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기도 밖에 할 말이 없다고? 세월호 참사에 그 어떤 해법도 제시 못하는 불교계

담마다사 이병욱 2014. 4. 29. 09:36

 

기도 밖에 할 말이 없다고?  세월호 참사에 그 어떤 해법도 제시 못하는 불교계

 

 

 

성법스님의 기고문에서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불교닷컴에 성법스님의 글이 올려져 있다. 세존사이트(www.sejon.or.kr)의 운영자로 잘 알려져 있는 성법스님의 글을 실은 것이다. 글에서 성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지금의 상황에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인들은 기도 밖에는할 말이 없다고 변명합니다.
하긴 늘 그래왔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이나 명예가 걸린 상황에서는 신도들을 동원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러나, 멀게는 1977년 이리역 화약 폭발 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가깝게는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등 국가적 재난들이 벌어져 국민들이 정신적 공황에 힘들어 할 때 정작 종교는 해야 할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세월호… 현실도 설명 못하는 불교, 불교닷컴 2014-04-28)

 

 

성법스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서 불교현실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세월호와 같은 대형참사가 터져 가족과 전국민이 커다란 슬픔에 빠져 있음에도 불교계와 스님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개탄하고 있다. 고작 해 줄 수 있는 말이 기도 밖에는할 말이 없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기도밖에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기사를 검색해 보니 도법스님이 한 말이다. 조계종 교수아사리회의에서 어느 스님이 붓다로 살자면서요. 모두가 붓다라면서요. 세월호 참사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당신이 붓다'라고 어떻게 알려줄 수 있습니까?(불교닷컴 2014-04-24)”라고 물었다. 그러자 도법스님은 그런 묘수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아무리 고민해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전부였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불자들이나 국민들이 낙담에 빠졌을 때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열심히 기도 해 줄 수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진: 미디어붓다(2014-04-25)

 

 

그래서일까 불교계에서는 공통적으로 극락왕생무사귀환캐치프레이즈를 내 걸었다. 어느 사찰에 가도 극락왕생과 무사귀환이라는 말이 꼭 따라 붙는다. 그러나 무사귀환이라는 말은 이제 형식에 지나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다. 사고가 난지 10일이 넘었기 때문에 생존자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무사귀환이라는 말이 따라 다니는 것은 일종의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불교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극락왕생 하나 뿐이다.

 

열심히 기도 하세요

 

성법스님의 이와 같은 지적에 공감한다. 그동안 한국불교에서는 불자들에게 열심히 기도하라고 하였다. 이런 말은 실제로 들은 말이다. 법당에서 스님이 신도들에게 늘 당부하는 말은 열심히 기도 하세요라는 말이다. 열심히 기도하면 소원이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절에 가면 각종기도가 무척 많다. 유일신교의 전매특허나 다름 없는 기도라는 말을 불교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음기도, 지장기도 등 절에서 열리는 행사에 기도가 붙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이다.

 

또 절에서는 천도재를 강조한다. 절에 다니면 누구나 한 번쯤 듣는 말이 조상천도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천도재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 세 번할 수 있는 것이 천도재이다. 그러다 보니 큰 비용이 들어 가는 천도재를 몇 번하고 나면 커다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로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불자가 천도재를 한 번 하였는데 한 번 더 하라도 해서 두 번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번 더하라고 하는 바람에 절에 다니기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는 교회에 가서 앉아 있다고 하였다.

 

늘 업타령 하지만

 

또 하나 들 수 있는 것이 한국불교에서 늘 하는 말이 업에 대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전생에 지은 업의 영향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사고가 났을 때 액땜했다는 말도 한다. 지금 작은 사고가 남으로 인하여 업장이 소멸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큰 사고를 피해 갈 수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에 대하여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업장이 소멸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다는 것이다.

 

이렇게 늘 업타령을 하는 한국불교에서 세월호와 같은 대형참사가 일어나 크게 상심해 있는 가족들과 국민에게 한다는 말이 열심히 기도 하는 것 외에 해 줄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업과 업보, 업장 소멸 이야기를 하였지만 정작 커다란 사고가 일어 났을 때 업자도 꺼내지 못하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라 한다.

 

한국불교의 이중성

 

이렇게 한국불교에서는 항상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 끊이지 않고 또 천도재를 늘 이야기한다. 그리고 평소에 업타령, 마음 타령을 하지만 막상 위기에 닥친 사람에게 모든 것이 전생에 지은 업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을 성법스님은 기고문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다.

 

평소에는 업타령을 하다가도 위기에서 업타령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성법스님은 종교라는 게 종교 집단을 위한 존재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 역시 절체절명의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보듯이 한국불교의 행태를 보면 평상시 하던 말과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하는 말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결국 종교집단의 존속을 위한 종교가 아닌지 반문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법스님은 기고문을 통하여 한국불교의 이중성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성법스님의 단멸론적 견해

 

아직 까지 한국불교에서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하여 해법을 제시하는 스님들을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고작 한다는 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라는 말 뿐이다. 그래서일까 절에서는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관세음보살정근이 낭낭하게 울려 퍼진다. 그런데 기고문에서 성법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 곳곳에서기본원칙을 외치고 있습니다. 늘 들어왔던 말이지만 지금처럼 무게감이 느끼게 절감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한국 불교는 지금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과 원칙에 충실한가를 고뇌해야 합니다. 극락을 실재하는 곳으로, 지옥을 실재하는 곳으로 신도들에게 말하고, 현세의 모든 일은 전생의 과보와 연결 짓고, 보시 공덕을 통해 악업이 사라진다고 말하고, 깨달음에도 돈오(頓悟)냐 점수(漸修)냐를 따지는 한국불교가 어째서 눈앞에 벌어진 엄연한 현실에 대해 연기론적인 합리적 설명을 못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생지옥을 보며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보지 않는다면 존재의 이유를 해명하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세월호… 현실도 설명 못하는 불교, 불교닷컴 2014-04-28)

 

 

성법스님에 따르면 극락과 지옥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보시공덕도 부정하고 있다. 이런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멸론적 견해로 보기 때문이다.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것이 단멸론적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어서 육사외도에 속한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육도윤회를 부정하고 더구나 보시공덕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명백히 외도적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승려로 등록 되어 있다. 기독교 같으면 이단이라 쳐 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성법스님에 대하여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

 

성법스님의 글을 읽어 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한다고 한다. 그러나 극히 일부만 적용 될 뿐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을 다 믿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 등 근본교리는 인정하지만 자신의 감각인지에 벗어나는 것은 믿지 않는 것이다. 내세라든가 윤회, 또는 천상과 지옥 등 육도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검증이 되지 않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성법스님의 사고에 대하여 윤회는 없다고?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를 보고(2013-10-0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전에 올린 성법스님의 단멸론적 시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윤회는 6가지의 세계로 나눠지는데, 이것이 붓다가 나누었다는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2)
그리고, 어째서 지금은 5가지도, 7가지도 아닌, 6가지라고 딱 잘라 분류를 하는 것일까요?

3)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도 인간인데, 윤회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3)
미래에 외계인이 발견되거나, 외계 축생이 발견된다면 그들에게도 이미 윤회가 적용되고 있는 것일까요?

4)
대승불교에서는 선악의 구별에 시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데, 윤회의 과보를 받는 선과 악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
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

5)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것은 불과 200만 년 전인데, 그 전에 지구에 살던 공룡등 동물도 윤회에 적용을 받은 것일까요?

6)
지구의 인구는 엄청 증가하는데, 지구의 축생들이 선한 업을 지어 인간이 증가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상의 사람들이 복덕이 다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7)
둥물들이 어떤 행위로 복덕을 쌓아 인간으로 신분이 도약할 수 있는 것입니까?(여러분 곁에 있는 애완견은 분명히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복을 짓고 있으니 제외합시다)

8)
그러나 복제된 동물은 어떻게 윤회의 틀 속에 들여보내야 합니까?

9)
지옥은 갈갈이 찢어진 고통을 육체에 주고 나서, 다시 깜짝할 사이에 복원을 시키는데, 그런 신묘한 기술을 복 짓고 사는 인간에게 주지 않고, 축생보다 못한 인간들을 혼내는데 사용하는 것은 ‘지옥 갈 일’ 아닌가요?

 

(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http://www.sejon.or.kr/ )

 

 

이 글은 스님의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것을 가져 온 것이다. 9개 항의 의문을 보면 마치 말룽끼야뿟따가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하는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을 하는 것 같다. 한마디로 쓸데 없는 질문이다. 번뇌만 증장시키고 해탈과 열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법스님의 의문 역시 공허한 것이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 검증의 잣대로 윤회, 천상, 지옥 등을 검증하려 하는 것이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이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감각적 인지에 바탕을 두고 과학적 검증의 잦대를 들이미는 성법스님은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http://www.sejon.or.kr/ )

 

 

이 결론 부분을 읽어 보면 단멸론적 시각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죽음 이후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을 때 행복하게 잘 살면 그만이라는 것이 단멸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글에서 스님은 질량보존의 법칙을 이야기 하면서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 우주에너지의 순환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 어떤 해법도 제대로 제시 못하는 불교계

 

세월호참사와 관련하여 불교계에서 그 어떤 해법도 제대로 제시 하지 못하고 있다. 고작 할 수 있는 말이 극락왕생이다. 그래서 조계종 교수아사리포럼에서 도법 스님은 그런 묘수가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무리 고민해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전부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치 기독교 목사의 말을 듣는 것 같다. 기독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열심히 기도 하는 것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또 초기불교를 연구 하는 어떤 스님은 세월호 참사에 있어 불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불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본다”라고 답하였다.

 

한국불교를 이끌어 간다는 스님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 고작 열심히 기도하자든가 불교에는 해법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천육백년전 부처님이 왜 출현 하였을까? 고통받고 있는 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텐데 한국불교에서는 기도타령을 하고 대책이 없다고 말한다. 더구나 어떤 스님은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단멸론 시각도 가지고 있다.

 

지금 괴로운 자가 있는데

 

불자들이 불교를 믿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리고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의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불교의 목적일까? 만일 이와 같은 기복적인 행위가 불교의 목적이라면 굳이 불교를 믿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복의 왕이라 볼 수 있는 유일신교가 있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이 아무리 용하기로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 보다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불교를 믿는 것은 맹목적이 아니다. 합리를 바탕으로 한 믿음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믿어라하지 않고 와서 보라!(ehipassika)’고 하였다. 초대할 만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한 것이다. 믿기 전에 먼저 와서 볼 것을 말한다.

 

지금 괴로운 자가 있다. 그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구나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 괴로움에 대하여 정리 하여 놓았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여 고성제라 한다.

 

고성제 안에는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사람도 알고 있는 생노병사가 들어가 있다. 그런데 괴로움에는 네 가지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

 

이번 세월호 참사가 난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에 해당된다. 이렇게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을 유발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었다면 이것 역시 괴로움이다. 그래서 이번 세월호 참사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라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딱 들어 맞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 없음을 확신 한다. 바로 이런 확신에 찬 믿음이 불교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유일신교의 맹목적인 믿음인 맹신과 다르다. 이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믿음이기 때문에 누구나 진리로 받아 들인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와서 보라고 하는 것이지 믿어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할까? 아쉽게도 아직까지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불교적 해법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고작 한다는 것이 극락왕생발원이다. 그리고 아무리 고민해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가 전부였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연구하는 스님은 “불교의 영역이 아니라고 본다”라고 잘라 말한다. 이것이 한국불교의 현실이다. 심지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라는 취지로 말하기도 한다. 그 누구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불교적 해법은 분명하게 있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성제이다. 지금 생사의 기로에 처한 사람들이나 국민들에게 해 줄 수 있는말은 부처님이 설한 사성제이다. 누군가 괴로움을 겪고 있을 때 고성제를 알려 주어야 한다. 고성제만 알려 준다면 염세주의자라로 오해 받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는 해법까지 제시하였다. 그것이 집성제이고, 멸성제이고, 도성제이다.

 

 

Asāre sāramatino                 아사레 사라마띠노

sāre cāsāradassino,              사레 짜사라닷시노
Te s
āra nādhigacchanti          떼 사랑 나디갓찬티

micchāsakappagocarā.            밋차상깝빠고짜라

 

핵심이 아닌 것을 핵심이라 생각하고

핵심을 핵심이 아닌 것이라고 여긴다면,

그릇된 사유의 행경을 거닐며

그들은 핵심적인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dhp11)

 

 

 

2014-04-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