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피지 못하는 꽃 날지도 못하는 새, 도(magga)를 이루어 열매(phala)를 맺는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13. 11:44

 

피지 못하는 꽃 날지도 못하는 새, (magga)를 이루어 열매(phala)를 맺는다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보며

 

하루 종일 모니터만 바라 보고 산다. 하는 일이 모니터를 보아야만 하는 것이고 글을 쓰다 보니 모니터를 바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루 일과 중의 대부분을 모니터를 바라 보고 살다 보니 모니터가 좋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최근 모니터를 하나 구입하였다. 27인치로서 가로가 긴 대형 모니터이다.

 

책상에는 모니터 두 대가 놓여 있다. 컴퓨터는 하나이지만 모니터가 두 개인 이유는 일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일의 특성상 화면을 여러 개 띄어 놓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한 개의 모니터로서는 효율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두 개의 모니터를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두 개 이다 보니 글쓰는데 있어서도 역시 효율적이다. 글을 쓰다 보면 이런 화면 저런 화면 띄어 놓고 검색하기 때문이다.

 

수리산 둘레길

 

하루 종일 모니터만 보고 살기 때문에 운동부족이 되기 쉽다. 달리 운동을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주말이면 산행을 한다. 일인사업자에게 있어서 밤낮이 없고 주말이 따로 없는 것이긴 하지만 토요일이 되면 마음에 부담이 없다.

 

5일제의 영향이어서인지 사회가 전반적으로 쉬는 분위기이다. 그래서 토요일이 되면 등산복차림으로 사무실로 간다. 늘 하는 일인 글쓰기를 위해서이다. 오전에 글을 써 놓고 오후에 산행을 하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수리산 산행을 하였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요즘은 둘레길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산행을 하기에 부담이 없다. 예전에는 반드시 꼭대기까지 올라 가는 것이 산행이라 생각하였으나 요즘은 둘레길 같은 것이 생겨나서일까 가벼운 산책정도로 생각한다.

 

둘레길은 인공으로 조성된 길이다. 산중턱에 길이 나 있는 둘레길은 산을 한바퀴 휘감아 돈다. 그래서 둘레길에만 들어서면 산행이 산책으로 바뀐다. 이렇게 둘레길을 걷다 보니 이제 봄이 완전히 시작 되었음을 느낀다.

 

산에 피어 있는 벚꽃

 

지난 몇 주간 매주 이곳 둘레길을 걸었는데 이번에는 지난주와 확연히 다르다. 나무에 싹이 돋아나 연두색 빛깔이 완연하다. 그리고 산중에는 아직도 진달래와 벚꽃이 한창이다. 도심에 있는 벚꽃은 이미 져서 처참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산중에 피어 있는 벚꽃은 이제 시작일 뿐만 아니라 좀더 오래 갈 것 같다.

 

 

 

 

 

산에도 벚꽃이 피어 있다. 드문드문 피어 있는 산벚꽃을 보면 도심의 벚꽃과 모양이 다르다. 도심벚꽃에 눈이 길들어져 있어서일까 산벚꽃을 보니 눈에 차지 않는다. 도심의 벚꽃은 뭉쳐 있는 듯 보이지만 산벚꽃은 퍼져 있는 듯하다. 도심의 화려한 벚꽃에 눈이 길들어져 있어서인지 산벚꽃은 소박해 보인다.

 

 

 

 

 

 

산벚꽃과 도시벚꽃은 어떻게 다른가?

 

산에서 피는 벚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꽃을 보니 도심의 벚꽃과 다르다. 도심의 벚꽃이 둥글둥글해 보이지만 산벚꽃은 퍼져 있는 듯하다. 도심의 벚꽃은 다섯 개의 잎이 붙어 있는 듯 보이지만, 산벚꽃은 꽃잎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다. 도심의 벚꽃이 세련된 도시여인의 이미지라면, 산에 피는 벚꽃은 산골아가씨같은 청순한 모습이다.

 

 

 

 

 

도심벚꽃

 

 

 

 

 

 

 

 

 

 

산벚꽃

 

 

 

둘레길에서 본 야생화

 

둘레길을 걷다 보니 야생화가 자주 눈에 띈다. 야생화라 하여 식물도감에나 나오는 희귀한 꽃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잡초에 피는 꽃은 꽃잎이 매우 작다. 잡초자체가 작기 때문에 꽃잎도 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맘 때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는 누구도 관심 있게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꽃이 피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눈길을 끈다.

 

 

 

 

 

 

 

 

 

 

 

 

 

 

 

 

야생화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다만 이 맘 때 산에서 피어 있기 때문에 눈길이 미친 것이다. 이와 같은 야생화는 온실의 크고 화려한 꽃과 달리 꽃잎 매우 작고 소박하다. 누가 보건 말건 비바람이 불어도 때 되면 스스로 자라서 스스로 꽃을 피워 낸다.

 

 

 

 

 

 

 

 

 

 

 

 

 

 

 

안쓰럽게 핀 도시의 야생화

 

도시에서도 야생화가 핀다. 사실상 잡초라 볼 수 있는 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 핀 잡초꽃은 보기가 안쓰럽다. 산에서 피는 잡초화와 달리 도시의 잡초화는 매우 척박한 환경에서 꽃을 피워 내기 때문이다.

 

늘 다니는 길에 꽃이 피었다. 아스팔트와 세멘트 담벼락 사이에 꽃이 핀 것이다.

 

 

 

 

 

 

흙이 보이지 않는 모서리에 보라색 꽃이 피었다. 마치 기적처럼 보인다. 약간의 흙을 의지하여 어디선가 씨가 날라와 뿌리를 내리고 푸른 잎사귀와 함께 보라색을 꽃을 피워 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산에서 피는 야생화는 행복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도시의 야생화는 도저히 식물이 자라기 힘든 환경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꽃을 피워 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 내게 한다.

 

꽃의 생존전략

 

도시에서 피는 꽃은 짓밟히기 쉽다. 사람들이 왕래가 많기 때문에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수시로 청소를 하고 환경정비를 하는 도시에서 한켠에 핀 잡초화는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 또 언제 짓밟힐지 모른다. 이렇게 도시에서 피는 꽃은 그 종말을 알 수 없고 또한 피기도 전에 사라질 수 있다.

 

사람 사는 곳에서 잡초는 귀찮은 것이다. 설령 잡초에 꽃이 피었다고 하여도 잡초는 잡초일 뿐이다. 그래서 농촌에서나 도시에서나 잡초는 제거의 대상이지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사는 곳에서의 잡초는 피지도 못하는 꽃과 같다.

 

꽃은 피어야 알아 준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앞다투어 갖가지 꽃이 피는 것도 일종의 알아 달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도시에서 피는 꽃이 그렇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관상용 꽃을 말한다.

 

그러나 꽃이 핀다는 것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 개체수를 늘리기 위한 방편으로 본다. 꽃이 핌으로서 꽃씨가 바람에 날려 수정할 수 있고, 벌과 나비가 향내를 맡고 몰려 들어 수정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하나의 생존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피지도 못하는 꽃도 있다는 사실이다.

 

피지 못하는 꽃

 

피지 못하는 꽃은 대표적으로 무화과일 것이다. 꽃이 피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무화과에 대한 게송이 있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

vicīna pupphamīva udumbaresu,
So bhikkhu jahāti orapāra

urago jiṇṇamiva taca purāa.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하는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5)

 

 

숫따니빠따 뱀의 경(Sn1.1)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첫번째 구절에서 무화과 나무에서 꽃을 찾아도 얻지 못하듯(vicīna pupphamīva udumbaresu)”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무화과에는 꽃이 피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화과꽃으로 장식하고자

 

왜 이런 게송이 나오게 되었을까? 게송에 대한 인연담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어떤 바라문이 자신의 딸을 결혼에 앞두고 무화과꽃으로 장식하고자 하였다바라문은 어떤 천민도 지금까지 사용한 적이 없는 꽃으로 딸을 장식하여 시집을 보내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직까지 사왓티에서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무화과꽃을 찾아서 장식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 꽃으로 딸을 장식하고픈 바라문은 다른 바라문에게 물었다. 그러자 성품이 아주 못된 어떤 바라문이 무화과꽃은 지금까지 이 세상의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꽃이니 그 꽃으로 장식하라고 알려 주었다. 이 세상에 무화과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오로지 딸의 장식만을 위해 집착하는 바라문에게 무화과꽃이 있다며 가능할 것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자 바라문은 무화과꽃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아무리 무화과꽃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없는 꽃을 찾아 다닌 바라문이 어느 날 명상에 잠겨 있는 한 수행승을 보았다. 그 수행승은 바라문이 무화과꽃을 찾고 있음을 알아채고 무화과꽃은 이 세상에 없다라고 일러 주었다. 그리고 무화과꽃을 찾아 장식하라는 어느 못된 바라문의 말을 믿고 무화과를 찾아 나선 바라문에 대하여 허황된 말이니 자신을 피곤하게 하지 말라고 충고 하였다.

 

무화과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화과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것이 무화과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존재들 가운데 어떠한 실체도 발견하지 못한다 (Yo nājjhagamā bhavesu sāra)”라 하였다. 무상한 존재에서 영원불변한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화과꽃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게송에서 실체라고 번역한 것은 사라(sāra)’이다. Sāra‘essence, , 真実, 真髄, , 核心의 뜻으로 본질, 핵심, 실체등으로 번역된다. 이처럼 실체가 없는 것을 찾아 나서는 것에 대하여 무화과꽃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오온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몸과 느낌, 지각, 형성, 의식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의 다발이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에 대하여 무화과꽃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무화과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무화과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무화과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식물이든지 꽃은 피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화과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무화과는 뽕나무과에 속한다. 꽃에 대한 설명을 보면 무화과나무의 열매인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하나 실제로 꽃은 과실 내에서 피며 외부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무화과나무에도 꽃이 핀다는 사실이다.,

 

 

 

무화과나무(위키백과)

 

 

무화과는 꽃이 과실안에서 피기 때문에 꽃이 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바라문은 무화과꽃으로 딸의 결혼을 장식하고자 하였다. 이런 시도에 대하여 부질없고 허황된 행위라 하였다.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오온에 그 어떤 실체가 없음에도 마치 무화과꽃을 찾아 나서는 것은 오온이 나의 것 또는 나의 느낌,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실체가 아닌 것에 집착하고 또 핵심이 아닌 것에 대하여 핵심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sāre sāramatino                 아사레 사라마띠노

sāre cāsāradassino,              사레 짜사라닷시노
Te s
āra nādhigacchanti          떼 사랑 나디갓찬티

micchāsakappagocarā.            밋차상깝빠고짜라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dhp11)

 

 

게송에서 핵심이라 번역한 것은 사라(sāra)’에 대한 것이다. 뱀의 경에서 실체라고 번역한 것과 같은 빠알리어이다. 이처럼 사라는 핵심, 실체, 본질 등으로 번역된다.

 

사람들은 본질이 아닌 것을 본질인 것처럼 집착한다. 무화과나무에 꽃이 겉으로 피지 않음에도 꽃을 찾아 나서는 것과 같다. 이는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담바라와 풀잠자리알

 

그런데 숫따니빠따에서 언급된 무화과에 대한 빠알리어가 우둠바라(udumbara)이다. Udumbara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the glamorous fig tree’라 설명되어 있다. glamorous라는 말이 매혹적인뜻이고, fig무화과라는 뜻이다. 따라서 ‘the glamorous fig tree’매혹적인 무화과 나무가 된다.

 

한자어 사전에 Udumbara優曇婆羅, 優曇華, 無花果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우둠바라(udumbara)는 한역경전에서 말하는 우담바라(優曇婆羅)’인 것을 알 수 있다.

 

마하야나 전통에서는 우담바라가 상상의 꽃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삼천년에 한 번 핀다는 상상의 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우담바라가 종종 핀다고 한다. 그래서 우담바라꽃이 피었다고 하여 이를 알리고 법회를 열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풀잠자리알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무화과나무에 꽃이 피지 않듯이 마하야나의 경전에서 말하는 삼천년에 한번 핀다는 상상의 우담바라꽃은 실제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풀잠자리알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하여 우담바라꽃이라고 말하는 것은 법구경 게송에서처럼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는(Asāre sāramatino, dhp11)”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니는(micchāsakappagocarā, dhp11)”것과 같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풀잠자리알에 불과한 것을 우담바라라고 하는 것은 마치 딸의 결혼식을 장식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꽃을 찾아 나선 어리석은 바라문과 같은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무참하게 짓밟혀도

 

이 세상에 피지 않는 꽃은 없다. 무화과일지라도 열매속에서 꽃이 피기 때문에 무화과에서도 꽃은 피는 것이다. 온실속에서 자란 크고 화려한 화초이든 비바람속에서 흔를리며 자란 잡초이든 모두 꽃이 핀다. 심지어 짓밟히면서도 꽃은 피어난다. 그래서일까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 하였다.

 

 

골짜기에 피어난 꽃에도 향기가 있고

버림받은 잡초 더미 위에도 단비가 내립니다

 

온실 속에 사랑받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벌판에서 혹한을 견뎌내는 작은 들꽃이 있습니다

 

무참하게 짓밟히는 이름없는 풀잎 하나도

뭉개지는 아픔의 크기는 우리와 똑같습니다

 

계절없이 사랑받는 온실속의 화초 보다는

혹한을 참아낸 들꽃의 생명력이 더 강합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의미는

뿌리를 살찌우기 위한 대자연의 섭리입니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선택받은 인생에는

각자에게 부여된 소중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지못해 피지못하는 꽃은 되지 마세요, 인터넷에서)

 

 

인터넷에서 발견한 마지못해 피지못하는 꽃은 되지 마세요라는 시이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좋은 글이라 하여 인터넷에 유통되고 있다. 시를 보면 들꽃예찬이다. 혹한을 견디고 싹을 틔어 낸 들꽃의 생명력에 대한 찬탄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지 못하는 꽃 날지도 못하는 새

 

잘난 자나 못난 자나 생명이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마치 식물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날지 못하는 새가 있는 것처럼 날지 못하는 인생도 있을 수 있고 피지도 못하는 인생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피지 못하는 꽃이 없다고 하지만 짓 밟혀 꺽여 버리면 꽃이 피지 않는다. 이 세상에 날지 못하는 새가 없을 것 같지만 날개가 꺽이면 날지도 못하게 된다. 이처럼 피지 못하는 꽃도 있고 날개가 있어도 날지도 못하는 새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람의 몸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어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피지 못하는 꽃과 같고 날지도 못하는 새와 같은 신세라 할 수 있다.

 

(magga)를 이루어 열매(phala)를 맺는다

 

식물에게 있어서 꽃이 핀다는 것은 결실을 예고 하는 것이다. 꽃을 피우는 목적이 남보기 좋으라고 핀다기 보다 오래 오래 개체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있어서 꽃이 핀다는 것은 발정기를 뜻한다. 발정기가 되면 상대방을 유혹하여 짝을 맺는다. 이는 다름 아닌 자신의 DNA를 전달하려 하는 것이다.

 

사람도 성년이 되면 꽃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결혼을 하여 자손을 남긴다. 여기까지 본다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크게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어서 동물과 다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정신능력이다. 정신능력이 있기 때문에 사유할 수 있다. 그래서 도와 과를 이루고자 한다.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는다는 말이 있다. (magga)를 꽃으로 보고 과(phala)를 열매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단지 자손을 남기는 것만이 자신의 할 바를 다한 것이라 볼 수 없다. 만일 자손남기는 것을 인생의 최고목표로 본다면 사실상 축생이나 다를 바 없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도를 이루어 열매를 맺어야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을 것이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ghamaddhāna

su tāsveva jātisu.

 

ni etāni diṭṭ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Koigāmasutta-꼬띠가마의 경, 상윳따니까야 S56.21, 전재성님역)

 

 

 

2014-04-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