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명상 마라나사띠(maranasati)
생태하천에서
생태하천이 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오폐수로 악취가 진동하여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생명이 살아 숨쉬는 생태하천으로 거듭난 것이다.
하천 바닥에는 물고기들이 산다. 어른 장딴지 만한 커다란 물고기들이다. 주로 다리 밑에 모여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를 지어 유유하게 헤엄치는 모습이 한가롭게 보인다. 마침 물위에는 청둥오리들도 있어서 생태하천은 그야말로 생명의 하천이 되었다.
물새가 노니는 모습은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생존의 몸부림을 하고 있다. 물에 떠 있기 위하여 열심히 다리를 젖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다닌다. 커다란 물고기 역시 유유하게 헤엄치며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열심히 먹을 것을 찾아 다닌다. 한가로워 보이는 물속에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하여 쫒고 쫒기는
밤 늦은 시간 EBS다큐프로를 보았다. 동물들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치타와 황금자칼에 대한 것을 보았다. 둘 다 생존을 위하여 먹이를 찾아 다녀야 하는 포식자이다. 약육강식의 축생의 세계에서 상위에 랭크 되어 있지만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못하면 살아 갈 수가 없다. 더구나 새끼들 까지 있으면 생존을 위하여 사냥을 해야 한다. 사냥의 대상은 가젤영양 과 같은 초식동물이다. 그 중에서 동작이 느리거나 다쳤거나 새끼는 사냥의 타겟이 된다.
치타와 가젤영양간의 쫒고 쫒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치타는 혼신의 힘을 다해 폭발적인 스피도로 달려 간다. 영양은 먹히지 않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도망간다. 모두 살아남기 위하여 쫒고 쫒기는 것이다. 마침내 치타는 영양을 덥친다. 치타가 영양의 숨통을 끊어 놓자 가젤영양은 축 늘어진다.
언제죽을지 모른 것이 축생의 세계이다. 지금 숨이 붙어 있더라도 누군가 습격하여 자신의 숨통을 끊어 놓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축생세계에서 수명은 보장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람은 안전할까?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목숨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nimittamanaññātaṃ
maccānaṃ idha jīvitaṃ,
Kasirañca parittañca tañca
dukkhena saññātaṃ.
[세존]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사람의 목숨이 정해지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정해지지 않은 (Animittam)’이라는 말은 각주에 따르면 ‘업의 대가를 치를 때 까지는 죽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인간의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것은 자신이 지은 ‘업’때문으로 본다. 따라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 ‘알 수 없고(aññātaṃ)’라고 하였다. 이 말은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삶이라는 것이 애처롭고 비참하고 어렵고 곤란한 것이라 하였다.
언제 죽을지 몰라
이처럼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어지는 게송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halānamiva pakka naṃ
pāto patanato bhayaṃ,
Evaṃ jātānamaccānaṃ
niccaṃ maraṇato bhayaṃ.
[세존]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allasutta-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사형수가 있다. 사형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일년 후에 죽을지, 한달 후에 죽을지 심지어 오늘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늘 죽음의 두려움에 떤다. 차라리 언제 죽을지 알려 준다면 마음의 준비나 하련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하루 하루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언제죽을지 알 수 없다. 기대수명이 팔십세라 하지만 그때 까지 산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경에서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라 하였다. 언제 죽을지 몰라 항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라 하였다.
여러가지 죽음의 조건
사형수에게는 죽음이 언제올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다.
누구나 죽게 되어 있다. 언제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데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날이 저물고 밤이 오면 이와 같이 ‘나에게 죽음의 조건은 많다. 뱀이 나를 물거너, 전갈이 나를 물거나, 지네가 나를 물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
나는 걸려 넘어져서 떨어지거나, 점액이 나를 막히게 하거나, 날카로운 바람이 나를 괴롭히면, 그 때문에 나는 죽을 것이고 그것은 나에게 장애가 될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Dutiya maraṇasati suttaṃ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2, 앙굿따라니까야 A6:20, 전재성님역)
하나의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간판 밑을 지나가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뉴스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람이 간판밑을 지나가다 오래 된 간판이 떨어져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 의도적으로 간판을 피해 다니게 되었다.
경에서는 죽음의 조건으로서 뱀, 전갈, 지네 등을 들었다. 그러나 현대에 있어서 죽음의 조건은 이에 못지 않게 매우 많다. 차를 타고 가다가 뒤에서 들이 받아 죽을 수 있고, 강도를 만나 죽을 수도 있다. 또 술이 취해 계단을 내려가다 헛딛어 추락해 죽을 수도 있다. 부부싸움끝에 격분한 상대방에 의하여 살해 당할 수도 있다. 길거리를 걷다가 납치 당하여 성폭행을 당하여 죽을 수도 있다.
이렇게 수 많은 죽음의 조건이 있는데 이는 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일이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사건이 현실화 될 수 없는 것이라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이처럼 도처에 죽음의 조건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명에 살지 못하고 언제 죽을지 몰라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아간다.
죽음에 대한 명상, 마라나사띠(maraṇasati)
사형수에게는 죽음이 언제올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알 수 없다. 보통사람들도 죽게 되어 있다. 언제가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데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 죽음이 들이 닥칠지 알 수 없다. 지금 한가롭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일지라도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불사에 뛰어들고 불사를 궁극으로 하는 커다란 과보와 커다란 공덕을 얻는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
(Paṭhama maraṇasati sutta-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사띠를 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음에 대한 사띠(sati)를 닦는 것일까? 경에서 한 수행승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수행승]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을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저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습니다.
(Paṭhama maraṇasati sutta-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1, 앙굿따라니까야 A6:19, 전재성님역)
한 수행승이 하루 밤낮을 살 것으로 생각하여 죽음에 대한 명상수행을 한다고 하였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 만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늘 죽음을 마음에 두고 살아 갈것을 말하고 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고 실천하는 삶을 살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수행승은 이 보다 더 적극적이다. ‘하루 낮 동안 살더라도’ ‘마라나사띠(maraṇasati)’ 를 하겠다고 하였다. 또 다른 수행승은 ‘ 탁발음식을 먹는 동안’이라 하였고, 또 다른 수행은 ‘내가 다섯모듬 씹는 동안’이라 하였다.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침내 어느 수행승이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이라 하였다. 지금 호흡하는 이 순간에도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띠를 실천하겠다는 말이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사람은 지은 업대로 살기 때문에 딱히 정해진 수명이 없다. 이는 축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수명과 복이 보장되는 천상의 세계에 달리 인간 이하 축생 등의 세계는 정해진 수명이 없다. 그래서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 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호흡이 멈추면 죽음으로 본다.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이라도 호흡이 멈추면 나무토막과도 같다. 생명이 끊어진 영웅호걸은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라 연약한 자라도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는 식은죽 먹기 보다 더 쉬운 일이다. 이렇게 손가락 하나 까닥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가 삶과 죽음이다.
죽기가 죽기 보다 더 싫을 때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 온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준비가 안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천년 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이것 저것 벌려 놓았는데 갑자기 죽음이 들이닥쳤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성찰해야 한다.
(Dutiya maraṇasati suttaṃ -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2, 앙굿따라니까야 A6:20, 전재성님역)
오늘 밤에 죽음이 찾아 왔을 때 신변정리가 안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며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업을 잔뜩 지어 놓았는데 갑자기 죽음이 찾아 온다면 두려울 것임에 틀림 없다. 선한 일보다 악한 일을 더 많이 하고 살았을 때 죽음이 두려울 것이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나중에 되돌아 보니 욕만 잔뜩하고 산 것을 알았을 때 커다란 죄업을 짓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 죽기가 죽기 보다 더 싫을 것이다.
옷에 불이 붙었을 때
더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갑자기 찾아 온 죽음으로 인하여 놀라고 당황할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성찰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하여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에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하여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진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Dutiya maraṇasati suttaṃ-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2, 앙굿따라니까야 A6:20, 전재성님역)
옷에 불이 붙거나 옷에 불이 붙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곧바로 꺼야 할 것이다. 그런 불이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라 하였다. 내일 죽을지 오늘 밤 자다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라고 하였다.
어떤 마음으로 임종을 맞이 해야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간이지만 임종을 맞는 다는 것은 행운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죽어 가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종은 어떤 마음으로 맞이 해야 할까? 어느 수행승이 법의 사령관이라 불리우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어떻게 수행승이 살면 임종에 이를 때 후회하는 삶을 삽니까?”라고 물어 보았다. 이에 사리뿟따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사리뿟따]
벗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세속적인 일에서 호감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기쁨을 찾고, 세속적인 일에서 즐거움에 몰두하고, 잡담에서 호감을 찾고, 잡담에서 기쁨을 찾고, 잡담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잠에서 호감을 찾고, 잠에서 기쁨을 찾고, 잠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모임에서 호감을 찾고, 모임에서 기쁨을 찾고, 모임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교제에서 호감을 찾고, 교제에서 기쁨을 찾고, 교제의 즐거움에 몰두하고, 희론에서 호감을 찾고, 희론에서 기쁨을 찾고, 희론의 즐거움에 몰두합니다. 벗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살면 임종에 이를 때 후회하는 그러한 삶을 삽니다.
(Anutappasutta-후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5, 전재성님역)
수행자가 임종에 이르렀을 때 후회하는 것들에 대한 내용이다. 잡담하고 잠을 만지 즐기고 모임을 갖고 교제를 하고 형이상학적 희론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면 임종할 때 반드시 후회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회하는 삶과 반대의 삶을 살면 된다. 그렇다면 재가자의 임종은 어떤 것일까?
“근심을 가지고 임종에 들지 마십시요”
임종에 들었을 때 ‘여한’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한을 품고 죽으면 죽어서 좋은 세상에 못 태어나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경에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꿀라마따]
장자여, 아마도 그대는 이와 같이 ‘아내 나꿀라마따는 내가 죽은 뒤에 다른 배우자에게 시집을 갈 것이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장자여,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장자여, 그대와 나는 우리가 십육년 동안이나 재가자로서 청정한 삶을 수용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근심을 가지고 임종에 들지 마십시요. 장자여, 근심이 있는 임종은 괴롭습니다. 세존께서는 근심이 있는 임종을 질책하였습니다.
(Nakulapitusutta-나꿀라삐따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6:16, 전재성님역)
재가자의 임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장자 나꿀라삐따가 임종하려 하자 그의 아내 나꿀라마따가 “근심을 가지고 임종에 들지 마십시요.”라고 하였다. 임종에 들기 전에 남겨진 가족들과 그 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걱정하는 것을 말한다.
장자는 자신이 죽으면 집안이 잘 유지 되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 심지어 아내가 재혼하는 것을 염려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내는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이런 저런 근심걱정을 놓아 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세존께서는 근심이 있는 임종을 질책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죽는 자가 가족 걱정, 재산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말한다. 죽은 자는 자신의 힘으로 손가락 하나 까닥 못하는데 그런 걱정 해 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할까?
불자들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 특별히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인간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늘 죽음을 겁내며 살아 간다. 기대수명이 있다고는 하지만 단지 기대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내일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만일 내일 죽음을 맞게 되면, 아니 지금 이 순간에 죽음이 왔을 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후회 있는 임종을 맞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자세로 죽음에 대한 죽음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말씀 하셨다.
1.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2.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낮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3.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한끼 탁발음식을 먹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4.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네 다섯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5.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한모금을 씹어 삼키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6.
수행승들이여, 이 수행승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이와 같이 ‘내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동안만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닦는다.
(Paṭhama maraṇasati sutta-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 1, 앙굿따라니까야 A6:19, 전재성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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