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과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0. 5. 10:26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과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이야기

 

 

 

나무아래에서

 

율장대품을 보면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장면이 상황별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나무 아래에서 장면이 그렇다. 그래서 모두 다섯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1)보리수이야기를 시작으로 차례로 2)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 3)무짤린다나무, 4)라자야따나나무, 5)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이야기이다. 이렇게 나무를 옮겨 다니면서 각각 칠일 씩 해탈의 지복을 누리며 앉아 있었다라고 묘사 되어 있다.

 

보리수이야기는 태양이 어두운 허공을 비추듯”보리수이야기(2014-10-02)’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이야기이다.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칠일이 경과한 뒤에 그 삼매에서 일어나 보리수 아래에서 나와서 아자빨라니그로나다 나무아래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나무아래에서 홀로 가부좌를 하고 역시 칠일 동안 해탈의 지복을 누리고 있었다. 이때 어떤 바라문이 나타났다.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Atha kho aññataro huhukajātiko brāhmao yena bhagavā tenupasakami. Upasakamitvā bhagavatā sai sammodi. Sammodanīya katha sārānīya vitisāretvā ekamanta aṭṭhāsi.

 

그때 어떤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이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 받은 뒤 한쪽으로 물러나 섰다.

 

(Ajapālakathākathā-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다발, 전재성님역)

 

 

 

Ajapala Nigrodha Tree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후 최초로 만난 사람이 거만한 바라문이라 한다. 여기서 거만한 바라문이라는 말은 ‘huhukajātiko brāhmao’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번역에서는 흥흥거리는 오만한 바라문이라 하였다. 왜 흥흥(huhu)거린다고 하였을까?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huhukajātiko brāhmao: UdA.52에 따르면, 바라문은 자신들의 긍지를 나타내기기 위해 훙 또는 훔(Hu)이라는 소리를 내는 자이다. 부처님은 훔훔하고 말하는 것을 여윈 자이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은 훔의 반복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20번 각주, 율장대품, 전재성님)

 

 

바라문이 훔훔 하는 것은 바라문 특유의 습관이라 한다.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이 훔훔소리를 내는 것은 자신들의 권위와 긍지를 나타내기 위한 소리로 본 것이다. 이처럼 거만함을 뜻하는 말이 (huṅ)이다. 그럼에도 후대 대승불교에서는 훔이라는 말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후훔(hu-hum) 하는 것은 브라만의 긍지

 

(Hu)과 관련하여 ‘Huhuka’  빠알리사전 PCED194를 찾아 보았다. “hu, hu,”하는 것에 대하여 브라만카스트의 긍지라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훔훔 하는 자에 대하여 ‘Huhunka’라 하는데 이는 의성어를 별칭화 한 것이다. 거만한 브라만이 훔훔한다고 하여 후훈까라 이름 붙인 것이다. 후훈까에 대하여 PCED194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Buddhaghosa explains that the brahmin was a ditthamangalika, filled with haughtiness and wrath, and went about uttering the sound ”hu-hum.” hence his name.

 

(Huhunka, 빠알리사전 PCED194)

 

 

붓다고사는 훔훔거리는 자를 딧타만갈리까(ditthamangalika)’라 불렀다. 오만함과 분노로 채워진 자를 말한다. 그런 자들은 늘 후훔(hu-hum)이라는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 소리를 따서 ‘Huhuka’라 한 것이다.

 

양반들이 헛기침을 하는 듯

 

붓다고사의 설명을 보면 마치 조선시대 양반들이 헛기침을 하는 것 같다. 양반들이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에헴하며 헛기침을 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다. 고대인도에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브라만이 자신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후훔(hu-hum)하며 소리를 내었는데 이런 소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의 구분 없이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후훔(hu-hum)하는 소리가 대승불교에서는 가치 있게 여겨졌다는 말이다. 그런 영향이어서일까 옴마니반메훔할 때 (Hum)’이 바로 브라만의 후훔(hu-hum)하는 소리에서 유래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옴마니반메훔에서 의 의미는?

 

옴마니반메훔은 무슨 뜻일까? 인터넷검색을 해 보니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 육자대명왕다라니(六字大明王陀羅尼), 옴 마니 파드메 훔(산스크리트어: ॐ मणि पद्मे हूँ, 한자麼抳鉢訥銘吽) 옴 마니 반메 훔불교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진언이다. 밀교를 비롯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 가운데 하나이다. 한국어에서는 성철 50년 전에 '옴 마니 반메 훔'이 아니라 '옴 마니 파드메 훔'이라고 고쳤으나 현재 전자쪽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1]

 

대승불교의 경전인 '육자대명왕다라니경'(六字大明王陀羅尼經) '불설대승장엄보왕경'(大乘莊嚴寶王經) 등에서는, 이 진언을 부르면, 여러가지 재앙이나 병환, 도적 등의 재난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주장하며, 이 주문의 효과가 적혀있다.[2][3]

 

문자적인 뜻은 ",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티베트인들이 특히 많이 외운다. 보통 티베트인들은 이런 뜻과 상관없이 그냥 많이 외우기만 하면 그 자체로 영험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4]

 

( 마니 파드메 , 위키백과)

 

 

불자들에게 옴마니반메훔이라는 말은 매우 익숙하다. 불자들의 생활경전인 천수경에도 실려 있는 주문이기 때문이다. 문자적으로 , 연꽃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라 한다. 이로 보았을 때 이라는 말은 해석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전승되어 온 대로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훔이라는 말은 율장대품에 따르면 카스트의 정점에 있는 오만한 바라문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때 뱉는 말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불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승불교에서는 옴마니반메훔에 대하여 훔에 대한 것을 보면 육바리밀로 보았을 때 근면이라 한다. 육도로 보았을 때는 지옥이고, 신성의 상징으로서 자비의 품질이라 하고, 희망된 영역으로 보았을 때는 관세음보살의 연화좌의 면전에서라 한다. 그 어디에도 거만한 바라문이 에헴하는 것에서 기원되었다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옴과 훔이 함께 쓰여 훔이라는 말이 대단히 가치 있게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고따마(gotama)라는 말은

 

거만한 바라문이 이제 막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을 보고서 후훔(hu-hum)하였다. 그런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고따마여, 어떻게 해서 바라문이 됩니까? 바라문을 만드는 성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여기서 후훔거리는 바라문의 또 다른 거만함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부처님에게 고따마여(gotama)”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마치 김씨” “박씨하듯이 성을 부는 것이다.

 

불자들이 부처님을 칭명할 때 고따마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이다. 어떤 이는 대승의 부처님과 구별한다고 하여 고따마붓다또는 고따마부처님이라 하는데 이는 실례라 본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이교도들이나 바라문들이 고따마’ ‘고따마하였을 뿐 부처님의 제자나 재가의 신도들은 반드시 세존이시여(bhagavā)”라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후 처음 만난 사람이 후훔하는 거만한 바라문 이었다

 

브라흐마나(brāhmaa)와 브라흐마(brahma)

 

부처님은 거만한 바라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Yo brāhmao bāhitapāpadhammo
Nihuhu
ko  nikkasāvo yatatto
Vedantag
ū vusitabrahmacariyo
Dhammena so brahmav
āda vadeyya
Yassussad
ā natthi kuhiñci loke

 

[세존]

어떠한 사제이든지 악한 원리를 제거하고

훔훔거리지 않고 떫음을 여의고 자제하고,

지혜에 통달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는 자,

세상에서의 융기가 결코 없는 자라면,

이치에 맞게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리.”

 

(Ajapālakathākathā-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다발, 전재성님역)

 

 

이 게송과 동일한 내용이 우다나 니그로다의 경(1-4, Ud3)’에서도 보인다. 게송에서는 두 가지 대조되는 말이 나온다. 브라흐마나(brāhmaa)와 브라흐마(brahma)이다. 여기서 브라흐마나는 사제를 뜻한다.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는 브라만계급을 말한다. 경에서는 후훔거리는 거만한 브라만으로 등장한다. 브라흐마라는 말은 창조신을 뜻한다. 브라만교에서 우주의 창조자이자 제의의 대상을 말한다.

 

브라흐마와 관련하여 게송에서는 청정한 삶의 실현(vusitabrahmacariyo)’이라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느님이라고 번역한 브라흐마라는 말은 청정한 삶을 성취하고 융기가 없는 자에게나 붙여 주는 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융기(ussadā)라는 말은 주석에 따르면, 탐욕의 융기, 성냄의 융기, 어리석음의 융기, 자만의 융기, 견해의 융기 이렇게 다섯 가지 융기를 말한다. 융기를 뜻하는 ussadā라는 말이 ‘abundant; excessive; full of’의 뜻이므로 탐욕 등으로 가득한 자라는 뜻이다. 이처럼 탐진치 등으로 사는 자는 결코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살 수 없다. 그래서 브라흐마(brahma)라는 말이 들어간 명칭을 붙여 줄 수 없음을 말한다.

 

예전의 바라문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브리흐마는 좋은 뜻임을 알 수 있다. 브라흐마짜리야(brahmacariya: 梵行)나 브라흐마위하라(brahmavihara: 梵住)라는 말이 있듯이 브라흐마라는 말이 붙는 것 자체가 원래는 좋은 뜻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브라만들은 극도로 타락해 있었다. 이는 숫따니빠따 바라문의 삶에 대한 경(Sn2.7)에 잘 표현 되어 있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으로서 대규모동물희생제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바라문의 타락상을 말한다.

 

초기경전에는 타락한 바라문과 제관으로서 바라문, 태생과 가문에 입각하여 거만하고 오만한 바라문이 묘사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 제7상윳따의 바라문의 모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옛날의 바라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옛날의 바라문으 청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전의 바라문이 진정한 바라문이라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은 아라한과 동급으로 보았다. 그래서 법구경 바라문의 품을 보면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라 하였는데, 이때 바라문이라는 말은 아라한을 뜻하며 부처님이 재해석한 바라문을 뜻한다.

 

훔훔거리며 떫은 표정을 지을 때

 

게송에서는 태생과 가문에 기반한 거만한 바라문이 잘 묘사 되어 있다. 그것은 훔훔거리지 않고 떫음을 여의고(Nihuhuko  nikkasāvo)”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훔훔거린다(huhuka)’는 것은 거만함을 나타내고, 떫다(kasāva)라는 말은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뜻한다. 그래서 에헴하며 떫은 표정의 바라문이 잘 묘사 되어 있다. 그런 바라문에 대하여 예전의 바라문 처럼 청정한 삶을 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탐진치 등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 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바라문이  고따마여, 어떻게 해서 바라문이 됩니까? 바라문을 만드는 성품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부처님은

 

 

어떠한 사제이든지 악한 원리를 제거하고

훔훔거리지 않고 떫음을 여의고 자제하고,

지혜에 통달하고 청정한 삶을 성취하는 자,

세상에서의 융기가 결코 없는 자라면,

이치에 맞게 하느님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하리.”

 

 

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바라문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불교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처음 만난 사람이 바라문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부처님 당시 지배계급으로서 바라문에 대한 부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바라문과 달리 타락하고 거만하고 무례한 바라문에 대하여 분명히 반대하였음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바라문교를 부정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연기법으로 보았을 때 영원주의를 대표하는 바라문교는 성립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바라문교 사제인 브라흐마나(바라문)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바로 위 게송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의 시작은 바라문의 비판에서 시작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불교는 바라문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2014-10-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