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시대에서 빅쿠의 시대로
두 개의 글을 읽었다. 하나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스님에 대한 글이고, 또 하나는 테라와다 빅쿠에 대한 글이다. 먼저 조계종스님에 대한 글이다.
여신도의 저주
인터넷카페에 게시된 조계종 스님에 대한 글은 충격적이다. 검색을 해보니 주간조선에 실려 있다. ‘여신도의 저주’란 제목으로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 8월 28일 오전, 기자가 A사찰을 찾아갔을 때 사찰 주지의 집무실 책상은 뿌옇게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경내는 평온해 보였지만 대한불교 조계종(이하 조계종)을 대표하는 24개 교구본사 중 하나임에도 승려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종무실 관계자는 “주지스님이 바뀌면 본사 승려들의 면면도 바뀌는 게 관례”라고 했다. 8월 말로 임기를 마치는 전임 주지와 9월 1일 입성하는 신임 주지 측의 권력 교체기에 나타나는 업무 공백이라는 것이다. 사직서를 제출한 현 종무실 직원들도 업무에서 손을 뗀 지 며칠이 지난 듯했다.
충남 지역을 대표하는 조계종 교구본사 사찰 A사(寺)는 전·현직 주지 측의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8월 말로 임기를 마치는 전임 주지 B스님 측 인사들은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대부분 사직서를 제출했고, 신임 주지 C스님 측은 아직 사찰의 인수인계를 받지 않아 종무행정이 일시 마비되는 사태를 맞았다.
지난 7월 18일 A사찰의 주지직을 놓고 벌인 양측의 선거전은 여자, 돈, 권력(인사권)이 한데 엉켜들며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 세속의 정치보다 더한 진흙탕 싸움으로 전개됐다. 조계종은 전국에 총 24개 교구본사를 두고 있다. 각 본사는 100개 안팎의 말사를 거느리는 한편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에서 10명의 선거인단을 추천할 권한을 갖기 때문에 본사 주지직은 종단의 핵심 요직이다. 게다가 A사의 이번 주지 선거는 오는 10월 10일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연임이 예상되는 현 자승 총무원장의 측근과 반(反)자승 후보가 맞붙었다는 점에서 총무원장 선거의 축소판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었다. A사찰의 경우 신임 C주지가 자승파로, 전임 B주지가 반자승파로 분류됐다.
A사 주지 선거가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50대 초반의 여성 유모씨(구속)가 등장하면서부터다. A사 종무실 관계자에 따르면 유씨는 전 주지인 B스님에게 의도적으로 접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이를 꼬투리 잡아 수천만원을 갈취해 간 것으로 알려졌다. B스님은 수도권의 대형 사찰 주지를 맡다가 2009년 8월 자신이 출가한 A사찰의 주지 선거에 출사표를 던져 당선된 인물이다. 당시 A사 주변에서는 “B스님은 수도권 대형 사찰에서 주지를 오래 맡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익명을 요구한 A사 종무실 관계자의 설명이다. “B스님은 수도권 큰 사찰에서 주지로 오래 일했고 평가도 좋았다. A사찰 주지 선거에서 승리하고 나서 의도적으로 B스님에게 접근하는 여성 신도가 있었는데, 유씨가 대표적 인물이다. 유씨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스님에게 술을 권하는 등의 방법으로 잠자리를 가진 뒤 3년 동안 스님을 괴롭혀 왔다. 돈도 돈이지만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상대 진영 후보와 접촉하며 주지스님을 곤경에 빠뜨렸다. 결국 주지스님은 선거에 불출마 선언을 했고 경쟁자였던 C스님이 주지에 당선됐다. 꽃뱀에게 보기 좋게 당한 꼴이 됐다.”
B스님과 유씨가 처음 만난 건 2010년 봄 사찰 축제 기간이었다고 한다. 초보 불화(佛畵)작가인 유씨는 평소 전통불화의 맥을 잇고 있는 A사찰에 관심을 갖고 있다가 사찰이 주최하는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A사를 찾았다. 당시 주지인 B스님과 처음 인사를 나눈 유씨는 축제 기간 자신이 그린 불화를 전시하기도 했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유씨는 수시로 A사찰을 드나들며 주지와 친분을 쌓았고 결국 부적절한 관계로 이어졌다는 게 B스님 측의 주장이다.
유씨는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유씨는 B스님과 관계를 이어가며 불화 제작비용 등의 명목으로 자주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약 3년 동안 유씨와 만남을 이어온 B주지스님은 결국 올해 초 주지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주변에 내비쳤다. 유씨와의 관계가 선거전에서 불거질 경우 그동안 승려로서 쌓아온 모든 이력이 송두리째 부정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선거를 몇 달 남겨둔 시점에서 유씨는 주지직 연임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B스님을 설득하며 재출마를 종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편으론 B스님과 주지직을 놓고 경쟁구도를 형성한 C스님과 접촉하며 B스님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언급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B스님 측근들은 이와 관련 “당시 선거를 치르지 않고 B스님을 단독 후보로 추천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출마를 검토해온 C스님이 유씨와 접촉하고 나서 돌연 유씨가 경찰에 성폭행을 당했다며 B스님을 고소했다. 주지스님은 과거를 후회하면서도 그 여성의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유씨가 고소장을 들고 경찰서를 찾은 건 선거를 45일 남겨둔 지난 6월 4일이다. 고소장에는 “B스님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의 내용은 금세 A사와 말사의 승려들에게 펴졌다. 유씨가 고소를 전후한 시기에 C스님을 지원하던 말사 주지 등이 현직 주지와 유씨의 부적절한 관계를 퍼트리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B스님 측은 고소 사실을 전해 듣고 주지 불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동시에 부랴부랴 자신과 가까운 주지 후보를 내세웠으나 선거를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B스님 측은 선거를 전후한 시기에 유씨와 접촉하며 고소의 배경을 캐고 다녔다. 이 과정에서 유씨는 “C스님 측에서 현직 주지를 고소하면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고 종무실 관계자는 전했다. 이 관계자는 또 “선거에서 승리한 뒤 C스님 측이 유씨와 접촉을 끊자, 유씨가 다시 C스님이 고소를 사주했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다”고도 했다.
7월 18일 선거가 진행되는 와중에 고소 사건에 대한 사정당국의 조사가 이어졌다. B스님은 경찰 조사에서 유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시인했지만 성폭행은 사실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B스님은 유씨가 부적절한 관계를 빌미로 금품을 요구하고 협박해온 사실을 검찰에서 폭로했다. 결국 검찰은 이번 고소 사건과 관련 B스님에게 ‘혐의없음’을 통보했다.
반면 유씨는 지난 8월 1일 긴급체포됐다. 검찰은 유씨를 무고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지난 8월 20일 구속수감했다. 유씨는 B스님의 나체사진 등을 몰래 촬영한 뒤 유포한 혐의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미 선거는 C스님의 승리로 종료된 뒤였다. B스님 측은 유씨를 배후에서 조종한 세력에 C스님 측이 가담했다는 정황을 파악하고 나서 C스님의 문제점을 집중 부각하며 반격에 나섰다. B스님은 검찰에 낸 탄원서에서 “A사 주지 선출을 위한 선거국면이라는 민감한 시기를 노려 경찰 고발이 있었고 그 표적이 된 현직 교구장과 경쟁관계에 있던 C스님 측에서 사건을 교사하고 금품과 기타 편의 제공을 약속했다는 말을 유씨가 공공연하게 하고 다녔다. 엄정 수사를 통해 고소 사건의 배후 세력을 밝혀달라”고 촉구했다.
B스님 측은 또 주지 선거를 앞두고 C스님 측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의 선거자금을 일부 선거인단에 뿌리며 불법 선거를 했다면서 선거부정 의혹도 제기했다. B스님 측은 C스님에게 부정한 자금을 받은 일부 스님의 진술을 받아 검찰에 제출했다고 주장했다. A사 종무실 관계자는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선거를 일주일가량 남겨둔 시점에 C스님 측 일부 인사가 C스님의 지지를 부탁하며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까지 전달했다”고 말했다.
교구본사인 A사는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연이어 2명의 사찰 주지가 구속된 전력이 있다. 국고보조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하거나 말사 주지직 임명권을 갖고 매관매직을 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되는 수난을 겪었다. 당시 수사상황을 잘 아는 A사의 한 관계자는 “A사의 한 해 예산이 11억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 매관매직 등을 통해 과거 일부 주지가 벌어들인 돈이 10억원대라는 소문이 있다. A사 주지가 직권으로 임명을 할 수 있는 말사 주지직은 40여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A사는 또 수십억원대 템플스테이 공사가 진행되는 등 사찰 개보수에 따른 이권사업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A사 주지 선거에서 선거인단을 돈으로 매수하는 무리수까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지로 선출된 다음 자신이 쓴 선거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사찰 운영을 불투명하게 하는 부패고리가 형성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이와 관련 B스님의 한 측근은 “C스님이 선거에 쓴 불법자금이 말사 운영비에서 나온 것이라면 업무상 횡령 및 배임수재가 적용될 수 있다는 법률자문을 받았다. 검찰이 C스님의 계좌추적을 하면 금세 밝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B주지 측 종무실 관계자는 C스님의 친형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교구 본사인 A사 측은 이에 앞서 C스님이 주지로 13년간 재직했던 말사의 운영과 관련 사찰 운영비를 횡령한 의혹이 있다면서 C스님을 검찰에 고발했다. 사찰 종무실장의 주장이다. “본사 주지선거에 출마하려면 말사 주지직을 사퇴해야 한다. 그럴 경우 말사에 대한 운영자료를 본사에 인수인계한다. C스님이 주지를 맡았던 말사의 경우 회계자료가 부실할 뿐만 아니라 일부 자료를 파기했다. 감사를 한 결과 말사 운영비를 개인통장으로 받아 수입금의 일부를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스님이 본사를 맡아 운영한다면 더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조계종 총무원은 A사 주지 선거 과정에서 드러난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C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던 말사에 대해 9월 초 감사를 실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C스님은 그러나 일련의 의혹을 모두 부인했다. C스님은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과연 교구 스님들이 나를 주지로 선택했겠느냐. 작년부터 B스님 쪽 사람들이 나를 음해했는데, 대응할 가치가 없다고 보고 묵빈대처(默擯對處)하고 있다. 나는 B스님이 참 안됐다고 생각한다. B스님의 측근들은 B스님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나도 못하게 막았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지역사회에서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내 입으로 상대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그는 또 유씨의 고소 배경에 연루됐다는 의혹 제기에 대해 “이미 검찰에서 해명이 끝났다. 유씨와 대질심문을 통해 그런 사실이 없다고 정리가 됐다. 유씨는 평소 알고 지냈고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지만 고소를 사주한 적이 없다. 주지스님 측 사람이 하도 닦달해 어쩔 수 없이 꾸며낸 말이었다고 유씨가 말했다”고 주장했다.
돈 선거 및 말사 운영비 횡령 의혹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돈 쓴 적이 없다.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말로 들린다. 또한 내가 재직했던 사찰에서 횡령은 없었다. 10년 이상 사찰을 성실하게 운영해 지역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C스님은 오는 9월 13일 A사찰 경내에서 주지 취임식을 가질 예정이라고 했다. 그가 주지로 취임한 후에도 검찰 수사가 남아 있어 A사찰의 선거 후유증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한편 B스님은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직접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의 측근은 “주지스님 본인의 치부가 드러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B스님과 만난 한 재가불자는 “어쨌든 B스님도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등 종단 계율을 어겼다. C스님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물러나는 바람에 종무실 식구들이 신임 주지와 어려운 소송을 치르게 됐다”고 말했다. A사 종무실 측은 지난 8월 22일 C신임 주지를 재물손괴 및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여신도의 저주? 주간조선 2272호 2013-09-02)
참으로 낯뜨거운 글이다. 그것도 인터넷 시대에 가장 많이 본다는 메이저 신문의 자매지에 실린 것이다.
글을 보면 한국불교가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특히 전주지의 여성과의 탈선행각은 충격적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은 출가수행자가 그것도 법랍이 높은 주지스님이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망신을 당한 것이다. 평생 산중에서만 살며 도를 닦은 도인이 경계에 부딪쳤을 때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빅쿠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반면 감동적인 글을 보았다. 테라와다 빅쿠의 계행에 대한 글이다. 어느 블로그에 실린 글인데 원글을 추적하여 올려 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수행, 법회 일정과 관련한 질문과 관련된 답변입니다.
이 빅쿠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우선은 빅쿠가 지내는 데 허물이 없는 장소가 있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장소가 좋고 나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붕이 분리된 독립된 꾸띠(숙소)에서만 여법하게 지내는 일이 가능합니다. 만약 일반주택이나 빌라, 아파트 등 여성 재가자가 한 지붕아래 지내는 건물에서 밤을 보내려면, 해 지는 시간부터 다음 날 통트는 시간까지 바닥에 머리를 내려놓지 않고 지내야(눕지 않고 지내야) 허물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집이나 방이 따로 분리되 있어도 한 지붕 아래에 있다면 허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한 장소에서 허물 없이 네 가지 몸의 자세의 균형을 이루며 지내는 일이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한 지붕아래 있다 하더라도, 외부로부터 계단과 출입구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면 허물에서 자유롭다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가장 여법한 환경은 재가자들의 생활 영역과 동떨어진 공간입니다.
그리고 공양하는 일이 여법할 것이 필요합니다. 이 빅쿠는 앞으로 지속적으로 하루 일식을 유지할 것이고, 여법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발우에 담기는 탁발 공양을 의지할 것입니다. 이 빅쿠를 봉양하기 위해 과도하게 상을 차리고 수행자들에게 부담이 가는 상황이라면 이 빅쿠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대중식당이나 다른 사찰(대승 사찰 등) 등 외부에서의 공양 요청도 일체 사절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빅쿠수행자의 계행에 관한 사전 이해가 없는 장소에서는 허물에서 자유로운 여법한 보시가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이 빅쿠가 아직 그러한 분주한 일정을 따를 만한 충분한 기력을 갖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장소에 관해서는 수행자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는 수행처라면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번 법회의 경우와 같이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일부 수행자가 선업의 마음으로 장소를 보시하여 법회 공간을 마련하는 종류의 것이라면 상관 없지만, 수행자 개개인에게 수행 명목, 혹은 공양 명목으로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는 장소는 가지 않겠습니다. 크고 좋은 장소이건, 작고 협소한 장소이건, 순수한 보시의 공덕으로 이루어진 장소가 아니라면 사양하겠습니다.
만약 어떤 장소에서 자발적인 보시의 공덕으로 숙식하며 집중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이 빅쿠는 집중수행에 맞는 적절한 수행의 주제를 줄 것이고, 정기적으로 수행을 점검해 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일부 시간대에만 참여할 수 있는 수행자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환경에 맞는 수행의 주제를 줄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시간에 법문을 통해 정기적으로 대중 법회를 가질 생각입니다.
집중적으로 수행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수행과 직접 관련된 별도의 법문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환경이 얼만큼 여법하게 마련이 되는지와 관련된 사항이기에 지금 확언하여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중 법회는 최소한 하루에 한번 모든 수행자들이 모일수 있는 시간에 정기적으로 진행할 생각이고, 그 이외의 시간들은 수행자들 개개인의 근기에 맞는 수행의 주제들을 주고 수행과 관련하여 질의 응답하고 상담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생각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주제는 한 수행처의 수행 지침을 중심으로 공통적으로 제시하지 않을 것이며, 수행자의 수행 근기를 가늠해서 개인마다 다른 종류와 수준의 수행주제를 드릴 것입니다.
대전의 수행자들께는 이 빅쿠를 대신하여 와라까미님께서 소식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작년부터 이 빅쿠에게 설법을 요청한 것에 대하여 약속한 바가 있고, 올 해 다시 대전에서 수행자들께서 오셨을 때 설법 요청을 승낙했습니다.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된다면 10월말 부터 11월말 까지의 기간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빅쿠가 조언드린 내용들을 대신 전해 주시고 설법의 기회를 원하시고 여법한 환경이 갖추어진다면 그 기간안에 가능하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건강상의 사정으로 인해 부득이한 상황이 생길수도 있는 점에 대해서는 미리 언지를 주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확언할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여서, 만약 안거를 난 이후에 법회 일정이 가시화 되면, 이 빅쿠의 거처, 공양, 이동, 상가에 대한 보시 등에 관한 사항들은 상가에게 여법한 방법이 어떤 것인지 깝삐야로써 자주 질문해 주시면 공덕이 됩니다.
빅쿠들은 재가자들과 관계없는 승단의 계행에 대해서 그들의 요청 없이 설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승단에 허물이 되지 않는 후원을 할 수 있다면 가장 가치있는 공덕이 될 것입니다.
재가자들이 질문하고 물어온 것에 대하여는 승단의 빅쿠들에게도 설하고 답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의구심이 나는 일이 있으면 어떠한 환경이 여법하고 허물이 없는 환경인지, 어떠한 보시가 여법하고 적절한 보시인지 자주 물으시기 바랍니다.
승단도, 재가자도, 적당히 남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별 문제가 되겠느냐? 라는 자세로 적당히 넘기게 된다면, 청정한 승단은 점점 그 빛을 잃을 것이고, 반드시 찾아올 이 불법의 소멸되는 시기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불법승을 보호한다는 선하고도 지혜로운 마음으로 여법하게 승단을 보호할 수 있는 훌륭한 재가불자, 깝삐야가 되시기를 격려합니다.
생각보다 긴 글이 되었습니다. 오해없이 이해를 도우려고 너무 많은 글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이 빅쿠는 당분간은 기력을 회복하는 일에 가장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담마다야다 스님의 조언을 따라 공양을 하는 습관 등 건강을 위해 몇 가지를 조절하고 있는데 조금씩 좋은 징조들이 보입니다. 몸이 지쳐온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시 기력을 차리기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늘 선업의 법들, 특히 늘 깨어서 마음을 청정히 하는 최상의 선업과 함께
건강하시고 평온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제주섬에서 상가락키따 빅쿠.
( 제주도에서 제에게 온 편지를 수행자님들과 같이 공유 하고 싶어 올립니다 , 카페 사슴숲 담마가족 2013-08-19 )
감동적인 글이다. 계행을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쓰는 듯한 테라와다 빅쿠의 노력이 돋보인다. 글에서 여성재가자와 한 지붕에서 밤을 지내는 것 조차 꺼려 하는 장면이 있다.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한 지붕 밑에 잠을 자야 할 경우 해질 때부터 동이 틀 때까지 눕지 않고 지내야 허물이 없다고 하였다. 비록 각방을 쓰고 있다고 할지라도 한 지붕이라면 잠을 잘 수 없이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래서 빅쿠를 초청할 때나 빅쿠의 잠자리를 마련할 때는 별도로 분리된 독립가옥이나 출입구가 있는 독립된 공간을 제공해야 빅쿠가 허물에서 자유롭다고 한다.
또 빅쿠는 “승단도, 재가자도, 적당히 남들이 다 그렇게 하는데 별 문제가 되겠느냐? 라는 자세로 적당히 넘기게 된다면, 청정한 승단은 점점 그 빛을 잃을 것이고, 반드시 찾아올 이 불법의 소멸되는 시기는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다가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려가 계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불법은 소멸되고 말 것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승단이 오래 유지 될 수 있도록 재가자가 보호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기성종단과 신생종단의 계행차이는?
두 개의 글을 보았을 때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편은 기성종단에서 일어난 ‘계행의 무너짐’이고 또 하나는 신생종단에서 보여지는 ‘계행의 지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불교전통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불교 출가자들은 계행 의식이 매우 희박하다고 한다. 계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가 하면 거추장 스럽게 여긴다고 한다. 막행막식 하는 것도 계행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조그만 경계에 부딛쳐도 쉽게 휩쓸리는 것 같다. 앞서 주간조선에서 언급한 주지스님과 여신도와의 불륜관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테라와다 빅쿠들은 계을 지킬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 계를 받아서일까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돋보인다. 하루 한끼 먹는 것도 계행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적 환경에서는 탁발을 할 수 없기 때문에 탁발을 하지 않는 대신 오후불식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 빅쿠들이 막행막식 하며 살아 가고 있다는 소리를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다.
계행에 있어서 스님과 빅쿠의 차이는 매우 크다. 이런 차이는 입는 옷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입는 옷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스님들은 한복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지만 남방에서 계를 받은 테라와다 빅쿠들은 부처님 당시의 옷인 가사를 입고 있다. 바로 이런 차이가 계행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본다. 부처님당시의 가사를 입고 있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 대로 살겠다는 약속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홀로 있는 수행자를 꺽어 버리는 여인
여인이 접근해 왔을 때 한국스님은 아주 쉽게 무너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가장 큰 요인은 계행을 지키지 않고 막행막식 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또 한편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초기경전을 접하지 않다보니 감각적 욕망의 위험을 모른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서는 감각적욕망의 위험에 대하여 어떻게 묘사 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 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요.
(날라까의 경, 숫따니빠따 Sn3.11,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수행자는 숲속에 살았다. 그리고 탁발에 의존하였다. 그렇게 하여 성자가 되었지만 항상 유혹의 위험에 노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아낙네는 해탈 자를 유혹합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아낙네라 함은 숲속으로 놀러 오거나 땔감을 구하러 온 여인을 말한다. 특히 도덕적 관념이 희박한 여인은 성자를 유혹하려 할 것이다. 도를 많이 닦아 도력이 높은 성자를 유혹하여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이다. 이는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행실이 나쁜 여인들은 수행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마치 예쁜꽃을 보면 꺽고 싶듯이, 홀로 있는 수행자를 꺽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요.”라고 하였다.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면”
숲에서만 유혹이 있을까? 수행자가 숲에 산다고 해도 먹어야 한다. 일하지 않은 수행자는 탁발에 의존하기 때문에 마을로 내려 가야 한다. 그때 어떤 유혹이 있을까?
부처님 당시 어느 수행승이 탁발을 나가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제가의 집에서 보냈다. 그런 장면을 보고 어느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쥐와 고양이의 비유를 들어 감각적 욕망의 두려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옛날에 한 고양이가 어린 쥐 한마리를 쫓아 하수도의 쓰레기 더미 위에 서서 ‘이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오면 그때 내가 그를 잡아먹어야지’ 라고 생각했다.
수행승들이여, 그때 그 생쥐가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 고양이는 곧바로 그를 잡아서 뜯어먹었다. 고양이는 생쥐의 내장을 갉아먹고 창자도 먹었다. 그래서 생쥐는 죽음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마찬가지이다. 세상에 어떤 수행승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죽을 정도의 고통이나 괴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Biḷālasutta-고양이의 경, 상윳따니까야 S20: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인을 보고 욕정이 일어나는 것에 대하여 고양이와 쥐를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쥐는 ‘수행자’를 말하고 고양이는 욕정의 대상이 되는 ‘여인’을 말한다.
쥐가 고양이게 잡아 먹히게 되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듯이, 여인에게 욕정이 발동되어 거기에 사로 잡혀 있다면 자신의 몸이 찢기는 것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 한다. 그래서 탁발을 나갈 때는 항상 ‘사띠’를 확립하라고 하였다.
여인을 보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이렇게 초기경전에서는 수 없이 감각적 욕망의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특히 여자에게 인기가 좋은 수행자는 더욱 더 조심할 것을 말하고 있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한 말이 대표적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여인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쳐다보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보았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아난다]
“세존이시여, 말했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세존]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비구들은 탁발에 의존하였다. 이때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데, 될 수 있으면 눈을 맞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 두타행에 따르면 비구는 눈을 항상 아래로 뜨고 멍에의 길이만큼만 바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탁발하는 과정에서 여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각주에 따르면 ‘친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말로 인하여 친교가 생기면, 정이 깊어지고, 번민하고, 계행을 파괴하고 괴로운 곳을 채우는 자가 된다고 하였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하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 때 ‘사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띠해야 할까? 각주에 따르면 ‘어머니의 연배의 여성이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고, 자매 연배의 여성에게는 자매의 마음을, 딸의 연배에게는 딸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좋다’고 한다. 이것이 주석서에 있는 대처방법이다.
어머니와 아들간의 최악의 시나리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보았을 때 욕정이 발동하면 어떻게 될까? 초기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충격적 이야기를 전한다.
한 때 세존께서는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다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싸밧티 시에 어머니와 아들 두 사람이 수행녀와 수행승으로 안거에 들어 갔다. 그런데 그들은 서로 자주 보기를 원했다. 어머니도 아들을 자주 보기를 원했다. 아들도 어머니를 자주 보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주 본 뒤에 서로 접촉하게 되었고 서로 접촉한 뒤에 친밀해지고 친밀해진 뒤에는 애욕에 빠지고, 애욕에 빠진 뒤에 수행자의 배움을 버리지 않고 타락을 숨기고 성적교섭을 행했다.
(Mātāputtasutta-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이다. 음란외설물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사띠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을 때 일어 알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다.
근친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빅쿠들이 알게 되자 부처님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무엇이라고 했는가? 저 어리석은 자가 어머니가 아들에 대하여 애욕을 일으켜서는 안되고 아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애욕을 일으켜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지 못했단 말인가?
(Mātāputtasutta-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일반적으로 근친사이에서는 애욕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유전적으로 근친을 하면 열등인자가 발현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가족간에 친척간에 애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럼에도 근친간에 애욕이 발생하였다면 인간 말종에 해당될 것이다. 마치 개가 아무하고나 붙어 난 새끼를 ‘개새끼’라 하듯이 욕정이 발동하여 아무 하고나 붙어 난 자들이 이에 해당 될 것이다.
여자는 악마의 완전한 족쇄라고
애욕은 어떻게 발생하고 욕정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자의 감촉처럼, 수행승들이여, 애욕을 일으키고 욕망을 일으키고 광기를 일으키고 속박을 일으키고 넋을 잃게 하고 위없는 멍에로부터의 안온을 성취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다른 하나의 감촉을 보지 못했다.
수행승들이여, 여자의 감촉 때문에 뭇삶들은 애욕에 물들고 속박되고 탐욕스럽게 되고 넋을 잃고 집착한다. 그들은 오랜 세월 여자의 감촉에 사로잡혀 근심한다.
수행승들이여, 여자는 걸어가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서있더라도, 앉아 있더라도, 누워있더라도, 웃더라도, 말하더라도, 노래하더라도, 울더라도, 기절했더라도, 죽었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행승들이여, 여자에 대하여 올바로 말하자면, 악마의 완전한 족쇄라고 말해야 올바로 말하는 것이다.
(Mātāputtasutta-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자에 대하여 악마의 족쇄라 하였다. 여자에 대하여 욕정을 품으면 설령 죽었더라도 남자의 마음을 사로 잡기 때문이라 한다.
“결코 혼자서 한 여인과 대화하지 말라”
‘어머니와 아들의 경’에 게송이 있다. 수행자가 어떻게 여인을 대하야 하는지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세존]
1.
Salalape asihatthena pisācenapi sallape,
Āsīvisampi āside yena daṭṭho na jīvati
손에 칼을 쥔
악귀들과 말하는 것이 낫다.
물려죽더라도
독사를 만지는 것이 낫다네.
2.
Natveva eko ekāya mātugāmena sallape,
Muṭṭhassatiṃ tā bandhanti pekkhitena sitena ca,
결코 혼자서
한 여인과 대화하지 말라.
눈빛과 미소로 여인은
새김을 잃은 자를 묶어 버리네.
3.
Athopi dunnivatthena mañjunā bhaṇitena ca,
Neso jano suvāsīdo4 api ugghānito5 mato.
또한 얇은 옷으로나
매혹적인 목소리를 내더라도
기절하였거나 죽었더라도
접근하는 것은 좋지 않다네.
4.
Pañcakāmaguṇā ete itthirūpasmiṃ dissare,
Rūpā saddā rasā gandhā phoṭṭhabbā ca manoramā.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종류를
여인의 몸에서 보고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매혹된다네.
5.
Tesaṃ kāmoghavuḷhānaṃ kāme aparijānataṃ,
Kālaṃ gatiṃ6 bhavābhavaṃ saṃsārasmiṃ purakkhatā.
욕망의 거센 흐름에 표류하면서
욕망을 보지 못하고
윤회 속에서 시간과 운명과
여러 존재에 이끌리네.
6.
Ye ca kāme pariññāya caranti akutobhayā,
Te ve pāragatā loke ye pattā āsavakkhaya'nti.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완전히 알아
두려움 없이 유행하는
세상에서 피안에 도달한 자들이
번뇌의 멸진에 이르렀네.
(Mātāputtasutta-어머니와 아들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전재성님역)
똑 같은 빠알리 게송에 대하여 초불연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목을 치기 위해] 손에 칼을 들고 온 사람과 대화하고
[잡아먹기 위해] 쫓아온 도깨비와 대화하고
그 뱀에 물리면 바로 죽는 그 독사가 물더라도
혼자서 혼자인 여인과 대화하지 말지어다.
시선과 미소와 난잡한 옷차림과 부드러운 말로
마음챙김을 놓아버린 그를, 그녀는 묶어버리노라.
그 사람은 노예가 되어 맞아 죽은 것과 같구나.
여자의 모습에서 마음을 즐겁게 하는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보나니
매혹적인 형상과 소리와 맛과 향기와 감촉이라.
감각적 욕망의 격류에 휩쓸린 자들은
감각적 욕망을 철저히 알지 못하여
윤회하는 운명처, 이런저런 존재로 치달리나니
그들은 윤회에 앞장서는 자들이라.
그러나 감각적 욕망을 철저하게 아는 자들은
어디에도 두려움이 없나니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저 언덕에 도달하여
번뇌의 소멸을 얻도다.
(Mātāputtasutta-모자(母子) 경, 앙굿따라니까야 A5:55, 대림-각묵스님역)
부처님은 윤회의 두려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애욕에 가득 차 있어서 사띠하지 못하였을 때 욕망의 거센 흐름에 떠 내려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은 행위에 따라 이런 저런 존재로 태어나 세세생생 윤회할 것이라 한다. 이런 경우 애욕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존재로 나기 위한 땔감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황진이의 집요한 공략으로
16세기 조선초기에 지족선사가 있었다. 30년을 오로지 도만 닦은 지족선사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었다. 도고마성이어서일까 살아 있는 부처는 황진이의 타겟이 되었다.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꺽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백일기도를 명목으로 접근한다. 황진이의 집요한 공략으로 마침내 지족선사는 무너졌다. 그래서 그 때부터 ‘십년공부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유행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있다. 어느 스님은 지족선사가 황진이로부터 세간의 도를 배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출세간의 도만 닦은 지족선사가 황진이를 통하여 세간의 도를 알게 된 것이라 한다. 생불이라는 허상의 딱지를 황진이가 떼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의 허상을 알게 해 준 황진이야말로 지족선사에게는 진정한 스승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지족선사에게 있어서 황진이는 ‘관세음보살’의 화신과 같은 여인이었다고 해석하였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의 상반된 해석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은 여인들에게 쉽게 넘어 가는 것 같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 A교구본사 주지스님이 대표적이다.
왜 사띠(sati)해야 하는가?
A교구본사 주지스님은 여인의 공략에 쉽게 무너졌다. 왜 그렇게 쉽게 무너졌을까? 계행을 어기면 파계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계행을 지키지 않아서 이지만, 부처님이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라고 말했듯이 ‘사띠(sati)’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사띠가 없었기 때문에 육근이 하자는 대로 따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사띠는 어떤 것일까?
사띠에 대하여 단지 ‘마음챙김’이라고 하면 언제든지 유혹에 넘어 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대상을 단지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라 든지, 대상이 여자가 아니라 오온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든지, 대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마음챙김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며 어떻게 해야할까? 사띠 본래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사띠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그는 그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 된다 (S46:3)”라는 문구에 근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이 중요한가? 부처님이 감각적 욕망의 위험에 대하여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행위에는 반드시 과보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긴 다음 여인을 보거나 이야기 하였을 때 사띠는 확립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정관’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부정관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겼을 때 욕정이 일어날 수 있을까? 여인의 웃는 하얀 치아를 보고 여인이 해골바가지로 보였다면 욕정이 일어 날 수 있을까? 그래서 부처님이 여인을 보았을 때 사띠하라고 말씀 하신 것이라 볼 수 있다.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행위의 두려움’을 말한다. 이런 행위를 또 다른 말로 ‘업(業)’이라 한다. 업을 지으면 업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비구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아는 빅쿠는 절대 한지붕 밑에서 각방을 쓰더라도 잠을 자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사띠를 유지하며 날이 샐때까지 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르는 스님은 여인의 웃음에 너무 쉽게 넘어 갔다. 30년 동안 공부한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이다.
한국불교에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고
한국불교에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였다. 계를 어긴 스님들이 계속 승가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파계를 하였으면 속세로 돌아 가야 할 텐데 계속 절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몇 년전 문제 되었던 은해사의 D스님도 결혼까지 사실이 있었음에도 승가에 남아 있다. 또 은처 의혹을 받고 있는 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도박으로 세간의 물의를 일으킨 스님들이 여전히 승가에 남아 있다. 폭력을 행사하여 조폭소리를 듣는 스님들 역시 승가에 남아 있다. 계를 어겨 파계 하였으면 물러 가야 할 텐데 계속 절에 남아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너나 나나 똑 같은 재가불자인데
우리나라 스님들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승복을 벗지 않는 것 같다. 승복이 그리 좋아서일까? 아니면 갈데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종단이 너그러워서일까? 아니면 모두 다 그렇기 때문에 받아 들이는 것일까? 분명한 사실은 승단추방이라는 ‘바라이죄’를 지어도 결코 승단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라 하듯이, 한번 스님이면 영원한 스님이 되는 것 같다. 그런 파계승이 있는 승단이 과연 불자들에게 귀의 대상일까?
파계하여 절에서 사는 스님들은 반승반속이다. 반은 승려이면서 반은 속인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그럴경우 승려로 보아야할까? 아니면 속인으로 보아야 할까? 일반적으로 반승반속은 승려라고 보지 않고 ‘속인’이라고 본다. 재가불자와 똑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재가불자가 재가불자가 귀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면 우리나라 승단은 비구승단이 아니라 ‘재가승단’이라 볼 수 있다. 너나 나나 똑 같은 재가불자인 것이다.
스님의 시대에서 빅쿠의 시대로
그럼에도 한 줄기 희망을 본다. 그것은 앞서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테라와다 빅쿠이다. 이제 갓 출발한 신생종단의 빅쿠이지만 계행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면 컴컴한 동굴에서 한줄기 광명을 보는 것 같다. 시대가 바뀌려는 변화의 조짐이다. 스님의 시대에서 빅쿠의 시대로 세상이 바뀌려 하는 것이다.
2013-09-03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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