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보리수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2. 16:54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보리수이야기

 

 

 

정견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불자들은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잘 모른다. 마치 정견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 보았을 때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불자들은 이런 사실을 대부분 모른다. 이는 초기경전을 접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 선사들이 생각하는 정견은 또 다르다.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정견에 대해서 말할 때가 있다. 그 때 마다 하는 말이 정견이 바로 서야 합니다라는 말이다.

 

선사들이 말하는 정견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본래 부처임을 아는 것이다라 한다. 이런 정의는 초기불교와 동떨어진 것이다.

 

정견이 서로 달랐을 때

 

이렇게 정견이 서로 달랐을 때 목적지는 다를 수 밖에 없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데 초기불교에는 오른 쪽 길로 간다면, 선종에서는 왼쪽 길로 가는 것과 같다. 바른 길로 갔었을 때는 궁극적으로 열반의 실현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하지만, 왼 길로 갔었을 때는 궁극적 실재와 합일의 길로 가게 된다.

 

정견이 다르면 종착지도 다르다고 하였다. 그 결과 깨달음의 내용도 다르다.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를 아는 것이 정견이므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선종에서는 본래불을 아는 것이 정견이므로 본래불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열반과 합일은 다른 것이다. 열반은 지혜수행으로 성취되는 것이지만, 합일은 선정수행으로 성취되는 것이 다르다. 이렇게 열반이든 선정이든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이라는 말은 열반을 성취하는 자나 합일을 성취하는 자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깨달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의 본질이나 진리 따위의 숨은 참뜻을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됨이라 설명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달음이라는 말이 불교의 전용용어라고 볼 수 없다. 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크게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라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목사도 방송에 나와 깨달았다라는 말을 스스럼 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열심히 기도하세요

 

절에 가면 늘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열심히 기도하세요라는 말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각종 기도에 동참한다. 불상 앞에서 108배를 하며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불자들의 일반적인 신행방식이다. 그러나 앞에 있는 불상이 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불상이 우상으로 되었을 때

 

불자들에게 있어서 불상은 경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불자들이 절에 가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대웅전이다. 대웅전에 들어 가서 삼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좀 더 신심 있는 불자라면 구배를 한다. 불법승 삼보에 대하여 삼세번씩 아홉 번 절하는 것이다.

 

불자들이 불상을 지극하게 예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소원을 빌기 위해서일까? 만일 불상의 용도가 소원용이라면 타종교인이 말하는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나무나 쇠붙이 또는 돌덩이로 만든 형상에 절을 하며 소원을 비는 행위는 전형적인 우상숭배이다. 만일 불자들이 쇠붙이로 만든 불상 앞에 돈을 올려 놓고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빈다면 타종교인들이 우상숭배의 종교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불자들은 왜 불상에 절을 하며 예경하는 것일까? 그것은 소원성취용으로서 불상이 아니라 커다란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길래 고래로부터 전세계에 걸쳐 수 많은 부처의 형상을 한 불상이 만들어 진 것일까?

 

고성(古城)에서 불상의 흔적을 발견하고

 

세계 어디를 가든 불상이 없는 곳은 없다. 특히 불교가 융성한 나라일수록 불상도 매우 많다. 지금은 타종교인이 살지만 과거에 불교국가이었던 지역에는 불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작년 실크로드 여행을 갔었을 때 투르판에서 그랬다.

 

투르판은 현재 신장-위구르자치구역에 있다. 주로 위구르족이 많이 산다. 그러다 보니 회교가 주류종교이다. 투루판은 과거에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고 동서문화의 교차지점에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 이전에는 불교국가 이었다.

 

투루판에 가면 두 가지 대표적 유적이 있다. ‘고창고성교하고성이 그것이다. 모두 몽고가 침략 하기 이전에 불교가 융성하던 곳이디. 특히 교하고성은 당나라시절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에서 유심히 본 것이 있다. 다른 관광객들은 스치고 지나쳤을지 모르지만 불교흔적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대탑이 있던 곳에서 불상의 흔적을 발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창고성에서 탑돌이를 하고, 투루판 고창고성은 불교성지(2013-07-30)’대불사(大佛寺)에서 불상, 불교성지 교하고성에서(2013-08-09)’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긴 바 있다.

 

 

지금은 이슬람지역이지만 옛날에는 불교지역이었던 곳에서 불상의 흔적을 발견하자 감격하였다. 이 이외에도 수 많은 불상과 불상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불상은 예경의 대상

 

부처님 입멸후 약 오백년 가량 무불상시대 이었다. 이후 불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을 그리워 하고 부처님을 닮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돌로 만든 불상에 소원을 비는 용도가 아니었음을 말한다.

 

불교국가마다 크고 작은 불상이 수 없이 조성 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수의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무슨 이유일까? 단지 소원성취용이라면 옛날부터 지금 까지 이렇게 많이 만들어 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불상이 많이 만들어진 것은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에게 남겨진 고민을 풀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수 많은 불상이 조성되어 왔고, 앞으로 미래에도 잊지 않고 조성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불상은 우상숭배가 아니라 예경의 대상이 된다.

 

위나야(율장)에서만 볼 수 있는 것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알려면 초기경전을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빠알리니까야에 대하여 부처님의 원음으로 본다. 그래서 초기경전이라는 말과 빠알리니까야는 동의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빠알리니까야는 매우 방대하다. 가르침의 바다와 같다. 어느 곳을 열어 보아도 가슴을 울리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너무 광대하다 보니 압도당해서 길을 잃고 헤맬 수가 있다. 이럴 때 부처님이 최초로 깨달음을 얻은 장면을 접한다면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과도 같다. 마치 정견이 서 있으면 바른 길로 가게 되듯이 부처님이 처음 깨달음을 성취하는 순간을 알게 된다면 역시 방향을 잘 잡은 것과 같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최초의 상황을 기록해 놓은 경전이 있다. 그것은 니까야(경장)이 아니라 위나야(율장)이다. 율장대품 가장 첫 첫 페이지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니까야에서 볼 수 없다. 오로지 위나야에서만 볼 수 있다.

 

율장, 경장, 논장 삼장을 갖추고

 

사부니까야를 모두 갖추었다. 그리고 법구경, 숫따니빠따, 우다나, 여시어경 등 쿳다까니까야의 일부를 갖추었다. 그런데 금년 2014 4월에 전재성박사에 의하여 위나야가 번역 출간 되었다. 율장대품과 율장소품이다. 이를 모두 구입하였다. 이렇게 하여 니까야, 위나야를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까지 합하면 논장까지 갖추게 되어 경, , 논 삼장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항상 위나야가 앞에

 

흔히 빠알리삼장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삼장은 위나야(율장), 니까야(경장), 아비담마(논장)를 말한다. 삼법인에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 하여 순서를 중요하게 여기듯이 빠알리삼장에서도 순서가 중요하다. 그래서 삼장의 순서는 위나야-니까야-아비담마 순이다. 항상 위나야가 앞에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빠알리 삼장 중에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위나야이다. 그런데 위나야 중에서 율장대품을 펼치면 가장 먼저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알리 삼장 제1 1절은?

 

빠알리 삼장은 율장대품 제1장 제1절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깨달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 된다.

 

 

Tena samayena buddho bhagavā uruvelāya viharati najjā nerañjarāya tīre bodhirukkhamūle pahamābhīsambuddho.

Atha kho bhagavā bodhirukkhamūle sattāha ekapallakena nisaadhikaraasamathāsavidī.

Atha kho bhagavā rattiyā pahama yāma paiccasamaanvaddhamāsalomapailoma manasākāsi:

 

한때 세존께서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우루벨라 지역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칠일 동안 홀로 가부좌를 하고 해탈의 지복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밤의 초야에 연기법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보리수이야기, 첫번째 송출품,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The Mahabodhi Tree at the Sri Mahabodhi Temple in Bodh Gaya()

 

 

바로 이 장면이 빠알리삼장의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다. 기독교로 말하자면 창세기와 같은 것이다. 바이블에서 최초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창세기이듯이, 빠알리삼장에서의 최초의 이야기는 부처님이 정각을 얻는 순간부터 시작 된다.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부처님은 그날 밤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어지는 내용은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연기의 순관에 대한 것이다.

 

 

Avijjāpaccayā sakhārā; sakhār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ūpa; nāmarūpaccayā saāyatana; sa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hā; tahāpaccayā upādāna; upāda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세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이 함께 생겨난다.

 

(보리수이야기, 첫번째 송출품,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초야(rattiyā pahama)에 깨달은 것은 연기법의 순관이다. 여기서 순관이라고 한 것은 윤회하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누군가 연기적으로 살아야죠라고 말한다면 이는 윤회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연기적으로 사는 방식은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끊임 없이 유전하고 윤회를 한다. 부처님이 가장 먼저 본 것이 바로 뭇삶들의 윤회하는 삶의 방식을 깨달은 것이다.

 

연기의 일반원리와 특수원리

 

불자들은 정견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모르듯이 깨달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다 보니 연기가 무엇인지 역시 잘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는 말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한자어로 약유차즉유피(若有此卽有彼)’ 한다. 그래서 누군가 연기를 말할 때 이 문구를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이 문구는 반쪽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다. 연기에 대한 완전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한쪽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라는 말이다. 이는 우리말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고 번역된다.

 

그래서 약유차즉유피(若有此卽有彼)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라고 붙여서 말해야 연기의 순관을 제대로 표현한 것이 된다. 여기서 약유차즉유피(若有此卽有彼)에 대하여 연기의 일반원리라 하고, 약생차즉생피(若生此卽生彼)에 대하여 연기의 특수원리라고도 한다. 이런 일반원리가 적용되어 특수원리로서 십이연기가 성립된다.

 

부처님이 연기를 설할 때 정형구가 있다. 그것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는 정형구이다. 여기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라고 한 것은 연기의 일반원리이다. 이어서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라는 형식으로 시작 되는데 이는 연기의 특수원리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연기

  

  

일반원리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若有此卽有彼

iti imasmi sati ida hoti

-상호의존적 연기

(대승의 법계연기)

특수원리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조건발생적 연기

-십이연기

 

 

연기에는 일반원리와 특수원리 두 가지 방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승에서는 일반원리로서 연기만 활용하고 있다. 이런 일반원리가 확장 된 것이 법계연기라 볼 수 있다.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

 

일반연기의 특징은 상호의존적이다. 이를 볏단의 비유로도 설명된다. 이에 대하여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2013-03-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라 표현된 일반원리가 마치 볏단이 서로 지탱하여 서 있는 것처럼 연기의 일반원리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로 본 것이다.

 

만일 누군가 연기에 대하여 오로지 상호의존적인 일반원리로서만 해석한다면 단멸론이 되기 쉽다. 몸과 마음을 상호의존적으로 보아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져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을 말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의 불교에서는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서도 드러난다. 백일법문 중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리불은 연기를 두 개의 갈대 묶음의 서로 의지하여 서 있는 것에 비유하여, 명색(明色)을 연하여 식()이 있고, 식을 연하여 명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명(無明)을 연하여 행()이 있고 행을 연하여 무명이 있으며, 무명의 멸함에 의하여 행의 멸함이 있으며, 행의 멸함에 의하여 무명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무명(無明)이 아버지가 되고 행()이 자식이 되어서 무명(無明)이 행()을 낳는다는 식이 아니라 무명(無明)과 행()은 서로 의지하는 형제지간이라는 것입니다.

 

갈대 묶음 가운데 하나를 빼버리면 다른 하나는 설 수 없으니, 이것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는 뜻을 비유하여 말한 것입니다.

 

명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는 것이지 시간적으로 고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십이연기의 재해석)

 

 

성철스님이 재해석한 십이연기이다. 성철스님은 연기에 대하여 상호의존적으로 보았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若有此卽有彼)라는 연기의 일반원리를 말한다. 그래서 볏단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연기의 조건발생적연기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단멸론

 

만일 연기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만 설명하고 조건발생적연기를 설명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단멸론이 되기 쉽다. 왜 그런가?

 

몸과 마음은 상호의존하고 있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若有此卽有彼)라는 연기의 일반원리에 들어 맞는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연기의 일반원리만을 고수하였을 때 어떻게 될까? 아마 이런 등식이 성립 될 것이다.

 

 

일반연기(상호의존적 연기)

단멸론

비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몸이 있을 때 마음이 있다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사라질 때 저것도 사라진다.

몸이 사라질 때 마음도 사라진다

若無此卽無彼

 

 

오로지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고수하였을 때 문제점에 대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상호의존하여 연기 하고 있는데, 몸이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져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단멸론이다.

 

만일 부처님이 상호의존적 연기만을 고수하였다면 단멸론자로 몰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까지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불상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모두 만족해야

 

부처님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함께 조건발생적 연기를 함께 설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단멸론이 아니다. 왜 그런가? 조건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연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상호의존적 연기(일반원리)와 함께 조건발생적 연기(특수원리)를 모두 만족한다. 그래서 연기를 제대로 표현하면 다음 표와 같이 된다.

 

 

연기법

대입설명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무명이 있을 때

형성이 있다.

1)연기일반원리

2)상호의존적연기

3)연기의 순관

4)윤회하는 삶

5)세간적 삶

6)집성제와 고성제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무명이 없을 때

형성이 없다.

1)연기특수원리

2)조건발생적연기

3)연기의 역관

4)해탈열반실현

5)출세간적 삶

6)멸성제와 도성제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무명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이처럼 부처님이 설한 연기는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연기법을 말할 때는 반드시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를 함께 말하여야 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두 연기의 원리가 함께 설명되어 있다.

 

연기송

 

이와 같은 연기송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ti imasmi sati ida hoti,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

imassuppādā ida uppajjati,      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imasmi asati ida na hoti,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imassa nirodhā ida nirujjhati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若有此卽有彼)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若生此卽生彼)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若無此卽無彼)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若無此卽滅彼)

 

(깨달음의 경, 우다나 Ud3)

 

 

문제가 생겼을 때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연기의 순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이는 윤회하는 삶이다. 세간에서 일반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접촉에 따른 느낌이 발생 되어 그 느낌에 대한 갈애로서 결국 새로운 태어남을 가져 오는 삶을 말한다. 이런 사실이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고로 시작 되는 연기의 순관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문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기만 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부처님이 연기의 순관으로 윤회의 원인을 알게 되었을 때,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연기의 회전을 거꾸로 돌리는 것에서 해법을 찾은 것이다.

 

순관에 이어 역관을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에 이어 곧바로 다음과 같은 연기의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이게 된다.

 

 

Avijjāyatveva asesavirāganirodhā sakhāranirodho; 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 viññāanirodhā nāmarūpanirodho; nāmarūpanirodhā saāyatananirodho; saāyatan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vedanānirodhā tahānirodho; tahā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ananirodhā bhavanirodho; bhavanirodhā jātinirodho; jātinirodh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nirujjh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īti.

 

[세존]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고,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며,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 명색이 소멸하면 여섯 감역이 소멸하며, 여섯 감역이 소멸하면 접촉이 소멸하고, 접촉이 소멸하면 느낌이 소멸하며, 느낌이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집착이 소멸하며, 집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한다.

 

(보리수이야기, 첫번째 송출품,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보리수(bodhirukkha)’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었다. 그리고 바로 그 보리수 아래에서 일주일간 해탈의 지복을 누렸다. 그리고 바로 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그래서 십이연기는 연기의 순관과 역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부처님의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연기와 조건발생적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

 

강한 기쁨의 진동으로 터져 나오는 우다나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대하여 정신활동을 기울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뭇삶들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어땠을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감흥어린 싯구를 읊으셨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 감흥어(udāna)는 어떤 것일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Atāpino jhāyato brāhmaassa,

Athassa kakhā vapayanti sabbā

Yato pajānti sahetudhamma"

 

[세존]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님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므로,

그 거룩한 님에게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

 

(보리수이야기, 첫번째 송출품,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빠알리삼장이 위나야-니까야-아비담마 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최초의 게송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위 게송에 대하여 부처님의 감흥어라 하였다. 여기서 감흥어라 번역된 우다나(udāna)는 순간적으로터져 나오는 감흥어린 신성한 발언을 말한다. 부처님이 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관하였을 때 강한 기쁨의 진동으로 터져 나오는 발음이 바로 위 게송이라 볼 수 있다.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진리를 발견하면 마음속에서 환희가 일어난다. 부처님이 연기의 법칙으로 윤회하는삶의 종식에 대하여 알게 되었을 때 감흥어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감흥어에서 핵심구절이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므로(Yato pajānti sahetudhamma)”라는 구절이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사실이라는 말은 담마(dhamma)를 말한다. 담마를 한자어로  ()’이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담마는 현상을 말한다. 형성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사실로 번역한 것이다.

 

모든 형성된 것은 스스로 형성되지 않았다. 또 누군가 창조하지 않았다. 형성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라 하였다. 원인을 갖기 때문에 그때 그때 마다 있는 사실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더 이상 의문하지 않을 것이다. 마치 깜깜한 방에서 전구를 켜면 일시에 환해 지는 것처럼 사실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그 거룩한 님에게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라 하였다. 이는 무명이 타파 되었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무명

 

무명은 앎의 반대 되는 말이다. 그래서 무명에 대하여 인식론적 무지라 한다. 왜 그런가? 각주에서는 무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1) 발견되어서는 안 될 신체적 악행 등이 발견되므로 무명이고,

2) 발견되어야 할 신체적 선행 등은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다.

3) 사물의 전도되지 않은 본성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무명이고,

4) 끊임 없는 윤회속에서 존재 등에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5)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6)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 속으로 뛰어 들기 때문에 무명이고,

7) 앎의 반대이기 때문에 무명이다.

 

 

무명에 대하여 일곱 가지로 설명되어 있다. 일곱 가지 무명은 결국 알지 못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알지 못한다는 것일까?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어리석음(moha)이라는 말이 수 도 없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어리석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초기경에서 어리석음은 무명과 동의어이다. 주석(Prj.II.22)에 따르면 무명은 네 가지 진리, 즉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 하였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분별의 경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ā ca bhikkhave avijjā? Ya kho bhikkhave dukkhe aññāa, dukkhasamudaye aññāa, dukkhanirodhe aññāa, dukkhanirodhagāminiyā paipadāya aññāa, aya vuccati bhikkhave, avijjā.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Vibha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무명의 정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를 내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사성제를 모르는 사람은 무지(無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조차 모를 수 있다.

 

중층적 구조의 무지, 무명(無明: Avijjā)

 

한국의 불자들이 불자라고 하지만 사성제의 진리를 모르고 있다면 무지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진리가 있는 것 조차 모른 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이럴 경우 무지의 무지라 보아야 할 것이다.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무지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이처럼 무지에 대한 무지는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이다. 이런 무지를 중층무지라 한다. 그래서 중층적 구조의 무지에 대하여 무명(無明: Avijjā)이라 한다.

 

세 가지 감흥어를 표로 보면

 

율장대품에서는 감흥어가 세 번 나온다. 이는 부처님이 초야, 중야, 후야 이렇게 세 번에 걸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세 번에 걸친 깨달음에 대한 감흥어를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초야 rattiyā pahama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Atāpino jhāyato brāhmaassa,

Athassa kakhā vapayanti sabbā

Yato pajānti sahetudhamma"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님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므로,

그 거룩한 님에게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

사실들이 원인을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앎

(Yato pajānti sahetudhamma)

중야

rattiyā majjhima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Atāpino jhāyato brāhmaassa,

Athassa kakhā vapayanti sabbā

Yato khaya paccayāna avedī"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님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

그 거룩한 님에게 모든 의혹이 사라진다.”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함

(Yato khaya paccayāna avedī)

후야

rattiyā pacchima

"Yadā have pātubhavanti dhammā

Atāpino jhāyato brāhmaassa,

Vidhūpaya tiṭṭhati mārasena

Suriyo'va obhāsayamantalikkha"

 

참으로 열심히 노력을 기울여

선정을 닦는 님에게 진리가 나타나면,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그 거룩한 님은 악마의 군대를 부숴버린다.”

진리를 꿰뚫음

(보리수이야기, 첫번째 송출품, 율장대품, 전재성님역)

 

 

보리수아래에서 세 번의 앎이 일어 났음을 알 수 있다. 경에 따르면 모두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임으로서 알게 된 것이다.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

 

초야에서는 사실이 원인을 갖는다(Yato pajānti sahetudhamma)”는 것을 분명히 안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야에서는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는 사실을 인식함(Yato khaya paccayāna avedī)”이라하였다. 이는 ‘khaya paccayāna(조건들의 소멸)’의 소멸이다. 그러나 십이연기의 연결고리는 조건 지어진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조건들 역시 조건 지어진 것들(緣生)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체할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라고 하였다. 동사에서 유래된 명사는 수동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khaya paccayāna문구에 대하여

조건지어진 것들은 소멸하고야 만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후야의 감흥어에서 핵심은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Suriyo'va obhāsayamantalikkha)”이라는 구문이다. 어두운 허공을 태양이 비추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다름 아닌 무명이 타파 되었음을 말한다. 마치 어두컴컴한 방에 촛불이나 전구를 켜면 순간적으로 환하게 밝아지면서 모든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인 중층적 구조의 무지가 타파 되었음을 말한다.

 

 

 

2014-10-0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