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하필 그 시간 그 자리에? 재난에 대한 초기불교적 해법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6. 12:05

 

왜 하필 그 시간 그 자리에? 재난에 대한 초기불교적 해법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가장 안타까운 죽음은 젊은 사람이 죽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살만큼 살다 죽은 경우 호상이라 하여 그다지 슬퍼하지 않지만 피워보지도 못한 꽃처럼 청소년의 죽음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든다. 

 

연일 방송에서는 진도여객선침몰사고 소식을 전한다. 대부분 오락프로는 중단되고 지역축제 또한 취소되거나 축소 되고 있다. 이처럼 전국민의 애도물결은 마지막 시신이 모두 건져 올려질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애도 분위기가 두 달은 갈 것이라 한다.

 

침몰한 여객선 내부에 있는 학생들은 모두 주검이 되서 나온다. 이를 본 유가족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오열한다. 이런 화면을 바라보는 국민들 또한 착잡하기 그지 없다. 왜 이와 같은 사고가 반복 되는 것일까? 미래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미래에도 이런 일이 반복 된다면 여객선침몰사건은 남의 일이 아니다.

 

언론에서는 생때 같은 내 새끼라는 말을 사용한다. 생때 같은 내새끼가 살아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생때라는 말은 몸이 튼튼하고 병이 없다는 뜻이다. 한꺼번에 수백명이 희생된 학생들은 모두 생때 같은 자식들이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나타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때 같은 내 새끼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제로이다. 사고가 난 이래 배속에서 건져 올린 것은 모두 주검 뿐이다. 이런 주검을 보는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통곡한다.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

 

진도여객선 침몰사건에 대하여 불교적 해법은 무엇일까? 최근 교계신문사이트에 따르면 조계종 교수아사리 세미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진도여객선 침몰 사건에 대한 불교적 해법이 제시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을 살려 내지 못하는 것처럼 뚜렸한 해법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스님은 다만 기도만 할 뿐이라 하였다. 아마도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기도일 것이다.

 

또 어떤 스님이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과 연관성에 묻자 도법스님은 “전생의 업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 불교가 아니다.(미디어붓다 2014-04-25)”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도법스님은 세월호가 업 때문에 그렇다 치더라도 불교적 사유로 보면 인간이 지혜롭게 대처하고 노력하면 막을 수 있거나 희생을 최소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업을 그렇게 정의하면 불교의 많은 부분은 왜곡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잘라 말했다고 한다.

 

반드시 업보의 성숙 때문만은 아니다

 

만일 누군가 세월호 침몰사건에 희생된 사람이 전생의 업 때문이라 한다면 아마도 아무도 불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침몰로 인한 희생에 대하여 불교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럴 경우 부처님은 무엇이라 말씀 하셨을까? 상윳따니까야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Moiyasīvakasutta- 몰리야 씨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1, 전재성님역)

 

 

느낌은 접촉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사건이나 사고 역시 접촉을 원인으로 한다. 그런데 접촉은 반드시 느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 느낌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덤덤한 느낌 이렇게 세 가지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느낌이 과거의 업에 따른 업보의 성숙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몰리여씨바까경에서 부처님은 반드시 업보의 성숙때문만은 아니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것에 대하여 전생의 업보 탓으로 돌리면 불교는 숙명론적이라 비판 받을 것이다.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의하여

 

경에서 부처님은 우연의 피습(Opakkamikāni)’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이는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을 말한다. 주석에 따르면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직접적인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이 있다. 예를 들어 간통을 하다 체포 되었을 때 누군가 머리통을 가격하였을 때 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주석에서는 부처님이 돌조각에 우연이 발을 다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바위를 굴렸는데 그 때 돌조각 하나가 부처님에게 상처를 입힌 것이다. 이처럼 예기치 않게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우연의 피습에 해당 될 것이다.

 

하필 그 자리에 그 가 있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운전자가 운전을 잘못하여 사고가 났을 때 함께 탄 사람이 다쳤다면 이 것 역시 우연의 피습으로 볼 수 있다. 하필이면 그 차를 탓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럴 경우 그 차를 타지 않았더라면하고 후회하기도 할 것이다.

 

간판이 떨어져 즉사 하는 경우

 

다음으로 간접적 원인에 따른 우연의 피습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중독, 물림, 불타고, 익사하고, 살해되는 것은 제때에 업보에 따라 죽지 못한 것으로 본다. (Milp.302)”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갖가지 사고로 사고사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가 있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간판이 떨어져 즉사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뉴스에서 발표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간판이 낡아서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어느 날 떨어졌는데 재수없게도 바로 그 밑을 지나던 사람이 맞은 것이다. 그런 뉴스의 영향 때문에 거리를 걸을 때는 간판이 떨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걷고 또 건물 입구에 오래 서 있지 않으려 한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위에서 무언가 떨어졌을 때 맞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Signboard

 

 

 

이처럼 간판이 떨어져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이를 과연 전생에 지은 업의 성숙에 따른 업보로 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전생의 업보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에 대하여 세상에 어떠한 느낌들은 우연한 피습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S36.21)”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번 세월호 침몰사고는 희생자의 전생의 업과는 무관한 것이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고로 보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불운한 것이다.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에 대하여

 

그래서 부처님은 불운한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체험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이 세상에서 어떠한 느낌들은 불운한 사건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해야 합니다.

 

씨바까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개인이 느끼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이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모든 것은 과거의 원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말하고 이와 같이 여깁니다.

 

그러나 스스로 체험적으로 알았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이고 세상의 진실로서 인정되었다는 것도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Moiyasīvakasutta- 몰리야 씨바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36.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에 대하여 인정해야 함을 말한다. 이런 불운한 사건이 반드시 업보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한 불운한 사건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많은 짐을 실어 나르는데 갑자기 째찍질 당하거나 갑자기 우물가에서 뱀에 물리거나 역경에 둘러 쌓여 생기는 일’을 말한다.(Srp.III.81)”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운한 사건이란 부수적으로 발생한 불행한 일을 말한다.

 

우물가에 물을 뜨러 갔는데 하필이면 우물가에 있는 뱀에 물렸다면 불운한 것이다. 또 남의 차를 타고 갔는데 운전부주의로 사고를 당했다면 역시 불행한 것이다. 이처럼 불행이 발생한 것은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행을 자초하는 단서를 이미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세월호에 탑승한 학생들은 하필 그 배에 탑승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학생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불운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연의 피습이나 불운한 사건으로 인한 괴로움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항상 잠재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떻게 우연히 발생할 지 알 수 없고, 언제 어떻게 불운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 하신다.

 

여덟 가지 요인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업과 그 과보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는 원인과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행위를 하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는 다고 한다. 이런 업보의 성숙에 대하여 주석에 따르면 어떠한 의약도 어떠한 주문도 업의 성숙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반드시 업보 때문만은 아니다. 그래서 경에서는 모두 여덟가지 요인을 들도 있다. 이를 나열해 보면 1) 담즙(Pitta), 2) 점액(Semha), 3) 바람(Vāta), 4) 체질(Sannipātikāni), 5) 계절의 변화(Sannipātikāni), 6) 불운한 사건(Visamaparihārajāni), 7) 우연한 피습(Opakkamikāni), 8) 업보의 성숙(Kammavipākajāni) 이렇게 여덟 가지이다.

  

업보의 성숙은 여덟 가지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업보의 성숙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업보의 성숙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업보의 성숙외에 우연한 피습이나 불운한 사건도 인정하고 있다.

 

깜마가 여전히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하여

 

그렇다고 하여 업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그 자리에 하필 있었던 것은 자신의 행위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쿠보디는 각주에서 Thus kamma can still be an indirect cause for the painful feeling directly induced by the first seven causes.(252번각주)”라 하였다. 이를 번역하면 첫번째부터 일곱번째의 요인들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고통스런 느낌에 대하여 깜마는 여전히 간접적 원인으로 작용한다가 된다.

 

빅쿠 보디의 설명에 따르면 담즙에서부터 우연한 피습에 이르기 까지 일어난 괴로운 느낌이 업보와 무관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업보가 간접적으로 작용하였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우연한 피습이나 불행한 사건도 따지고 보면 업이 개입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간적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왜 하필 그 자리에 있게 되었을까?’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깜마가 간접적으로 작용한 것이고, 그 자리에서 사고를 당했다면 우연한 피습이나 불운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것 하나 자신의 행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건과 사고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하여 발생한다.

 

세월호 침몰사고 역시 복합적이라 볼 수 있다. 사고가 난 것은 우연의 피습과 불운한 사고라 볼 수 있고, 그 자리에 있게 된 학생의 경우 깜마가 간접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 원인(우연한 피습 또는 불운한 사고)와 간접적 원인(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과 사고가 모두 무상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상하게 변해 가는 과정에서

 

불교에서 삼법인을 말한다. 그 중에 하나가 제행무상이다. 어느 것 하나 고정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불행한 사건 역시 무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직접적인 요인과 간접적인 요인을 보면 어느 것 하나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길을 걷다가 간판이 떨어져 즉사하였다면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천장이 무너져 죽은 것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간판이 일부로 그 사람을 겨냥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간판 자체도 무상한 것이어서 세월이 흐르다 보니 부식되어 떨어진 것이다. 떨어질 만하여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그 간판 밑을 지나가던 사람이 맞았다면 이는 그 사람의 과거 전생에 지은 업과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떨어지는 간판에 맞아 죽었다면 이는 조건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런 조건은 모두 무상하게 변화 하여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제행무상에 벗어난 것이 없다.

 

간판도 세월에 따라 변한다. 사람도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간판도 무상한 것이고 사람도 무상한 것이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세계에서 접촉이 일어난다. 접촉이 일어남으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이 발생한다.

 

그런데 접촉에 따라 즐거운 느낌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말한다. 반대로 접촉에 따라 괴로운 느낌이 발생할 때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해 가는 과정에서 접촉이 발생한다. 이번 세월호 역시 무상하게 변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먼저 메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블로그에 올리신 자료를 받아볼 수 있는지요?”

 

현재 본문 글에 대하여 스크랩해 갈 수 없도록 오른쪽 마우스 버튼을 막아 놓았다. 그 결과 글을 가져 갈 수 없다. 그러나 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을 위하여 메일로 소통하고 있다.

 

블로그에서 메일로 소통하고 있다. 여러가지 이유로 댓글을 허용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소통하고 있는 수단이 이메일이다. 그러나 메일을 보내는 사람들은 극히 적다. 그럼에도 종종 메일을 보내는 주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 다음과 같은 글을 주셨다.

 

 

삼보님께 예경 올리옵니다.

 

깜깜한 혼돈의 밤중에 등불을 만난듯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을 애독하고 있는 비구입니다.

 

철저하게 경전(니까야)에 근거한 '진흙속의연꽃'님의 글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애매한 이해는 금강처럼 불괴의 확신으로 살아있는 담마가 되도록 해 주었습니다.

 

특히 '번역비교'를 통해서 더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는데,

출가자뿐만 아니라 재가불자들에게도

불자로서의 도덕적 관념을 바르게 확립할 수 있도록

니까야에 있어서의 실천적인 계율에 대한 말씀들도 정리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니까야를 우리글로 읽을 수 있도록

바르게 번역해 주신 분들에게도 깊이 감사드리지만,

흩어진 구슬을 꿰듯 핵심을 짚어 평이하게 소개해 주는

'진흙속의연꽃'님의 법공양에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대승경전을 보거나 대승적인(?) 수행을 하기전에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근본 교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하는 것이라,

제가 함께 하고 있는 법회에서도

지난해부터 니까야를 읽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인용한 경전들을 니까야전집에서 확인하기도 하고

카드에 옮겨적기도 합니다만,

블로그에 올리신 자료를 받아볼 수 있는지요?

 

모쪼록 건강에도 유념하시고,

진흙같은 오탁의 온 누리에 많은 연꽃이 피어나서

맑고 향기로운 연꽃향기가 충만하도록

쉼없이 담마의 사자후 전해주소서.              _()_

 

(Y스)

 

 

Y스님은 글을 가져 갈 수 없어서 불편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블로그에 올리신 자료를 받아볼 수 있는지요?”라고 묻고 있다. 그래서 원하는 제목을 알려 주시면 글을 보내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메일로 필요로 하는 글을 알려 주었다. 이렇게 원하는 글을 알려 주면 글을 메일로 발송할 수 있다.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메일로 소통하다 보니 일대일 소통이 된다. 그 중에 어느 분은 세월호와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그리고 궁금한데

부처님이 세월호에 갖혔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 지 궁금합니다

물이 차오는 것을 '대상'으로 관찰 만하셨는지

저에게는 그런 극단적이고 두렵고 외로운 죽음인데

부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지 조금이나마 부처님의 하신 말씀을 통해

가르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S법우님)

 

 

S법우님은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다. 만일 부처님이 세월호에 갇혔다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슬프다. 그런데 누구나 그런 상황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에도 세월호와 같은 참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막상 세월호에 갇혀 죽음을 맞게 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 이렇게 죽는구나

 

언젠가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일 때문에 중동으로 출장을 간 적 있었는데 터키 이스탄불에서 두바이로 향하는 도중에 있었다. 그 때 당시 터키항공이었는데 운행 중에 몹시 기체가 흔들렸다. 더구나 바깥에는 세찬 비가 창을 때리고 있었다.

 

중형 사이즈의 비행기가 흔들리자 짐칸에 실려 있던 짐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동요는 없었다. 다만 어떤 터키 사람은 겁에 질려 실신 하자 승무원이 산소마스크로 응급처치 해 주었다.

 

이렇게 비행기가 심하게 요동치자 그 때 느낌은 ,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하였다. 공중에서 비행기 사고나 나면 모두 죽는 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치 죽음의 순간을 앞두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이 비행기는 공항에 무사히 착륙하였다. 그 이후로 비행기만 타면 악몽과도 순간이 떠 올라 긴장하게 된다.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찬양하기 위해

 

배가 침몰 할 때 선원이나 승객도 ,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신에게 살려 달라고 열심히 기도할 지 모른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야에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 대한 경이 있다. 이럴 때 불자들은 어떻게 하였을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참사람과 함께 지내며

참사람괴 함께 사귀어라.

참사람의 참다운 가르침을 알면,

뭇삶들은 불사의 행복 속에 산다네. (S1.31, 전재성님역)

 

 

사뚤라빠 무리의 품에서 참사람과 함께 경(S1.31)’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하늘사람이 부처님 면전에서 삼보에 대하여 찬탄하고 있다. 이렇게 하늘사람이 찬탄한 것은 배의 침몰과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침몰 순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Satullapakāyikā : 하늘사람들인데, Srp.I.54에 인연담이 나온다. 상인들이 바다를 건너는데,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가라앉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각각 자신의 수호신을 외쳐 대며 도움을 청했다.

 

싸뚤라빠는 ‘백명의 외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결가부좌한 채 동요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한 동승자가 그에게 태연자약한 이유를 묻자 그는 여행을 떠나기 전 승단에 공양을 드리고 귀의했으므로 어떤 두려움도 없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달라는 동승자의 부탁을 받고, 그들을 백명씩 일곱 그룹으로 나누어 차례로 부처님의 오계를 가르치고 오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겨 확실히 귀의하도록 했다.

 

배는 점점 깊이 가라앉아 모두 죽게 되었고 그들은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도리천)에 태어나 제석천궁에서 살게 되었다. 싸뚤라빠 무리들은 이들이며, 지금 그들은 위대한 스승인 부처님을 찬양하기 위해 부처님을 방문한 것이다.

 

(각주, 전재성님)

 

 

이 경에 대해서 불자들의 피난처는? 가지 풍난(風難)이야기(2013-12-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어떻게 선원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태어났을까?

 

어떻게 하여 선원들이 모두 하늘나라에 태어 났는지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폭풍우를 만난 모든 선원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은 한사람의 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친 폭풍우가 몰아쳐서 배가 전복될 위기에 처해 있었는데도 태연히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를 보고 선원들이 감동한 것이다.

 

이렇게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삼보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오계를 준수하는 삶의 덕분이다. 그래서 비록 지금 죽는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코 악처에 떨어질 염려가 업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또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태연히 명상을 하며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다른 선원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불렀다. 빅쿠 보디의 표현에 따르면 ‘미친듯이 신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는 인간이 극단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충분히 가능한 것이라 보여 진다.

 

불자선원이 이렇게 태연자약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요하던 선원들은 자신들도 그와 같은 믿을 갖게 해달라고 그 짧은 시간에 요청한다.

 

인연담의 내용으로 보아 선원 칠백명 전체를 모아 놓고 교화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상황에서 칠백명 전원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불자는 백명 단위로 일곱개의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일곱 그룹의 리더들에게 먼저 삼귀의 하게 오계를 수지하게 하여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고 일곱그룹의 리더들은 자신이 속한 영역으로 가서 선원들에게 삼귀의와 오계를 설함으로서 귀의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한사람의 불자로 인하여 칠백명 전원이 삼보에 귀의하게 되었다. 짧은 시간에 모두 불자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선원 전체가 귀의하고 나자 배는 뒤집혔다. 그래서 모두 죽게 되었다. 그런데 선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삼보를 피난처로 삼음에 따라 그 공덕으로 모두 천상에 태어 나게 되었다.

 

(‘불자들의 피난처는? 가지 풍난(風難)이야기)

 

 

주석에 따르면 배가 침몰하자 선원 칠백명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칠백명 선원 전원이 천상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는 한사람의 불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배가 침몰하는 순간 죽음에 이르러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는 삼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는 순간 청정한 마음을 내었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난 것이다. 만일 죽는 순간 자신의 신을 찾으며 울부짓었다면 천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로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관찰하면서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죽음을 맞이 하는 그 순간에 청정한 마음을 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수행처에서는 와선이라는 것을 한다. 바닥에 편하게 누워 자신의 배의 호흡을 지켜 보는 것이다. 호흡을 지켜 보면서 잠에 들고 잠에서 깨어 날 때 역시 호흡을 지켜 보면서 깨어 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을 지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임종 순간에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나 악행에 대한 업이나 표상이 떠 오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오로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관찰하면서 임종을 맞았을 때 열반에 들것이라 한다.

 

 

 

2014-04-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