있다는 토후쿠지 영역안에는 유치원도 있고 학교도 있고 각종 편의 시설이 있어서 일종의 ‘절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6월초이어서일까 일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꽃이 수국이다. 집집마다 한켠에 수국을 심어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전국적이라 보여 진다. 6월 초 이맘 때 쯤이면 일본 어디에서든지 백색과 보라색, 심지어 청색의 수국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한적한 길을 돌고 돌아 한참 걷다 보니 다리가 보였다. 토후쿠지 경내로 진입하는 다리이다. 경내도에 따르면 이를 와운교( 臥雲橋)라 한다.
와운교는 토후쿠지에 세개가 있는 다리중의 하나인데. 이 와운교를 포함하여 통천교(通天橋), 언월교(偃月橋)를 토후쿠지 삼명교(三名橋)라 한다.
통천교(通天橋) 단풍
나무로 만든 다리 와운교 위에서 토후쿠지의 경내가 일부 보였다. 경치가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두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은 매우 유명한 통천교(通天橋)이었다. 특히 단풍이 들었을 때 명소라 한다. 그래서 단풍철이 되면 수 많은 관광객들이 통천교의 단풍을 보기 위하여 찾아 온다고 한다.
통천교 단풍
통천교 단풍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쿄토에서도 유수의 홍엽(단풍)의 명소로서 알려져 있는 동복사. 경내에는 통천 이르와 등 5종의 단풍이 약 2,000수가 있고 만추에는 관광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엔니(개산조)가 송나라로부터 가져온 통천모미지(通天モミジ, 잎이 3개로 분기된 단풍= 唐楓)가 특히 유명하다.
(通天モミジ)
통천교에 심어진 단풍은 토후쿠지 창립자 엔니(円爾)스님이 당나라에서 들여 온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를 당나라 단풍이라는 뜻으로 ‘당풍(唐楓)’이라 하는데, 잎이 세갈래로 갈라져 있다, 이를 통천모미지(通天モミジ)라 한다. 통천모미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 통천교는 1380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1959년 태풍으로 붕괴 된 것을 다시 재건 하였는데, 교각 끝 부분은 철근 콘크리트로 되어 있다고 한다.
왜 대궐 같은 큰 절을 짓게 되었을까?
와운교를 건너 경내에 들어 갔다. 경내에 들어서자 느낀 것은 한마디로 “거대하다!”라는 감탄사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근정전을 보는 듯한 커다란 법당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하게 만든다. 또 본당 바로 앞 커다란 2층 건물(삼문) 또한 거대하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왜 이렇게 대궐 같은 큰 절을 짓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복사는 쿄토시 동산구 동남단, 후시미구와 경계를 접하는 부근에 있는데, 924년 후지와라 노 다다히라(藤原忠平, 880-949)의 의하여 건립된 된 후지와라씨의 가문의 사찰인 법성사라는 거대한 가람이 있던 곳이라 한다. 그런데 1236년 가마쿠라 쇼군 후지와라 노 요리츠네(藤原 頼経)의 아버지(섭정)인 쿠조 미에이치(九条道家, 1193-1252)가 대사원 설립 발원을 한 것이 토후쿠지의 시작이다.
(東福寺)
이와 같이 가마쿠라시대 당시 실력자에 의하여 처음부터 큰 절을 짓기로 작정한 것이 토후쿠지이다. 그래서일까 절 이름에 대한 유래도 큰 것과 관련이 있다. 나라시대의 가장 크다는 두개의 절인 ‘동대사(東大寺)’와 ‘흥복사(興福寺)’에서 각각 1자씩 취하여 동복사(東福寺, 토후쿠지)라 명명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력자의 발원에 따라 절이 건립되었기 때문에 절의 규모가 클 수 밖에 없다. 또 절이 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불상에 있다. 절이 설립될 당시 높이 5척에 달하는 본존석가상상의 크기에 맞추어 법당이 건립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가 1255년이다.
거대한 본당 건물
하지만 절은 1319년에 소실되었다. 14세기에 다시 재흥되었지만 메이지 시대인 1881년 또다시 소실되었다. 지금 보고 있는 거대한 본당 건물은 1917년 재건 공사를 하여 1934년에 완공 된 것이라 한다.
본당의 규모는 매우 크다. 높이가 25미터에 이르고 길이가 41미터이다. 쇼와시대 목조건축으로서는 최대급이라 한다.
법당안의 어떤 모습일까. 법당안을 보니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법당의 규모에 비하여 초라할 정도로 작다.
이렇게 법당의 규모에 비하여 매우 작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지만 일본의 중세기(가마쿠라시대)에 만든 작품이라 한다. 더구나 메이지 시대 화재가 났을 때 화마를 면하여 오늘 날까지 보존 되고 있는데, 중앙이 석가모니불이고 아난과 가섭이 협시로 되어 있다.
토후쿠지 건조물 문화재 리스트
토후쿠지에는 수 많은 문화재가 있다. 건조물, 회화, 조각-공예품, 서적 등이 있는데, 이중 토후쿠지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건조물 문화재 리스트를 보면 다음과 같다.
토후쿠지 건조물 문화재 리스트
名称 |
時代 |
備考 | |
国宝 |
室町 応永12(1405) |
||
重文 |
室町 前期 |
||
重文 |
東福寺偃月橋 |
桃山 慶長8(1603) |
|
重文 |
室町 前期 |
旧称万寿寺 | |
重文 |
東福寺鐘楼 |
室町 中期 |
旧称万寿寺 |
重文 |
鎌倉 前期 |
||
重文 |
室町 前期 |
||
重文 |
室町 長禄3(1459) |
||
重文 |
桃山 慶長2(1597) |
旧称万寿寺 | |
重文 |
鎌倉 前期 |
||
重文 |
室町 康永2(1343) |
||
重文 |
東福寺常楽庵 |
江戸 文政6~9(1823~1826) |
|
国宝 |
竜吟庵方丈 |
室町 嘉慶元(1387) |
竜吟庵 |
重文 |
竜吟庵庫裏 |
室町 慶長8(1603) |
竜吟庵 |
重文 |
竜吟庵表門 |
桃山 |
竜吟庵 |
府指定 |
東福寺五社成就宮 |
室町 後期 |
|
府指定 |
江戸 寛政5(1793) |
||
府指定 |
東福寺大鐘楼 |
江戸 寛文11(1672) |
|
府指定 |
室町 後期 |
||
府指定 |
東福寺臥雲橋 |
弘化4(1847) |
|
府指定 |
東福寺南大門 |
桃山時代 |
|
府指定 |
東福寺中大門 |
桃山時代 |
|
府指定 |
東福寺北大門 |
桃山時代 |
|
府指定 |
東福寺日下門 |
桃山時代 |
|
府指定 |
桃山 天正18(1594) |
||
府指定 |
退耕庵客殿 |
桃山~江戸 慶長年間 |
退耕庵 |
府登録 |
万寿寺客殿 |
江戸 中期 |
万寿寺 |
이 많은 문화재를 주어진 1시간 이내 본다는 것은 무리이다. 더구나 문화재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과 숨겨진 이야기까지 알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사전에 자료를 조사하여 미리 공부를 한다거나 몇 차례 더 방문하여 그 의미를 파악한다면 모를까 주마간산격의 패키지 관광에서 단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겉보기에 지나지 않은 순례이었을지라도 순례기를 작성하면서 다시 한번 되돌아 보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몰랐던 사실도 많이 알게 된다. 여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것만이 아니라 되돌아 보는 것도 여행의 과정에 포함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행이라는 것이 가기 전의 설레임, 현장에서 감동, 그리고 되새겨 보는 즐거움이 있다는 말이 생겨 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본 최고(最古)의 선종사찰 삼문(三門)
토후쿠지의 수 많은 건조물 리스트에서 눈에 띄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삼문’이 있다. 삼문은 일본 국보로 지정 되어 있다. 국보로 지정되었다는 의미는 오래 전에 만들어 잘 보존 되어 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삼문은 1425년에 건립 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현존하는 선종사찰의 삼문으로서는 일본최고 (日本最古)라 한다.
사방에 정원이 있는 방장(方丈)건물
방장(方丈)건물이 있다. 이 건물은 메이지시대 1890년에 재건 되었다고 한다. 소헌황태후(昭憲皇太后)가 하사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방장 주변에 정원이 있다는 것이다. 근대의 정원가인 시게모리 미래이(重森三玲, 1896-1975)에 의하여 1938년 조성된 것이라 한다.
호장한 모습의 선당(禅堂)
또 하나 인상적인 일본식 건물이 있다. 와운교를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고풍스런 건조물이 있는데, 이를 ‘선당(禅堂)’이라 한다. 토후쿠지가 선종사찰이기 때문에 참선을 하는 곳이라 볼 수 있다.
선당은 옛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1347년에 건조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건물 모습에 대하여 위키백과에서는 ‘호장한 모습(豪壮な姿)’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중세기부터 현존하는 최고로 오래된 선당이라 한다.
맞배지붕 형식
토후쿠지 선당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은 전면 보다 측면을 강조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건물형태는 ‘맞배지붕’형태와 비슷하다. 맞배지붕은 지붕형식이 가장 간결한 人자형, 八자형을 말한다.
맞배지붕형식은 일본 절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니죠성의 니노마루도 같은 형태라 볼 수 있다. 옆면을 강조하다 보니 출입구을 옆면에 만들어 놓은 것 역시 일본 절의 특징이다. 그런데 맞배지붕 형식의 일본절의 건물을 보면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덕사 대웅전은 대표적인 맞배지붕형식이기 때문이다.
옆모습에 반한 수덕사 대웅전
순례법회에서 본 수덕사 대웅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런 대웅전은 1308년 건조된 건물로서 7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조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국보이다. 그런데 대웅전의 옆모습에 반하였다. 전면 보다 측면이 더 아름다운 것이다. 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덕사 대웅전
우리나라 절의 대웅전이 대부분 팔작지붕 형태로 되어 있어서 측면은 볼 것이 없는데, 수덕사 대웅전은 맞배지붕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측면이 볼 만 했다. 특히 측면에 나무로 된 공포가 인상적이었다. 이런 형태의 공포는 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수덕사의 건축형태에 대하여 백과사전에 따르면 ‘백제계의 건축양식’이라 하였다.
백제계의 건축양식이란 어떤 것일까. 백과사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마루보와 대들보의 낙차를 크게 두고 우미량을 겹으로 걸어 지붕에서부터 계속된 우미량의 율동미가 소슬합장의 곡선, 이중량(二重樑)의 곡면과 함께 백제계 특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수덕사 대웅전)
이처럼 백제계 건축양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것이 수덕사 대웅전이고, 특히 옆모습이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눈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것
그런데 이번 일본사찰 순례를 다니면서 느낀 것은 일본의 절에서 수덕사 대웅전 측면과 비슷한 형태를 많이 목격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이곳 토후쿠지의 선당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토후쿠지(東福寺) 선당(禅堂)건물
토후쿠지 선당 건물의 측면을 보면 한 눈으로 보아도 수덕사 대웅전의 측면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일본의 절 건축물은 예로부터 백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스카시대의 문화는 곧 백제의 문화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도래 하여 일본에서 본격적인 역사가 시작 되었고, 또 일본에 불교를 알려 준 나라가 백제이다. 이처럼 고대일본에 있어서 백제문화의 영향권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전통이 고스란히 일본문화에 녹아 들어가 있는데, 그런 것 중의 하나가 토후쿠지의 선당에서 보는 건축형태라 보여진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백제건축양식이 그대로 녹아 들어가 있다는 수덕사의 대웅전 측면의 모습과 역시 백제장인의 건축양식을 간직하고 있는 토후쿠지의 선당이 유사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건조 시기도 비슷하다. 수덕사 대웅전은 1308년에 건조되었고, 토후쿠지 선당은 1347년에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항상 아름다운 낙원과 같은 곳
다음으로 상락암(常楽庵)이다. 상락암은 단풍으로 아름다운 통천교를 건너야 한다. 통천교는 단풍으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주변경관도 매우 뛰어나다.
통천교를 지나 상락암에 도착 하였다. 상락암은 토후쿠지 북측에 위치 하고 있는데, 개산당과 보문원 두 개의 전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문원
개산당
개산당은 토후쿠지의 창립자 엔니(円爾, 1202-1280)스님의 상을 안치 해 놓은 곳이다.
그런데 개산당을 보면 2층 누각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개산당을 전의각(伝衣閣,でんねかく)이라 부르는데, 금각(金閣, 鹿苑寺)과 은각(銀閣, 慈照寺), 비운각(飛雲閣, 西本願寺), 탄호각(呑湖閣, 大徳寺塔頭芳春院) 등과 함께 쿄토오각(京の五閣)이라 한다.
상락암(常楽庵)은 문자가 의미 하듯이 항상 아름다운 낙원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일까 정원이 잘 꾸며져 있다. 이를 개산당 정원이라 한다. 개산당 정원에 대하여 토후쿠지 홈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普門院の前庭も兼ねた池泉鑑賞式庭園。開山堂への参道を中ほどまで進めば左手に枯山水の庭が開けます。枯山水は約百坪(330平方メートル)の平庭式で市松の砂紋をつけ、鶴島、亀島を象った石組を配して蓬莢山水をあらわし、対面の池庭は築山風、池中に亀島をつくり、枯滝を設けます。
禅院式と武家書院式とを調和させた江戸中期の代表的な名園とされています。
보문원 앞의 정원도 겸한 지천감상식정원, 개산당으로 참도 중간 정도에 좌우로 카레산스이(枯山水)의 정원이 펼쳐져 있다. 카레산스이는 약 백평(330평방미터)의 평정원이고, 시송의 가는 자갈무뉘를 만들어 학도,귀도를 상징한 석조를 취하여 봉래산수를 표현하고, 대면의 지정은 축산풍, 지중에 귀도를 만들어 고용을 설치 하였다.
선원식과 무가서원식과 조화시켜 에도 중기의 대표적 정원이다.
(開山堂庭園)
개산당 앞의 정원은 에도시대 중기에 만들어진 정원이라 한다. 그런데 그 기법이 ‘카레산스이(枯山水)’라는 것이다. 이는 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는 자갈을 사용하여 마치 물처럼 표현하는 양식을 말하는데, 료안지의 석정이 유명하다. 마치 료안지의 석정을 다시 보는 듯한 카레산스이 정원은 선종사찰에서 볼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정원양식이다.
1976년 신안해저에서 정크선이 인양되었는데
토후쿠지는 거대 사찰이다. 사찰마을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25개의 산내 사찰이 모여 있고, 더구나 경내의 건조물을 보면 거대하기 그지 없다. 이런 절을 짓기 위해서는 국가적 프로젝트라고 보여지는데, 토후쿠지와 관련한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서 그런 증거를 발견하였다. 다음과 같은 놀라운 사항이 있다.
東福寺の建設工事は30年以上に亘って続き、法堂(はっとう、顕教寺院の「講堂」にあたる)が完成したのは文永10年(1273年)であった。その後、元応元年(1319年)の火災をはじめたびたび焼失するが、九条家、鎌倉幕府、足利家、徳川家などの援助で再建されてきた。昭和51年(1976年)韓国の全羅南道新安郡智島邑道徳島沖の海底から、大量の荷を積んだジャンク船が発見、引き揚げられた(新安沈船)が、積荷木簡の中には「東福寺」「十貫公用」などの字が見られることから、この船は焼失した東福寺の造営料を名目として、鎌倉幕府公認で派遣された唐船(寺社造営料唐船)であることが推測されている。
토후쿠지 건설공사는 30년 이상 계속되었고, 법당(현교사원의 강당에 해당된다)이 완성 된 것은 때가 1273년이었다. 그 후 1319년의 화재를 시작으로 자 소실 되었지만, 쿠조가(九条家),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아시카가가(足利家), 토쿠가와가(徳川家) 등의 원조로 재건되어 왔다.
그런데 1976년 한국의 전남 신안군 지도읍 도덕도 난바다 해저로부터 대량의 짐을 실은 정크선이 발견 되어 인양되었는데, 적하목간 중에 동복사 십관공용 등의 문자가 발견 되었기 때문에, 이 배는 소실된 동복사의 조용료를 명목으로서 가마쿠라 막부 공인으로 파견된 당선(寺社造営料唐船-사사조영료당선) 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東福寺)
1976년 우리나라에서 신안해저 유물이 발견되었다. 도자기 등을 가득실은 당과의 무역선이 발견 되었는데,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고, 유물은 특별히 전시 되고 있다.
그런데 그 신안 해저에 좌초된 선박이 토후쿠지 재건을 위한 무역선박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물품목록이 기록된 목간에 ‘동복사 (東福寺-토후쿠지)’ ‘십관공용(十貫公用)’이라는 문자가 발견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정크선
신안해저에서 발견된 선박의 형태.
신안해저에서는 18000점의 도자기,
25톤-800만매의 동전,
그리고 346점의 목간이 발견되었다.
사사조영료당선(寺社造営料唐船)이란 무엇인가
가마쿠라막부 당시 중국과 무역하는데 사용된 당선을 ‘사사조영료당선(寺社造営料唐船)’이라 하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寺社造営料唐船(じしゃぞうえいりょうとうせん)は、14世紀前半(鎌倉時代末期から南北朝時代にかけて)に、主要な寺社の造営(修復・増築を含む)費用を獲得することを名目として、幕府の認可の下、日本から元に対して派遣された貿易船群のことである。特に建長寺船・天龍寺船などが有名。日中関係史において、元寇による関係悪化(13世紀)と日明貿易(15世紀)の間の時期をつなぐ、半官半民的な交易船である。
사사조영료당선은 14세기 전반(가마쿠라시대 말기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서)에 주요한 사사의 조영(수복, 증축을 포함한다)비용을 획득하는 것을 명목으로 하여 막부의 인가하에 일본으로부터 원나라로 파견된 무역선군을 말한다. 특히 건장사선-천룡사선 등이 유명하다. 일중관계사에 있어서 원구(元寇, 몽고군 내침의 난)에 따른 관계악화(13세기)와 일명무역(15세기)의 사이에 시기를 연결하는 반관반민적인 교역선이다.
(寺社造営料唐船)
사사조용료당선은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하에 만들어진 반관반민 무역선이라 한다. 명목은 소실된 사찰의 재건을 위하여 만든 것이라 하지만 실질적으로 원나라와의 관계개선용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것이다.
국가에서 직접 나서지 않고 사찰재건용이라는 명목으로 반관반민의 무역을 하였지만, 무역선의 실질적인 주체는 ‘상인’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무역선의 주체는 상인이고 막부나 동복사 등이 하주(荷主)라 볼 수 있다.
진귀한 물품 천목다완(天目茶碗)
하주들은 일본에서 볼 수 없는 진귀한 물품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여 판매하였는데, 참고로 신안에서 발견된 물품은 백자, 청자의 천목다완(天目茶碗, てんもくぢゃわん)등 18000점의 도자기라 한다. 이중 천목다완은 매우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천목다완은 송대 중국 절강성 ‘덕청요(徳清窯)’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일본에서 선종이 성행하게 되었을 때 선사들이 중국유학후에 차를 마시기 위하여 가지고 들어 온 것이 천목다완이다. 그래서 일본에 많이 알려 지게 되었는데, 다완중에서도 철광택이 나는 것을 천목(天目)이라 한다. 또 천목다완은 특히 별구(鼈口, 자라입)를 갖는 2단의 입구구조로 되어 있어서 보온효과가 뛰어 나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 당시 다도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송대의 천목다완
(宋代の天目茶碗)
이처럼 화주들은 일본에서 구입할 수 없는 귀한 물품을 대량구입하여 일본에 판매하여 이윤을 취득 하였는데, 토후쿠지 역시 이와 같은 중국과의 무역을 통한 이득으로 재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토후쿠지에서 발견한 한국흔적 두 가지
불과 1시간 여 밖에 주어지지 않는 패키지 여행에서 토후쿠지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었다. 주마간산격으로 겉 모습만 둘러 보고 사진과 동영상을 남기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순례기를 작성하면서 몰랐던 사항을 많이 알게 되었다. 특히 토후쿠지가 우리나라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신안에서 발견된 해저 유물이 토후쿠지 재건과 관련된 무역선이라는 사실은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사항이고, 또하나 놀라운 사실은 일본절의 건축물이 백제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증거로서 수덕사 대웅전의 측면 모습과 일본 절의 측면이 너무나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일본에서 지금까지 백제의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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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질렀을까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킨카쿠지(金閣寺) (0) | 2012.06.27 |
노래하는 마루, 대정봉환의 무대 니조성 (0) | 2012.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