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맛에 대한 갈애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9. 18:33

 

 

맛에 대한 갈애

 

 

 

커피에 대한 글을더니

 

커피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세라믹 필터가 첨부된 머그컵을 샀었는데, 이를 원두커피 내려 마시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평소 불교관련 이야기만 하다가 갑자기 커피에 대한 글을 썼더니 커피에 대하여 잘 아는 법우님이 글을 남겨 주셨다. 커피를 맛 있게 만드는 방법에 대한 글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제가 커피를 좋아해서 커피 학원을 다녔어요 ^^ 그 후론 집에서 매일 만들어먹는데, 오늘 커피관련글을 쓰셨네요 ^^ 커피를 맛있게 드시려면 원두보관이 제일 중요합니다. 저는 원두를 사서 집에서 갈아서 쓰는데요 간원두를 사실때는 제일 작은 사이즈로 구입하시는데 좋아요 왜냐면 산소와의 접촉시간에 비례해서 (간)원두의 맛도 현격하게 떨어지거든요. 저도 귀찮지만 조금씩 갈아서 바로바로 만들어먹는답니다.원두보관도 이중삼중으로 해서 공기와 차단하고요, 물온도도 중요하긴 한데..아무튼 학원에서 제일 강조한게 산소와의 접촉이라 ㅎㅎ 혹시나 도움이 될까해서 댓글답니다. 그리고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처님가르침 공부하는데 연꽃님 블로그가 제일 도움이 된답니다. _()_

 

(ㅇ법우님)

 

 

법우님의 글에 따르면 공기와의 접촉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갈아 진 원두가 공기와 접촉하는 시간이 많아지면 커피 특유의 맛이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래서 가급적 시간이 들더라도 그 때 그 때 갈아 마시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를 실천해 보았다.

 

직접 갈아 만든 원두커피

 

갈아서 마시는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라인더가 필요 하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가장 저렴한 것으로 구매 하였다. 전동식이 아닌 수동식이다. 그리고 갈지 않은 원두 한 봉지를 구입하였다. 이렇게 준비가 되자 여러 단계를 거쳐 원두 커피를 만들 수 있었다.

 

 

 

 

 

 

 

 

 

 

 

 

 

 

 

 

 

 

 

 

 

 

 

 

 

 

 

 

 

 

 

원두커피의 맛은 산소 접촉을 최소화 하는 것이 키포인트라 하여 그대로 실천하여 맛을 보았다. 노력과 정성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전의 갈아진 원두를 사용한 것과 비교하여 맛이 다른 것 같다. 그 이후로 계속 갈아 마시고 있다.

 

점심 한 끼 비용의 커피값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것이 커피이다. 주로 봉지커피를 마신다. 설탕과 프림이 들어간 봉지커피는 대표적인 인스턴트 식품이다. 끓인 물을 붓기만 하면 즉석에서 만들어진다. 또 자판기의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몇 초 이내로 단 맛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 사람들은 매일 이런 봉지 커피를 하루 에도 여러 잔 마신다. 어떤 이는 하루에 10잔 이상 마신다고 한다.

 

이와 같이 커피 맛에 길들여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원두 커피 열풍이 불었다. 그래서 거리마다 원두커피 전문점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가격이 만만치 않다. 점심 한 끼 식사비용과 맞먹기 때문이다.

 

이렇게 커피를 선호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다. 이에 반하여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드믈다. 차맛을 아는 사람들이 마시는데, 커피와 비교하여 만드는 방법도 복잡하고 가격도 만만치 않아 일반화 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사람은 커피를 마시는 사람과 비교하여 1/10의 비율에 불과 하다고 한다.

 

커피나 차는 맛을 추구하는 기호품이다. 그래서 맛을 알게 되면 계속마시게 되어 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중독’이라 볼 수 있다. 마치 알코올중독자가 술을 끊지 못하듯이 커피와 차가 없으면 일손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커피 한 잔 또는 차 한 잔을 마시면 혈액순환이 되어 마음이 안정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루일과의 시작을 반드시 커피나 차로 시작 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번뇌를 유발하는 맛에 대한 탐착

 

기호품인 커피와 차를 포함하여 모든 음식은 맛을 바탕으로 한다. 맛을 알기 때문에 맛에 대한 탐착이 일어나 찾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맛에 대한 탐착은 수행에 방해 되는 요소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미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한다. 수행승들이여, 미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미각능력을 잘 다스려서 수호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M2)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에 따르면, 맛에 대한 탐착은 번뇌를 유발할 것이라 하였다. 미각능력을 다스리지 못 하였을 때 맛에 대한 탐착으로 인하여 맛을 추구함으로서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속퇴한 수행자

 

실제로 미각능력을 다스리지 못하여 수행을 그만 둔 경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

“벗이여, 싸리뿟따여, 도반 수행승이 배움을 버리고 속세의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싸리뿟따]

“벗이여,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에 알맞은 분량을 알지 못하고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 자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벗이여, 참으로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고 알맞은 분량을 알지 못하고 깨어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면, 그는 살아있는 동안, 충만하고  깨끗하고 청정한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리뿟따삿디위하리까경-Sāriputtasaddhivihārikasutta-사리뿟따의 도반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20(2-7),전재성님역)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못하여 속퇴한 수행자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수행자들은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런데 탁발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겪는다. 그 중에 하나가 음식에 대한 것이다.

 

형편에 따라 주는 대로 받아 먹는 음식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할 경우 어떻게 될까. 항상 부족하고 배고픔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맛있는 것을 바랄 것이다. 그런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더 이상 수행을 지속하지 못하고 포기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미각능력을 제어하지 않으면

 

이처럼 음식으로 인하여 수행을 그만 두게 되었을 때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미각으로 맛을 맛보더다라도 그 인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가 미각능력을 이렇게 제어하지 않으면, 그것을 원인으로 탐욕과 불만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이 그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제어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 미각능력을 보호하고 미각능력을 수호합니다.

 

(사리뿟따삿디위하리까경-Sāriputtasaddhivihārikasutta-사리뿟따의 도반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20(2-7),전재성님역)

 

 

수행자에게 있어서 음식은 초기경에 따르면 이 몸을 지탱하거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 목적을 벗어 나서 맛의 집착하면 제어가 되지 않아 결국 탐욕 등 불선법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결국 수행을 포기해야 될지도 모른다.

 

총상 (總相)과 세상(細相)

 

경에서 인상연상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이는 니밋따(nimitta)와 아누비얀자나(anuvyanjana)에 대한 것이다. 이를 총상 (總相)과 세상(細相) 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을 때 여자다  남자다라고 개념으로 보는 것을 총상(總相, nimitta)을 취하는 것이고, “눈이 예쁘다” “코가 높다등 구체적인 신체부위에 대한 상을 취하면 이를 세상(細相, anuvyanjana)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맛에 있어서도 총상(인상)과 세상(연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술병을 보면 소주이다라고 인식하여 소주라는 인상(총상)을 취하고, 이어서 혀로 느끼는 쓴 맛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맛이 연상(부분상) 되는 것이다.

  

 

 

 

 

 

 

 

 

라면국물 맛 때문에

 

지리산에서 수행하던 스님에 대한 책을 읽었다. 책의 저자는 지리산 깊은 산중에서 홀로 수행하면서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이 라면이라 하였다. 매콤한 라면국물 맛을 잊을 수 없어서 늘 먹고 싶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등산객이 라면을 주어서 먹게 되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결국 그 스님은 수행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여자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순리대로 살아 야 함을 강조하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맛에 대한 탐착을 극복하지 못하였을 때 결국 세속화 될 수 밖에 없고 더 이상 수행이 진척되지 않아 수행을 포기 하는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시각, 청각 등 여섯가지 능력에 탐착하는 것은 세속화의 지름길이고 또한 세상의 흐름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브리흐마야짜나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참으로 힘들게 성취한 진리를

왜 내가 지금 설해야 하나.

탐욕과 미움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 진리를 잘 이해하기 힘드네.

 

흐름을 거슬러가 오묘하며

심오하고 미세한 진리는 보기 어렵네.

어둠의 무리에 뒤덮인

탐욕에 물든 자들은 보지 못하네. (S6:1)

 

 

부처님은 부처님이 발견한 위없는 깨달음에 대하여 세상사람들은 이해 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번뇌를 제거하여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맛을 알고 나서부터

 

세상의 흐름대로 가는 것이 시각, 청각, 미각, 촉각 등 여섯가지 감각능력의 흐름대로 사는 것이다. 이 중 맛에 대한 탐착이 매우 강렬하다. 생존과도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맛에 대한 탐착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 디가니까야 아간냐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맛있는 땅의 출현)

 

[세존]

“바쎗타여,

그 때에 암흑, 칠흑 같은 어둠의 오로지 물의 존재가 있었다. 달과 태양도 나타나지 않았고, 별자리도 별빛도 나타나지 않았고, 밤과 낮도 나타나지 않았고 한 달과 보름도 나타나지 않았고, 계절과 일 년도 나타나지 않았고, 여자와 남자도 나타나지 않았고, 뭇삶은 단지 뭇삶이라고 여겨졌을 뿐이었다.

 

바쎗타여,

언제 어느 때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마치 끓인 유유가 식으면 그 위에 엷은 막이 생기는 것처럼, 맛있는 땅조각이 물 위에 막을 형성하며 나타났다. 그것은 아름답고 향기롭고 맛이 있었다. 마치 정제된 버터와 정제된 생버터와 같은 색깔을 지녔고, 순수한 야생꿀처럼 맛이 있었다.

 

바쎗타여,

그러자 어떤 뭇삶에게 ‘어참, 이것이야말로 무엇일까?’라고 동요가 생겨나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를 엄습했다.

 

바쎗타여,

다른 뭇삶들도 그 뭇삶을 모방하여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았다. 맛있는 땅조각을 손으로 맛보자 그것에 매료되어 갈애가 그들을 엄습했다.

 

(아간냐경-Aggaññasutta-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불교판 창세기라 볼 수 있는 아간냐경에서 암흑의 시대, 태초에 대한 설명이다. 우주가 형성되고 난 다음 천상에 살던 존재들이 수명과 공덕이 다하여 아래 세상에 화생하게 되었다. 경에 따르면 그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며,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세월을 산다.(D27)”라고 묘사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기쁨으로 먹고 사는 존재들이었으나 맛을 알고 나서부터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경에서 한 번 땅의 맛을 보자 동요가 일어나고 맛에 대한 ‘갈애가 급습’하였다고 표현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혀끝에 놓인 것만으로 칠천개의 미각신경이 퍼져나가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어 갈애가 생겨 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치 바이블에서 뱀의 유혹으로 사과를 따 먹게 되자 타락 되듯이, 한 번 맛을 보자 맛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점점 타락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빛나던 몸은 거칠어지고, 기쁨으로 먹고 사는 대신 먹을 것으로 살게 된다. 그런데 맛에 대한 갈애가 심하면 심할수록 더 추한자가 생겨나서 잘생긴자는 못생긴자를 경멸하는 아만이 생겨 났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생겨 나고 성적교섭을 하게 된다. 최종적으로 빈부격차와 사성계급이 생겨나 사람에 대한 차별이 생겨 나게 된다. 이 모두가 맛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 것이다.

 

맛에 대한 집착의 끝은?

 

맛에 대하여 집착을 하면 할수록 타락의 길로 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타락의 끝은 어디일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잘 말해 주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물고기, 거북이, 악어와 다른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일찍이 맛을 탐하여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물속에서 태어나고 물속에서 자라고 물속에서 죽는 생물 가운데 동료로 태어난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전재성님역)

 

 

발라빤디따경에 따르면, 맛에 탐착하고 악행을 하는 어리석은 자는 죽어서 축생으로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오로지 먹기 위하여 생존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축생이기 때문이다.

 

축생세계의 특징은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거기에는 법다운 실천이 없고, 바른 실천이 없고, 착한 실천이 없고, 공덕 있는 실천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먹어야만 생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맛을 탐하는 자라면 축생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축생으로 생성 되는 조건이 탐욕우치라 한다.

 

닭을 닭으로 보지 않고

 

어떤 사람은 마당에서 모이를 헤쳐 먹고 있는 닭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고 한다. 닭을 보는 순간 ‘통닭구이’나 ‘닭백숙’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매우 놀란 적이 있다.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닭이 닭으로 보지만, 닭맛을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닭이 닭으로 보이지 않고 하나의 ‘요리’로 보인다는 것이다. 닭을 보는 순간 통닭이라는 총상(總相, nimitta)을 취하고 이어서 닭맛이라는 세상(細相, anuvyanjana)을 취한 것이라 본다. 이성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사람을 보았을 때 남자 또는 여자로 구분하여 본다. 특히 이성을 밝히는 자라면 여자를 보았을 때 ‘예쁘다’ ‘섹시하다’라는 총상을 취할 것이다. 이어서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하여 세상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의 감촉을 떠 올릴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섹스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맛이나 촉감 등에 탐착하는 미각능력이나 촉각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각능력도 있고, 청각능력도 있고, 후각능력도 있고, 정신능력도 있기 때문이다.

 

곡차를 즐겨 마시는 수행자

 

이와 같이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탐착하고 집착한다면 동물적 본능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그 인상(총상)에 집착하지 않고 그 연상(세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출가수행자들 중 일부는 감각능력으로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탐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스님이라면 시각능력에 따른 형상을 즐기고 탐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수 못지 않게 노래에 열중하는 스님이라면 소리를 즐기고 탐착한다고 볼 수 있고,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스님이라면 냄새와 맛에 대한 탐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두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서 탐착하면 탐착 할수록 깨끗하고 청정한 삶의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래서 결국 속세의 삶으로 되돌아 갈 것이라 한다. 차나 커피를 좋아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나라 출가수행자들이 즐겨 마시는 것이 있다. 차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차를 대접한다. 차를 앞에 두고 이야기 한다고 해서 차담이라고 한다. 선가에서는 도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차나 한잔 마시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차는 출가수행자들과 매우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니까야에 차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차를 앞에 놓고 대화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차와 같이 카페인이 첨부된 중독성 물질이 수행에 방해 되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맛에 대한 집착을 하면 할수록 청정한 생활과 거리가 멀어지고 결국 세속의 삶으로 돌아 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수행자들은 차를 즐겨 마시는 것 같다. 차 뿐만 아니라 커피도 즐겨 마시고, 심지어 곡차도 즐겨 마시는 것 같다.

 

축생의 과보

 

원두커피맛을 알고 난 이후 원두를 갈아 마시는 수고를 마다 하지 않는다. 이는 맛에 대한 탐착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미각능력에 한 한 것이다. 그러나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지으면서 여섯가지 감각능력에 대한 감각적 쾌락 등을 즐기는 생활을 하는 경우 그에 따른 과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탐욕과 우치에 따른 축생과보를 받을 것이라한다.

 

그런데 한 번 축생으로 떨어진 후에 다시 인간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고 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 뚫린 멍에를 바다에 던져 넣는다. 동풍이 불면 그것은 서쪽으로 떠내려가고, 서풍이 불면 그것은 동쪽으로 떠내려가고, 북풍이 불면 그것은 남쪽으로 떠내려가고, 남풍이 불면 그것은 북쪽으로 떠내려간다.

 

그런데 그곳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 큰 바다에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를 던져 넣었는데 그때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오른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을 수가 있겠는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언젠가 어느 땐가 오랜 세월이 지나야 할 것입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눈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 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전재성님역)

 

 

 

2013-01-0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