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대한 ‘부모 뿌리론’
출가수행자를 비방하는 구업
비밀댓글을 받았다. 지난 번 ‘장애에 대한 법륜스님의 유물론적 견해’라는 제목으로 글을 쎴는데,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하였다.
연꽃 님, 아래 기사는 해피 법당 해피 스님의 기사인데, 연꽃 님의 의견과 다르더군요. 두 분 경을 증거로 말씀하시는 건 같지만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궁금합니다.
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7998
(H법우님)
법우님이 남녀 놓은 글에 따르면 해피스님의 견해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똑같이 빠알리니까야를 근거하여 글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의견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혼란스럽다는 입장의 글이다. 이글을 받고 망설였다. 과연 답변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 때문이었다. 만일 답변을 하게 된다면 출가수행자를 비방하는 구업을 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글을 쓰기로 하였다. 이는 해피스님의 업설에 대한 문제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해피스님의 글이 담겨져 있는 글을 검색하였다. 불교닷컴에 해피스님이 기고한 글을 볼 수 있었다. 스님의 글을 여러 번 숙독 하였다. 어떻게 견해가 다른지에 대한 것을 알아 보기 위해서이다. 가장 큰 견해 차이는 ‘업보’에 대한 것이었다.
해피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나, 그들 법우님들에게 실례가 될런지 모르겠지만, 그간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쓰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여한 특별한 쓰임새를 알고, 그 쓰임새를 다하는 삶을 살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특별한 삶의 선택된 당사자로서 당당하고 자신있고 차별 받지 않게 삽니다.
그런데 절에 가면, 인과(因果)를 말합니다. 전생에 지은 바 업보(業報)요, 업장(業障)이니 누구를 탓할 것입니까? 자기가 과거에 잘못한 탓에 현재의 아픔을 과보로써 겪는 것이니 참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생에 죄 지은 표식으로 나타난 장애를 껴안고 눈치보며 타의적으로 차별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교리적 차이가 있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근본경전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 <업에 대한 큰 분석의 경(M136)(http://cafe.naver.com/happybupdang/1444)>과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M135)(http://cafe.naver.com/happybupdang/1443)>에서 부처님은 업에 의한 태어남을 설명합니다. 특히,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에서는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며, 14가지로 행위를 구분한 '업보로서의 태어남'을 말합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설해지는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금생에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신체 장애가 업보일 수는 없습니다, 해피스님, 2012-05-18, 불교닷컴)
스님은 들어온 이야기 중의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쓰임새를 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주신 선물’과도 같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업보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았다고?
이런 견해에 대하여 해피스님은 모두 잘못된 견해라고 부정한다. 그러면서 “근본경전 [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맛지마니까야의 쭐라깜마위방가경(M135,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스님은 “이와 같이 중생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중생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라는 문구를 인용하고 있다.
쭐라깜마위방가경(M13)에 실려 있는 업보에 대한 인용 문구는 글을 쓰면서 수 없이 사용하였다. 사람들의 얼굴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 것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른 과보로 본다고 견해를 밝혔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명백하게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Kammaṃ satte vibhajati yadidaṃ hīnappaṇītatāyāti)”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스님은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전생에 지은 업 때문에 금생에 장애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라고 강조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위 인용문에서 언급된 어느 불자의 질문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피스님은 한결 같이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정말 그럴까.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 (M135)에 따르면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쑤바]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존자 고따마여, 참으로 인간들은 목숨이 짧기도 하고 목숨이 길기도 하고, 질병이 많기도 하고 질병이 없기도 하고, 용모가 추하기도 하고, 용모가 아름답기도 하고, 권세가 없기도 하고, 권세가 있기도 하고, 빈궁하기도 하고, 부유하기도 하고, 비천하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하고, 우둔하기도 하고 현명하기도 합니다. 존자 고따마여, 어떠한 원인과 어떠한 조건 때문에 인간의 모습을 한 인간들 사이에 천하고 귀한 차별이 있습니까?”
[세존]
“바라문 청년이여, 뭇 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 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
(쭐라깜마위방가경-Cūḷakammavibhaṅga suttaṃ- 업에 대한 작은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35,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바라문 청년 쑤바와 업과 업보에 대한 대화 내용이다. 바라문 쑤바가 왜 사람들은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태생이 다른지에 대하여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업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한다. 업이 뭇삶(중생)들을 차별하여 귀하고 천한자가 생겨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스님은 “부처님은 업보로서의 장애를 말하지 않습니다”라고 거듭말하면서 장애만큼은 업의 과보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해피스님의 ‘부모 뿌리론’
그렇다면 해피스님은 신체적 장애로 대표되는 선천적 장애에 대하여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을까. 스님이 남겨 놓은 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몸과 마음은 ①서로 조건이 되는 관계이고, ②뿌리를 달리 하는 관계입니다(http://cafe.naver.com/happybupdang/3498). 몸은 부모에게서 생기고, 마음은 전생으로부터 모태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애는 몸에 따르는 것이지 마음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업보는 모태에 드는 마음[식(識)]에 속하는 것이지 부모에게서 받는, 한시적으로 이번 생을 구성하는 몸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의 만남에 있어, 업보는 마음이 담고 오는 것이지 몸이 가져오는 것[정자와 난자에 내재한 조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장애를 담고 오는 업보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전생의 업 때문에 장애라는 업보 또는 업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어머니 뱃속에서든 태어난 후이든 몸에 대한 조건의 적절하지 못한 변화 때문에 생겨난 현상일 뿐입니다[연기(緣起)].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여한 특별한 쓰임새 때문도 아닙니다.
(신체 장애가 업보일 수는 없습니다, 해피스님, 2012-05-18, 불교닷컴)
뭇삶들을 차별하게 하는 것이 업과 업보라고 분명하게 부처님이 말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장애에 대해서 만큼은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런 주장은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에서 “유전적인 문제가 없는데 그렇다면.. 엄마 탓인 경우가 있습니다. 임신중에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거나,…”라는 견해와 동일하다.
이렇게 유독 선천적 신체적 장애에 한하여 부모로부터 비롯된 것 또는 임신중에 부주의로 인한 장애라는 주장은 업과 업에 따른 과보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해피스님이 주장하는 근거는 몸과 마음의 뿌리가 서로 다른 것이 '몸은 부모를 뿌리로 하고, 마음은 전생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라 한다. 그래서 링크 된 주소를 따라 가 보면 “몸은 부모를 뿌리로 하고, 마음은 전생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몸 따로, 마음 따로를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링크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런 특성의 차이로 인해 ‘나’는 해탈하여 존재[오취온(五取蘊)= ‘나’]를 소멸할 때 까지 연기(緣起)하는 마음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오취온을 설명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따로 분리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단멸론자들의 오취온 타령
인터넷 토론 사이트에서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오취온 타령’이다. 철저하게 몸과 마음으로 분리하여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오취온만 떨어 내면 해탈을 실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오취온을 설명하기 위하여 몸 따로, 마음 따로로 보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보기 어렵다.
이렇게 몸 따로, 마음 따로 놓고 보았을 때 이를 서로 상호 의존하는 것으로 보아 몸이 멸하면 마음도 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 단멸론자들의 견해이다. 그래서 단멸론자들은 공통적으로 부모로부터 우리들이 출생하였다고 본다.
단멸론자들에게 ‘왜 생긴 모습이 다르고 성향이 다른지’에 대하여 물으면 업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구동성으로 부모로부터 나온 것이라든가 유전전인 요인이라든가 생물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답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인 부모발생설은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이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에 허무주의 견해를 보면 “이 자아는 물질로 이루어지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로 만들어지고, 부모에게서 생겨난 것으로…(D1)”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우리 들이 부모로부터 출생하였지 업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사만냐팔라경(D2)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유물론을 주장한 아지따 께사깜발린은 철저하게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공양도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고…”라고 말함으로서 철저하게 업에 대한 과보를 부정하였다. 또 “홀연히 생겨나는 중생도 없고..”라고 말함으로서 업력에 의하여 홀연히 생겨나는 뭇삶(천신이나 지옥중생 등)도 없다고 부정하였다.
이렇게 몸 따로, 마음 따로 분리하여 오취온만 해결하면 된다는 오취온 타령을 주장하는 단멸론자들은 업과 업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부모로부터 생겨 났다는 것은 업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업력으로 태어나는 회생(化生)
만일 업력이나 업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빠알리 니까야에 등장하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지옥과 같은 악처에 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천상에 나는 천신이나 지옥 중생도 부모로부터 난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빠알리니까야를 근거로 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다면 존재들이 부모들로부터 났다고만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 하신 중생은 우리들 인간 뿐만 아니라 삼계 걸쳐 있는 천신이나 지옥 등 모든 중생이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런 중생은 화생하는 것으로서 자신이 지은 업의 힘(업력)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다.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신구의 삼업에 따라 자신이 지은 업에 적합한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선정수행을 한 중생은 색계천상에 태어나는 것이고, 믿음과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아 간 자들은 욕계 천상에 태어나고,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은 그에 대한 과보로 지옥에 태어 나게 되어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장애를 가진 자들에 한해서만 특별하게 “장애를 담고 오는 업보는 없다”라든가, “업보로서의 태어남 가운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
물론 선천적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 위로하고 용기를 주기 위해서라고 한 말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력 또는 업의 힘에 의한 것임에 틀림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증명한다.
수행승들이여, 거기에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약육강식만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 어리석은 자는 오랜 세월이 지나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인간의 몸을 얻는다면, 그때마다 비천한 가문 즉 짠달라의 가문, 사냥꾼의 가문, 죽세공의 가문, 수레공의 가문, 백정의 가문과 같은 가난하고 음식이 모자라고 곤궁하게 사는 가문에 다시 태어난다. 그곳에서는 음식과 의복을 얻기도 힘들다. 그는 용모가 악하고 모습이 추하고 왜소하고 질병이 많고,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이고, 음식, 의복, 수레, 화환, 향료, 크림, 침대, 집, 등불을 얻지 못한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축생에서 오랜시간이 지나 마치 맹구우목의 비유처럼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였으나 그 지위는 매우 낮을 것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약육강식의 세계, 오로지 생존본능만이 남아 있는 세계에서 먹고 개체를 유지시키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법답게 살수 없고 공덕을 쌓을 기회가 없어서 설령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였다고 하더라도 미천한 존재로 날 것이라 한다.
또한 폭행, 강간, 알코올중독, 마약 중독 등 삶의 과정에서 몸과 입과 마음으로 수 많은 악업을 저지른 경우 역시 업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업력이 작용하여 그에 대한 과보를 받지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귀하고 천한자가 부모의 몸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업의 힘이 작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눈멀거나 팔병신이거나 절름발이이거나 반신불수”등을 언급하고 있다.
장애 아닌 자들이 없다
누구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선천적 장애를 가진 것만이 장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범위를 넓혀 보면 우리가 사는 인간계 뿐만 아니라 색계도 있고 무색계도 있다. 아래로는 지옥과 같은 악처도 있다. 특히 인간 보다 수승한 존재가 화생한다는 색계나 무새계의 중생은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다.
색계의 경우 선정수행한 공덕의 힘으로 화생하게 되는데, 시각과 청각가 정신 기능만 가질 뿐, 후각과 미각과 촉각의 능력이 없다. 기쁨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고 남녀 구분이 없는 중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옥 중생의 경우 여섯가지 감각기능을 모두 구족하고 있다. 고통을 받으려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기준으로 본다면 장애를 가지지 않은 존재가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모두 잠재적인 장애자들이다. 삶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늙어 나이가 들어 치매가 발생되었다면 이는 장애가 발생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들이 부모의 몸을 빌어 태어 났고 유전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지만 장애가 업보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지금 선천적 장애를 가진 자들에게는 위로의 말이 될지언정 부처님의 업자성정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부모를 뿌리고 하고 마음은 전생으로부터 온다”는 해피스님의 주장에 동의 할 수 없다. 어떤 경전에 근거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몸 따로, 마음 따로 하여 단지 오취온만 멸하면 된다는 발상은 마치 단멸론자들의 ‘오취온타령’을 듣는 것 같다.
바이블에서 장애를 가진 자는
절에서 선천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법문을 할 때 업설을 적용하기가 매우 난처한 것 같다. 교회에 가면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쓰기 위해 장애를 주셨다”라고 말하면서, 절에 가면 ‘업장타령’을 한다고 하면 “장애를 가진 사람 중에 누가 절에 다니려고 하겠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장애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물’ 운운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다. 해피스님이 기고한 글에 대한 댓글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 무슨 해괘한 소리를 하시나요. 구약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예수교 지도자)에게 이르라. ‘무릇 너의 대대 자손 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여호와의 식물(예배)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라.; 무릇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못할찌니, 곧, 소경이나,절뚝발이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지체가 더한 자나,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계속 곱사등이나, 난장이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괴혈병이나, 버짐이나, 불알 상한 자나, 제사장(예수교 지도자)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아와 여호와의 화제(예배)를 드리지 못할지니, ; 그는 흠이 있은 즉, 나아와 여호와의 식물(예배)을 드리지 못하느니라.’”(레위기 21; 16~21) ---> 이렇게 장애인은 더럽다고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정의한 종교입니다. 성경 제대로 알고 인용하시고 쓰세요!!
( ‘신체 장애가 업보일 수는 없습니다’에 대한 댓글, 2012-05-18, 불교닷컴)
바이블에 따르면, 장애를 가진 자는 교회에 들어 가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애를 가진 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물 운운 하는 것이 교회에서 하는 말이라 한다.
장애는 ‘내 탓’도 ‘네 탓’도 아니다
이와 같이 선천적 장애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은 업설에 있어서 타자요인설이다. 이는 해피스님이 말한 부모로부터 발생한다는 부모발생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고 하여 업은 스스로 만든다고 하는 자기원인설도 아니다.
부처님은 안냐띳띠야경(S12:24)에서 괴로움이 외부에서 발생한다는 타자원인설과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자기원인설 모두를 부정하였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은 내 탓도 아니고 남의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탓일까. 이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 찾아야 한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벗들이여,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서 생겨 나는 것이다. 무엇을 연유로 해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S12:24)”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접촉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도 생겨나는 것이고 업도 발생하는 것이다. 장애 역시 태어날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접촉에 따라 태어난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접촉을 연유로 하는 것은 후천적 장애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잘 설명된다. 사고등으로 인하여 장애가 발생하였을 때, 병이 들어 장애가 발생하였을 때 모두 그런 사건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성숙되어 접촉이 일어나서 발생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본다면 장애는 내 탓도 아니고 남의 탓도 아니다. 연기적 법칙에 따른 것이다.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면
그렇다면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담겨 있다. 그리고 장애를 딛고 빛의 세계로 나아 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뿍갈라경에 따르면 “그러나 그는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합니다. 그가 신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언어적으로 착한 일을 하고 정신적으로 착한 일을 하면 몸이 부서진 뒤 죽어서 좋은 곳, 하늘나라에 태어납니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고 보시, 지계 등 공덕을 쌓으면 죽어서 더 나은 세계에서 재생하게 되리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우리 스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상속자라 하였다. 또 업의 차별로 인하여 귀하고 천한 것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를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천적 장애에 한하여 부모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업자성정견에 맞지 않는다. 마치 몸 따로, 마음 따로 인것 으로 보아 오취온만 소멸시키면 보는 것은 단멸론적 주장의 다름이 아니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또는 “우리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으니까…”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가 스님도 아니면서…” 라든가, “지가 교수도 아니면서…”라고 말한다면 또 어쩔 수 업는 일이다. 다만 경전에 근거해서 쓸 뿐이다.
심각한 정신적 장애
사람들은 선천적 장애에 대하여 안타까워 하고 불쌍하게 본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한량 없는 윤회의 과정에 있어서 그와 같던 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우리들 모두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정신적 장애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신적 장애를 제거 해야 한다고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말씀 하신다.
그 정신적 장애는 다름 아닌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악의와 원한,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환, 의심 이렇게 다섯가지 장애를 말한다. 이를 ‘오장애’라 한다. 이런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장애자인 것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초기경전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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