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참을 수 없는 무료와 권태, 야사의 출가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5. 31. 17:04

 

 

참을 수 없는 무료와 권태, 야사의 출가이야기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천만불자라고 한다. 천만불자들은 스승이 있을까? 특별한 사람이나 극소수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스승이 없다고 보면 된다. 스님들처럼 출가하면 믿고 따를 수 있는 은사스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절이 있어서 따를 수 있는 스님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거의 대부분 개인적인 신행생활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절에 가면 조용히 법당에 들어가 삼배하는 정도의 신행생활을 말한다.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에게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부처님 말씀 일 것이다. 비록 부처님이 살아 계시지는 않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가르침이 고스란이 초기경전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에서는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이라 하였다. 스승이 없는 시대에 스승이 없다면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초기경전에 의지하라는 말과 같다. 초기경전 자체가 훌륭한 스승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없는 불자들은 초기경전에 의존하면 된다. 초기경전에는 부처님말씀이 가득하기 때문에 사실상 부처님이 직접 가르침을 주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전을 접하는 그 자체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직접 전해 듣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영감을 주거나 성스러운 글을 읽고 반조하기

 

천만불자들의 신행방법은 다양하다. 상근기의 불자들은 스님들 처럼 안거에 들어 가기도 하고 참선하기도 할 것이다. 최근에는 테라와다 수행방법이 도입 되어 위빠사나수행에 전념하는 불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참선이나 위빠사나 하는 것만 수행이라 볼 수 있을까? 최근 교계신문에 따르면 명상포교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명상포교와 관련하여 조계종에서 주관한 종책연찬회에 대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명상방식은 참선이나 위빠사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김재성교수가 발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김 교수는 수 세기를 거치며 계발돼 온 명상의 기법에는만트라 등 의미 있는 단어구절 반복하기현재 순간에 대한 마음챙김호흡을 따르거나 세기몸의 감각 흐름에 주의 기울이기자애 연민 용서 와 다른 치유하는 정서 계발기하학적 모양 등 시각적 대상에 대한 집중평화로운 장소대상에 대한 심상화영감을 주거나 성스러운 글을 읽고 반조하기자연에 대한 관조신을 찬양하는 성가 등이 있다고 했다.

 

(마음산업에 들뜬 조계종, 명상포교 강조, 불교닷컴 2014-05-28)

 

 

김재성교수가 발표한 명상에 대한 것은 매우 다양함을 알 수 있다. 기사에서는 모두 아홉 가지 방식을 소개 하고 있다. 이중 눈에 띄는 것이 영감을 주거나 성스러운 글을 읽고 반조하기이다. 이는 다름 아닌 경전의 게송이나 특정 문구를 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 말에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

 

한마디 말에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사람이 선배나 친구로부터 한마디 말을 듣고 생각이 180도 바뀐 케이스를 말한다. 이처럼 부처님말씀은 180도 생각을 돌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경전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 경전에 표현 되어 있을 때 감동한다. 그 문구로 인하여 180도 생각이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커다란 인격적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이처럼 경전에서 게송 한구절에 마음이 바뀌고 경전 문구 하나에 인격적 변화가 일어난다면 참선이나 위빠사나 못지 않은 효과가 있다고 본다. 수행이라는 것이 반드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야만 이루어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의 말 한마디, 스승이나 선배의 격려의 말, 친구의 위로의 말에 인생의 전환점을 이룰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전에 쓰여져 있는 문구를 접하면서 인생이 달라 질 수 있다. 그런 점으로 본다면 영감을 주거나 성스러운 글을 읽고 반조하기는 매우 훌륭한 수행방법이라 생각한다. 스승이 없어도 경전만 보고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쾌락이 세상을 결박하고

 

상윳따니까야 1권에는 짤막한 게송이 매우 많다. 마치 상윳따니까야 일곱 권의 내용을 짤막한 게송으로 압축해 놓은 듯 하다. 그런 게송 중에 결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세상을 결박하고 무엇이 그 여행의 수단이고 무엇을 떠나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부르는가?(S1.64)”라고 묻는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답송으로 답한다.

 

 

nandi sayojano loko

vitakkassa vicāraa,
Ta
hāya vippahāena

nibbāamiti vuccatīti.

 

 

[세존]

쾌락이 세상을 결박하고

사유가 여행의 수단이고

갈애를 떠나면

그것을 열반이라 부르네.”

 

(Sayojanasutta-결박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4, 전재성님역)

 

 

[세존]

즐김이 세상을 묶으며

일으킨 생각이 그것의 걸음걸이이니라.

갈애를 버려야

열반이라 불리게 되느니라.”

 

(Sayojanasutta-묶음 경, 상윳따니까야 S1.64, 각묵스님역)

 

 

“The world is tightly fettered by delight;

Thought is its means of travelling about.

Craving is what one must forsake

In order to say, ‘nibbāa.’”

 

(Fetter, CDB S1.64, 빅쿠보디역)

 

 

게송에서 핵심어는 ‘sayojana’이다. 이에 대하여 결박또는 묶음이라 번역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구절을 보면 쾌락이 세상을 결박한다(nandi sayojano loko” 라고 하였다. 여기서 쾌락이라는 말이 난디(nandi)’이다. 영어로는 ‘Joy’ 라 한다. 빅쿠보디는 delight로 번역하였다.

 

어디 즐길거리가 없을까?”

 

난디라는 말은 초기경전 도처에 등장하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초전법륜경을 들 수 있다. 초전법륜경 집성제에서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yāya ta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 S56.11)”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여기저기에 환희하며라고 할 때 환희가 난디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난디(쾌락)라는 것은 딴하(갈애)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것도 끊임 없이 찾는다. 그래서 마치 원숭이가 눈을 두리번 거리듯이 어디 즐길거리가 없을까?”하고 끊임 없이 재미를 찾아 나간다. 그래서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한다. 무료와 권태는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늘 즐길거리를 찾는 것에 대하야 따뜨라 따뜨라(tatra tatrā)”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따뜨라는 ‘there’의 의미이다. 따뜨라가 두번 반복 되어 따뜨라 따뜨라(tatra tatrā)”가 되면 여기 저기로 번역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여기저기 즐길거리를 찾아 다닌다.

 

사람들은 눈과 귀 등 다섯 감각능력을 가만 두지 않는다. 눈으로는 아름답고 사랑스런 형상을 늘 쫒아 다니고, 귀로는 끊임 없이 좋은 소리를 듣고자 쫑긋 한다. 코나 혀도 마찬 가지 일 것이다. 맛있는 것을 찾아 맛집을 순례하고 TV에서는 끊임 없이 먹거리프로를 내보내고 있다. 촉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촉감은 눈이나 귀, , 코 등으로 받아 들이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극적이다. 그래서 촉감의 노예가 되면 헤어나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드라운 감촉을 찾아 끊임 없이 방황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감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한시도 가만 있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그런 사람들에게 무료와 권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무료와 권태

 

무료와 권태가 계속 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에 대하여 가장 좋은 예가 있다. 그것은 율장대품에 나오는 야사의 이야기이다.

 

율장대품을 구입하였다. 전재성박사가 최근 발간한 빠알리율장을 말한다. 대품과 소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품에는 경장에서 보여지는 경들이 눈에 띈다. 초전법륜경이나 무아상경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율장대품에는 경장에서 볼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다. 야사의 이야기도 그 중에 하나이다. 율장대품에서 야사는 이렇게 외쳤다.

 

 

[야싸]

, 괴롭다. ! 고통이다.”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두번째 송출품 전재성님역)

 

 

 

대부호의 아들 야사는 괴롭다라고 절규하듯이 외치고 있다. 오늘날로 말하면 재벌2세의 아들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야사이다. 경에 따르면 야사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었다고 하였다. 하나는 겨울궁전이고, 하나는 여름궁전이고, 하나는 우기의 궁전이라 하였다. 특히 우기궁전의 경우 넉 달 동안은 기녀들의 음악에 둘러싸여 내려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렇게 온갖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며 살아 가던 야사가 왜 괴롭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기녀들의 흐트러진 모습이 묘사 되어 있다. 이런 기녀들이 시체더미를 보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 되어 있다. 구역질 나도록 싫은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갑자기 재난에 대한 위험을 보고 싫어 하여 떠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래서 ,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절규한 것이다.

 

야싸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사는 무작정 집을 나섰다. 새벽에 집을 나섰으므로 노천에서 경행을 하고 있는 부처님 모습을 본 것이다. 야사는 부처님을 보자 또 다시 ! 참으로 괴롭습니다. ! 참으로 고통입니다.”라고 스스로 말한다. 갖출 것 다 갖춘 자가 괴롭고 더구나 고통스럽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어떻게 말씀 하셨을까?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세존]

야싸여,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

야싸여,

오십시요!

앉으십시요!

내가 그대에게 가르침을 설하겠습니다.”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두번째 송출품 전재성님역)

 

 

Yasa

 

 

이 구절을 보면 달마대사와 혜가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른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안심법문은 달마와 혜가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혜가가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하자,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라고 말한 것이 안심법문의 요지이다.

 

만일 안심법문식으로 위 구절을 표현 한다면 야싸여, 괴로운 마음을 가져 오너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경에서는 안심법문식의 표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부처님은 자비롭게 오십시요!”라고 환영한다. 그리고 앉으십시요!”라고 하면서 자리를 권한다. 괴로움에 고통스러워 하는 젊은이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라 볼 수 있다.

 

팔을 자르니 가히 도를 구할만하다

 

그러나 달마와 혜가의 대화를 보면 살벌하다. 혜가가 자신의 팔을 잘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직지심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師曰諸佛無上妙道廣劫勤修하사 難行能行하고 難忍能忍하시니라 豈以小德小智 輕心慢心으로 欲冀眞乘徒勞勤苦니라 聞師誨勵하고 潛取利刀하야 自斷左臂하야 置於師前커늘 知是法器하시고 乃曰諸佛最初求道爲法忘形하시거늘 汝今斷臂吾前하니 求亦可在라하시고 遂因與易名曰慧可라하시다 光曰諸佛法印可得聞乎닛고 師曰諸佛法印匪從人得이니라 光曰我心 未寧하니 乞師與安하노이다 師曰將心來하라 與汝安하리라 曰覓心了不可得이니다 師曰與汝安心竟이니라

 

달마대사가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가장 높은 미묘한 도는 오랜 세월동안 부지런히 수행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능히 참았느니라. 어찌 작은 덕과 작은 지혜와 가벼운 마음과 거만한 마음으로 참다운 가르침을 바라는가? 부질없는 고생만 할 뿐이로다.  

 

신광이 달마대사의 가르침을 듣고 몰래 날카로운 칼을 가져다가 스스로 왼쪽 팔을 잘라서 대사의 앞에 두었다. 대사가 법의 그릇임을 아시고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들이 최초에 도를 구하는데 법을 위해서 몸을 잊었는데 그대가 지금 내 앞에서 팔을 자르니 가히 도를 구할만하다.”하시고 대사가 드디어 그로 인하여 이름을 바꾸어 혜가(慧可)라고 하였다.

 

신광이 말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들을 수 있습니까?

 

“모든 부처님의 법인은 사람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저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니 스님께서는 편안하게 하여 주십시오.

 

“그 편안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대에게 편안하게 해 주겠노라.

 

“마음을 찾아도 마침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에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 

 

(직지심경 46 /혜가 대사 2 /마음을 가져 오너라)

 

 

 

여기서 신광은 혜가를 말한다. 신광이 달마에게 괴로운 마음에 대하여 가르침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달마는 신광이 거만하다고 여겨 못마땅하게 여긴 것 같다. 그러자 신광은 자신의 팔을 잘랐다. 자신의 팔을 하나 자름으로서 믿음을 보인 것이다. 그제서야 달마는 팔을 자르니 가히 도를 구할만하다라고 말하며 안심법문을 하고 있다.

 

생사문제가 걸려 있는 젊은이에게

 

여기 매우 절박한 자가 있다. 생사에 대한 문제이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구해 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인생의 기로에 선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할까? 어떤 이야기를 해야 180도 인식의 전환을 이룰 수 있을까? 만일 말을 잘못하면 그 사람은 그 길로 강에 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말 한마디에 감명받으면 인생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부처님을 발견한 야사나 달마에게 찾아간 혜가 역시 절박한 상황이었다.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 이야기를 보면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부처님은 자비로 대했고, 달마는 매우 냉정하게 대했다. 생사의 갈림길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말한마디에 따라 어떤 극단적인 행동을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이다.

 

그런데 직지심경을 보면 혜가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였다. 가르침을 들을 수만  있다면 자신의 팔을 자르는 것쯤은 문제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마는 팔이 잘려진 것을 보고 나서야 안심법문을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리고 동문서답식의 선문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생사문제가 걸려 있는 젊은이이게 자리를 권하고 자비의 마음으로 여기에는 괴로움이 없고, 여기에는 고통이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근기에 따라 단계적 가르침을

 

그렇다면 생사의 갈림길에 있는 야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었을까? 율장 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차제설법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모든 것을 갖춘 재벌2세와 같은 야사가 괴롭고 고통스럽다고 하니 가장 쉬운 가르침부터 알려 준 것이다. 대품에 따르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타락-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율장대품)”라고 설명 되어 있다. 흔히 말하는 시계생천이야기 일 것이다. 착하고 건전한 삶을 살아 가면 반드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처님은 야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건강한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법문을 설했다. 마치 청정하여 반점이 없는 천이 올바로 색깔을 받아 들이는 것처럼,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싸에게 그 자리에서 바로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야싸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두번째 송출품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처음부터 어려운 가르침을 설하지 않았다. 재가자나 초심자에게는 시계생천이라 하여 도덕적이고 봉사하는 삶을 살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다가 가르침이 무르익으면 다음 단계의 가르침을 주었다. 이를 차제설법이라 한다. 근기에 따라 단계적 가르침을 펼치신 것이다.

 

그런데 야사는 근기가 높았던지 가르침을 곧바로 이해 하였다. 이를 안 부처님은 한단계 더 높은 가르침을 펼친 것이다. 예를 들면 사성제나 연기법과 같은 법문을 말한다. 이런 법문을 듣자 야사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 하였다. 이런 진리의 눈이 새롭게 생겨난 것에 대하여 천의 비유를 들었다. 하얀 광목천에 물감을 들이는 것처럼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을 말한다.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이처럼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어떤 현상을 보일까? 초기경전에서는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 (ya kiñci samudayadhamma sabbanta nirodhadhammanti)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이는 부처님이 오비구에게 설법할 때 콘단냐에게서 진리의 눈이 생겨 났을 때도 똑 같은 외침이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정형구에 대하여 수다원송이라 한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으므로 적어도 일곱생 이내에는 완전한 열반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꼰단냐에게서 최초로 법안이 생겼고, 이어서 오비구 모두가 법안이 생겼고, 또한 야사에게도 똑같이 법안이 생긴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에 대하여 이런 방법으로 설명 될 수 있다. 어느 과학자가 이론을 완성하고 실험까지 완벽하게 증명하였다. 그러나 오로지 자신 혼자만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 입증 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서는 이를 원리로서 인정할 것이다. 누가 실험해도 똑 같은 결론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발견한 연기법을 제자들에게 적용하였을 때 모두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똑 같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진리로서 증명된 것이나 다름 없다.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할 것 없이 

 

 

이 세상에 즐거움이 더 많을까 괴로움이 더 많을까? 이는 우문에 불과하다. 특히 불교도들에게 있어서 그렇다. 일체개고라 하여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Sabbe sakhārā dukkhā, Dhp278)”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은 이와 정반대로 살아 간다. 오로지 즐거움만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환희하며하며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그런데 즐길거리를 찾는것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모두 다 똑같다는 것이다. 부자이어야만 즐길거리가 많고 가난한자는 돈이 없어서 별로 즐길거리가 없어서 심심하게 보낼 것이라는 것은 오산이다. 돈이 없어도 즐길거리는 널려 있고 가난해도 나름대로 즐길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난한집 아이나 부자집아이나 모두 나름대로 즐기는 방식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젊은이나 노인들도 마찬가이이다. 늙었다고 하여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 없이 즐길거리를 찾는다. 어떤 것이 되었든 남녀노소와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모두 여기저기서 즐길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갈애가 남아 있는 한

 

그런데 너무 즐길거리가 많아도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이를 야사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 세 개의 궁전을 갖고 있는 야사가 기녀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쾌락을 향유하였지만 결국 ,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너무나 괴러웠던지 집을 뛰쳐 나갈 정도이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결코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오늘도 내일도 돈을 벌기 위하여 하루 대부분 일터에서 보낸다. 그리고 일생의 대부분을 돈벌기 위해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일까? 아마 즐기는 데 사용하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즐기는데 시간을 보내다 더 이상 즐길거리가 없을 때 어떨까? 아마 "심심해! 심심해!"를 연발하며 또 다시 즐길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나 즐거운 느낌은 그 때 뿐이다. 이어서 무료와 권태가 찾아 온다. 이번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하여 권태를 극복 하기 위하여 또 다른 즐길거리를 찾아 나선다.

 

이처럼 끊임 없이 즐거움만 찾아 다니는 것은 갈애 때문이다. 마셔도 마셔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 갈애가 남아 있는 한 윤회 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쾌락이 세상을 결박하고

사유가 여행의 수단이고

갈애를 떠나면

그것을 열반이라 부르네.”(S1.64)

 

 

 

 

2014-05-3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