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불교, 선방불교, 신선불교
벽치기 신공
벽치기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문밖에서 엿듣고 기사를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1월 8일 부산 범어사에서 열렸던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주관으로 2박 3일간 일정으로 계획 되었던 행사에 대한 것이다. 조계종 쇄신을 위한 종도들의 의식개혁방안을 모색하는 행사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종도는 재가자가 아닌 ‘스님들’을 지칭한다.
첫날 행사가 열리는 밤 밖의 날씨는 영하 10도를 웃돌았다고 한다. 이렇게 추운날 행사가 열린 주지실의 방안은 절절 끓고 있었다고 하는데, 벽치기를 한 기자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취재를 위해 기자가 범어사를 찾았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불교닷컴>의 취재를 거부한다는 이유였다. 댓돌에 앉아 노트북을 펴고 문지방 너머로 들리는 소리를 주워 담아 기사를 썼다. <불교닷컴>이 지난해 6월 22일부터 줄곧 해오던 이른바 '벽치기'이다.
(조계종 자성쇄신 결사의 한 단면, ([취재수첩] 언론 재갈 물리고 기껏 도출한 결론이... ,, 불교닷컴 2013-1-10)
조계종과 총무원에 대하여 비판적인 기사를 양산했다는 이유로 취재 거부를 당해온 불교닷컴 기자가 남긴 이야기이다. 차가운 겨울 밤 문밖에서 안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를 듣고 노트북 자판을 두두린 이른바 벽치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중도에 대하여
2박 3일 일정으로 추진 되었던 행사는 1일만에 서둘로 끝냈다고 한다. 마치 종회일정을 보는 것 같다. 기사로 전달되는 종회관련 소식을 보면 조계종 중앙종회가 원래 일정대로 끝나는 경우는 드믈다고 한다. 일정을 앞당겨 끝내기 일쑤라 한다.
이번 행사에서 도우스님과 무비스님의 설전이 있었다고 한다. 조계종 종도들의 의식개혁 방법론에 대한 것이라 한다. 요지는 ‘중도’에 대한 것이다.
고우스님은 중도에 대하여 “부처님 깨달음의 중심이 중도이다.”라는 취지로 말하였고, 무비스님은 “중도는 이해가 아닌 증득 대상이다.”라는 요지로 말하였다고 한다.
두 분 스님들의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도라는 것에 대하여 이의가 없지만 이해는 다른 것 같다. 고우스님은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근거하여 ‘쌍차쌍조론’을 거론 하며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적으로 설명하였고, 무비스님은 스승과 제자, 신도와 스님이 서로 맞절이라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예를 들어 실천론적으로 접근하였다.
고우스님의 추상론과 무비스님의 실천론에 대한 설전으로 보였지만, 두 분 스님의 중도에 대한 견해를 보면 대승불교식 중도관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중도에 대하여 ‘목적론’ 또는 ‘구경론’적으로 보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미 되어 있는 중도, 완성된 중도를 말한다다.
그렇다면 왜 선사들은 중도에 대하여 구경론적으로 보고 있을까. 그것은 선종의 성립기반에 근거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이란?
선종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 ‘불립문자(不立文字)’와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내세우며 ‘직지인심'(直指人心)’과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특징으로 한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언설로서 표현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 밖에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과 마음으로 전승 되어온 가르침을 깨달아야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이기 때문에 따로 깨달을 것이 없다고 한다. 단지 우리가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 하는 작업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 내재 하고 있는 깨달음의 성품, 즉 불성을 보기만 하면 성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선불교식 ‘견성성불’이다.
선종에서는 스승과 제자사이가 매우 중요하다. 누군가 득도 했다라고 말하여도 이를 인가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깨달았다고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어 온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스승과 제자를 통하여 전승 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스승에 대한 ‘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깨달음 인증서
실제로 한국선불교 전통에서 스승의 인가가 있어야 득도 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책이나 TV자막에서 어느 스님을 통하여 득도 하였다는 내용이 깨달음에 대하여 인가를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심지어 증서까지 작성하는 경우도 있다. 다음과 같은 진제스님의 말이 있다.
그것이 해결됨으로 해서 향곡선사께서 뜻이 통해가지고 법을 주고 받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향곡선사가 인증서, 부처님부터 오늘날 까지 법을 통하는 인증서, 박사학위같이.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나니 그것이 무한진리야. 이제 그대에게 산 진리를 전하노니, 만인 앞에 진리를 (펴거나 거둘거나?-잘 들리지 않음) 그대에게 맡긴다 이게 인증서입니다. 이게 있어야 많은 사람의 (잘 들리지 않음)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깨달았다는 인증을 확인서입니다. 이게 있어서 인자 진짜 선지식이고 바른 지도를 할 수 있습니다.
(진제스님, <특집>조계종 13대 종정 진제 법원 대종사에게 듣는다, 불교TV 2012-03-09)
현재 조계종 종정으로 있는 진제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인가이야기이다. 깨닫고 난 다음 스승인 향곡선사로부터 증서 같은 것을 받았다고 한다. 마치 박사학위 증서 같이 깨달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명서 같은 것이다.
이렇게 스승에서 제자에게 가르침이 전승되는 선불교에서 인가는 매우 중요한 의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언설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만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에 근거한다.
열반은 있어도 성취한 자는 없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선불교식 인가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라는 프로에서 묘원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열반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도과를 얻었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는 무아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소멸된 것을 말하거든요.
이러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되요. 이때 지속적인 알아차림에 의해서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다음에 호흡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이 아는 마음밖에 없거든요. 이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을 ‘아는 마음’이라거나 또 ‘앎’이라도 합니다. 이 앎이란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앎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그 아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이때 의식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에요. 이때 스승과 수행자 사이에 대화는 ‘앎이 사라졌는가?’ 아니면 ‘앎이 있었는가?’ 하는 간접적인 말로 열반을 표현해요. 만약 이때 다른 수행자들이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아직 정신적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내용은 오직 스승과 이것을 경험한 수행자들 만이 주고 받습니다.
만약 ‘내가 열반을 성취했다’고 하면 자신을 과신 하는 것이에요.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이르러도 그 말을 못하게 하셨어요. 그런데 하물며 열반에 들지 못하고도 들었다고 할 경우가 있거든요. 이는 큰 허물이 되며 출세간에서는 이를 거의 범죄수준으로 봐요.
사실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어요.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일부의 수행자들이 도과를 성취 한 것을 집착하는데, 이건 잘못된 것입니다. 수다원이라는 도과가 무슨 자격증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진정한 수행자라면 열반을 성취한 것을 집착할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괴로움에서 ‘얼마나 해방 되었는가’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하면 됩니다.”
(묘원법사, BBS 불교방송: 무명을 밝히고 : 지금은 수행시대 - 위빠사나11:도과의 세계(1)|
먼저 묘원법사는 열반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한마디로 의식이 끊어진 상태가 열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열반에 대하여 묘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도와 과를 성취하였느니 하는 말들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대하여 공문서에 도장을 찍듯이 인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무아상태에서 체득한 열반은 있어도, 열반을 경험자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열반은 있어도 열반을 성취한 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반을 성취하기 위하여 집착하기 보다 번뇌에서 얼마나 자유러워졌는가, 또는 괴로움에서 얼마나 해방되었는가로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방에서는 해마다 성도절이 다가오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한 용맹정진에 들어 간다고 한다.
용맹정진 이야기
용맹정진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특히 라디오에서 월호스님의 해인사 선방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중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선방생활 가운데 우선 기억이 나는 것은 용맹정진(勇猛精進)이다. 해인사 선방에서는 하안거와 동안거 매 철마다 7박 8일간 용맹정진을 갖는다. 만 일주일 간 잠을 자지 않고 좌선에 몰두하는 것이다. 물론 밥은 먹는다. 하지만 어떤 스님은 통째로 단식을 하면서 용맹정진을 하기도 한다. 대단하다.
(월호 스님,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7박 8일 용맹정진)
성도절을 앞두고 해인사 선방의 경우 일주일간 용맹정진 기간을 갖는다고 한다. 잠을 자지 않고 일주일간 좌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몇일간 하다 보면 졸음과의 싸움이 시작된다고 한다. 화두를 챙기는 것 보다 졸음과의 싸움이 가장 크다고 한다.
그렇게 일주일간 용맹정진을 하고 나면 마침내 ‘해 냈다’라는 것에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라기 보다 일주일간 졸음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에 대하여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정진이라는 것이 선방식 용맹정진과 다르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Kathannutvaṃ mārisa, oghamatarīti?
[하늘사람]
“스승이시여, 당신은 어떻게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까?”
Yadā svāhaṃ āvuso santiṭṭhāmi. Tadāssu saṃsīdāmi.
Yadā svāhaṃ āvuso āyūhāmi tadāssu nibbuyhāmi.
Evaṃ khvāhaṃ āvuso appatiṭṭhaṃ anāyūhaṃ oghamatarintī.
[세존]
“벗이여,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거센 흐름을 건넜습니다. 벗이여,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흐름을 건넜던 것입니다.”
(오가따라나경-Oghataraṇasutta-거센 흐름을 건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1(1-1),전재성님역)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첫 번째로 나오는 1번경에 실려 있다. 총 7권 2,957경(최대 6,646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전재성 박사의 상윳따니까야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거센 흐름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어 보인다.
전재성박사의 해제에 따르면 첫 번째경은 부처님의 ‘중도사상’에 대한 것이라 한다. 하늘사람이 거센흐름을 건너는 방법에 대하여 묻자 부처님은 ‘머무르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고 건넜다’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견해나 태도나 행위에 있어서 철학적이거나 수행적인 극단을 피하는 것으로 가르침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힘들이지 않고도
경에서 ‘거센 흐름(暴流)’은 빠알리어 오가(Ogha)를 말하는 것으로 윤회의 바다에서 생사가 거듭되는 것을 빗대어 말한 것이다. 주석에 따르면 감각적 쾌락의 폭류, 존재의 폭류, 견해의 폭류 이렇게 세 가지 거센 흐름이 있다고 한다. 이런 흐름을 부처님은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고 건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올바른 수행을 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의지와 노력은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까지는 것이 있다. 주식이다. 홈트레이딩을 할 때 돈을 벌겠다고 하루에도 수십차례 단타매매를 하여 보지만 잔고만 줄어 들 뿐이다. 좋아 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 가려 하지만 가까이 가려 할수록 더욱 더 멀리 도망간다. 자식에게 좋은 대학을 목표로 여러 가지 과외를 시켜 보지만 그럴수록 점점 목표와는 더 멀어진다.
이렇게 애를 쓰고 집착을 하면 할수록 수렁에 더 깊이 빠지듯이 휘말려 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anāyūhaṃ oghamatarintī)”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무엇을 뜻할까. ‘잘못된 의지와 노력은 결국 운명적 파탄을 초래하고 말것이다’라는 말이다.
지금 여기에서 버림에 의하여
육단심으로 졸음을 참아 가며 용맹정진을 하여 보지만 나중에 남는 것은 졸음과의 싸움에서 견디어 냈다라는 성취감을 맛 본다면 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놈은 무엇인고”라는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본래부처의 성품을 찾고자 한다면 이는 깨달음이 단지 성취의 대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애를 쓰거나 집착을 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지금 여기에서 버림에 의한 깨달음의 성취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우리가 본래 부처로서 부처인 것을 알아 보기만 하면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오염원을 버림에 의한 깨달음을 말한다. 성취가 아니라 버림에 의한 깨달음을 말한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대표되는 오염원 또는 번뇌를 버림으로서, 놓아 버림으로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 것이다.
알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세존]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자입니다.
(셀라경-Sela sutta, 맛지마니까야 M92, 전재성님역)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세존]
알려져야 하는 것이 바로 알려지고
닦여져야 할 것은 바로 닦여지고
버려져야 할 것은 바로 버려 졌으니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
(브라흐마유경-Brahmāyusutta, 맛지마니까야 M91,전재성님역)
두 개의 게송은 똑 같은 내용이다. 맛지마니까야 셀라경(M92)과 브라흐마유경(M91)에 실려 있는데, 문맥에 따라 능동태와 수동태로 표현 된 것이 다. 이 게송은 숫따니빠따 셀라경(Sn3.7)에서도 볼 수 있다.
게송에서 알아야 할 것, 닦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 이렇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이 세가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석에 따르면 알아야할 것은 ‘사성제’를 말하고, 닦아야 할 것은 ‘팔정도’를 의미하고, 버려야 할 것은 ‘오염원’을 말한다. 이 세가지를 충족하면 깨달은 자, 즉 부처(Buddha)가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명확하게 제시 하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사성제)을 실천(팔정도)하여 번뇌(오염원)를 소멸하면 누구나 깨달은 자(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머물지도 않고 애쓰지도 않으면서(중도) 윤회(괴로움)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볼 때 깨달음은 성취의 대상이라기 보다 버려서 얻어 질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원칙에 따라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매우 신비화 되어 있다. 안거철에 선방에서 화두를 들며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용맹정진 하는 스님들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더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는 ‘사자전승(師資傳承)’이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이 끼여들 틈이 없다. 설령 스스로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스승이 인가 해 주지 않으면 또한 깨달음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중도와 팔정도의 관계는?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나 깨달은자(붓다)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 실천적 가르침이 팔정도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거센 물결을 건넜다’라고 하여 중도를 설하였다.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을 중도라고 한다면, 실천적 특성을 가진 팔정도와 중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담마짝깝빠왓따나경 (초전법륜경, S56:11)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ṃ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ṃ-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중도는 다름 아닌 팔정도(여덟가지 고귀한 길)를 말한다. 따라서 중도는 팔정도와 같은 것이다. 그런 팔정도는 깨달은 자(붓다)가 되기 위한 실천을 의미한다. 이는 경에서 그러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때 팔정도는 완성된 도가 아니라 실천해야 될 도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는 실천으로서 팔정도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성철스님의 쌍조쌍차
성철스님의 중도에 대하여 고우스님의 표현을 빌리면 “<대승기신론>은 쌍조를 기본으로, <금강경>은 쌍차를 중심으로 불교를 이야기했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중도에 대하여 실천적 특징으로 보지 않고 ‘목적론’ 내지 ‘구경론’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승불교 전통에서 어쩌면 매우 당연한 것이라 보여진다. 나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본래 부처를 확인 하는 작업이 수행으로 보기 때문에 중도 역시 구경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중도가 12연기인 이유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중도는 팔정도를 의미하고, 팔정도는 실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깟짜나 곳따경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그러한 양극단을 떠나서 중도로 가르침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고,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생겨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고,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고,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해서 소멸한다.
(깟짜나곳따경-Kaccānagottasuttaṃ, 상윳따니까야 S12:15(2-5), 전재성님역)
깟짜나곳따경에 따르면 중도의 가르침이 연기법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초기불교에서의 중도는 팔정도이고 동시에 연기법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탐진치 등 오염원을 버림에 의한 실천에 따른 깨달음의 성취가 강조되고 있다.
팔만사천법문과 팔정도 무력화
그러나 선불교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는 우리나라 불교의 경우 실천적 이라기 보다 구경론에 가깝다. 깨달음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으로서 내가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만대장경의 팔만사천 법문은 오로지 마음 심(心) 하나로 귀결 된다고 본다. 이는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에 따라 마음 심자 하나로 부처님의 언설인 8만 4천 법문을 무력화 시킨 듯이 보여진다.
또 마음 속에 내재 되어 있는 본래 부처의 성품을 보아 버리기 하면 바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여 실천적 수행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 팔정도가 무력화 된 듯이 보인다.
산중불교, 선방불교, 스님불교, 신선불교
그러다 보니 한국불교는 오로지 산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산중불교’, 오로지 선방에서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들어야만 깨칠 수 있다고 보는 ‘선방불교’가 되어 버렸다. 설령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스승이 도장 찍어 주지 않으면 결코 깨달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은 깨달음에 대하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스님불교’가 되었다. 이렇게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도를 닦는 것은 다름 아닌 ‘신선불교’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201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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