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키치불자의 키치스님에 의한 키치로서의 불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17. 12:04

 

 

키치불자의 키치스님에 의한 키치로서의 불교

 

 

키치(Kitsch)란 무엇인가?

 

키치라는 말이 있다. 매우 생소한 이 말은 불교평론에서 보았다. 2003년 불교평론에 실린 키치로서의 불교라는 글을 통해서이다. 이에 대하여 논문저자는 오늘날의 불교는 키치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문맥으로 보았을 때 부정적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 것일까?

 

키치(Kitsch)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짝퉁이라는 말도 키치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런 키치에 저자는 통속적인 것이라 하였다. 오래 전에 유행하였던 선데이서울과도 같은 것이다. 예술로 따진다면 대량생산되는 명화 같은 것이다. 대중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어서 통속적이고 가볍고 대량소비 될 수 있는 소모품 같은 것이다.

 

저자는 불교키치의 한 예로서 틱낫한의 책을 들었다. 논문이 2003년도에 작성 되었으므로 2002년 당시 틱낫한의 방한에 따라 틱낫한의 책이 크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틱낫한의 책이나 달라이 라마의 책은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제기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불교가 아닐 수도 있다.(진정한 불교가 사실 뭔지도 모르겠지만) 또한 진정한 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본 글의 논지를 해치진 않는다. 본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본래 불교가 무엇이다라는 점이 아니라현대인들에게 불교란 무엇일까에 가깝다. 사족을 달자면 《근본불교》 같은 책이 출판되면 만 권이 안 팔리는 반면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백만 권이 넘게 팔리고 있다. 더군다나 《행복론》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책이 불교에 기초해서 말하고 있다고믿는. 이런 시점에서 일반인들에게 있어 불교란 《근본불교》이기보다는 차라리 《행복론》이 아닐까?

 

(키치로서의 , 각주, 원신연님, 불교평론 2003-12-10)

 

 

논문저자는 원신연님이다. 놀랍게도 그 때 당시 대학생이다. 논문말미에 저자 소개를 보면 고려대학교 철학과 재학중이라고 되어 있다. 대학생이 이정도의 논문을 쓸 정도라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논문의 내용이 대학교수가 쓴 것 못지 않게 알차기 때문이다.

 

불교의 행복론

 

저자는 키치로서의 불교로 행복론을 들었다. 불교의 본질이 행복이 아님에도 행복을 강조하는 것이 대중들의 눈높이 맞춘 것이고 결국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불교의 본질은 행복이 아니라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가르침이 사성제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하여 고생끝 행복시작이라 본다면 이는 통속적이다. 불교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키치로서의 불교라 볼 수 있다.

 

무뉘만 불교인 경우

 

요즘 불교는 키치적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하였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불교의 근본 목적과는 괴리 된 채 몇 가지 요소들만이 따로 떼내어져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뉘만 불교인 경우가 많다. 겉으로는 불교인것처럼 보이지만 자제히 들여다 보면 불교가 아닌 것이다. 그런 예를 TV에서 종종 본다.

 

종편채널에서는 경쟁적으로 자연인을 보여 주고 있다. 산속에서 혼자사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그중 TV조선에 소개 된 자연인은 좀 독특하다. 혼자사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다. 더구나 부부는 모두 삭발하였다. 그리고 승복까지 입고 있다. 거기에다 법명까지 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스님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겉모양만 그럴 뿐 일반사람들이 사는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다.

 

프로소개에 따르면 남자는 60세이다. 40년전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출가한 후 10년이 되었을 때 도저히 대중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맞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다 10여년전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하였다. 이후 건강이 크게 나빠져서 고생하였는데 10년 전 M사에 있을 때 운명의 여인을 만났다는 것이다. 처음 보았을 때 달덩이를 보는 듯 황홀하였다고 하였다. 여인은 남자보다 나이가 4살 적은 56세이다. 둘이 인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을 하고 산지 8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TV조선, 2014-06-12)

 

 

프로를 보면 여자는 남자를 극진히 보살핀다. 산속 이곳 저곳에 약초를 심어 놓고 이를 반찬삼아 밥을 해 주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여자는 남자가 혹시 병이라도 나지 않을까 염려하여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런데 프로를 보면 이들 부부의 모습이 스님들이라는 것이다.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더구나 법명까지 있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스님들이 부부로서 생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프로를 이번에 두 번째 보았다. 종편의 특성상 반복해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승반속으로 살아도

 

스님들이 부부로 사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비구로 살기 힘들어 환속하였다면 머리를 기르며 일반인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부부로 살면서 삭발하고 승복을 입고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인으로 살기 보다 스님으로 사는 것이 더 쉬워서일까?

 

이처럼 반승반속으로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불자들은 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준다.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또 전에 스님이었다는 이유로 스님이라 존중해 준다. 그런데 오래 전에 환속해서 머리를 기르고 일반인 복장을 해도 여전히 스님이라고 불러 준다. 한번 스님이었으면 영원히 스님인 것 같다.

 

탁발하는 스님을 보았을 때

 

TV에서 스님들이 부부로 사는 모습이 전국에 방영되었다. 이를 본 시청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불교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것임에 틀림 없다. 아직까지는 일반사람들에게 스님들은 청정한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든 세대에서는 탁발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 이미지로서 가장 크게 떠 오르는 것이 탁발이다. 지금은 종단에서 승려로서의 품위를 해친다 하여 탁발을 금하고 있지만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는 스님들이 탁발하는 모습을 흔히 보았다. 삿갓을 쓰고 회색승복을 입은 스님이 문앞에 조용히 서 있거나 경을 외우면 어머니는 쌀을 한그릇 퍼담아 주곤 하였다. 이런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아 스님 하면 탁발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다. 이는 긍정적인 이미지이다. 수행자가 걸인처럼 구걸하는 것 그 자체가 무소유와 청정함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방송프로에서는 스님들이 부부로 살며 여보 당신 하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올인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런 프로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불교의 스님들이 다 저런 것은 아닐까 하고 의문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종편채널의 스님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불교를 폄하 하려는 고의적 의도도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런 빌미를 제공한 스님부부에게 문제가 있다. 스님이 아니면서 스님행세를 하면서 스님들과 불자들과 불교에 대하여 안 좋은 이미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특종만 찾아 다니는 방송

 

오늘날 한국불교의 승가를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다.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스님들이 모두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처럼, ‘화장실도 가지 않은 사람들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TV조선에서와 같이 스님부부를 보면 이런 환상은 깨진다. 스님들도 결혼을 하여 부부로서 사는 모습을 보면서 그럴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스님들은 못하는 것이 없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등 세속에서 일반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서슴없이 한다. 이런 스님들을 찾아서 방송하기도 한다. 이렇게 별난 스님들을 대상으로 방송하다 보니 스님들은 의례 그런 사람들인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

 

이는 본질과 어긋난 것이다. 대중적이고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방송사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특종만 찾아 다니고 별종들만 발굴하여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방송사에 놀아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것이 키치로서의 불교이다. 불교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재미위주의 불교를 말한다.

 

방편이라 하지만

 

한국불교가 방송사에서 눈요깃거리로나 제공되는 별종불교가 되었다. 이는 특별한 행위를 하는 스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별종스님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방편이라 한다. 포교를 하기 위하여 방편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 , 그림, 마술, 권투 등 갖가지 방편이 등장한다. 이런 정보를 입수한 방송사에서는 마치 특종이나 한 것처럼 별종스님들에 대한 방송을 내보낸다. 그러나 볼 때 뿐이다. 마치 개그콘서트를 보고 난 후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단지 한번 소비 되고 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통속적인 불교이고 인기영합적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키치로서의 불교이다.

 

율장교육이 안되어 있어서

 

세속에서도 그다지 높은 가치를 부여 하지 않는 것에 올인하는 스님들이 있다. 노래, , 그림 그리기 등과 같은 것이다. 불도를 닦아 수행하기에도 촌음을 아껴야 하고 그 수행력을 바탕으로 포교를 하여 가르침의 대한 갈증을 씻어 주어야 하는 것이 출가자의 본분사이지만, 주의를 기울어도 안될 일에 올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에서 별난스님 또는 별종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그것은 율장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구족계를 받지만 비구계의 내용대로 사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만일 비구계를 준수하고 율장정신으로 산다면 별난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서슴없이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행한다면 이는 비구로서 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가사는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것

 

학생이 학생다워야 하고, 군인이 군인다워야 하듯이 출가자는 출가자다워야 한다. 이는 출가자를 상징하는 승복에서 나온다. 그래서 승복의 권위라는 것이 있다. 그럼에도 스님들이 한낱 방송에서 별종취급 당한다면 이는 승복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다. 불자들이 믿고 따르는 스님들에 대한 이미지를 깍아 내리는 것이 된다.

 

오래 전에 신문기사에 따르면 스님들이 룸살롱 출입까지 하였다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승복을 입고 모텔에 들어 갔다는 고발 기사도 있고, 실제로 술집에서 승복을 입은 스님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승복을 입고 출입을 해서는 안될 곳에 가도 되는 것일까?

 

승복은 출가자의 권위와 같다. 회색승복으로 대표되는 승복은 삭발과 함께 스님을 일반인과 구별시켜 준다. 그럼에도 한국스님들은 승복을 입고 못하는 것이 없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심지어 룸살롱 출입까지 한다.

 

이처럼 무애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장에서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다. 자유롭게 걸림 없이 사는 스님들을 보면 대체로 가사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사를 입지 않기 때문에 걸림 없이 산다고 볼 수 있다. 왜 한국스님들은 가사를 입지 않을까?

 

한국불교에서 가사는 특별한 날에만 입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예불이나 행사가 있을 때만 수하는 것이다. 남방 테라와다처럼 항상 입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걸림 없이 사는 것일까?

 

승복을 바꾸겠다고 하였는데

 

한국스님들은 걸림 없이 산다. 이렇게 걸림없이 사는 것에 대하여 무애행이라 한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스님들 대부분은 무애스님이다. 이런 무애스님의 특징을 보면 승복을 입긴 입었지만 가사를 착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애스님들이 가사를 24시간 착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걸림없이 사는 것을 포기할지 모른다. 가사를 입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리고 마술을 하고 권투를 하고 룸살롱에 가는 것을 주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가사를 항상 착용한다는 것은 결국 계율대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2013 3월에 조계종 종회에 의제개혁특위가 설치 되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상징인 승복에 변화가 예상된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향적스님)은 오늘(320) 193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의제개혁특별위원회 구성을 합의했다.

 

제정스님은 “현재 한국불교에서의 승복은 조선시대 상민 내지 천민의 복장에 가깝다”며 “부처님 율장정신과도 위배되며 시대적 복식에도 뒤떨어진 스님들의 의복을 개혁하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행자다운 의제를 제대로 정비해 위의에 맞고 신심을 증장시킬 수 있는 의제개혁의 연구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제개혁특위 위원장으로는 제정스님이 선출됐다. 특위에는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의 모든 의제를 연구하게 된다. 활동인원은 15인 이내며, 기간은 1년이다.

 

(승복 모양 현대적으로 바뀌나, 불교신문 2013-03-21)

 

 

의제개혁특위에 따르면 현행 승복을 바꾼 다는 것이다. 현행 승복은 조선시대 부터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 형태로서 시대에도 맞지 않고 더구나 율장정신에도 맞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율장정신에 맞는 새로운 가사형태를 연구하여 발표 하겠다고 하였다. 연구기간은 1년이다. 이에 대하여 승가인가 이익단체인가? 율장의 새가사(袈裟) 함께 제2 빅쿠(Bhikkhu)선언을(2013-04-13)’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의제개혁특위가 발족되어 활동한지 일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결과물을 발표 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불교관련 신문사이트를 여러 개 매일 보고 있지만 이 의제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색을 하여 보니 2014 2 11일자 불교신문에 별위원회 현황보고도 관심이다.’라는 기사와 함께 제개혁특별위원회(위원장 제정 스님)’라는 문구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야심차게 출발하였던 스님들 복장 혁명은 물건너 간 것일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의제개혁특위 발족소식을 듣고 상당한 기대를 표시하였다. 그래서 미래의 복, 어떤 모양의 가사(Kasaya)일까? (2013.04.14 1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올린 글에서 미래의 승복은 테라와다불교의 승복과 같은 것이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의 가사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더구나 율장정신에 따라 살기 때문에 계행을 어기는 경우가 드믈다고 한다. 따라서 별난스님이나 별종스님들처럼 본분에서 어긋나는 행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한국에서 새롭게 승복을 제정한다고 하면 테라와다식 가사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기존 한국불교 종단에서 부처님당시 율장의 정신이 담긴 가사모양으로 승복이 바뀔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종교이기 때문에 그 종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승복이 바뀌는 것을 기대하기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차라리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한다면 모를까 기존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 하다.

 

가사를 입는 다는 것은

 

그렇다고 율장정신이 담긴 부처님당시 가사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할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이미 한국에는 다양한 불교전통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한국테라와다불교를 들 수 있다.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승복 역시 남방가사 그대로이다. 이는 부처님당시의 모습과 가깝고 율장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국테라와다불교 빅쿠

서울시청다목적홀(2014-06-14)

 

 

한국에는 한국테라와다불교처럼 자생적인 종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방불교국가에서 직접 전승되고 있는 불교전통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해당불교국가 빅쿠들이 직접 내한하여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자국의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한국불자들도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다. 스리랑카의 담마끼띠빅쿠가 대표적이다.

 

 

 

 

스리랑카 담마끼띠빅쿠

마끼 (EBS, 2014-02-19)

 

 

 

이렇게 한국에는 이미 부처님당시 승복을 입은 빅쿠들을 접하는 것이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 벌로 된 부처님당시의 가사를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의지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벌의 가사로 24시간 산다면 이백여가지에 달하는 계율은 자연스럽게 지켜 지리라 본다.

 

왜 세 벌의 옷으로 규정하였을까?

 

테라와다빅쿠는 옷 세벌로 살아 간다. 이 세벌의 옷이 일상복이자 예불복이자 잠옷이다. 이렇게 24시간 항상 착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탈은 꿈에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부처님이 그랬듯이 항상 부처님처럼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 벌의 옷에 대한 규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이 라자가하에서 베살리로 유행할 때의 일이다. 이 때 부처님은 많은 수행승들이 많은 옷보따리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가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어리석은 수행승들이 사치에 빠졌음을 알았다. 그래서 의복에 대한 규정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대품에 따르면 옷감과 관련하여 결계를 정하고 한계를 정하면 어떨까?”하고 생각하였다.

 

부처님은 베살리로 가는 도중에 고따마까라는 탑묘에서 밤을 보냈다. 겨울이어서인지 노천에서 추위가 심했다. 경에 따르면 추운 결겨철 팔일제 기간 중에 눈 내리는 날에라고 표현 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인도에서 가장 추운 계절에 그것도 눈내리는 날에 옷 한벌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두겹, 세겹을 껴입었다. 그것도 모자라 하나 더 껴 입어서 네 번째 옷을 껴 입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제서야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몸소 체험한 바에 따르면 추위와 관련하여 세벌의 옷을 허용하였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그러자 나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훌륭한 가문의 아들들이 이 가르침과 계율가운데 출가했지만, 이 추위에 쉽게 영향받고 추위에 두려워 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조차도 세벌 옷이면 견뎌낼 수 있다. 내가 수행승들의 옷감과 관련하여 결계를 정하고 한계를 정하되, 세 벌 옷을 허용하면 어떨까수행승들이여, 세 벌 옷 즉, 두겹의 대의, 한 겹의 상의, 한 겹의 하의를 허용한다.”

 

(율장대품, 8장 의복의 다발, 세 벌 옷에 대한 규정2,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몸소 추위를 체험해보시고 세 벌의 옷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결정하였다. 그래서 이후 세 벌의 옷으로만 지내게 된 것이다.

 

세 벌 옷에 대한 악용사례

 

그런데 율장대품에 따르면 악용하는 사례가 발견된다. 부처님이 세 벌의 옷으로 한정 하자 어떤 수행승은 세 벌 옷으로 마을에 들어가고, 또 다른 세 벌 옷으로 승원에서 지내고, 또 다른 세 벌 옷으로 목욕하러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총 아홉 벌이 된 것이다. 이런 악용사례는 옷 뿐만이 아니다. 샌들 등 수 없이 많다.

 

율장에는 악용사례가 낱낱이 기록 되어 있다. 이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빠짐 없이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장은 고대인도의 생활방식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한다.

 

부처님은 세 벌 옷에 대한 악용사례를 발견하고 또 다른 조치를 하게 된다. 그것은 수행승들이여, 여분의 옷을 지녀서는 안된다. 지닌다면, 원칙에 따르 조치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 하였다. 이는 속죄죄를 말한다. 어떠한 수행승이라도 여분의 옷을 비축하면 상실죄를 포함하여 속죄죄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제정된 것이 율장이다.

 

부처님의 미적 의식

 

세 벌 옷과 관련하여 재미 있는 일화도 있다. 부처님이 라자가하 시의 남쪽지역인 닥키나기라지방에서 잘 정리된 네모난 모양의 밭을 보고서 힌트를 얻어 이를 옷에 적용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그대는 수행승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옷을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조각을 만들고 기워야 할 곳들을 깁되, 수행자에게 적합하고, 도적들이 부러워 하지 않게 할 정도로 현명하고 크게 슬기롭다. 수행승들이여, 잘린 조각의 외투, 잘린 조각의 상의, 잘린 조각의 하의를 허용한다.”

 

(율장대품, 8장 의복의 다발, 세 벌 옷에 대한 규정2, 전재성님역)

 

 

해제글에 따르면 전재성님은 부처님의 미적 의식이 엿보인다고 하였다. 이는 지바까의 청원을 받아 들인 것에서 시작된다. 초창기에는 분소의를 입던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분소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일반사람들이 입던 옷으로 확대하였다. 그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부처님의 시의인 지바까 빳조따왕으로부터 최상의 천을 하사 받자 이를 부처님에게 드리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부처님은 시의로부터 천을 수요하였다. 이후 수행승들은 반드시 분소의만 고집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은 네모난 밭을 보고서 여러 조각의 천을 보기 좋게 네모나게 만든다면 좋을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본래 분소의의 효과도 있을 것이라 본다. 더구나 경에서는 도둑이 탐을 내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수행자가 고급천으로 옷을 입었을 때 보기에도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둑의 타겟이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세 벌의 옷은 네모난 헝겁을 기워 만든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번에도 용두사미로?

 

조계종 의제개혁특위에 따르면 율장정신에 따라 새로운 승복을 만들 것이라 하였다. 율장정신에 따른다면 율장대품에 표현 되어 있는 의복의 다발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어쩐 일인지 일년이 훨씬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연구성과를 발표 하지 않고 있다.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용두사미로 끝나고 마는 것일 것?

 

가사는 출가자만 입나?

 

한국의 스님들은 여간 해서는 가사를 입지 않는다. 법회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입지 않고 그대신 회색승복으로 지낸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것이든지 서슴없이 하는 것 같다. 만일 율장정신대로 24시간 가사를 입고 지낸다면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사는 반드시 출가자만 입는 것일까?

 

BTN특집프로에 법륜스님과 함께 하는 인도성지순례가 있다. 이 프로를 보면 320명이나 되는 순례자들이 가사를 입고 있다. 이번 순례는 정토행자들이 참여 하는 특별순례라 한다. 그런데 좀 특별한 장면이 보였다. 그것은 재가불자들이 가사를 수하는 장면이다. 부처님이 초전(初轉)’을 한 사르나트에서 수계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순례단은 이 뜻 깊은 성지에서 법륜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수계를 받았다. 이번 순례기간동안 만큼은 출가를 했다는 마음으로 부처님의 참제자가 되어 오계를 지킬 것을 맹세하며 호계합장하며 연비를 받았다.

 

(<특집>2014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인도성지순례 1, 불교TV 2014-07-02)

 

 

 

 

성지순례에 참가하는 전원이 수계를 받은 것이다. 그것은 오계에 대한 것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계이다. TV 를 보면 연비를 받는 장면도 보여 준다. 그런데 특이 하게도 수계자 모두에게 노랑가사를 나누어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가사를 수하고 나니 마치 출가자처럼 보인다. 이후 순례하는 장면을 보면 노랑가사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순례가 모두 끝나 가사를 반납하기 전까지 계속 된다. 이렇게 본다면 가사 입는 것이 출가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가사를 수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행에 어긋나는 행위를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출가자가 가사를 수 하지 않고 산다고 하면 그 순간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반인과 똑 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불교는 키치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흔히 무늬만 불자라는 말이 있다. 불교를 자신의 종교라고 하지만 일년에 한 두 번 절에 다니는 사람들을 말한다. 부처님오신날 절에 가서 등 한번 달아도 불자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절에 오래 다녔다고 하여 불자라 볼 수 없다. 절에 10, 20, 30, 심지어 평생 다녀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면  이 역시 무뉘만 불자라 볼 수 있다.

 

스님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머리를 깍고 회색승복을 입었지만 하는 행위는 일반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면 무뉘만 스님이다. 노래하고 춤추는 등의 행위를 한다면 가수나 무용가이지 스님이 아닌 것이다. 이는 숫따니빠따에서 행위에 따라 농부도 되고 기술자자가 된다고 하였듯이 머리를 깍은 스님일지라도 행위에 따라 달리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무뉘만 불자이거나 무뉘만 스님의 경우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통속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불교평론에서 원신연님은 자신의 삶이 보다 만족스럽기를 원하지 삶을 내던진 채 고독하고 힘들게 삶의 본질을 묻고자 하진 않는다.”라 하였다. 불교본래의 목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대신 욕망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본다면 고생끝 행복시작을 의미하는 듯한 이고득락이나 행복론역시 무뉘만 불교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불교는 키치적으로 소비되고 있다.라고 하였다.

 

키치(Kitsch)는 전에 들어 보지 못한 새로운 용어이다. 영어단어 키치는 우리말로 저속한, 천박하게 장식한, 저속한 작품이라고 번역된다. 또 다른 말로 천박하고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본질을 외면한 채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불교는 짝퉁불교이고 이는 다름이난 키치불교라 볼 수 있다.

 

키치불자의 키치스님에 의한 키치로서의 불교

 

누구나 행복을 말한다. 어느 종교이든 어느 사상이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은 적이 없다. 불교 역시 행복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여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 볼 수 있을까?

 

불교의 본질은 사성제의 가르침으로 설명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고생끝 행복시작일까? 불교에서는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행복도 알아차려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면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성제의 멸성제에서도 표현 되어 있듯이 괴로움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의 실현이다. 따라서 괴로움으로 벗어나고 윤회를 종식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렇게 하려면 팔정도를 닦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의 목적이 행복이라거나 이고득락이라 한다면 다른 종교나 사상과 다를 바 없다. 행복론은 불교의 전매특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고득락이라거나 행복론을 주장하는 것은 키치에 해당된다. 이는 다름 아닌 짝퉁이다. 그래서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행복론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로서 인기영합적인 저속한 모조품 또는 대량 생산된 싸구려 상품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통속불자의 통속스님에 의한 ‘통속불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를 좀더 고상하게 영어로 표현한다면 키치불자의 키치스님에 의한 키치로서의 불교가 된다.

 

 

 

 

 

 

2014-07-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