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와 중도(中道), 가운데길인가 바른길인가
질 수밖에 없었던 선거
지난 해 대선에서 선거에 지자 ‘멘붕’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힐링’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연초 안철수교수의 멘토라 불리우는 법륜스님은 “안철수 전 후보로 단일화가 됐다면 이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지난 번 대선에서는 질 수밖에 없는 선거를 하였다는 것이다. 양자대결에서 일년동안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은 후보를 제껴두고 만년 2위인 후보를 본선에 진출시켰으니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 동시에 치루어진 경남지사와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또 질 수밖에 없는 후보를 내었다고 하였다. 국민들은 점차 보수화 하고 우경화 하는데, 극좌 후보와 전교조 출신의 후보를 내었기 때문에 역시 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영도출마론’을 보고
소위 기득권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를 기대한다. 지금 보다 상황이 좀더 나아지고 심지어 혁명적으로 바뀌었으면 하고 바란다. 특히 청년층과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그런 바램이 안철수현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 왔다. 그리고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였다.
안철수의 출마를 앞두고 말이 많다. 특히 진보매체라 불리우는 오마이뉴스와 같은 인터넷신문에서 노골적인 반감을 표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런 것중의 하나가 ‘영도출마론’이었다. 인터넷에 글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견제구를 날리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교수나 파워블로거, 인터넷논객 등 소위 글 좀 쓸 줄 안다는 사람들은 한 마디씩 하는 것이었다.
안철수는 안철수의 길을 가야 한다고
그런데 어느 시사 평론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이럴 때 노무현의 길을 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노무현의 길과 안철수의 길은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노무현은 부산에서 도전과 패배가 장차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었지만, 안철수에게는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안철수가 부산에서 패배하게 될 경우 민주당 중심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야권질서의 형성은 요원해진다. 지금 안철수에게 부산 영도 출마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야권의 재편이라든가 새로운 정치질서의 형성 같은 문제에는 그리 큰 관심이 없는 경우들이다. 지금 안철수는 노무현의 길을 가면 안된다. 안철수 개인의 당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야권질서의 재편이 지체없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 때문이다.
(유창선 박사, 안철수의 노원병 출마는 유죄인가, 유창선닷컴 2013-03-06)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에 따르면 안철수는 안철수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길은 어떤 길일까.
양당구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안철수의 등장으로 인하여 다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관련 뉴스를 보게 되고 특정인물에 대한 기사를 찾아 보게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파워블로거의 글을 접하였다. 그리고 그가 쓴 글을 상당 부분 읽어 보았다. 그리고 공감하였다. 여러 글 중에 안철수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필자가 진보주의자로서 안철수의 성공을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글을 쓰는 것은 보수화된 기득권 양당 구조를 깨지 않으면 한국의 정치판은 소수 엘리트 정치인들의 놀이터이자 사익 추구의 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안철수에게 바라는 것은 새누리당과 민주당 모두와 각을 세울 수 있는 신당 창당에 성공해 견고한 기득권 정치판의 지각변동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늙은도령, 안철수 선택, 보수화된 기득권 양당구조에 균열을, 2013-03-18)
인터넷필명 ‘늙은도령’이라는 블로거가 쓴 글이다. 자칭 진보주의자이지만 안철수의 성공을 바란다고 하였다. 그것은 양당구도를 깰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거대여당과 거대야당의 양강 구도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극한대립도 하지만 때로 협력도 한다. 특히 서로 협력할 때 기득권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거대 정당을 기득권 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모두 기득권 집단으로 보는 것이다.
현재의 야당 역시 기득권 집단으로 보는 것은 과거 10년간 기득권을 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득권 집단끼리 담합하면 기득권의 옹호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간의 입장에 서 있는 안철수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안철수신당이 성공하면 기존의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도 잠식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다당제가 되면 소외된 자들이나 변화를 원하는 자들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라 한다.
중도(中道)
정치평론가와 파워블로거의 글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안철수는 안철수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중도(中道)’라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가운데 길을 말한다. 그런데 정치에서 중도라는 말은 항상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또는 낮에 하는 행동 다르고 밤에 행동 다른 것, 또는 새도 아니고 그렇다고 쥐도 아닌 박쥐와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였다. 대표적으로 70년대의 중도통합론을 들 수 있다.
안철수신당이 생겨나면 이념적으로 중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중도는 어떤 것일까? 먼저 사전적인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도(中道)
(1)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
(2) 오가는 길의 중간.
(3) [불교]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대적인 진실의 도리(道理).
(4) [불교] 고락(苦樂)의 양편을 떠난 올바른 행법(行法).
인터넷 국어사전에 따르면 위와 같이 네 가지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중도의 원래 의미는 ‘바른 길’을 뜻한다. 중도가 단순히 가운뎃길이라기 보다 어느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올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중도는 원래 불교용어
중도는 원래 불교용어이다. 부처님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고 난 다음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은 양극단을 떠나는 것이 중도라 하였다. 이때 중도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맛지마 빠띠빠다(majjhimā paṭipadā)’이다. 맛지마(majjhimā) 가 중간(middle) 또는 중앙(central)라는 뜻이고, 빠띠빠다(paṭipadā)가 길(Road 또는 path)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를 합쳐 한자어로 ‘중도(中道)’라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문자적인 의미로만 보았을 때 중도는 가운뎃길임에 틀림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어지는 설법에서 중도라는 것이 올바른 깨달음(sambodhi)과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nibbānā)에 이끄는 길이라 하였다.
중도는 바른 길이다!
중도라는 것이 단순하게 가운뎃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런 중도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 가르침의 수레바퀴에 대한 경-초전법륜경, 상윳따니까야 S56:11, S55.2.1, 전재성님역)
이 구절에서도 역시 중도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끈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체적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팔정도(八正道)이다. 올바른(sammā)으로 시작 되는 여덟가지 실천방법이 중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도는 바로 팔정도라고 정의 하였다.
그런데 팔정도의 여덟 가지 실천항목을 보면 모두 ‘올바른’ 이라는 말이 들어 간다. 그래서 올바른 견해(正見, sammādiṭṭhi), 올바른 사유(正思惟, sammāsaṅkappo), 올바른 언어(正語, sammāvācā), 올바른 행위(正業, sammākammanto), 올바른 생활(正命, sammāājīvo), 올바른 정진(正精進, sammāvāyāmo), 올바른 새김(正念, sammāsati), 올바른 집중(正定, sammāsamādhi) 이렇게 여덟 가지이다.
이 올바른 이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삼마(sammā)이고, 한자로 정(正)이고, 영어로 right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중도는 가운뎃길이 아니라 바른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터넷 국어사전에 표현된 첫 번째 설명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바른길”에서와 같이 중도란 ‘바른 길’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중도란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바른길인 것이다.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초전법륜경에서는 중도에 대하여 고락중도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양한 중도를 설하였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된 다양한 중도사상
No |
구 분 |
내 용 |
경전적 근거 |
1 |
유무중도 (有無中道) |
존재인 유(有)는 현상계의 소멸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되고 비존재인 무(無)는 현상계의 생성원리를 살펴보면 부정된다. |
"깟차야나여,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또 하나의 극단이다."(S12:15) |
2 |
자타중도 (自他中道) |
자기원인설과 타자원인설은 인과관계의 선형성(lineality)의 두 극단이라고 볼 수 있다.
|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S12:17) |
3 |
단상중도 (斷常中道) |
자기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동일성은 곧 '모든 것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원주의(常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타자원인설에 바탕을 두는 인과의 차별성은 곧 '모든 것은발생되지 않는다'는 허무주의(斷見)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연기법에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모두 부정된다. |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S12:17) |
4 |
일이중도 (一異中道) |
현상계가 완전히 동일하다던가 차별적이라고 한다면, 인과성의 원리는 성립할 수 없다. |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하나입니까?” “모든 것은 하나라고 하는 것은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고따마 존자여, 모든 것은 다른 것입니까?” “모든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도 바라문이여, 세속철학이다. 바라문이여, 이들 양극단을 떠나서 여래는 중도로서 가르침을 설한다.”(S12:48) |
5 |
거래중도 (去來中道) |
인과관계는 궁극적으로 거래(去來)라고 하는 근접성을 반드시 수반할 필요는 없다. 인과는 동시적으로 조건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대과학철학의 이론에서도 드러난다. ‘제일공의경’의 쌍쓰끄리뜨 복원본은 거래를 부정한다. |
"수행승들이여, 시각(眼)이 생길 때 어떤 다른 것에서 오지 않으며, 그것이 사라져버릴 때 어떤 곳에 축적되어 가지도 않는다.(인도철학3집)"
|
6 |
생멸중도 (生滅中道) |
다른 초기경전인 우다나에서는 생멸중도가 괴로움의 종식인 열반의 특성으로 나타난다. |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것을 온다고도 간다고도 머문다고도 소멸한다고도 생기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의지처가 없고 전기(轉起)가 없고 대상(對象)이 없으므로 이것이 괴로움의 종식이라고 나는 설한다."(Ud. 80) |
7 |
고락중도 (苦樂中道) |
초전법륜경에서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과 관련한 실천적 원리로 잘 나타나 있다.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S56:11) |
(출처: 상윳따 니까야 2권 해제, 전재성박사)
고락중도 외에 다양한 중도사상이 있다. 이는 대승불교에서 용수가 제시하는 팔부중도(八不中度) 보다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것을 알 수 있다.
힘센 나쁜 놈(the bad), 이상한 애(the ugly), 착한 애(the good)
최근 유시민 전보건복지부장관이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안철수박사에 대하여 “알아서 자기 길을 열어가겠죠. 그가 어떤 힘으로 이 프레임을 부술 수 있을지 저는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어요.”라고 말하였다. ‘힘센 나쁜 놈(the bad)’과 ‘이상한 애(the ugly)’이라고 표현되는 비루한 정치판에서 ‘착한 애(the good)’가 과연 살아 남을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이다. 그래서 가시밭길을 걸어 가게될 한 신인 정치인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가게될 정치인에 대하여 입 있는 자들은 한 마디씩 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 (S6:9)" 라는 말이 있듯이 ‘힘센 나쁜 놈(the bad)’과 ‘이상한 애(the ugly)’들의 독설이다.
반면 기대어린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이념적으로 중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라는 양대 거대 기득권 집단을 깨 주기 바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안철수의 정체성이 합리적 보수에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볼 때 안철수는 야권을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 보수를 분열시킬 것으로 보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다당제가 되면 민주주의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2030으로 대표되는 청년층과 변화를 바라는 층의 희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안철수식 정치를 ‘새정치’라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중도정치’라 볼 수 있다. 그런 중도는 가운뎃길이라기 보다 국어사전에 표현된 대로 ‘바른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안철수식 새정치가 중도로서 바른 길로 갈 것인지 흥미진진하게 관전할 것이다.
2013-03-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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