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대양보다 더 많이 흘린 눈물, 어떻게 해야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8. 12:12

 

사대양보다 더 많이 흘린 눈물, 어떻게 해야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연등축제날 조계사에서

 

연등축제날 조계사에서 M법우님을 만났다. 이미 오래 전에 약속한 일이다. 법우님이 스리랑카성지순례를 다녀 왔는데 몇 가지 전달해 줄 것이 있다고 하여 연등축제날을 잡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연등축제날이 되면 항상 사진을 찍어 글을 올린다.  그래서 연등축제도 구경할 겸 해서 오후에 조계사를 찾았다. 그런 법우님은 조계사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국제포교사로서 외국인 관광객에게 불교와 불교문화를 알려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선물로 받은 것

 

조계사 안내소에서 만나 장소를 이동하였다. 총무원 건물이 있는 카페이다. 거기에서 법우님은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것을 주었다. 초기불교에 관심 있는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월폴라 라훌라빅쿠의 유명한 책 ‘What the Buddha taught’실론티’, 그리고 패엽경불치사사리함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법우님과 인연은 블로그와 관련 있다.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 주신 인연으로 알게 되었다. 특히 2012년에는 법우님의 남편분과 함께 팀을 이루어 일본성지순례한 바 있다. 이런 인연으로 종종 안부를 묻곤 하였는데 이번에 진주에 있는 N정사의 스리랑카성지순례에 참여 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스리랑카에서 사온 것을 이번 연등축제날에 선물한 것이다.

 

패엽경을 선물 받았는데

 

법우님이 선물한 것 중에 패엽경이 있다. 스리랑카성지순례 가면 파는 것이라 한다. 물론 관광상품용으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패엽경이 어떻게 생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패엽경은 148X39mm 가량 된다. 재료는 종이가 아니라 나뭇잎으로 만든 것이다. 인터넷사전에 따르면 패엽경(貝葉經)패다라엽(貝多羅葉)에 바늘이나 송곳 따위로 새긴 불경이라고 설명 되어 있다.

 

패다라는 무슨 뜻일까? 더 검색해 보니 한자어 패다라엽(貝多羅葉)은 산스크리트어 ‘Pattra’의 음사라 한다. 흔히 일반 식물의 잎 또는 필사용 나뭇잎의 뜻이다. 종이가 없던 시절 옛날 인도 등지에서는 종이 대신 사용하였다고 한다.

 

패엽경으로 사용되는 가장 좋은 나무가 타라(tara)나무 잎이라 한다. 스리랑카에서 삼장을 문자로 옮길 때 바로 이 타라나무잎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다라나무의 잎은 바탕이 곱고 길며, 이를 글 쓰는 데 사용하려면 먼저 나뭇잎을 말려서 너비 약 2인치, 길이 약 1자 내지 2자의 장방형으로 끊어서 죽필(竹筆), 또는 송곳이나 칼 등으로 글자의 획을 만들고, 먹을 새겨 넣거나 먹과 붓으로 쓰기도 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처럼 종이가 없던 시절 종이 대용으로 불경을 문자화 한 것이 패엽경이다.

 

왜 싱할리어로 음사하여 보전하였을까?

 

패엽경은 원래 구전 되어 오던 삼장의 내용을 싱할리어로 음사 한 것이다. 이렇게 싱할리어로 음사하여 보전한 것은 이유가 있다.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 때 이다. 그 때 당시 전인도를 통일하였던 아소까 대왕의 아들인 마힌다(Mahinda)’ 장로가 BC. 3세기 때 불교를 스리랑카에 최초로 전한 것이다. 그 때 당시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를 함께 전하였는데 이는 아소까대왕 당시 이미 3차 결집이 완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인 된 ‘3차 결집의 빠알리삼장을 전세계로 전파 하고자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스리랑카인 것이다.

 

대기근의 영향

 

구전되어 오던 빠알리삼장이 문자로 전승된 것은 이유가 있다. 크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하나는 기근의 영향이다. 스리랑카 역사서라 볼 수 있는 마하왐사와 디빠왐사에 따르면 대기근으로 인하여 비구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껴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근의 참상은 어떤 것일까?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에 따르면 기근이 계속되어 너무 극심한 기근으로 사람들은 [아사한] 인간의 고기를 먹었다. 연로한 장로는 극심한 굶주림으로 정신이 뒤집힌 그런 사람들의 먹이가 되었다.”라고 삼모하위노다니를 인용하여 밝히고 있다.

 

대륙의 변화무쌍한 사조

 

문자화된 또 하나의 이유는 대륙의 변화무쌍한 사조와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 편역자 대림스님은 해제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랑카에서 상좌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 주석서들을 빠알리가 아닌 싱할리어로 전승해왔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도대륙의 변화무쌍한 학파난립과 신흥사상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고, 실제 그것은 전통적인 가르침을 다른 신흥사상과 섞지 않고 전승할 수 있다는 큰 장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청정도론해제, 대림스님)

 

 

대림스님 설명에 따르면 섬나라 스리랑카에서 대륙의 사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는 기원을 전후한 시대를 말한다. 인도불교사에서 이 시기는 브라만교에서 환골탈태한 힌두교가 본격적으로 발흥시기에 해당되고, 또 새로운 불교운동이라 볼 수 있는 대승불교가 일어난 시기이기도 한다. 이처럼 인도대륙에서는 사상이 변화가 급격하게 진행 되었는데 섬나라 스리랑카에 전해진 공인된3차 결집 불교를 지켜 내기 위한 조치로 문자화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구전된 빠알리어는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스리랑카 문자인 싱할리어로 기록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하여 기원전 80-94년으로 보고 있다. 대기근과 대륙의 변화무쌍한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기원전 80-94년 사이에 왓따가마니왕 당시 마딸레 지방의 알루위하라 승원에서 500백명의 장로들이 모여 경장과 율장과 논장을 집대성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하여 불교역사에서는 4차 결집이라 부른다. 4차 결집에서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여 삼장을 체계적으로 문서화 한 것이 패엽경의 시초인 것이다.

 

싱할리어로 가두었다

 

패엽경으로 전승된 삼장은 싱할리어이다. 문자가 없이 다만 구전으로 전승되어 온 빠알리어를 싱할리어로 음사 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어 ()’을 뜻하는 빠알리어가 알파벳으로 ‘dhamma’이라 하는데 이를 우리말로 음사하면 담마가 된다. 뜻으로 옮기기 않고 다만 소리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리나는 대로 싱할리어로 옮긴 것이 패엽경이다.

 

스리랑카에서는 구전되어 온 삼장을 문자로 전승하여 왔다. 그래서 대기근이나 대륙의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빠알리삼장을 싱할리어로 전승되어 왔는데,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싱할리어로 가두었다라고 표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승된 빠알리삼장은 3차 결집 당시에서 원본의 큰 훼손 없이 오늘날 까지 전승되게 되었다.

 

현재는 로마나이즈화된 빠알리니까야를 접할 수 있다. 알파벳으로 기록된 빠알리 삼장 역시 음역한 것이다. 이와 같은 빠알리삼장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패엽경이다.

 

로마나이즈화 된 망갈라경

 

선물로 받은 패엽경을 보니 싱할리어가 아니다. 로마나이즈화 된 문자로 기록 되어 있다. 경을 보니 마하망갈라라숫따(Mahamagalasutta)이다. 가로가 148mm이고 세로가 39mm인 나무를 재료로 한 것에 한쪽면에 글씨가 쓰여 있다. 망갈라경에서 다섯 번째 게송에 해당되는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Mātāpitū upaṭṭhāna              마따삐뚜 우빳타낭

puttadārassa sagaho,            뿟따다랏사 산가호
An
ākulā ca kammantā              아나꿀라 짜 깜만따

eta magalamuttama.           에땅 망갈라뭇따망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stn262)

 

(Magalasutta- 위대한 축복의 경, 숫따니파타Sn 2.4, 전재성님역)

 

 

 

 

 

실론티의 맛은 어떨까?

 

다음으로 실론티(Seylon Tea)’에 대한 것이다. 법우님이 선물한 실론티를 열어 보았다. 꽤 묵직하다. 개봉해 보니 분말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물에 타먹기에는 거칠다. 그래서 망이 촘촘하게 되어 있는 일배용기를 이용하였다. 그러자 주황색 빛깔의 물이 나왔다.

 

 

 

 

 

 

실론티의 맛은 어떨까? 차를 즐기는 것도 아니고 차에 대하여 지식은 없지만 우리나라 황차맛과 비슷하였다. 황차는 구수한 맛이 특징으로서 장이 약한 사람에게 좋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스님들이 주로 마신다고 한다.

 

황차는 시중이나 사찰에서 80그램에 약4만원 가량한다. 그래서 마시기가 부담 스럽다. 그런데 선물한 실론티는 무게가 무려 ‘250그램에 달한다. 그것도 잘게 부수어져 있으므로 시중에서 유통되는 황차 보다 거의 열 배가량의 무게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실론티에 대한 상품설명을 보니 스리랑카 동부에 있는 우바(Uva)’지방에서 만든 것이라 한다. 유월경에 찻잎을 따서 차고 건조한 바람에 말린 자연산이라 소개 되어 있다.

 

성지순례 씨디(CD)를 보니

 

법우님이 준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스리랑카에서 성지순례 한 것에 대한 사진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한다. 하나의 씨디(CD)안에 담아서 글을 쓸 때 참고하라고 준 것이다.

 

씨디안에는 어떤 사진이 들어 있을까? 열어 보았다. 일정별로 주제별로 잘 정리 되어 있다. 아마도 천장이 넘는 것 같다. 대충 보니 아깍까소 비구가 올린 사진과 유사하다. 인터넷에 올려진 아깍까소 비구사진을 많이 활용하였는데 이 번 씨디로 인하여 앞으로 글을 쓸 때 좋은 자료로 활용하려 한다.

 

법우님의 스리랑카 일정을 보니 2013 2 19일부터 2 24일까지 되어 있다. 한국에서 스리랑카까지 직항로가 있어서 갈때와 올때는 기내에서 밤을 보냈다고 한다. 실제로 현지에 본 것은 34일이라 한다.

 

이 짧은 기간 내에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소위 골든 트라이앵글이라는 말을 하였다. 스리랑카의 수도인 콜롬보캔디아누라다푸라를 잇는 삼각지점을 말한다. 그래서 콜롬보-캔디-담블라-시기리야-폴론나루와-아누라다푸라 순으로 여행하였다고 하였다.

 

법우님에 따르면 두 분의 테라와다 스님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 중 한 분은 인천에서 부개마하시선원을 열고 있는 일창스님이라 하였다. 그러나 두 분 스님 모두 테라와다 복장을 하고 있어서 테라와다 빅쿠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법우님에 따르면 테라와다빅쿠는 오후불식에 철저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낮 12시가 넘으면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행기간 중 이동을 하였는데 12시 이전에 도착하지 못하면 테라와다 빅쿠는 굶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12시에 도착하지 못할까봐 신도들이 안달이 났다는 이야기도 전하였다. 이렇게 빅쿠들은 계를 지키려 노력하고 신도들은 계행을 지키도록 도와 준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신도들은 테라와다빅쿠들을 깍듯이 모시는 것 같다.

 

 

 

 

 

약병을 집어 던지고

 

법우님은 최근 2년간 크게 상심하였다고 하였다. 그것은 남편이 돌아 가셨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일본성지순례에서도 함께 하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해 가을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사고로 돌아 가신 것이다.

 

법우님은 처음 이런 일을 겪어서 몹시 힘들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병원치료도 받고 약도 먹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벗어난 것은 위빠사나수행을 하고 나서 부터라고 하였다. ‘한국명상원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육개월 가량 수행을 하였는데 병원에서 회당 십만원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고 하였다. 법문과 경행과 좌선, 그리고 인터뷰로 이어지는 수행과정을 통하여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빠져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번 순례를 통하여 약병을 집어 던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손주 봐주는 것이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법우님은 교직에 몸담았다. 영어교사로서 58세에 정년퇴임을 한 다음 국제포교사자격증 취득하여 조계사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불교를 알리는 봉사를 하고 있다. 작고하신 남편은 동갑내기로서 전쟁이 나던 해에 태어났다고 하였다. 유복자로 태어난 남편은 어려운 환경이었음에도 공부를 잘 하여 명문대에 입학하였고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공기업에 다녔다고 하였다. 그리고 퇴임 후에는 조계종 포교사자격증을 취득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부부가 포교사이었지만 최근 몇 년간 떨어져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딸의 아이를 돌봐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5년 동안 외손주를 돌봐 주는 역할을 하다 보니 남편에게 소홀하게 대한 것에 대하여 몹시 후회 하였다.

 

그러고 보면 손주 돌봐 주는 할머니에 대한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 오르는 것 같다. 직장에 다니는 자식을 위하여 손주 봐주는 것이 미덕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돌봐 주다 보면 무척 힘들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손주에 꽉 묶여 있다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강연을 들어 보면 법륜스님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손주 봐주지 말자는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하였을까? 그것은 자신의 자식은 자신이 키워야 한다는 논리이다. 새들이나 짐승도 새끼를 낳으면 자립할 때 까지 도와 주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유치원에 들어 갈 때 까지는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붉은 단풍을 보자 그만

 

남편이 돌아 가신지 일년이 되던 해 단풍이 절정일 때 붉은 단풍을 보자 그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어서 흘린 눈물이라 하는데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초기경전의 눈물경을 떠 올렸다고 한다. 눈물경을 읽었을 때는 몰랐지만 막상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볼 때 눈물경의 의미가 분명히 드러났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대양으로 표현되는 비유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

 

세월호 참사로 인하여 유가족들은 슬픔에 빠져 있다. 바다만 하염 없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눈물경에서 부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Anamataggoya bhikkhave, sasāro. Pubbāko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raāna sattāna tahāsayojanāna sandhāvata sasarata.

 

Dīgharatta vo bhikkhave, dukkha paccanubhūta".  Ta ki maññatha bhikkhave, katamannu kho bahutara ya vā kho iminā dīghena addhunā sandhāvata sasarata amanāpasampayogā manāpavippayogā kandantāna rudantāna assupassanna paggharita, ya vā catusu mahāsamuddesu udakan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의 양과 사대양에 있는 물의 양과 어느 쪽이 더 많겠는가?”

 

(Assusutta-눈물경, 상윳따니까야 S15.3, 전재성님역)

 

 

경에서 사대양이라 한 것은 지구의 사대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석에 따르면 불교의 세계관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수미산은 사방에 대양이 있어서 대양가운데 솟아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경에서 말하는 사대양(catusu mahāsamuddesu)’은 지구의 오대양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것이다.

 

무상하게 변하는 과정에서

 

그런데 한존재가 흘린 눈물의 양은 사대양의 물과 비할 바가 아니라 하였다. 한존재가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은 수미산의 사방향에 있느 사대양 눈물 보다 더 많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흘리는 눈물의 양은 이제까지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에 비하면 새발의 피로 비유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한 것이다. 그럼에도 슬픔에 흘리는 눈물의 양은 온 우주를 삼키고도 남을 정도이다.

 

경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였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라고 말하는 것과 일치 한다.

 

배가 침몰하여 생때 같은 새끼를 잃었다면 사랑하지 않은 것(appiyehi)’과 만남에 해당된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은 것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하는 것 (piyehi)’ 과 헤어짐을 뜻한다. 이렇게 무상하게 변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사랑하지 않는 것을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또 그 만남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런데 경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훌륭하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이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해오는 동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형제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형제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자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자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아들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딸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딸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친지의 죽음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친지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재산의 상실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재산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없는 질병의 비참을 경험했다. 그대들이 질병의 비참을 경험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과 사랑하는 사람과의 헤어짐 때문에 비탄해하고 울부짖으며 흘린 눈물이 훨씬 더욱 많아 사대양의 물에 비할 바가 아니다.

 

(Assusutta-눈물경, 상윳따니까야 S15.3, 전재성님역)

 

 

경에서는 가족과의 헤어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죽음이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많은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고 눈물 흘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흘린 눈물이라 하였다.

 

흘린 눈물에 대한 빠알리어가 ‘assupassanna paggharita이다. 이는 assu가 눈물의 뜻이고, passanna  seeing의 뜻으로 보면서의 의미이다.  paggharita paggharita로서 ‘driped(흘린)’의 뜻으로 과거분사이다. 따라서 ‘assupassanna paggharita는 이미 과거에 눈물을 흘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에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윤회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이야기 하였다. 지금 비록 눈물 흘릴 일이 없다고 할지라도 갠지스강의 흘러 가는 강물을 바라 보았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으로 인한 눈물이 윤회과정에서 수 없이 있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경에서는 어머니의 죽음 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형제, 자매, 아들, , 친지의 죽음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음을 말한다.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을 것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자는 말이 있다. 티벳불교에서 특히 강조하고 있는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량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나를 낳아 준 수 많은 어머니를 가졌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들은 사실상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육도윤회하는 모든 존재들도 대상이 된다. 따라서 축생도 한 때 나를 낳아 준 어머니이었을 수가 있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렇게 일체중생을 어머니로 알자라 하였을 때 모든 생류에 대한 자비심이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낳아 준 어머니었을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없고, 심지어 축생에게 조차 살생을 가할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는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 전생에 눈물을 흘렸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 나를 낳아준 어머니이었을 존재의 죽음에 대하여 눈물을 흘렸고, 또 윤회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번쯤 아들이나 딸 이었을 존재의 죽음을 슬퍼 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윤회를 계속하는 한 이런 비탄의 눈물 역시 끝없이 흘릴 것이라는 말이다. 윤회하는 과정에서 각종 사건이나 사고 또는 죽음과 같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덤은 증대 되고 뼈무더기는 쌓여만 가고

 

시작을 알 수 없는 윤회는 그 끝 또한 알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도 알 수 없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윤회의 과정에서 눈물의 양은 점차 많아 질 것이고 뼈무더기는 쌓여만 갈 것이다. 이렇게 이미 겪은 일임에도 이를 알아 차리지 못하면 비극은 매번 반복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괴로움을 맛보고 아픔을 맛보고 허탈을 맛보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Assusutta-눈물경, 상윳따니까야 S15.3, 전재성님역)

 

 

이미 겪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알아차려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못 알아차리는 것이 사람들의 삶인 것 같다.

 

돌씽녀는 왜 다시 결혼하고자 할까?

 

사람들은 과거 일은 새까맣게 잊어 버린다. ‘돌씽이라는 말이 있다. ‘돌싱이라는 말은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로서 돌아온 싱글이라는 뜻이다. 돌씽 중에는 이혼하여 혼자가 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새로운 꿈을 꾸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라는 프로에서 돌싱을 특집으로 다룬 것을 보았는데 그토록 쓴맛을 보았음에도 또 다시 결혼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람들은 두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까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기만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얼마나 괴로워 하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과거의 눈물을 새까맣게 잊고 새로운 인연을 맺고자 한다.

 

부귀영화와 희로애락은 이미 과거 전생에 다 경험하였다

 

시람들은 전생일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르침에 따르면 전생에 실로 여러가지 사건을 겪었다. 그 중에는 살인자로서의 삶도 있었고, 도둑으로서 삶도 있어서 오계를 지키지 않아 그 때 마다 목이 잘리고 피를 흘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오계를 어겨서 흘린 피가 사대양의 물 보다 더 많을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윤회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눈물흘리고 피를 흘렸음에도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누구나 오계를 지킬려고 노력한다. 격분하여 우발적 살인사건이 일어날 찰나에 멈추는 것도 과거전생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전생에 살인을 저질러 목이 잘렸을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였기 때문에 비록 격분하여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려 하지만 자제하는 것이다.

 

또 음행을 하면 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아녀자를 겁탈하려 않으려 하는 것이다. 과거 전생에 아녀자를 겁탈하여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사대양 보다 더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능적으로 오계를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과거전생에 흘린 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 하였기 때문에 인간으로 태어나 오계를 준수하는 삶을 살아 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은 여전히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제 윤회를 끝내자고 하였다. 부귀영화와 희로애락은 이미 과거 전생에 다 경험 한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다.

 

윤회를 종식하려면 먼저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야 한다. 윤회의 두려움은 바로 행위의 두려움에서 시작 된다. 행위(kamma)가 재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이상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이제 그대들은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라하였다. 이미 겪을 것 다 겪었기 때문에 모든 지어진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초연하기에 충분하며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15.3)”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글쓰기에 대하여 염려하지만

 

법우님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아마도 수행의 힘 때문이라 본다. 그러면서 글쓰기에 대하여 염려를 한다. 너무 열중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글쓰기는 일상이라고 설명하였다. 글쓰기는 밥먹는 것과 똑 같고, 밥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듯이 글을 쓰지 않으면 글이 고파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남이 보기에 긴글을 쓰는 것은 글쓰기를 오래 하다 보니 글에 힘이 붙었기 때문이라 설명 해 주었다. 오랜 만에 법우님을 만나서 선물도 받고 좋은 말도 많이 들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2014-04-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