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성지순례기

귀막고 있는 전등사 원숭이상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20. 15:26

 

귀막고 있는 전등사 원숭이상

 

 

 

오랜만에 전등사를 찾았다. 잘 발달된 고속도로와 고속도로 같은 국도를 타고 가다 보니 1시간 30분만에 도달하였다.

 

전등사는 여러 차례 가 보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2007년 이후 방문한 사찰마다 사진과 동영상과 글로서 기록을 남겼으나 전등사의 경우 그 이전에 방문하였기 때문에 기록이 없다. 그래서 늦게나마 기록을 남긴다.

 

옛사람 생각이 나서

 

전등사 동문주차장에 도착하니 옛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더구나 음식을 파는 곳에 이르니 거의 10여년전의 기억이 떠 오른다. 그 때 당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척의 일행과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명절날 시간이 남아서 강화도에나 한 번 갖다 오자는 제안이 있어서 따라 나선 것이다. 자연스럽게 목적지는 전등사가 되었다. 전등사 관람을 마치고 주차장 근처의 식당에서 자리를 함께 하였다. 그러나 그 분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암으로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시 전등사를 찾으니 옛사람이 생각났다. 사람은 가고 없으나 그때 그 식당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그 식당을 볼 때 마다 기억속의 사람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동문에 도착하니

 

전등사 동문에 도착하였다. 마치 산성처럼 통로가 되어 있다. 올 때 마다 늘 읽어 보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읽어 보니, 이곳은 옛날 성터이었다. 이곳 전등사가 있는 곳이 바로 정족산성이었다고 한다. 조선말 병인양요 당시 이곳을 지키던 양헌수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서 조선왕조 실록을 지켰다고 표지판에 기록 되어 있다. 또 전등사가 있는 곳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가 있던 자리라 한다. 전등사 바로 위에 사고터가 있는데 복원 시켜 놓았다. 

 

 

 

 

 

마치 요새처럼

 

이곳이 절이긴 하지만 옛날에는 군사요충지었다. 고려시대에는 이곳에 가궐이 있었고, 외적이 침입할 때마 왕조의 피난 장소로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등사는 마치 요새처럼 보이기도 한다. 절의 남쪽면에서는 북한산성이나 남한산성에서나 볼 수 있는 성곽문 형태의 남문이 있기 때문이다.

 

 

 

 

 

돌아가지 않는 윤장대

 

남문에서 북쪽으로 향하였다. 올라 가다 보니 윤장대가 보였다. 오래 전에 방문하였을 때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윤장대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다. 고장난 것이다. 안내판을 보니 고장입니다. 돌리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다. 파손된 채로 방치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가까이 가지 않는다. 과연 윤장대는 언제 제대로 돌아 갈 수 있을까?

 

 

 

 

 

한 번 놓은 물건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누군가 관리하기 전에는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부도난 회사를 가보면 어지럽혀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각종 집기는 내 팽개쳐져 있고 각종 서류는 바닥에 나 뒹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위로 인한 것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런 상태로 세월이 흘러 버린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들은 정반대이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무질서에서 질서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살다 떠난 집은 마지막 살다 간 그 상태채로 방치 되어 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무질서가 증대되어 마침내 허물어지고 만다. 그러나 집 주에 심어진 나무는 정반대이다. 빈집은 허물어져 가도 생명이 있는 나무는 마치 왕자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하는 것을 엔트로피라 하고, 반대로 무질서에 질서로 향하는 것을 네겐트로피라 한다. 지금 보고 있는 전등사의 윤장대를 보면 엔트로피가 증대된 것이다. 파손된 채로 방치 되어 있다는 것은 무질서가 극에 달한 것이다.

 

겨울에만 볼 수 있는 것

 

지금은 한겨울이다. 손이 시릴 정도로 바깥 공기가 차갑다. 더구나 낙엽이 진 나무를 보면 앙상해서 더욱 더 차갑게 느껴 진다. 그럼에도 겨울의 정취는 있다. 산중이라 그런지 꽁꽁 언 얼음을 볼 수 있다. 흘러 내린 물이 그대로 얼어 붙어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이런 광경은 오로지 겨울에만 볼 수 있다.

 

 

 

 

 

 

 

 

 

 

 

마치 고향에 돌아 온 듯

 

겨울에 보는 전등사는 춥고 삭막해 보인다. 눈부신 신록에 보는 전등사와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늘 안심 하는 것은 변치 않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변화무쌍하지만 산중에 있는 산사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십여년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지금 보아도 그 자리에 있다. 그래서 마치 고향에 돌아 온 것 같다.

 

 

 

 

 

 

 

 

 

 

 

 

 

 

 

 

 

 

 

 

 

 

 

 

 

 

 

소원을 적어 놓은 리본트리

 

겨울이어서인지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화창한 신록의 계절에는 수 많은 불자들과 관광객으로 붐비지만 차가운 겨울에 보는 전등사의 풍경은 약간 썰렁하다. 아마도 한겨울 매서운 추위 탓일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 못 보던 것이 있다. 그것은 소원을 적어 놓은 리본트리이다.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삼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중앙 꼭대기는 솟대가 있다. 아마도 새해를 맞이 하여 소망을 담은 것이라 보여진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았다. “우리가족 건강히..” 등의 문구가 보인다. 대부분 건강, 학업, 취업, 치유 등 소박한 염원을 담은 것이다. 누구나 바라는 작은 행복을 염원하는 것이다.

 

 

 

 

 

봉녕사의 소원트리

 

리본트리는 전에 보지 못한 것이다. 아마 최근 몇 년 이내에 확산 된 것처럼 보인다. 올해 1 1일 수원에 있는 봉녕사에서도 전등사에서 본 것과 같은 소원 트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종이를 접어 만든 것이 다를 뿐이다.

 

 

 

 

일본에서도 소원트리가

 

이처럼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최근 소원트리가 유행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소원트리를 보았다. 지난 2012년 일본성지순례 당시 쿄오토의 약사사와 후쿠오카에 있는 천만궁신사에서이다.

 

 

 

쿄오토 약사사의 소원트리

 

 

 

 

 

 

후쿠오카 천만궁신사의 소원트리

 

 

 

약사사의 경우 대나무에 소원을 비는 리본을 엮어 놓았다. 천만궁신사의 경우 별도로 목조 구조물을 만들어 일년 내내 달아 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건강, 취업, 학업 등을 바라는 소박한 소망은 어느 나라에서나 똑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실례를 무릅쓰고

 

전등사에는 서 너 차례 간 것 같다. 너무 오래 되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도 작고 아담한 대웅전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부처님상은 기억에 나지 않는다. 이렇게 사찰순례를 하다 보면 절의 이미지는 떠 올려 지지만 불상은 좀처럼 잘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찰방문을 하면 실례를 무릅쓰고 사진에 담아 놓는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 조선 광해군 13(1621)에 중창한 건물. 정면3, 측면3칸의 팔작지붕형태

 

 

 

 

 

 

대웅전 불상

 

  

전등사 대웅전에 유명한 것이 있는데

 

전등사 대웅전은 유명하다. 종종 TV에서 소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네 귀퉁이의 처마 밑에 있는 괴이한 형상 때문이다. 전등사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벌거벗은 여인상이라고 소개 되어 있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 앞에 있는 상

 

 

 

 

 

 

 

 

대웅전을 바라보고 우측 앞에 뒤에 상(두 귀를 막은 상)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앞에 뒤에 상

 

 

 

 

 

 

 

대웅전을 바라보고 좌측 앞에 앞에 상(두 귀를 막은 상)

 

 

 

안내 표지판에는 전설임을 말하며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나쁜 짓을 경고 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상을 조각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TV프로를 보면 네 귀퉁이의 형상에 대하여 모두 나부상(裸婦像)’이라 한다.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러나 아무리 자세히 쳐다 보아도 벌거벗은 추녀의 형상을 한 여인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원숭이로 보인다. 그래서일까 불교포커스에 실린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중 앞에서 벌거벗은 채 벌 받는 나부상이란 이미지 속에는 여성을 성적 인격적으로 비하하고 모독함으로써 자신의 허약하고 상처 받은 내면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불안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다.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관습화된 이야기를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비논리적인 입장과 행동을 투사하고 합리화 하며 사회구조의 허약한 틈 사이에서 입지를 강화시켜나간다.

 

(뭔지는 알고 찍으시는 거에요?, 불교포커스 2009-11-02)

 

 

이는 사찰생태연구소 김재일님의 지적이다. 사람들이 나부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여인이 죄를 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는 것도 파격적이고 과한 것이라 한다. 더구나 벌거벗은 못난 여인을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저주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형상은 무엇에 대한 것일까? 사찰생태연구소 김재일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건 말 지어내기 좋아하는 이들의 우스개 소리일 것이다. 그것은 나부상이 아니라 길상과 벽사를 상징하는 원숭이상으로 보인다. 절집에 원숭이상을 벽사로 둔 예는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원숭이상을 비롯하여 선암사에 있는 원숭이 돌조각, 그리고 송광사 일주문 소맷돌의 원숭이상, 팔만대장경 판각처로 알려진 강화 선원사 절터에서 발굴된 원숭이상 등이 있다.’

 

(뭔지는 알고 찍으시는 거에요?, 불교포커스 2009-11-02)

 

 

나부상은 말지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한다. 그래서 나부상이 아니라 원숭이상이라 한다. 사실 한 눈에 보아도 원숭이 형상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원숭이는 왜 귀를 막고 있는 것일까?

 

동조궁의 세 마리 원숭이상

 

일본 동조궁(東照宮)에는 귀를 막고 있는 원숭이상이 있다. 그런데 귀만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눈도 막고 있고 입도 막고 있다.

 

 

 

일본 동조궁의 마리 원숭이

 

  

 

그렇다면 왜 세마리의 원숭이는 위와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검색한 결과 안내표지판에 どものうちはざるわざるかざる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이는 아이들에게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게 함이 좋다.”라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왔을까? 또다른 검색 자료에 子供いことはないかないさない (三猿えの意味)”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아이들 에게 나쁜 것을 보게 해서는 안되고, 듣게 해서도 안되고, 말하게 해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세상사에 때가 묻지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세 마리 원숭이 조각상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산혜원선사의 발원문에서

 

전등사에도 원숭이 조각상이 있다. 귀를 막고 있는 것도 있고, 한쪽 귀를 막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네 개 중에 두 개는 두 귀를 막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귀막은 조각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에서는 원숭이를 볼 수 없다. 그럼에도 1621년에 중창 되었다는 대웅전에 원숭이상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도 두 귀를 막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이에 대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 추측컨데 아마도 세상사에 물들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이산혜원선사의 발원문에서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안들고”라고 표현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동진출가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스님들은 다음생에도 스님이 되기를 발원하는데 가급적 세상 물정 모르는 동진출가를 염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진출가하게 되면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말을 하지 않고 사는 것과 같기 때문에 청정함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고 살 수 없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으며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눈과 귀뿐만이 아니다. 코로, 혀로, 몸도 있기 때문에 감각기관을 통하여 무수한 접촉이 이루어진다. 그런 접촉이 이루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좋고 싫음을 느낀다. 그래서 좋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욕심부린다. 그런데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화를 낸다.

 

좋아 하는 것은 거머쥐려 하고, 싫어 하는 것은 밀쳐 내려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 순간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간다. 그런 삶 자체를 어리석음이라 한다. 그렇다고 하여 눈막고, 귀막고 살 수 있을까? 눈이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또 귀가 멀어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눈먼 자나 귀먼 자라 하여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번뇌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눈막고, 귀막고, 코막고 산다고 하여도 번뇌는 없어지지 않는다.

 

불교TV사이트에서 무문관과 관련된 프로를 보았다.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서 3개월에서 길게는 6년까지 무문관수행을 하고 있는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들은 외부와 접촉이 차단되어 있는데 다만 식사할 때만 접촉이 이루어진다. 그것도 식사를 알리는 목탁소리와 식구통으로 들어 가는 음식이 접촉의 전부이다.

 

이렇게 자물쇠가 채워진 방에서는 보지도, 듣지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런 수행을 수년간 한다. 마치 장님처럼, 벙어리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하였을 때 더 이상 번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깨달음 얻고자 죽기를 각오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안다. 눈으로, 귀로, 코 등으로 접촉이 일어 났을 때를 말한다.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

 

아이들과 같은 순수함을 유지 하기 위하여 원숭이처럼 눈감고, 귀막고 살 수 없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이고,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려 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대에게 보이고, 들리고, 감각되고 인식된 것에 관하여 말한다면, 보인 것 안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이며, 들린 것에는 들린 것만이 있을 뿐이며, 감각된 것 안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뿐이며, 인식된것 안에는 인식된 것만 있을 뿐이다.(S35.95)”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시각의식에 보여진 형상 속에는 오로지 보여진 것만이 있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시각의식은 오로지 형상속에서 형상만을 보고 영원한 어떤 본질을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유형의 의식 가운데도 보여진 것만이 있을 뿐이다. 보여진 것 가운데 보여진 것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형상을 형상속에서 인식하는 시각의식이다.

 

또 ‘뿐’이라는 말은 한계를 말한 것으로서 단지 보여진 것 뿐이다. 그 의미는 나의 마음은 지금 단지 시각의식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시각의식이 시야에 들어온 형상에 관한 탐욕이나 증오나 어리석음에 영향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래서 순간포착(자와나)은 탐욕 등이 없는 시각의식 뿐이고, 이 경계를 지나치지 않고 탐욕 등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새김을 확립하여 형상을 보면

 

부처님은 있는 그대로 볼 것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말룽끼야뿟따경에서는 보는 것과 듣는 것 등에 대하여 긴 게송으로 요약되어 있다. 형상에 대한 것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Na so rajjati rūpesu rūpa disvā patissato

Virattacitto vedeti tañca nājjhosāya tiṭṭhati

Yathāssa passato rūpa sevato cāpi vedana

Khīyati no pacīyati eva so caratī sato

Eva apacinato dukkha santike nibbāna vuccati.

 

 

새김을 확립하여 형상을 보면

형상들로 불타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마침내 그것에 탐착하지 않네.

그래서 형상을 보더라도

이렇게 새김을 확립하고 지내면

느낌을 경험하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다면

그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S35.95)

 

 

 

2014-01-2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