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는 신도가 아니라 수행자이다!
종교생활의 새로운 풍속도
일요일 오전 도시에서 볼 수 있는 풍경중의 하나가 교회 가는 사람들이다. 구멍가게 보다 더 많다는 것이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이 교회이다. 그런데 교회 가는 사람들의 차림을 보면 평상시 보다 더 잘 차려 입는다. 이렇게 일요일 오전에 사람들이 교회로 향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익숙한 광경이 되었다.
큰 교회가 하나 있다. 여의도 S교회의 자매 교회인 E교회이다. S교회 J목사의 동생이 창시한 교회이다. S교회 J목사의 후광이 있어서일까 E교회 앞에는 일요일만 되면 차량으로 가득하다. 45인승 전세버스에서부터 마이크로 버스에 이르기 까지 도로 양옆이 주차장이 되었다. 예배가 끝나면 각지로 실어 나르기 위한 차량들이다. 어깨띠를 두른 교회 주차 요원들이 부지런히 교통정리를 하고 평소보다 더 잘 차려 입은 교인들이 교회로 들락 거린다. 일요일 오전 E교회 앞은 이렇게 늘 활기로 넘친다.
작은 교회가 하나 있다.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밖에 까지 들린다. 그런데 전통적인 찬송가 음악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 스타일이다. 더구나 드럼 등 악기를 동원하여 합창하고 있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듣기만 하여도 신이 나는 음악이다.
평일 점심시간 무렵이다. 인근 교회 사람들이 인도에 진을 치고 있다. 중간 사이즈 교회인데 어깨띠를 맨 신도들이 전도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파라솔을 설치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교회팜플렛과 커피를 제공한다.
이렇게 도시에서 일요일 오전은 교회다니는 사람들로 찬송가 소리로 요란하다. 그리고 평일에는 요지에서 전도활동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종교생활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감성을 자극 하는 찬송가
대한민국 국민치고 교회에 한 번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주변에 널려 있는 것이 교회이고, 미션스쿨도 많아서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교회를 접하였을 것이라 본다. 그런 교회의 특징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감성을 자극 하는 것이라 본다. 이는 고교시절 미션스쿨 3년을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감성을 자극 하는 대표적인 것이 노래이다. 찬송가를 말한다. 그래서 예배와 찬송이 주류를 이룬다. 그런 이유로 항상 바이블과 찬송가책은 함께 한다. 교회 가는 사람들의 옆구리에 또는 가방에는 바이블과 찬송가책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할 때 찬송으로 시작해서 찬송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늘 찬송가를 부르다 보니 목사들은 모두 가수처럼 보인다. 노래를 잘 부르기 때문이다. 설교도 잘 해야 하지만 노래도 잘 불러야 훌륭한 목사처럼 보인다. 실제로 미션스쿨 3년 동안 겪은 바에 따르면 교목은 설교도 잘 하지만 특히 노래를 잘 불렀다. 그런 노래는 감성을 자극한다. 그래서 몰입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교회 천지가 된 이유는?
오늘날 왜 교회 천지가 되었을까? 여러가지 요인이 있지만 ‘노래’때문이라 보여 진다. 예배할 때 찬송이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노래가 끊이지 않는다.
노래를 부르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을 것이다. 교인들간 일체감을 느낄 수 있고 감성을 자극함으로써 몰입효과도 있다. 또 소리내어 합창함에 따라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있을 것이다. 우울하거나 심심할 때 노래를 부르면 기분이 전환 되듯이 함께 찬송가를 부르다 보면 스트레스 해소 효과도 있고 노래를 부름에 따라 즐거워 질 수 있다.
찬송없는 예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만일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을 것이라 본다. 노래가 있기 때문에 노래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리는 요인이 있다고 보여진다. 교회에서 찬송없는 예배는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찬송없는 예배는 상상을 할 수 없다. 만일 노래 없이 예배만 한다면 밋밋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고 몰입하게 하는 노래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유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 바탕에는 사람을 흡입하는 강력한 ‘기복’이 깔려 있다.
감성에 호소 하는 대승불교
감성을 자극하는 교회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감성을 자극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래가 발달하지 않았다. 특히 초기불교가 그렇다. 하지만 대승불교에 찬불가가 있다. 마치 교회 찬송가 처럼 수 많은 찬불가가 있어서 규모가 되는 사찰에서는 법회가 열릴 때 마다 합창단에서 찬불가를 부르기도 한다. 그런 사찰의 합창단이 부르는 찬불가는 ‘교회따라하기’ 전형이라 보여진다.
그러고 보면 대승불교와 기독교는 유사한 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종이나 북, 징, 춤, 노래 등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고취한다. 특히 티벳불교에서 그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 사찰에서도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갖가지 도구를 이용한다. 종이나 북, 목어, 심지어 목탁도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각종 진언 역시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반면에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한다. 그래서 종, 북, 목탁 등의 도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진언이나 주문을 외는 것도 없다. 이는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이성에 호소 한다. 그러다 보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때로는 냉정하다. 왜나하면 지혜롭지 못하면 법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원맨쇼 하듯이
언젠가 사찰순례에서 사시공양예불에 참석한 적이 있다. 예불은 정해진 순서에 따라 약 한시간 반 가량 진행 되었다. 예불이 끝나자 옆에 있던 어떤 이가 “오늘 참 속이 다 후련하다”라고 하였다. 천수경, 약찬게, 각종 주문을 함께 독송하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절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한 것 같이 보였던 것이다.
사시예불에서 법문은 없었다. 마치 원맨쇼 하듯이 스님이 정해진 룰에 따라 한시간 반동안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 불자들은 그 때 만큼은 마음의 짐을 내려 놓았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함께 독송함으로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고, 더구나 108배를 함으로써 스트레스도 풀렸을 것이라 본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교회에서 예배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여 진다. 이는 감성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감성을 배격하는 초기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이성에 호소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감성을 배격하는 것이다. 특히 눈과 귀 등 여섯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것에 대한 배격이다. 이는 빠일리니까야를 보면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청각과 소리를 조건으로 청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
(괴로움의 생겨남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106, 전재성님역)
여섯 가지 감각능력중에 청각과 소리에 대한 것이다. 귀로 소리를 들었을 때 갈애가 일어난다면 괴로움이 일어나는 조건이라 한다. 그래서 소리를 즐기고 집착하는 것은 결곡 괴로움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시각과 형상,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감과 감촉, 정신과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교인들을 묶어 두기 위한 방법
요즘 TV를 보면 먹는 이야기가 많다. 특히 저녁 먹을 시간에 집중적으로 보도 되는데, 먹거리를 프로를 보고 있으면 식욕을 자극한다. 단지 보는 것에 지나지 않고 냄새도 맛도 느낄 수 없을 뿐인데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먹는 것은 시각과 후각, 미각, 촉각 모두 자극한다. 그래서 먹는 것은 오감을 한꺼번에 자극한다고 한다. 이렇게 자극하는 프로를 내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국민들을 눈과 귀를 묶어 두기 위함이다. 그래서 먹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5공시절 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대표 되는 3S정책으로 정치에서 관심을 멀어지게 하듯이, 먹거리 프로를 집중방영함으로서 국민의 관심을 정치로부터 돌리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것 역시 교인들을 묶어 두기 위한 방법이라 볼 수 있다. 입으로 찬송가를 부르고 그 소리를 들음에 따라 그 순간을 즐기기 때문에 묶여 있는 것이다. 마치 맛을 아는 사람이 맛집 순례를 하며 맛에 대한 갈애를 가지듯이 소리에 더 열중하고 더욱 더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소리를 하고 나면 즐겁고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이다. 이런 맛에 교회를 가는 것이 아닐까?
절에 가면 절을 한다. 주로 108배이다. 마치 운동하듯이 108배를 한다. 실제로 운동효과도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절을 하고 나면 신심도 생기지만 무엇 보다 건강이 좋아 진다는 사실이다. 마치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부르면 신심도 나고 스트레스도 풀리듯이, 절을 하고 나면 무언가 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행하는 모습을 보면
처음 위빠사나 수행처에 갔었을 때 일이다. 가장 처음에 가르쳐 준 것이 ‘경행’이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런 경행 모습을 보면 밋밋하기 그지 없다. 손을 앞으로 모으고 천천히 걷기도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내딛는 모습이 마치 로보트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슬로비디오’를 보는 듯 했다. 그러나 정해진 코스를 말없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은 매우 진지해 보였다.
누군가 경행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재미 없어 할 것이다. 만일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 경행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10배를 하고 1000배를 하고 3000배를 해야 무언가 한 것처럼 느껴 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위빠사나 수행처를 본다면 역시 재미 없어 할 것이다. 교회처럼 노래 부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악기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심지어 춤을 추어야 무언가 한 것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삶의 수단
절에 다니는 사람들이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위빠사나 수행처를 보았다면 재미 없어 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인간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하여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설렁설렁 대충 넘어가는 것일까? 말없이 경행하는 모습 하나만 보고서 밋밋하고 싱겁다고 볼 수 있을까? 반드시 108배를 해야 무엇을 한 것 같고, 노래를 불러야 감동하는 하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경행과 좌선을 병행한다. 경행이 끝나면 좌선을 하는데, 이때 한시간 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 눈을 감고 강한 대상에 집중한다. 그렇게 장시간 앉아 있다 보면 갖가지 생각이 다 일어 난다. 또 다리가 저리는 등 신체적 고통이 수반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가장 강력한 삶의 수단’이라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밋밋하고 싱거운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절을 하고 노래를 하는 등 감성을 자극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신행 방법이다.
신도와 수행자
기독교에서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을 ‘신자’라 부른다. 그런데 불교에서도 역시 신자라 한다. 그래서 ‘불교신자’ 또는 ‘불교신도’라 한다. 이는 조계종의 경우 ‘중앙신도회’라는 단체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스님들이 법문할 때 “신도여러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기독교나 불교나 믿는 사람은 모두 ‘신자’라 칭한다. 하지만 초기불교는 다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재가불자는 신도라기 보다 차라리 ‘수행자’에 가깝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신자 또는 신자라 부르지 않는다. 반드시 ‘수행자’라 부른다. 실제로 수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사는 “수행자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신도 여러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모두 수행자이다. 대표적으로 빅쿠(비구), 빅쿠니(비구니), 우빠사까(청신사). 우빠시까(청신녀) 이렇게 사부대중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를 믿을 뿐 그 외 다른 것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 수행자로 보는 것은 불교의 성립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불교가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영원한 자아를 상정하는 ‘아뜨만’과 세상의 근원이라 불리 우는 ‘브라만’에 대하여 실체가 없음을 연기법으로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대상이 없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 삿다(saddhà)
불교에서는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삼보 이외에 믿을 수 있는 대상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서 보라”고 말한다. 만일 “믿어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나 절대자를 믿는 종교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신교에서는 믿어야만 종교가 성립하기 때문에 일단 믿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와서 보라”고 하였다. 와서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다.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대조하여 보았을 때 틀림 없다는 것을 알면 비로소 믿는 것을 말한다. 이런 믿음을 ‘삿다(saddhà)’라 한다. 사성제가 대표적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였을 때 자신의 삶에서 생노병사 등 8고를 되돌아 보았을 때 그 가르침이 틀림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비로소 받아 들인다. 이런 이해에 바탕한 믿음, 확신에 찬 믿음이 불교적 믿음인 ‘삿다(信)’인 것이다.
이해에 바탕한 믿음을 갖게 되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갖게 된다. 따라서 감성을 자극하는 노래나 춤, 주문, 악기 등의 소리를 멀리한다. 그런 이유로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노래도 없고, 목탁이나 북 등 소리를 내는 것도 없고, 108배 하는 것도 없고, 춤추는 것도 없다. 인간의 오욕락을 자극하는 것은 수행의 대상이 아니고 방해 요소로 보기 때문이다.
왜 재가불자가 수행자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는 자는 모두 수행자이다. 출가자이건 재가자이건 모두 수행자이다. 이는 부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빠알리나까야에 따르면 ‘제일’ 또는 ‘으뜸’이라는 ‘악가(agga)’ 명칭이 붙은 제자들이 있다. 사리뿟따의 경우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mahāpaññānaṃ)’이라 불리운다.
이런 식의 명칭이 재가자인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빠사까의 경우 수닷따 아나타삔디까에 대하여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dāyakānaṃ)’라 하였다. 또 우빠시까의 경우 사마와띠가 ‘자애를 닦는 님 가운데 제일(mettāvihārīnaṃ)’이라 하였다. 이런 제자들은 신도라기 보다 수행자들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일가는 제자 80명 중에 우빠사까(청신사) 9명이 포함되어 있고, 우빠시까(청신녀)는 10명이 포함 되어 있다.
참고로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으뜸 가는 제자 80명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80대 제자
No |
이 름 |
특 징 |
비 고 |
1 |
안냐꼰단냐 aññākoṇḍañña |
세월을 아는 님 가운데 제일 rattaññūnaṃ |
빅쿠(비구)
|
2 |
사리뿟따 sāriputta |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 mahāpaññānaṃ | |
3 |
마하목갈라나 mahāmoggallāna |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 iddhimantānaṃ | |
4 |
마하깟사빠 mahākassapa |
두타를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 dhutavādānaṃ | |
5 |
아누룻다 anuruddha |
하늘 눈을 가진 님 가운데 제일 dibbacakkhukānaṃ | |
6 |
밧디야 깔리고다야뿟따 Bhaddiya kāḷigodhāya puttoa |
높은 가문 출신 가운데 제일 uccākulikānaṃ | |
7 |
라꾼다까 밧디야 lakuṇaṭakabhaddiya |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님 가운데 최고 mañjussarānaṃ | |
8 |
삔돌라 바라드자와 piṇḍolabhāradvāja |
사자후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 sīhanādīkānaṃ | |
9 |
뿐나 만따니뿟따 puṇṇa mantāṇiputta |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 dhammakathikānaṃ | |
10 |
마하 깟짜나 mahākaccāna |
간략하게 설해진 것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는 님 가운데 제일 saṃkhittena bhāsitassa vitthārena atthaṃ vibhajantānaṃ | |
11 |
쭐라 빤타까1 cullapanthaka |
정신으로 이루어진 몸을 만들어내는 자 가운데 제일 cetovivaṭṭakusalānaṃ | |
12 |
쭐라 빤타까2 cullapanthaka |
마음의 전환에 유능한 자 가운데 제일 cetovivaṭṭakusalānaṃ | |
13 |
마하 빤타까 mahāpanthaka |
지각의 전환에 유능한 자 가운데 제일 saññāvivaṭṭakusalānaṃ | |
14 |
수부띠1 subhūti |
평화롭게 사는 님 가운데 제일 araṇavihārīnaṃ | |
15 |
수부띠2 subhūti |
보시 받을 가치가 있는 님 가운데 제일 dakkhiṇeyyānaṃ | |
16 |
레바따 카다라바니야 revata khadiravaniya |
āraññakānaṃ 숲속에서 지내는 님 가운데 제일 | |
17 |
캉카 레바따 kaṅkhārevata |
선정에 드는 님 가운데 제일 jhāyīnaṃ | |
18 |
소나 꼴리위사 soṇa koḷivīsa |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 kalyāṇavākkaraṇānaṃ | |
19 |
소나 꾸띠깐나 Soṇa Kuṭikaṇṇa
|
분명한 언표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 kalyāṇavākkaraṇānaṃ | |
20 |
시발리 sīvalī |
보시를 받는 님 가운데 제일 lābhīnaṃ | |
21 |
왁깔리 vakkalī |
믿음이 돈독한 님 가운데 제일 saddhādhimuttānaṃ | |
22 |
라훌라 rāhula |
배우기를 열망하는 님 가운데 제일 sikkhākāmānaṃ | |
23 |
랏타빨라 raṭṭhapāla |
믿음으로 출가한 님 가운데 제일 saddhāpabbajitānaṃ | |
24 |
꾼다다나 kuṇḍadhāna |
먼저 산가지를 받는 님 가운데 제일 paṭhamaṃ salākaṃ gaṇhantānaṃ | |
25 |
왕기사 vaṅgīsa |
변재가 있는 님 가운데 제일 paṭibhānavantānaṃ | |
26 |
우빠세나 왕간따뿟따 upasena vaṅgantaputta |
단정한 님 가운데 제일 samantapāsādikānaṃ | |
27 |
답바 말라뿟따 dabba mallaputta |
처소를 배정하는 님 가운데 제일 senāsanapaññāpakānaṃ | |
28 |
삘린다 왓차 piḷindivaccha |
신들이 좋아 하고 사랑하는 님 가운데 제일 devatānaṃ piyamanāpānaṃ | |
29 |
바이야 다룻찌리야 bāhiya dārucīriya |
재빨리 곧바로 아는 님 가운데 제일 khippābhiññānaṃ | |
30 |
꾸마라깟사빠 kumārakassapa |
재기에 넘친 설교님 가운데 제일 cittakathikānaṃ | |
31 |
마하꼿티따 mahākoṭṭhita |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님 가운데 제일 paṭisambhidāppattānaṃ | |
32 |
아난다1 ānanda |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 bahussutānaṃ | |
33 |
아난다2 ānanda |
새김을 확립한 님 가운데 제일 satimantānaṃ | |
34 |
아난다3 ānanda |
행동거취가 분명한 님 가운데 제일 gatimantānaṃ | |
35 |
아난다4 ānanda |
의지가 확고한 님 가운데 제일 dhitimantānaṃ | |
36 |
아난다5 ānanda |
시중드는 님 가운데 제일 upaṭṭhākānaṃ | |
37 |
우르웰라 깟사빠 uruvelakassapa |
대중을 거느린 님 가운데 제일 mahāparisānaṃ | |
38 |
깔루다이 kāludāyi |
가족을 기쁘게 하는 님 가운데 제일 kulappasādakānaṃ | |
39 |
박꿀라 Bakkula |
잘 병들지 않는 님 가운데 제일 appābādhānaṃ | |
40 |
소비따 sobhita |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님 가운데 제일 pubbe nivāsaṃ anussarantānaṃ | |
41 |
우빨리 upāli |
계율을 지키는 님 가운데 제일 vinayadharānaṃ | |
42 |
난다까 nandaka |
수행녀들에게 충고 하는 님 가운데 제일 bhikkhunovādakānaṃ | |
43 |
난다 nanda |
감관을 수호 하는 님 가운데 제일 Indriyesu guttadvārānaṃ | |
44 |
마하깝삐나 mahākappina |
수행승들에게 충고 하는 님 가운데 제일 bhikkhuovādakānaṃ | |
45 |
사가따 sāgata |
불의 세계에 대한 명상에 유능한 님 가운데 제일 tejodhātu kusalānaṃ | |
46 |
라다 rādha |
변재가 있는 님 가운데 제일 paṭibhāneyyakānaṃ | |
47 |
모가라자 mogharājā |
거친 옷을 걸치는 님 가운데 제일 lūkhacīvaradharānaṃ | |
48 |
마하빠자빠띠고따미 mahāpajāpatīgotamī |
세월을 아는 님 가운데 제일 rattaññūnaṃ |
빅쿠니(비구니)
|
49 |
케마 khemā |
위대한 지혜를 지닌 님 가운데 제일 mahā paññānaṃ | |
50 |
웁빨라반나 uppalavaṇṇā |
신통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 iddhimantīnaṃ | |
51 |
빠따짜라 Paṭācārā |
계율을 지키는 님 가운데 제일 vinayadharānaṃ | |
52 |
담마딘나 dhammadinnā |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 dhammakathikānaṃ | |
53 |
난다 nandā |
선정에 드는 님 가운데 제일 jhāyīnaṃ | |
54 |
소나 soṇā |
열심히 노력하는 님 가운데 제일 āraddhaviriyānaṃ | |
55 |
사꿀라 sakulā |
하늘눈을 가진 님 가운데 제일 dibbacakkhukānaṃ | |
56 |
밧다꾼달라께사 bhaddākuṇaḍalakesā |
곧바로 아는 님 가운데 제일 khippābhiññānaṃ | |
57 |
밧다까삘라니 bhaddākāpilāni |
전생의 삶을 기억하는 님 가운데 제일 pubbenivāsaṃ anussarantīnaṃ | |
58 |
밧다깟짜나 bhaddakaccānā |
위대한 곧바른 앎에 도달한 님 가운데 제일 mahābhiññappattānaṃ | |
59 |
끼사고따미 kisāgotamī |
거친 옷을 입는 님 가운데 제일 lūkhacīvaradharānaṃ | |
60 |
시갈라마따띠 sigālamātāti |
믿음으로 해탈한 님 가운데 제일 saddhādhimuttānaṃ | |
61 |
따뿟사발리까 tapussabhallikā |
먼저 귀의한 님 가운데 제일 paṭhamaṃ saraṇaṃ gacchantānaṃ | |
62 |
수닷따 아나타삔디까 Sudatta anāthapiṇḍika |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 dāyakānaṃ |
우빠사까(청신사)
|
63 |
찟따 맛치까산디까 Citta macchikāsaṇḍik a |
가르침을 설하는 님 가운데 제일 dhammakathikānaṃ | |
64 |
핫타까 알라와까 Hatthaka ālavaka |
네 가지 섭수의 기초로 대중을 돕는 님 가운데 제일 catūhi saṅgahavatthūhi parisaṃ saṃgaṇhantānaṃ | |
65 |
마하나마 삭까 mahānāmo sakka |
뛰어난 것을 보시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 paṇītadāyakānaṃ | |
66 |
욱가 웨살리까 Uggoa vesālika |
즐거운 보시를 하는 님 가운데 제일 manāpadāyakānaṃ | |
67 |
욱가따 uggata |
참모임에 시중 드는 님 가운데 제일 saṃghupaṭṭhākānaṃ | |
68 |
수라 암밧타 sūra ambaṭṭha |
흔들리지 않는 청정한 믿음을 내는 님 가운데 제일 aveccappasannānaṃ | |
69 |
지와까 꼬마라밧짜 jīvaka komārabhacca |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님 가운데 제일 puggalappasannānaṃ | |
70 |
나꿀라삐따 nakulapitā |
친절하게 말하는 님 가운데 제일 vissāsakānaṃ | |
71 |
수자따 sujātā |
먼저 귀의한 님 가운데 제일 paṭhamaṃ saraṇaṃ gacchantīnaṃ |
우빠시까(청신녀)
|
72 |
위사카 미가라마따 visākhā migāramātā |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 dāyikānaṃ | |
73 |
쿳줏따라 khujjuttarā |
많이 배운 님 가운데 제일 bahussutānaṃ | |
74 |
사마와띠 sāmāvatī |
자애를 닦는 님 가운데 제일 mettāvihārīnaṃ | |
75 |
웃따라 난다마따 uttarā nandamātā |
선정을 닦는 님 가운데 제일 jhāyīnaṃ | |
76 |
숩빠와사 꼴리야디따 suppavāsā koliyadhītā |
뛰어난 것을 보시하는 님 가운데 제일 paṇītadāyikānaṃ | |
77 |
숩삐야 suppiyā |
환자를 돌보는 님 가운데 제일 gilānupaṭṭhākīnaṃ | |
78 |
까띠야니 kātiyānī |
청정한 믿음을 지닌 님 가운데 제일 aveccappasannānaṃ | |
79 |
나꿀라마따 nakulamātā |
친근하게 대하는 님 가운데 제일 vissāsikānaṃ | |
80 |
깔리 kāḷī |
소문을 듣고도 청정한 믿음을 내는 님 가운데 제일 anussavappasannānaṃ |
(출처: 앙굿따라니까야 1:196~1:275, 전재성님역)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빅쿠와 빅쿠니 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도 수행자로 본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는 자라면 모두 수행자로 보는 것이다.
재가불자는 신도가 아니다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이 “빅카웨” 라고 불렀을 때 반드시 빅쿠(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부대중 모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 것으로 알 수 있다.
[마하나마]
“세존이시여, 재가신자가 지혜를 갖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존]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하고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
(마하나마경, 상윳따니까야 S55:37)
재가불자가 되려면 삼보를 믿고 오계를 준수하면 된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자와 똑같이 사성제를 통하여 지혜를 성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재가불자가 단지 보시하고 지계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수행을 통하여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재가불자는 더 이상 신도라 부를 수 없다.
재가불자는 수행자이다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불자들을 신도라 부른다. 한국불교에서 수행자라 함은 출가한 스님들을 말한다. 그래서 한국불교는 스님과 신도 이렇게 이원화 되어 있다. 이는 기독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독교에서 믿는 자를 신자라 한다. 그래서 목사와 신자, 신부와 신자 이렇게 이원화 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모두 동등하다. 출가자인 빅쿠나 빅쿠니, 그리고 재가자인 우빠사까와 우빠시까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로서 동등하다. 누구가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라면 수행자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신도가 아니라 수행자이다.
2013-09-0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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