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임락경목사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30. 11:21

 

임락경목사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종교사이트가 있는데

 

네트워크만 연결 되어 있으면 소통하는 시대이다. 이처럼 정보통신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 올린 글이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연등축제날 M법우님을 만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휴심정이야기를 하였다.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가 운영하는 일종의 종교사이트이다. 우리나라 삼대 종교라 불리우는 불교와 개신교와 천주교의 성직자 뿐만 아니라 원불교, 유교 등의 성직자도 필자로 참여 하고 있고 또 환경운동가 등도 기고 하고 있는 사이트이다. 그래서 휴심정 필진을 보면 종교간 화합과 상생, 그리고 자연과 생태, 환경 등 현재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이처럼 고급필진으로 이루어진 휴심정에서 진흙속의연꽃이 거론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락경목사의 글을 통해서이다.

 

법우님은 임락경목사가 진흙속의연꽃에게 사과 하였다는 글을 보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보지 않았느냐가 묻는다. 이와 같은 법우님의 말에 못보았다고 하였다. 한동안 그 사이트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법우님에 따르면 지난 연말 임락경목사가 사과하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꼭 한번 확인하라는 말을 하였다.

 

이 지면을 통해서 정식으로 사과드린다

 

휴심정사이트를 들어가 보았다. 검색창에 키워드를 입력하자 임락경 목사의 글을 찾을 수 있었다. 2013 12 9일에 작성된 글로서 조회수가 28천명에 달한다. 법우님이 말한대로 필명과 함께 사과의 글이 보였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우선 내 글을 읽고 댓글로서 평가해주신 “진흙 속의 연꽃”님에 대하여 공개사과 드린다. 내가 말이 목사지 목사답지 않다. 학문을 닦지 않고 농사짓고 장애인들과 한평생 살다보니 글쟁이가 아니다. 더욱이 요즈음 흔한 컴퓨터도 없다. 이메일도 없다. 이동전화기가 단순한 전화기였는데 지난번 군포에 사는 박아무개가 사주었다. 전화기를 가지고 내 이름을 찍어보니 휴심정에 실린 글에 공개 사과하라는 글을 처음 보았다. 첫 번째 모임에는 유명한 스님들은 초청했던 것이고 법륜스님이나 도법스님 등은 참석하시지 않았다. 참석하신 다른 스님들도 차려진 상에서 막걸리 맥주 마시지 않았다. 또한 고기는 안 드셨다. 스님들 앞에 고기와 술잔이 놓인 것은 나도 당황했다. 다만 스님들이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인들을 대하시면서 그 분위기를 잘 넘겨주시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는 표현이 잘못되었다. 이 지면을 통해서 정식으로 사과드린다.

 

(임락경목사, 야단법 송년회, 2013-12-19)

 

 

임락경목사는 필명을 거론 하면서 지면을 통해서 정식으로 사과드린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임목사가 사과의 글을 올린 이유는 2011년 올린 글 때문일 것이다.

 

휴심정 필진들의 송년회이야기

 

2011년 연말 휴심정 필진들의 송년회이야기가 휴심정사이트에 실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대종교에서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만한 명망가들의 송년모임이다. 이렇게 유명인들이 모인 송년회모임 이야기에 대하여 임락경목사가 재미난 이야기를 곁들여 글을 올렸다.

 

그런데 모임이 이상했다. 소위 종교인들 즉, 스님이나 신부 그리고 목사들이 모임에서 한상 거하게 차려 진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막걸리와 소주, 맥주 등이 보이고 기름진 음식도 가득 하였다. 더구나 그 자리에는 회색승복을 입은 삭발한 스님의 모습도 보였다. 마치 회사에서 연말 망년회 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2011 휴심정 필진들의 송년회

 

 

 

 

 

 

2012 휴심정 필진들의 송년회

 

 

 

 

 

 

2013 휴심정 필진들의 송년회

 

 

 

 

 

이 땅의 존경 받는 성직자들의 모임에서 회사연말망년회 분위기를 보았다. 임락경 목사의 글에 따르면 이날 종교인들의 막걸리 두상자가 비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종교인들의 예사롭지 않은 송년 모임에 대한 글과 사진을 보고 종교전문기자의 힘과 종교명망가들 16인의 송년모임(2011-12-1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마치 스님들이 술판에 참석한 것처럼

 

글과 사진을 올리고 나자 어느 법우님이 실제 16명의 모두 나와 있는 사진을 보니 법륜 도법 청전스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승복 입은 스님들 중에 없는데 왜 거론한 것일까요?”라고 의문을 제기 하였다. 그러고 보니 글에서 임락경 목사가 거론한 스님명단 중에 법륜스님과 도법스님, 청전스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임락경 목사의 글에는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라 하여 이들 스님의 이력을 소개하였다. 그래서 이들 스님들이 마치 술판에 참석한 것처럼 글을 쓴 것이다.

 

불교에 불음주계가 있다. 오계 중의 하나로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는 계이다. 그래서 불자라면 승속을 막론하고 술을 마셔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임락경 목사의 연말송년회 술판이야기를 보면 마치 스님이 술을 마신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개된 사진 그 어디에도 한국불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법륜, 도법, 청전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휴심정 운영자인 한겨레신문 조현기자에게 문의 하였다. 그결과 조현기자는 해당글의 댓글에 예 그 분들은 송년회 참석하지않았습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공개사과를 요청하고

 

사진으로 확인하고 조현기자가 확인해 준 바에 따르면 그 날 술판에 세 분 스님은 없었다. 그럼에도 있지도 않은 사실에 대하여 마치 있는 것처럼 글을 올린 임락경목사와 이런 글을 올리도록 허용한 조현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공개사과를 요청하였다.

 

 

임락경 목사는 답해야 한다. 임목사가 쓴 글의 내용 중에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며 스님들의 이력을 소개 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히 거짓이다. 그리고 이력에 나온 스님들이 계행을 어겼을 가능성을 배제 하지 않은 글을 썼는데, 이 또한 해명해야 한다.

 

이런 책임은 휴심정을 운영하는 조현기자에도 있다. 그는 목차에 “한자리에 모인 목사 신부 교무 스님 신학자의 '기싸움'”라는 제목에 “휴심정 필자모임, 막걸리 2상자 비우고도 흐트러지지 않고 격식도 없는 '극본 없는 희극'”라는 부제를 달아 법륜스님, 도법스님, 청전스님, 원철스님이 막걸리파티를 하였을 가능성을 제기 하였는데, 이는 명백히 이들 네 분 스님들에 대한 명예에 먹칠을 한 것이다.

 

임락경목사는 자신이 작성한 글 기싸움에 게제된 거짓내용에 대하여 공개사과를 하여야 한다. 그리고 한겨레신문 조현 종교전문기자 역시 거짓을 방조한 행위에 대하여 해당스님들과 불자들에게 사과 하여야 한다.

 

(진흙속의연꽃, 임락경목사의 글 ‘기(氣)싸움’을 읽고, 2011-12-13)

 

 

글에서 임락경목사와 조현기자에게 공개사과를 요청하였다. 비록 블로그에 올린 글이긴 하지만 모든 정보가 오픈되고 공유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보게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임락경 목사가 사과의 글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조현기자로 부터 그 어떤 메시지도 받지 못하였다.

 

또 하나 사과할 것이 있다며

 

임락경목사는 2013년 휴심정 송년회 글에서 필명을 거론 하면서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또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내 변명은 이렇다. 내가 불경 공부를 못했다. 그래도 불교에 대해서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내 의도는 불교에서 배우려는 마음과 존경한 스님들을 찾아 만나려는 마음은 한결같다. 내가 설명했던 불입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에 대해서 내가 젊었을 때 스님에게 들은 법문이었다. 다만 적어두지 않고 외워둔 것이어서 잘못 전달할 수도 있다. 이번 댓글을 읽고 내 잘못된 경전해석을 또다시 사과드리면서 잘 배웠다. 앞으로는 섣부른 실력으로 절대로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지 않으려고 한다.

 

(임락경목사, 야단법석 휴심정 송년회, 2013-12-19)

 

 

임락경 목사는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섣불리 자신의 판단으로 불교교리를 왜곡한 것에 대한 사과이다.

 

선종교리에 대한 잘못된 설명

 

임락경 목사가 글로서 자신의 잘못된 견해를 시인한 것은 임락경목사의 글을 읽고 반론을 편 것에 영향받은 것이라 본다. 위에 언급된 불교교리에 대한 왜곡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2011년 임목사의 송년회 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종교 전쟁은 불교에서는 없다. 불경에 있는 가르침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 불입문자(不立文字) :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교리를 캐거나 모든 계행을 닦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지도해 불과를 얻을 수 있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진리만 바로 보면 성불할 수도 있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불경이 아니고 아무 경전이라도,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라도 진리는 있고 진리만 바로 찾아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임락경목사,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 휴심정 2011-12-21)

 

 

임목사는 우선 불교에 종교전쟁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불교역사상 전쟁을 일으켜 불교를 전파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에 따르면 선종의 교리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특히 교외별전과 불입문자에 대한 설명이 그렇다. 마치 문자 그 자체를 풀어 놓은 듯한 설명이다. 불교인이 이런 설명문을 보았다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왜곡되었는가?

 

임락경목사는 선불교의 핵심교리라 볼 수 있는 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에 대하여 본래 뜻과 동떨어진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한 비교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임락경목사 설명

원래 뜻(사전적 의미)

교외별전

(敎外別傳)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

선종에서, 부처의 가르침을 말이나 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진리를 깨닫게 하는 법

불입문자

(不立文字)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

선종에서,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언어나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

직지인심

(直指人心)

교리를 캐거나 모든 계행을 닦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지도해 불과를 얻을 수 있음

교리를 캐거나 계행을 닦지 않고, 직접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진리를 알게 하여 불과를 이루게 하는 일

견성성불

(見性成佛)

진리만 바로 보면 성불할 수도 있다

불교에서 자기의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룬다는 뜻

 

 

 

선종의 특징은 교외별전, 불입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다. 이 네 가지 특징가운데 임락경 목사는 교외별전과 불입문자에 대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교외별전에 대하여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라 하였고, 불입문자에 대해서는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라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해석방법은 본래의 뜻과 동떨어진 것이고 왜곡된 것이다.

 

임락경 목사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처럼 남의 종교의 교리를 왜곡한 목적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임목사의 글에서 이를 다시 풀이하면 불경이 아니고 아무 경전이라도,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라도 진리는 있고 진리만 바로 찾아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함으로써 드러난다.

 

임목사가 하고 싶었던 말은 불경이나 성경이나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 모두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교외별전에 대하여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불경외에 성경도 있음을 말하고 있다. 또 불입문자에 대하여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라고 왜곡하여 역시 불경외에 성경도 있다라는 말을 은연중에 표현 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불교교리 즉, 선종의 교리를 왜곡한 이유는 대승불교와 기독교가 근본에 있어서 다르지 않음을 말하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라도 진리는 있고라 하여 불교와 기독교의 진리가 다름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진리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면서 진리만 바로 찾아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라 하여 성불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나 다름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임락경 목사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모든 종교는 같은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같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모든 종교는 결국 같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외별전 대하여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라 하였고, 불입문자에 대해서는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라고 하여 불교인들이 보기에는 엉뚱하게설명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임목사의 불교교리에 대한 왜곡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래서 블로그에 임락경목사의 ‘기통찬이야기(2012-12-22)’라는 제목으로 올렸다.

 

임락경목사의 선종교리에 대한 설명은 정말 몰라서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적 실수일까? 이에 대하여 후자에 더 높은 비중을 둔다. 왜냐하면 임락경 목사의 글에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사상이 농후하기 때문이디.

 

임락경목사의 글을 비판하면서 올린 글에서 휴심정 필진과 필진들이 올린 글을 종교다원주의로 규정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필진중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다수 포함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길희성교수를 들 수 있다. 휴심정 사이트에서는 길희성 교수의 다원주의에 대한 글을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런 길희성 교수는 종다원주의자이자 신학자이다. 이런 필진에 역시 다원주의자이자 신학자아지 목사인 이경재교수도 포함 되어 있다.

 

종교다원주의란 무엇인가?

 

블로그에서 대표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인 길희성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종교다원주의를 비판하였다. 블로그에 실린 글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에 따르면 ‘견성성불’이라는 것이 ‘내 안의 불성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원래 부처이었기 때문에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고, 부처의 성품을 보면 성불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라 한다. 그런데 임목사는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으로 견성성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늘 주장하듯이 산을 오르는데 있어서 여러갈레의 길이 있다든가, 산의 정상이 하나이듯이 진리를 하나라는 말이다. 이런 다원주의는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를 가정한 것이다.

 

길희성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글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도(),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아마도 모인 각 종교필진들이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견성성불을 해석한 것이라 보여진다.

 

(진흙속의연꽃, 임락경목사의 ‘기통찬’이야기, 2012-12-22)

 

 

휴심정 필진들의 면면을 보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많다. 신학자인 길희성교수, 목사이자 신학자인 이경재 교수 등이다. 그런데 임락경 목사 역시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이 작성한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산정상론으로 설명 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길희성 교수는 산의 정상이 하나이듯이 진리를 하나이다라는 말일 각종 기고문을 통하여 주장하였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진리는 하나라 한다. 이렇게 진리가 하나이다 보니 존재의 근원이라 불리우는 궁국적실재(Reality)’에 대하여 여러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길희성 교수는 궁극적실재에 대하여 “도(),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런 개념에 그리스도 역시 포함 된다.

 

이처럼 휴심정 모임의 필진중에 다원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근본에 있어서 결국 하나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다원주의에 동조하는 스님들도 있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에 동조하는 스님들도

 

2011년 휴심정 필진에는 도법스님도 들어가 있다. 2011년 송년 술판에서는 도법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필진명단에 등재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종교다원주의자로 충분히 의심받을 수 있다. 그런 의심은 증거로 나타난다.

 

조계종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도법스님이 2011년 종교평화선언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놀랍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불교는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진리란 특정 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진리는 모두에게, 모든 믿음에 다 열려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종교평화 실현을 위한 불교인 선언-초안 축약본,  열린 진리관 , 2011-08-23)

 

 

2011년 조계종에서 추진하려 했던 종교평화선언이다. 소위 아쇼카선언이라 한다. 선언문 중에서 열린진리관에 대한 것이다. 선언문에서는 놀랍게도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 하였다. 이는 명백히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다.

 

불교계에서 뜬금 없이 이런 선언을 추진하려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 당시 불교가 처한 상황과 관련 되어 있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불교가 차별 받고 종교간 갈등이 심화 되는 상황에서 이 선언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매우 비판 받았다. 가장 먼저 정치적 행위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이런 선언을 하면 다른 종교에서도 동참할 것이라 하여 불교에서 먼저 선수 치고 나온 것이라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다원주의사상 영향으로 본다. 이는 선언문에서 열린진리관을 보면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는 내용이다. 이런 표현은 종교다원주의자이자 신학자인 길희성교수의 산을 오르는데 있어서 여러갈레의 길이 있지만 산의 정상이 하나이듯이 진리를 하나이다라는 주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만일 종교평화선언이 공표되었다면

 

만일 조계종에서 종교평화선언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선언문을 공표한다면 한국불교는 종교다원주의를 인정하는 종교가 될 것이다. 그 결과 불교의 교리는 결국 기독교와 다른 것이 아님이 된다. 더구나 불교의 불성이나 참나, 비로자나(법신불)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늘 주장 하듯이는 궁극적실재에 속하게 된다

 

궁극적 실재는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운. 이런 궁극적실재에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속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간파 하였기 때문에 수십번에 걸쳐서 종교평화선언의 부당성에 대한 글을 올렸다.

 

조계종에서 사실상 2인자라 볼 수 있는 도법스님이 추진하였던 종교평화선언은 아직 선언 되지 않았다. 2011년 초안이 발표 된 이래 불교계 내부에서 반발에 부딪쳐 내용을 보완중이라 하였다.

 

그러나 언제 본선언문이 공표 될지 모른다. 만일 종교평화선언이 공표 된다면 한국불교는 사실상 소멸의 과정에 들어 간다고 볼 수 없다. 타종교 교리를 인정하고 타종교의 궁극적실재와 다름이 없다고 인정한다면 더 이상 불교라 볼 수 없는 것이다.

 

왜 다원주의자들은 초기불교를 제외하였을까?

 

초기불교에서는 궁극적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상견에 해당되는 궁극적실재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초기불교의 열반에 대해서는 궁극적실재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에 대하여 진리는 하나라고 보고 있지만 초기불교만은 예외로 보는 것이다. 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다. 존재의 근원이자 궁극적실재라 불리우는 브라흐마(Brahma)을 비판하였고, 또 모든 존재에 영혼과 같은 개아가 있다는 아뜨만(Atman)을 비판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브라흐마와 아뜨만이 실체도 없고 또한 실재 하지 않음을 연기법으로 증명하였다.

 

그런데 브라흐마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 (), 태극, (), 그리스도등으로 불리우는  궁극적 실재의 범주에 들어간다. 이런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된 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오직 초기불교만은 예외로 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초기불교에 대하여 종교다원주의 범주에 포함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는 궁극적실재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완전히 다른 종교라 볼 수 있다. 마하야나에서는 불성, 참나, 본래면목 등 궁극적실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궁극적실재의 범주에 그리스도, 브라흐만과 함께 참나, 불성 등을 궁극적실재의 서로 다른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초기불교와 마하야나는 다르다. 그래서일까 러시아 출신의 저명한 불교학자 체르바츠키(Stcherbatsky)박사는 마하야나(대승)주의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고 고따마 붓다는 초월적인 신이 되어 버렸다라며 한탄하였다고 한다.

 

결국 종교다원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임락경 목사는 불교의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렇게 한 목적은 모든 종교의 진리는 하나라는 것을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블로그에서 글로서 지적하였다.

 

그런데 2013년 휴심정송년모임 글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대하여 내 잘못된 경전해석을 또다시 사과드리면서라고 하면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앞으로는 섣부른 실력으로 절대로 부처님 말씀을 인용하지 않으려고 한다.”라고 함으로써 불교의 교리를 인용하는데 있어서 신중을 기할 것을 다짐 하였다.

 

그러나 교외별전과 불립문자에 대한 자의적 해석이 결국 종교다원주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왜곡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련다

 

임락경 목사는 2011년에 작성된 자신의 글에 대하여 만2년이 지난 2013년에 휴심정 사이트에서 글로서 사과를 하였다. 법륜스님, 청전스님, 도법스님 이렇게 세 분의 스님이 술판에 참여 하지 않았음을 확인하여 주었다. 그리고 선종의 교외별전 등 선종교리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사과 하였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지금도 내가 글쟁이가 아니라서 완전한 해명과 사과가 안 될 줄 안다. 직접만나서 말로서 사과한다면 진정한 사과가 되고 오해 아닌 진심을 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련다. 그저 2년 동안 죄송할 뿐이다.

 

(임락경목사, 야단법석 휴심정 송년회, 2013-12-19)

 

 

임락경목사는 자신은 글쟁이가 아니라 하였다. 그래서 글로써 사과의 말을 표현하기가 완전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직접만나서 대면하면 더 정확하게 사과의 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심지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련다라 하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짓 참회

 

누군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빌면 이를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비웃는 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대부분 발끈 할 것이다. 이런 케이스가 초기경전에 있다.

 

 

Accaya desayantīna yo ce7na paigahati,
Kopantaro dosagaru sa vera
paimuccati.

 

[어떤 하늘사람]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아 들이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참으로 원한에 묶이네.

 

(Ujjhānasaññisutta -웃자니쌍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5, 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은 부처님이 미소를 짓자 자신의 참회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오해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결점을 찾고자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샅샅이 보았다. 그러나 부처님에게서 그 어떤 허물도 볼 수 없었다.

 

하늘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였다. 이에 부처님이 미소로 답하지 하늘사람은 자신을 비웃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그래서 결점을 찾아 부처님을 모욕주고자 한 것이다. 이런 참회는 진정한 참회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참회를 받아 들여 주지 않았다고 하여 더 큰 결점을 찾아 모욕 주려 한다면 거짓으로 참회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

 

하늘사람은 거짓참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하늘사람에게 “세상에 잘못도 없고 허물이 없다면, 그리고 원한이 그치면, 세상에서 착하고 건전한 님이리.(S1.35)”라는 게송으로 이해시켰다. 부처님은 번뇌 다한 자는 결코 원한을 가지지 않는 허물없는 자임을 말한 것이다.

 

부처님은 허점을 찾는 하늘사람의 참회를 마침내 받아 들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Tathāgatassa buddhassa sabbabhūtānukampino,
Tassaccay
ā na vijjanti tassa natthi apāgata,
So na sammoham
āpādi sova1 dhīro sadā sato.

Accaya desayantīna yo ce na paigahati,
Kopantaro dosagaru sa vera
2 paimuccati,
Ta
vera nābhinandāmi patigahāmi voccayanti.

 

[세존]

“모든 존재를 가엾게 여기는 여래에게는

어떠한 잘못도 없고 어떠한 허물도 없네.

그는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고

슬기롭고 항상 새김이 깊다네.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

 

(Ujjhānasaññisutta -웃자니쌍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1.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허점을 찾아 부처님을 모욕주려는 하늘사람의 참회를 받아 들였다. 만일 참회를 받아 주지 않는 다면 어떻게 될까? 게송에서 진정으로 참회할 때 참회를 받지 않고 울화를 품고 분노가 무거운 자는 원한에 묶이네.”라고 표현 되어 있듯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때 참회를 받아 들이지 않으면 원한에 묶이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잘못을 뉘우치는 자의 참회는 받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더 이상 원한에 묶이지 않기 때문이다.

 

임락경목사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이렇게 참회하고 참회를 받아 들였을 때 더 이상 감정의 앙금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임락경 목사의 사과를 받아 들인다. “나는 원한을 즐겨하지 않기에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 (S1.35)”라는 부처님말씀 처럼,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지 않기 위하여 임락경 목사의 사과를 받아 들인다.

 

 

 

2014-04-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