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 ‘젠(ZEN, 禪) 붐’의 발원지 료안지(龍安寺)

담마다사 이병욱 2012. 6. 30. 12:14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 ‘(ZEN, ) 의 발원지 료안지(龍安寺)

 

 

(8)일본성지순례 2일차(2012-06-06): 료안지(龍安寺)

 

 

 

 

킨카쿠지(금각사) 순례를 마치자 오전 일정이 끝났다. 순례 두번째 날 점심은 한식으로 하기로 하였다. 킨카쿠지 옆에 있는 한식당이다. 한식당이라고 하여 규모가 큰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라면집 보다 약간 더 큰 정도 되는 자그마한 식당이다.

 

 

 

 

 

 

거리를 둘러 보았다. 버스정거장이 보였다. 도시에 있는 우리나라 버스 정거장과 유사하다. 하지만 교통정보시스템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자전거 길도 있어서 자건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도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자전거 길은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다.

 

 

 

 

 

일본의 차는 어떨까. 세계적인 자동차메이커가 즐비한 일본에서 보통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매우 작아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최근 자주 볼 수 있는 각진 소형차 스타일이다.

 

 

 

 

 

 

한국인이 주인인 식당에서 준비된 비빔밥을 먹고 다음 목적지 료안지(龍安寺)로 출발하였다.  료안지는 어디에 있을까. 지도로 검색해 보았다.

 

 

 

 

 

료안지(龍安寺) 지도

 

   

 

주지스님은 바쁘다

 

쿄토지도를 보니 킨카쿠지 바로 옆에 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쿄토에는 절이 무척 많다. ()자 표시가 수 없이 지도에 보이는데, 실제로 사람이 사는 시내 곳곳에서도 절을 볼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사람이 사는 주택가에도 절이 많은데, 절안에는 납골당이 있다. 그래서 스님들은 바쁘다고 한다. 납골당을 만들어 사찰의 수입을 확대하기 위하여 영업하기 때문이라 한다. 

 

일본에도 교회가 있다!

 

이렇게 절이 많은 일본에서 교회는 없을까. 쿄토에서도 교회가 있다. 킨카쿠지 옆 한국식당 바로 옆에 가톨릭 성당이 있었다.

 

 

 

 

 

 

우리나라 성당처럼 규모가 크지 않다. 하얀건물에 십자가가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보는 십자가처럼 화려 하지 않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다.

 

일본에서는 좀처럼 교회를 구경할 수 없다. 널린 것이 교회와 보이는 것이 십자가 뿐인 우리나라와 영 딴판이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 보면 가물에 콩나듯 교회가 보인다.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에 비친 교회를 찍어 보았다.

 

 

 

 

 

우리나라 교회처럼 크고 화려 하지 않다. 보통 중급 정도 사이즈의 교회이다. 그럼에도 생긴 형태는 우리나라 교회와 매우 흡사 하다. 서양식 건물에 높은 첨탑에는 십자가가 하늘 높이 걸려 있는 것은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보여진다.

 

온통 숲에 덥혀 있는 료안지(龍安寺)

 

료안지(龍安寺)에 도착하였다. 산 가까이에 있어서 일까 절은 온통 숲에 덥혀 있다. 6월의 맑고 따가운 햇살이 비추지만 나무 그늘이 있어서 공기는 상쾌 하였다.

 

 

 

 

 

 

 

 

 

 

 

 

 

 

 

 

 

 

 

 

 

 

 

 

 

 

 

 

 

방장(方丈) 건물

 

마치 산책코스 같은 녹음이 무성한 길을 따라 가자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였다. 석정(石庭)이 있는 건물이다.

 

 

 

 

 

 

 

 

 

 

이 건물은 방장(方丈)이라고 부른다. 목조로 지은 매우 큰 건물이다. 일본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중요문화재라 하고, 1606년 건축된 것이라 한다.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어 있다.

 

방장건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들어 가면 매우 널직한 마루가 나온다.

 

 

 

 

 

원래 이 방장건물에 카노하(狩野派, 일본화의 한 유파, 室町시대 후기에 狩野正信에서 비롯됨) 기법에 따른 미닫이 그림() 7매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이지시대 폐불훼석(廃仏毀釈)에 따라 곤궁에 처하자 매각되고 흩어져 버렸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은 쇼와(昭和)시대에 그려 진 것으로서 화재도 다른 것이라 한다.

 

 

 

 

 

 

 

돌정원 석정(石庭)

 

방장건물에 신발을 벗고 들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아닌 돌정원 석정(石庭)을 구경하기 위해서이다. 건물 바로 앞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석정이 있기 때문이다.

 

 

 

 

 

 

 

 

 

 

 

돌정원을 구경하기 위해서 일본인 들 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보인다. 그들은 마루에 편하게 앉아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원의 돌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마치 선()수행을 하는 듯이

 

그들은 이 작은 정원에서 무엇을 보고자 함일까. 그리고 무엇을 느끼고자 함일까. 한가로이 앉아 있는 모습이 몹시 바쁜 여행일정 중에 몹시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렇게 료안지(용안사)는 모든 것이 여유롭고 한가해 보인다. 바삐 걷는 모습이나 서두는 듯한 기색이 없다.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선수행을 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물이 없어도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설명에 따르면 요안지의 석정(石庭, 돌정원)은 카레산스이(枯山水)라 한다. 그런 카레산스이는 어떤 것일까.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枯山水のないのことで、遣水などのいずになどにより山水風景表現する庭園えば白砂小石いて水面見立ることがく、かっていればそのである。表面れを表現することもある

 

카레산스이는 물이 없는 정원으로서 연못이나 관수등의 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이나 모래등으로 산수의 풍경을 표현하는 정원양식. 예를 들면 백사나 작은 돌을 깔아서 수면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많고, 다리가 걸려 있다면 그 밑은 물이다. 돌의 표면의 문양으로 물의 흐름을 하는 것도 있다.

 

(枯山水)

 

 

 

 

 

 

카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의 특징은 물이 없는 곳에서 물이 있는 것처럼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양식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이어지는 위키피디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抽象的表現室町時代寺院いられした。従来庭園でも技法として庭園一部いられ、殿造庭園でも枯山水部分大名屋敷られていく回遊式庭園枯山水んでいることがあったが、寺院いられて以降した庭園としてられるようになった。日本庭園られる場所くものであったが、枯山水登場後ずしも使わなくとも造園可能になった。

 

추상적인 표현의 정원이 무로마치시대의 선종사원에서 특히 사용되고 발달되었다.

 

종래의 정원에서도 기법으로서 정원의 일부로 사용되고, 침전조정원(殿造庭園) 에서도 카레산스이(枯山水)의 부분을 포함하여 디이묘저택에서 조성되고 있는 회유식정원(回遊式庭園)도 카레산스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있지만, 선종사원에서 사용된 이래 독립된 정원으로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정원은 물을 취득 하는 장소에 축조 되어 왔지만, 카레산스이양식의 등장후 반드시 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조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枯山水)

 

 

 

 

 

 

카레산스이(枯山水)양식은 선종사찰에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선종사찰에서 만든 정원은 파격적이라 한다. 이제까지 물이 있는 정원의 관행을 깨 버린 것이다. 그래서 물이 없어도 정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 대표적으로 이곳 료안지(龍安寺)의 석정(돌정원)이라는 것이다.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

 

이처럼 료안지(龍安寺), 사이호지(西芳寺), 다이토쿠지() 등에서 볼 수 있는 카레산스이(枯山水) 양식이 대표적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이곳 료안지의 석정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료안지의 석정은 무로마치시대(室町幕府, 1338-1573) 말기작으로서 특방선걸들 (特芳)이라고 불리우는 뛰어난 선승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그렇다면 석정에 놓여 있는 돌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일어판 위키피디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5は、をどちらからめても、1れてえないように設計されているという。しかし、部屋から1だけ15石全てがえる位置がある。ハルトバントンダマイケルライオンズによれば、それは方丈中心であり、15配置は、ここを根元とする「二分岐構造」になっているという。ただし、この程度面積15べれば、そのうちの1つはれてえなくなるのはむしろのことだとする意見もあり、これを表現意とするにはがある。なお、東洋では十五夜)にあたる15というを「完全」をすものとしてとらえる思想があり、151りない14は「不完全さ」をすとされている。また、日本には、日光東照宮陽明門にみられるように、「物事完成した時点からまる」という思想があり、建造物をわざと不完全なままにしておくことがある。

 

모두 15개의 돌은 정원의 어느 곳에서 쳐다 보아도 반드시 한 개는 다른 돌에 숨겨져 볼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한다. 중앙의 위치 오직 한곳만 15개의 돌 전부 불수 있는 것이다.

 

Gert Van Tonder and Michael Lyons에 따르면 고승의 처소에 중심이 있고 15개의 돌 배치는 이곳을 근원으로 한 이분기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단 이정도의 면적의 정원에 15개의 돌을 배열하면 그 중 1개는 숨겨져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이것을 표현의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찬반양론이 있다. , 동양에서는 십오야(만월)에 해당하는 15라는 숫자를 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 15 1개 부족한 14는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일본동조궁의 양명문에 보여지는 것과 같이 사물은 완성시점에서 붕괴가 시작된다라는 사상이 있고, 건조물을 일부러 불완전한 채 해 놓는 것이다.

 

(龍安寺)

 

 

 

 

 

 

료안지에 대한 블로그나 카페, 또는 그 외 사이트의 소개를 보면 15개의 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 보아다 14개 만 보일 뿐, 15개를 다 보려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야 볼 수 있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일본어판 위키에 소개된 내용에 따르면 다분히 불교적 의미가 매우 강하다. 15개는 보름달과 같이 완성을 의미하므로 14개가 보일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완성되면 그 순간 붕괴가 시작 되기 때문이라 한다. 보름달이 되면 이제 기울어지는 일만 남았듯이 항상 14인 채로, 덜 완성된 채로 남아 있다면 붕괴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선의 일곱가지 정신

 

이와 같이 료안지는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일본 무로마치 시대 뛰어난 선승들이 만든 작품이다. 그런 돌정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파격과 간결함, 그리고 무언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선()의 특징인데, 무비스님은 불교TV ‘서장강의에서 선의 정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일곱가지로 설명하였다.

 

 

1.간소(簡素)

2. 탈속(脫俗)

3.자연(自然)

4.유현(幽玄)

5.고고(枯高)

6. 정적(靜寂)

7. 변화(變化)

(()의 일곱가지 정신)

 

 

간소, 탈속, 자연, 유현, 고고, 정적, 변화  이렇게 일곱가지가 선의 7대 정신이라 한다. 즉,  선은 간단하고 명료 하고 소박한 것이라 한다. 선은 또 속기가 붙지 않은 탈속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항상 자연과 함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선은 깊고 깊은 것이어서 그 오묘한 맛을 범부들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선은 벼랑위에 있는 깡마른 고목처럼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처럼 홀로 서 있듯이 고고하다는 것이다.

 

또한 선은 고요한 가운데 변화무쌍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무비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참선 좀 한다. 공부 좀 한다. 불교 좀 한다. 모두 한 불교 하는 분들 모였네요. 한 불교 한다 하면 그만 자기 아집이 생기는 겁니다. 자기 틀이 딱 생겨요. 불교를 안한 사람은 없는데 한 불교 한다는 사람은 전부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틀이 생기는 겁니다.선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변화라는 말이 참 매력 있지요? 선은 꼭 이래야 된다고 고정되어 있는 것을 아주 거부 합니다.

 

사실은요. 댓돌 위에 신을 가지런하게 벗어놓고, 또 선방에 가 보면 방석을 손이 베일 정도로 모를 세워서 착~ 정리해 놓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무질서 할 때는 아주 무질서 합니다. 어디를 찾아볼 수 없게 무질서한 것이 수좌들, 선객들입니다. 그러면서 질서가 있을 때는 정말 서릿발 같은 질서를 세울 줄 아는 것이 禪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변화! 고정 되어 있지 않아요. 가지런하지가 않아요. 한결 같지가 않아요.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선을 제대로 한사람은 그런 변화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생명이지요.

 

선은 생명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생명력을 극대화 하는 한 작업이고, 한 방편이 이 선이고, 그 중에서도 간화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못해서 호국불교니 기도불교니 기복 불교니 별별 불교를 하지만, 그래도 그 중심에는 선이 있어요. 선이 생명입니다. 선불교가 면면이 중심에서 자리를 지켜 왔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이렇게 있는 겁니다.

 

(무비스님, 서장 강좌)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

 

이처럼 선에는 일곱가지 고유의 정신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선의 정신을 이곳 료안지에서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고요함 가운데 알 듯 모를 듯 한 선문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방장(方丈) 건물 뒤에 있는 지족의 준거(知足蹲踞)’일 것이다.

 

지족의 준거라 불리우는 것은 일종의 약수물처럼 보인다. 대나무 대롱을 이용하여 물이 떨어지게 만들어 놓았고, 거기에다 물을 떠 마실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바가지도 있다. 하지만 약수물의 용도는 아닌 것으로 본다. 일본어판 위키에 따르면 다실에 들기 전 손이나 입을 청결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준거(蹲踞)’라 하여 고상한 한자어를 사용 하였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대나무 대롱을 받는 동그란 돌이 있고 그 안은 네모 모양으로 파여 있다. 그리고 네모 바깥에는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왜 이와 같은 문구를 새겨 놓았을까.

 

오유지족(吾唯知足)에 대한 뜻은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われ、ただるを)”라는 뜻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소욕지족 (少欲知足)을 말한다.

 

 

가장 불교적인 삶, 소욕지족(少欲知足)

 

소욕지족은 청정도론에 따르면 여기서 소욕과 지족은 탐욕 없음(不貪)이다(2장 두타행, 85)”라고 설명 되어 있다. 그래서 소욕지족은 지금 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삶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단지 족함을 아는 소욕지족의 삶은 수행자들의 삶 그 자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탁발을 나가는 비구들의 모습을 보면 소욕지족의 삶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청정도론에 소욕지족과 관련된 가르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다시 비구가 공손하고, 정중하고, 양심과 수치심을 갖추고,

속옷을 단정히 하고 겉옷으로 잘 가려서 입고,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갈 때나 앞으로 보고 옆으로 볼 때나

구부리고 펼때나 그의 자태는 확신에 차 있으며,

눈을 내리뜨고, 위의가 반듯하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고,

음식에서 적당량을 알고, 항상 깨어 있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

소욕하고, 지족하며, 부지런히 정진하고, 선행을 성심으로 하고,

공경해야 할 분을 극진히 공경하면서 머문다.

이것을 일러 바른 행실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바른 행실을 알아야 한다.

 

(청정도론 제1장 계, 48)

 

 

이처럼 수행자는 소욕하고 지족 하는 삶을 살아 가야 하는데, 료안지의 바위에 새겨진 문구 역시 지족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15개의 돌을 못 보았다고 하여

 

이런 면으로 보아 오유지족(吾唯知足)’이라는 문구는 불교적 가치관이 잘 반영되었다고 보는데, 이 문구와 관련하여 일본어판 위키에서는 석정의 15개의 돌과 연결하여 다음과 같이 또 설명하고 있다.

 

 

ここの蹲踞には「吾唯知足」(われ、ただるをる)の4まれているが、その意味合いから石庭が「一度14しか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を「わずするちなさい」というめでもあるといわれる

 

여기서 준거(蹲踞)’ 오유지족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지만 그 의미가 함축하는 것은 석정의 돌이 한번에 14개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에 대하여  불만으로 생각하지 않고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시요라는 훈계도 있다고 말해 진다.

 

(龍安寺)

 

 

 

 

 

 

 

15개로 이루어져 있는 석정의 돌은 어느 곳에서 보아도 14개 밖에 볼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15개의 돌을 다 보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15개 다 볼 수 없지만 그런 마음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이 오유지족(吾唯知足)의 마음 즉, 그대여, 단지 족함을 알라(われ、ただるを)”라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고 한다.

 

‘젠(ZEN, )’ 붐의 발원지

 

우리나라에서 한 때 “가장 한국적인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유행하던 적이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물러나고 민주화된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부터이다. 그래서 신토불이라는 말과 함께 유행한 이 말은  곧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보전 하자는 뜻으로 받아 들여 졌다. 그 결과 많은 무형의 문화재가 발굴되기도 하고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다시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 이상  “가장 한국적인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좀처럼 듣기 어렵게 되었다.

 

“가장 한국적인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은 오로지 한국에만 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계유일의 것이 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의미로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으로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가장 세계적인 것을 들라면 일본의 선이 될 것이다.

 

일본선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선에 대하여 관심 있는 사람치고 전세계적으로 ‘젠(ZEN, )’ 이라는 용어를  모를 정도가 되었다. 그런 젠이라는 말은 어떻게 세계화 되었을까.

 

일본선을 세계에 널리 알린 사람은 20세기 초 선승이자 불교학자인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이다. 하지만 위키피디아 자료에 따르면 일본선이 다시 한번 유명해진 것은 1975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료안지를 방문하여 석정을 견학하고 나서 부터라고 한다. 이 견학으로 인하여 세계 각지에 일본의 ‘젠(ZEN, )’ 붐이 일었고, 그에 따라 료안지의 경우 일본 내국인 보다 해외 관광객 비율이 높아진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선은 가장 일본적이다. 그런 일본선의 진수를 볼 수 있는 곳이 료안지인데, 이는 바로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선의 경우 일본이 이미 젠(ZEN, )이라는 이름으로 선점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것은 무엇일까.

 

 

2012-06-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