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 바이러스와 분노 다스리기
“Why are you so upset?”
오래 전 영어회화 테이프를 이용하여 공부하였다. 그때 교재에서 인상깊었던 내용이 ‘upset’라는 단어이었다. 교과서를 이용하여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매우 생소한 단어이다. 회화에서 “Why are you so upset?”라고 물어 보자, “I am so very upset”라고 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upset라는 말은 ‘화가 났다’는 뜻이다. 화가 났다면 누구나 알고 있는 angry를 써야 하나 upset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구어체로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화가 난 상태가 아니라 분노가 폭발된 상태로서 우리말로 굳이 표현하자면 “열받는다”라는 뜻과 가깝다.
화가 날 때가 있다. 주로 자존심이 상했을 때이다. 직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역시 분노한다. 그럴때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 열받어!”라 한다. 속이 부글부글 끊어서 머리가 뜨끈 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뚜껑이 열린다”라고 말한다. 머리뚜껑이 열렸을 때 고함을 지르고, 공격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그래서 물건을 집어 던지는 등의 광란을 부리기까지 한다.
부글부글 끓는 물
실제로 빠알리 니까야에서도 분노에 대하여 열받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바라문이여, 마치 물그릇이 불에 달구어져 끓어오르고 거품을 일으켰다면 거기서 사람이 눈으로 자신의 얼굴 모습을 관찰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알거나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상가라바경-Samgarava-쌍가라바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5(6-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분노(byāpāda)에 대하여 ‘부글부글 끓는 물’로 비유하였다. 끓고 있는 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없을 것이라 한다.
냄비에 있는 물이 끓고 있다면 뚜껑이 들썩일 수도 있다. 물이 꽉찬상태라면 뚜껑이 열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화가 나면 열을 받게 되고 열을 받으면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를 것이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하는 것에 대하여 “뚜껑이 열린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물건 집어 던지기
열이 받쳐 뚜껑이 열렸을 때 어떤 일을 저지를 지 모른다. 부글부글 끓는 물에서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이, 격분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어 던지고,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 모두 분노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단 한번의 실수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
불교tv사이트에서 인경스님의 분노조절하기를 보았다. 스님은 자신의 체험담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십대, 삼십대는 물건을 집어 던졌어요. 물건을 집어 던지는데 30대 때 앞사람이 눈이 동그래진 거에요. 그랬더니 그 동그란 눈동자 때문에 알아차림이 됐어요.
(인경스님, 분노조절하기(인경스님), 제1회 분노란 무엇인가. 불교TV 2013-02-08)
하도 화가 나서 콘사이스를 집어 던지려 하는데 겁에 질린 상대방의 동그란 커다란 눈동자를 보았다고 한다. 그 순간 알아차렸다고 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콘사이스를 집어 들고 던지려 뒤로 젖혀진 팔을 그제서야 본 것이다. 그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분명하게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그 후 부터는 던지는 행위는 없어졌다고 한다.
우발적 살인
누구나 이와 같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을 참지 못하여 자신도 모르게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발적인 살인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죄에 대한 대가를 받는데, 영화 ‘쇼생크의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1994)’에 나오는 흑인 죄수 레드(모건 프리먼)의 독백에서도 알 수 있다.
가석방심사에 번번히 떨어진 레드는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러 장기간 복역하였다. 그래서 그 때 당시를 회상하며 ‘어떤 나쁜 놈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 말한다. 이는 그때 당시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자신에 대하여 제삼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본 것을 말한다. 그때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행한 뒤에 후회하고”
그러나 업질러진 물이다. 비록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분노에 가득차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고 하더라도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 분노의 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 taṃ kammaṃ kataṃ sādhu 나 땅 깜망 까당 사두
yaṃ katvā anutappati 양 까뜨와 아누땁빠띠
yassa assumukho rodaṃ 야싸 앗수무코 루당
vipākaṃ paṭisevati. 위빠깡 빠띠세와띠.
행한 뒤에 후회하고
얼굴에 눈물 흘리며 비탄해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Dhp67, 전재성님역)
‘행한 뒤에 후회하고’라는 말은, 현세에서 회상하는 순간에 후회스럽고 비탄스러울 뿐만 아니라 미래에 비참한 운명의 상태의 태어남을 가져 오기 때문이다. 현세에서도 괴롭고 내생에서도 괴로울 것이라 한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눈물흘리며 후회하는 것이다.
과도한 기대감 때문에
인경스님의 경우 분노에 가득차 집어 던지려 하였을 경우 상대방의 놀란듯한 동그란 눈을 보고 크게 알아차렸다고 한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분노하게 된 것일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화 낸 적 있으신가요? 누구한테 화내요?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립니다. 왜 그럴까요? 가깝게 있으니까. 기대감이 있으니까. 그 기대감이 어긋날 때 우리가 화를 내게 됩니다.(12:04)
(인경스님, 분노조절하기(인경스님), 제1회 분노란 무엇인가. 불교TV 2013-02-08)
사람들이 화를 내는 가장 큰 이유가 기대감이 좌절 되었을 때라 한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도 포함된다. 이런 기대감을 탐욕이라 하였다. 그래서 화가 나는 근본 원인은 탐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기대감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족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요인도 알고 보면 과도한 기대감 때문이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욕심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분노는 탐욕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런 탐욕과 분노를 내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이라 한다.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깨달은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 어떤 점이 다를까. 이는 화를 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탐욕과 어리석은 잘 드러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화내는 것은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의 깊이와 정도는 화를 내느냐 안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깨달은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닫기 전에는 기대를 많이 했다. 깨달은 뒤에 분명히 안 뒤 부터는 기대하지 않았다. 탐착을 하지 않았다. 탐착을 하지 않으니까 화를 내지 않았고, 화를 내지 않아서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고, 즉 어리석음이 없어지니까 탐착하지 않았고 탐착하지 않아서 화를 내지 않았다. 이렇게 탐진치가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인경스님, 분노조절하기(인경스님), 제1회 분노란 무엇인가. 불교TV 2013-02-08)
인경스님의 한 사람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깨달은 자의 특징은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기대를 하지 않으니 화낼일도 없을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이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깨달은 자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자라 한다.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
탐진치가 소멸되었다는 것은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법구경 ‘분노의 품(Kodhavagga)’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o ve uppatitaṃ kodhaṃ 요 웨 웁빠띠땅 꼬당
rathaṃ bhantaṃ va dhāraye, 라탕 반땅와 와라예
Tam-ahaṃ sārathiṃ brūmi 따마항 사라팅 브루미
rasmiggāho itaro jano. 라스믹가호 이따로 자노
질주하는 수레를 제어하듯
일어난 분노를 억제할 수 있다면,
나는 그를 마부라고 부른다.
그 밖의 사람은 고삐잡이일 뿐이다.(Dhp 222, 전재성님역)
질주하는 수레란 궤도를 벗어난 것을 말한다. 말이 미친듯이 달렸을 때 마차는 길아닌 길로 질주 할 것이다. 이런 마차를 제어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고삐를 쥐고 있는 마부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삐를 멈출 수 있는 사람, 분노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마부’ 밖에 없다. 그 밖에 왕이나 왕자 등 수레를 모는 사람이 있을 지라도 고삐잡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왕이나 왕자들 보다 더 훌륭함을 말한다.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은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부당한 일, 모욕적인 일 등 차마 표출할 수 없었던 분노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조건이 맞으면 자신도 모르게 표출되고 만다. 그래서 애꿎게도 제 삼자에게 화풀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화내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Tasseva tena pāpiyo 따세와 떼나 빠삐요
yo kuddhaṃ paṭikujjhati, 요 꿋당 빠띠꿋자띠
Kuddhaṃ appaṭikujjhanto 꿋당 압빠띠꿋잔또
saṅgāmaṃ jeti dujjayaṃ. 상가망 제띠 둣자양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Akkosasutta-악꼬싸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전재성님역)
대부분 상대방이 화를 내면 따라 화를 내게 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화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역설은 경의 본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tavevetaṃ brāhmaṇa hotīti)”
부처님 당시 최상위 계층인 바라문 가문에서 부처님의 승가로 연달아 출가하자, 화가 난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바보, 멍청이 등의 거친 말로 비난하고 모욕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지거리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지거리하는 자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한다면, 바라문이여,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Akkosasutta-악꼬싸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전재성님역)
일상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항상 생각하는 것은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를 열어 본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답이 나와 있는 것이다. 이 경이 바로 그런 케이스이다.
지금 머리 뚜껑이 열릴 정도로 화가 났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상대방의 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화를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몽땅 상대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tavevetaṃ brāhmaṇa hotīti)”라고 두 번 씩이나 말씀 하셨다.
“그대 자신을 태우리”
이와 같은 부처님의 해결책이 유명해서일까 법구경 인연담에서도 인용되었고, 청정도론에서 자애수행을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활용되었다. 청정도론에서는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tavevetaṃ brāhmaṇa hotīti)”라는 표현에 대하여 “화내는 업을 행할 때 바람을 안고 서서 다른 자에게 먼지를 뒤집어씌우려는 사람처럼 바로 자신이 뒤집어쓸 뿐이다.”라고 표현하였다.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을 소개 하였다.
그대가 화를 내어 그에게 고통을 줄 수도
혹은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화가 초래한 고통으로
당장에 그대 자신을 태우리.
(청정도론, 제9장 거룩한 마음가짐 22, 대림스님역)
상대방의 분노로 인하여 내가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일 같이 화를 낸다면 괴로움을 겪을 것이고, 화를 내지 않는 다면 겪지 않을 것이다. 그런 화는 기본적으로 화낸 사람이 더욱 큰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당장에 그대 자신을 태우리”라 하였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양손에 시뻘건 숯과 똥을 쥐고서 다른 자에게 던지려는 사람”으로 표현 하였다.
지금 나에게 상처를 주기 위하여 한 손에 똥을, 또 한 손에 숯불덩이를 들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부처님의 말씀 처럼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라고 하여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똥과 숯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몸에서는 구린내가 진동할 것이고, 들고 있는 손바닥은 타 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성내는 사람이 성냄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
화를 내면 자신만 손해이다. 이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세가지로 요약하였다.
첫째, 인간관계가 깨진다.
둘째, 현재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
셋째,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간다.
화를 내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을 자주 본다. 또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분노는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다. 그래서 화를 내면 친구관계가 소원해지고, 거래처라면 거래가 중단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 온 공덕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이다. 또 화를 내면 현재의 일에 집중할 수 없다. 사장이 분노하면 회사 전체가 곤두박질 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화를 내면 화를 내는 자신의 가슴이 타들어 간다. 화를 냄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는 것이다.
스트레스가 심화되면 암으로
분노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상대방이 분노하였을 때 큰 소리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집어 던지는 행위이다. 또 하나는 도피하거나 회피 하는 것을 말한다. 도피는 위협적인 상황에서 현재에 도망가는 것, 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회피는 당했던 공격을 생각하고 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격이나 도피-회피 모두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성냄으로 인하여 스스로 고통을 받기 때문에 질환이 되고 병이 되는 것이다. 이를 포괄적으로 스트레스라 한다. 이런 스트레스가 심화되면 암으로 발전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인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안에는 세포안에는 항상 암세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암세포가 스트레스를 강하게 받으면 암세포들이 결합하여 작은 덩어리로 발전하게 됩니다. 수명을 단축시키고 암을 증폭시키는 것이 스트레스이에요.
(인경스님, 분노조절하기(인경스님), 제1회 분노란 무엇인가. 불교TV 2013-02-08)
공격을 해도 스트레스가 발생하고, 회피를 해도 스트레스가 발생한다고 한다. 그런 스트레스가 화병 또는 암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분노 바이러스와 분노 다스리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분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기가 불편한 경험이나 불편한 느낌, 분노, 또 짜증, 화가 내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림하고 분명하게 자각하는게 분노를 조절하는데 도움이 되요.
(인경스님, 분노조절하기(인경스님), 제1회 분노란 무엇인가. 불교TV 2013-02-08)
인경스님에 따르면 분노는 바이러스와 같다고 한다. 감기 바이러스가 전달되듯이 분노바이러스가 있는데, 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잠재 되어 있는 분노의 마음을 말한다. 이런 분노바이러스가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자극과 생각으로 설명한다.
마치 감기 바이러스가 잠복 되어 있어서 몸의 저항력이 떨어지면 발현되듯이, 마음속에 내재 하고 있는 분노 바이러스 역시 조건이 맞아 떨어 졌을 때 분노로서 표출 되는 것이다.
직장에서 모욕을 당했는데 이를 꾹 참았다고 하자. 이를 잠복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전철을 타고 오면서 생각해 보니 은근히 화가 나는 것이다. 집에 돌아 왔는데 마침 가까이 있던 남편이 말을 잘못 하면 이때 분노가 폭발해 버리는 것이라 한다. 이렇게 분노바이러스는 자극 받고, 생각하고, 표출하는 삼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따라서 알지 못하면 분노가 더더욱 성장하고 더더욱 증폭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분노를 자각하는 것, 또는 알아차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등 ‘몸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방법은 알아차리고, 심호흡하고, 질문하는 것이라 한다. 한다. 특히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라고 질문하여 현실문제을 해결하는 것이라 한다.
분노를 완전히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
이와 같이 분노를 자각하고 알아차려서 분노 다스리기가 있지만, 경전에서는 분노에 대하여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증지부’ ‘다섯의 모음’에 있는 ‘절복진노경’의 예를 들어 “도반들이여, 이것이 적개심을 제거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니 비구에게 적개심이 일어나면 이것으로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A.iii.186-90)”라고 표현하고 있다. 청정도론에 언급된 절복진노경(折伏瞋怒經, āghātapaṭivinayasutta, A5:161)을 찾으면 다음과 같다.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원한을 제거함이 있나니, 어떤 곳에서든 비구에게 일어난 원한을 이것으로 모두 제거해야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자애[慈]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연민[悲]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평온[捨]를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마음챙기지 않음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에게 원한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굳게 확립해야 한다. ‘이 존자는 업이 바로 그의 주인이고, 그는 업의 상속자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그의 권속이고, 업이 그의 의지처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그가 업을 지으면 그는 그것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그 사람에 대해서 생긴 원한을 제거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지 원한을 제거함이 있나니, 어떤 곳에서든 비구에게 일어난 원한을 이것으로 모두 제거해야 한다.”
(빠타마 아가따빠띠위나야경-Paṭhama - āghātapaṭivinayasuttaṃ -원함을 제거함 경1, 앙굿따라니까야 A5.4.2.1(A5:161), 대림스님역)
경에서 다섯 가지 원한의 제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원한’이라고 번역된 ‘아가따(āghāta)’는 빠알리 사전에 따르면 분노(anger), 증오(hatred), 폭발(collision)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경에서는 분노를 일으키지 않기 위한 것으로서 다섯 가지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이중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평온( upekkhā)이 보인다. 이는 ‘자-비-희-사’로 표현되는 사무량심에 속한다. 그런데 ‘더불어 기뻐함’이라 번역되는 희(喜 muditā)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마음챙기지 않음(asati)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amanisikāra)’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자애(mettā), 연민(karuṇā), 평온( upekkhā), 마음챙기지 않음(asati)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amanisikāra) 이렇게 네 가지가 된다.
아사띠(asati)와 사띠(sati)
그런데 왜 ‘마음챙기지 않음(asati)과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amanisikāra)’이라 하였을까? 이는 자신의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났을 때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분노하는 것을 알았을 때는 반대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sati)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다를 위하는 것이라.(S7:2)” 라 하였다. 이렇게 분노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 났을 때와 상대방의 분노를 알았을 때 사띠하는 방법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업이 자신의 주인
경에서는 다섯 번째로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은 행위가 오온에 의한 것임에도 화가 풀리지 않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오온의 법들은 순간적인 것이라 이미 없어져버렸거늘 지금 그대는 누구에게 화를 내는가”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는 화를 내는 것은 오온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때 그 순간 그 조건에서 오온이 화를 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일어 난다면, 업이 주인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에서 태어났고, 업이 권속이고, 업이 의지처라고 반조하라고 한다. 이것이 경전상에 표현된 분노를 소멸시키는 다섯 번째 방법이다.
2013-03-18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이 태어날 때 입에 도끼가” 성자를 비난한 과보 (0) | 2013.03.20 |
---|---|
안철수와 중도(中道), 가운데길인가 바른길인가 (0) | 2013.03.19 |
스님들의 수난시대 (0) | 2013.03.15 |
2013 불교박람회 관람기 (0) | 2013.03.11 |
삶이라는 고단한 바다에서, 콩닥거리는 ‘가슴 섬’으로 피신하기 (0) | 2013.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