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하안거를 폐지해야

담마다사 이병욱 2014. 6. 27. 14:30

 

 

하안거를 폐지해야

 

 

 

조선민족에게는 공산주의가 체질에 맞는다고

 

결국 문창극국무총리후보가 자진사퇴하였다. 후보자로 있던 18일간 온 나라가 떠들썩 하였는데 그것은 문후보의 친일관련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기독교적 사상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래서 교회동영상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문창극후보가 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준 말이 있다.  그것은 ‘DNA’이다. 문후보는 조선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 지고 이게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독교의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조선민족은 게으른 민족이어서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 이를 일깨워 준 것이 근면한 기독교정신이라는 것이다. 또 문후보는 이처럼 게으르고 일하기 싫은 조선민족에게는 공산주의가 체질에 맞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하기 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 살기를 조장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문후보자의 발언에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불교계에서도 사퇴성명서가 나왔다. 특히 조계사신도회에서는 대웅전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할 수 없는 역사관과 비뚤어진 종교관을 가지고 어떻게 공정한 국정을 펼쳐나갈 수 있을지 우려 된다고 성토했다. 이처럼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곳이 불교계이다. 그러나 종편채널에서 보수논객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와 다르다. 교회에서는 모두 통용되는 말이라 한다. 그러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문창극후보자의 발언에 대하여 우리사회에서는 극과 극의 반응을 보였다.

 

스님들 쓸데없는 짓 말고 예수 믿으라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문창극후보와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기독교적 사고방식에 따른 것이다. 특히 미국의 종교라 불리우는 기독교의 청교도적 사고방식이다. 이와 같은 사고에 따르면 게으른 것은 죄악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번성하는 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교도적 사상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신자유주적 자본주의 열풍이 있었다.

 

기독교인들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불교는 이해하지 못할 종교가 될 것이다. 출가자들이 일을 하지 않고 산속에서 놀고 먹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개그맨보다 더 웃기다는 장경동목사는 스님들 쓸데없는 짓 말고 예수 믿으라(2008-08-21)”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다 못 산다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런 발언의 배경에는 출가자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마 스님들이 산중에서 하릴없이 노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돈을 벌어 음식을 사야지 뭐하는 짓인가?”

 

청교도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누구나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게으르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커다란 죄악으로 보았다. 문창극 전후보나 장경동목사 역시 이와 같은 기독교적 사상에 따라 발언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이런 사고 방식은 걸식자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지난 2011년 팔만대장경 특집다큐로 제작되었던 다르마 2치유편을 보면 영국에서 탁발수행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적 사고방식이 뿌리깊게 남아 있는 영국에서 두 명의 탁발수행승을 대하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이에 대하여 탁발수행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93년에 수계식을 한 다음 발우를 받았어요. 그리고 마을로 탁발을 다니기 시작했죠. 영국사람들은 재미있는 게 어떻게 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못 본척하길 잘해요. 우리가 발우를 들고 서 있으면 많은 분들은 그냥 지나가세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주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러면 음식을 얻으려고 왔다고 말하죠. 돈은 안 받겠다고 하면 당황하실 테니까 감사하지만 음식을 구하고 있다고 대답하죠.

 

때로는 이렇게 얘기 하는 분도 계십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음식을 사야지 뭐하는 짓인가?” 그럴 때 매우 따뜻한 마음으로 그분의 염려에 적절하게 답하려고 노력합니다.

 

 

 

출처: 다르마 2 치유 111016 HDTV G3

 

 

영국 아마라바티 불교사원의 빅쿠니의 말이다. 두 명의 빅쿠니가 영국의 도시로 탁발을 나갔는데 사람들은 갖가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장면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는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고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햐였다고 한다. 이는 청교도정신으로 무장된 영국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음식을 사야지 뭐하는 짓인가?”라고 꾸중하였다는 것이다.

 

놀고 먹는 것에 대하여

 

대부분 놀고 먹는 것에 대하여 부끄러워 한다. 부모에게 빌붙어서 사는 사람을 등골브레이커라고도 하는데, 이는 부모가 대학교육까지 다 시켜 주었음에도 자립하지 못하고 놀고 먹는 이들에 대하여 붙여 주는 명칭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사회에서도 게으르고 남에게 의존하는 것은 커다란 죄악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문창극 전후보의 ‘DNA이나 장경동목사의 스님비하발언이 나왔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대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아마 스님들이 놀고 먹는다고 여기는 것이라 본다. 실제로 그럴 오해의 소지는 충분히 있다. 산중에서만 사는 스님들이 도시에서 하는 일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경우 사람이 사는 곳에서 지역의 주민들과 끊임 없이 소통하려 하는데, 스님들은 깊은 산중에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는 것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목사들이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불자로서 스님들이 산중에서만 사는 것에 대하여 비판을 많이 하였다.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다 보니 지역에 사실상 불교가 없는 것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역기반이 없는 불교는 결국 뿌리가 없는 것과 같아서 한국불교는 한세대만 지나면 소수종교로 종교로 전락 될 것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산중에서만 살지 말고 저자거리로 나와서 지역주민들과 소통할 것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스님들은 여전히 산중에서 나올 줄 모른다. 그런 이유로는 절이 대부분 산중에 있기도 하지만 일년에 두 차례 있는 안거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두 차례 안거는 타당할까?

 

불교에서 안거가 있다. 율장에 따르면 인도에서 우기에 함께 모여 정진하는 것으것부터 시작 되었다. 그러나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래 되면서 기후특성상 하안거와 동안거 이렇게 일년에 두 차례 안거를 지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두 차례 안거는 타당한 것일까?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두 차례 안거를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교사전에 따르면 여름은 너무 덥고 겨울은 너무 춥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돌아다니기 힘들기 때문에 한 곳에 모여 수행정진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불교에서 두 차례의 안거기간을 합하면 6개월이 된다. 일년 중 반은 절에서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안거와 안거사이에는 해제기간이 있다. 3개월로서 봄과 가을에 해당된다. 그래서 해제가 되면 스님들은 만행(萬行)’을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만행이란 만가지 행을 뜻하며 여러 곳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닦는 온갖 수행을 말한다. 또 만행에 대하여 구름가는대로 물흐르는대로 떠 돈다고 하여 운수행각 (雲水行脚)’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한국불교에서는 일년에 두 차례의 안거와 만행이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없을 것이다. 3개월 안거하고 이어서 3개월 만행하는 식으로 보내면 도시에서 포교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역에 거주하면서 계획적으로 포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스님들은 산중에서만 산다. 저자거리에 불교가 없는 이유도 일년에 두 차례 있는 안거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하안거를 폐지해야

 

어떤 스님은 현행안거에 대하여 개선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일년에 두 차례 있는 안거를 한번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줄인다면 하안거가 될 것이다. 동안거는 추워 때문에 모여 산다고 하더라도 하안거의 당위성은 찾아 보기 힘들다. 더무 더워서 돌아 다니기 힘들다든가 여름에 돌아 다니면 벌레를 밟아 죽일 염려가 있다는 것은 한국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안거폐지론을 주장한다.

 

하안거를 폐지하면 남는 9개월 동안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거리에 나가 포교를 할 수도 있고 자원봉사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원봉사에 대하여 자신의 경계를 시험해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좋은 공부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노인요양소나 말기암환자들이 있는 곳에서 봉사한다면 산중에서 공부하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이런 이유로 하안거를 폐지해야 하고 동안거 한번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안거가 많다는 것은

 

한국불교에서 고위직 스님을 뽑는 기준이 있다. 그것은 승랍안거이다. 교계신문에 따르면 방장은 선교율을 겸비한 승랍 40년 이상으로 20안거 이상을 성만한 본본종사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외 에도 주지가 되려면 최소한 2안거 이상이야 된다고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의 이력에 있어서 안거수가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안거기준에 대하여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다. 안거가 많다는 것은 무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라 한다. 한국불교에서는 깨닫기 위하여 화두를 들고 안거에 들어 가는데 10, 20, 30, 평생 안거에 들어간다면 결국 깨닫지 못한 것을 자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능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안거수가 많다고 하여 그다지 자랑할 것이 못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안거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안거가 시작 된 인연

 

최근 율장 두 권을 구입하였다. 전재성박사가 빠알리율장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들이 어떻게 생활 하였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다. 그 중에 안거에 대한 것이 있다.

 

율장대품에 안거의 다발이 있다. 이 안거의 다발을 읽어 보면 한국불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안거의 개념과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가장 먼저 부처님 당시 안거는 오로지 한차례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우기 3개월 동안 한군데 모여서 수행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안거가 시작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율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때 존귀한 부처님께서는 라자가하 시의 벨루바나 숲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공원에 계셨다. 그런데 당시에 세존께서는 수행승들에게 안거에 대하여 아직 시설하지 않아서, 수행승들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우기에도 유행을 다녔다.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

 

[사람들]

어찌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우기에도 유행을 다니며, 곡식과 풀을 짓밟고, 하나의 감관이 있는 자의 목숨을 해치고, 많은 작은 생명의 목숨을 죽인단 말인가? 저 이교도들도 그 가르침이 악하더라도 안거를 지키려고 하고 준비하려고 하고, 저 새들도 나뭇가지 끝에 둥우리를 짓고 안거를 지키려고 하고 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수행자 싸끼야의 아들들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우기에도 유행을 다니며, 곡식과 풀을 짓밟고, 하나의 감관이 있는 자의 목숨을 해치고, 많은 작은 생명의 목숨을 죽이고 있다.”

 

수행승들은 그 사람들이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하는 것을 들었다. 그래서 세존께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것으로 인연으로 그것을 기회로 삼아 법문을 설하고 수행승들에게 말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안거에 드는 것을 허용한다.”

 

(율장대품, 3장 안거의 다발, 1 안거의 인연)

 

 

안거가 시작 된 인연을 보면 비난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인도에는 우기, 건기, 혹서기 이렇게 세 계절로 구분된다. 경에서는 우기, 여름, 겨울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와 달리 여름이나 겨울이 아닌 우기에 안거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작은 생명의 목숨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유행 중에 길거리에서 무심코 작은 벌레 등 생명을 밟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비난 받은 것이다. 더구나 이교도들도 우기 때 만큼은 돌아 다니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부처님은 안거를 허용하게 된다.

 

안거의 근본사상은 무엇인가?

 

부처님은 이교도의 좋은 점인 안거를 받아 들이게 되었다. 이후 우기 3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였는데, 이런 우기안거의 근본사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식물과 동물에 대한 비폭력불상해에 기인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식물과 동물에 대한 배려와 사람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안거가 시작 되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안거의 근본사상은 생명존중에 있는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 안거는 단지 겨울의 추위와 여름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함께 모여 살고, 화두를 들며 수행정진하는 것으로 변질 되었다. 더구나 요즘 선방의 경우 냉난방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수행정진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더구나 일년에 두 차례나 시행 되고 있어서 일년에 6개월 안거에 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일년에 6개월 안거에 들면 전법은 언제 할 것인가?

 

안거중이라도 재가자가 요청하면

 

사람들의 비난에 따라 안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전법에 어려움이 생겼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처음부터 안거의 시기를 우기 전체에 고정시킨 것이 아니라 한다. 우기 사개월 간 지속하는 우기 가운데 선행 삼개월이나 후행 삼개월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안거를 하도록 그 시기를 조절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률적으로 날자를 정한 한국의 안거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더구나 긴급한 볼 일이나 국가적인 일이 생기면 안거를 앞당기거나 연기 하는 등 탄력적으로 적용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잠정적으로 안거를 파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사원의 준공식이나 재가신자 자녀의 결혼, 병이들어 경의 송출이 필요할 때 등을 말한다. 이럴 경우 칠일 안에 해결하고 돌아 와야 한다. 이 중 한 가지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여기 재가의 남자신자가 자신을 위하여 주택을 건립했거나누각을 건립했거나경행당을 건립했거나혹은 아들이 결혼하거나병이 들었거나, 잘 알려진 경을 송출하려 한다. 만약 그 수행승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존자들이여, 오십시요. 이 경이 사라지기 전에 이 경을 배우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존자들이여, 오십시요. 제가 보시를 하겠습니다.  저는 가르침을 듣고 수행승들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칠일 안에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파견되면, 가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서는 안된다. 칠일안에 돌아와야 한다.

 

(율장대품, 3장 안거의 다발, 5 안거중 여행)

 

 

경을 보면 재가자가 요청하면 안거중이라도 여행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단 칠일안에 해결 될 수 있는 일을 말한다. 재가자의 주택건립에 따른 축원이나 수행처 준공과 관련된 행사 등을 말한다. 더구나 재가자 자녀의 결혼에도 요청이 있으면 참석하여 가르침을 펼쳤고, 병들어 임종에 이르렀을 때 도 경의 송출을 위해 여행 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며 우기 기간 중의 안거라 하여 일체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오로지 한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음을 말한다. 이런 점은 한국불교의 안거와 매우 비교된다. 스님들은 한번 안거에 들면 산문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거는 사원에서만 할까?

 

우리나라의 경우 안거를 할 때 반드시 절에서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율장대품에 따르면 반드시 사원에 한정 되는 것은 아니다. 외양간에서 안거에 들 수 있고 비가 오지 않는 사막에서 카라반과 이동 중에도 안거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비를 피해 배를 타고 여행하며 안거에 들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라반과 배를 타고 안거에 들게 된 인연은 다음과 같다.

 

 

한때 어떤 수행승이 우기가 가까이 오자 카라반과 함께 가고자 했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카라반 가운데 안거에 드는 것을 허용한다.”

 

한때 어떤 수행승이 우기가 가까이 오자 배를 타고 가고자 했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배 안에서 안거에 드는 것을 허용한다.”

 

(율장대품, 3장 안거의 다발, 12 안거의 입지조건)

 

 

이처럼 부처님은 그때 그때 마다 상황을 고려 하여 탄력적으로 안거를 허용하였다.

 

허용되지 않은 안거의 입지조건

 

그러나 허용되지 않은 안거의 입지조건도 있다. 그곳은 나무의 동혈이나 노천, 화장터의 영안실, 천막이나 토관 등이다. 이 중 천막 아래서 안거를 드는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때 수행승들이 천막아래에서 안거에 들었다.

사람들이 험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했다.

 

[사람들]

마치 소치는 자들과 같다.”

 

세존께 그 사실을 알렸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천막에서 안거에 들어서는 안된다. 들면 악작죄가 된다.

 

(율장대품, 3장 안거의 다발, 12 안거의 입지조건)

 

 

마치 목동들처럼 천막에서 안거를 든 수행승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사람들이 소치는 사람같다고 비난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천막에서 안거에 드는 것을 금하고 악작죄를 짓는 것이라 하였다. 악작죄는 이전에 잘못된 행위를 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안거를 해서는 안될 곳이 일곱 곳에 달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금하는 이유

1

나무의 동혈

악귀의 종자, 악작죄

2

나무의 가지 위

동물사냥꾼, 악작죄

3

노천

악작죄

4

와좌구 없이

악작죄

5

영안실

시체를 태우는자, 악작죄

6

천막 아래에서

소치는 자들, 악작죄

7

토관안에서

이교도들, 악작죄

 

 

 

왜 위와 같은 곳에서 안거를 들면 안된다고 하였을까? 공통적으로 수행승의 품위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수행승이 있어서는 안될 장소에 있었을 때 사람들이  험책하고 분개하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놀고 먹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두 가지 이유

 

보통불자의 눈에는 스님들이 놀고 먹는 것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가장 첫 번째 요인으로 도시에 사람 사는 곳에 불교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 교회십자가는 넘쳐 나지만 한국에서 1위의 교세라는 불교의 절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절은 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산중에 사는데 산중에 있는 절은 스님들의 수행공간이자 동시에 주거공간이다. 이처럼 산중에서만 살기 때문일까 저자거리에는 절이 없다. 이는 스님들의 본분이라 볼 수 있는 포교를 하지 않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과 소통없이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와 함께 도인처럼 살아 가는 스님들이 할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는 것처럼 비추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로스님 중의 한분은 한국불교에 대하여 삼무(三無)’현상이 심화 되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무위, 무위도식, 무식이다. 아무 하는 일 없이 먹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식하게 되어 대중과 점점 멀어짐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장경동목사는 스님들 쓸데없는 짓 말고 예수 믿으라라 하여 불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경우도 있다.

 

스님들이 놀고 먹는 것으로 비추어지는 두 번째 이유는 안거에 있다고 본다. 일년에 두 차례에 있는 안거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산에서 사는 것이나 다름 없다. 3개월 안거하고 3개월 만행하는 식으로는 지역에 불교를 뿌리내리게 할 수 없다. 그저 구름가는대로 물흐르는대로 떠 돈다고 하여 운수행각 (雲水行脚)에 지나지 않는다.

 

안거는 한번으로 족하다

 

산중에서만 사는 스님, 그리고 일년에 두 차례 안거에 드는 스님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보통불자가 불편하게 느낄 정도라면 일반사람들은 반감을 가질 지 모른다. 그것은 놀고 먹는 것으로 비추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사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적대적으로 비칠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이번 문창극후보자의 게으른 DNA’와 조선민족에게는 공산주의체질이 맞는다는 등의 말에서도 감지 할 수 있다. 그리고 KBS다큐 다르마에서 영국의 탁발자에 대하여 부끄러운 줄 알아라.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어 음식을 사야지 뭐하는 짓인가?”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통사람들는 놀고 먹는 것에 대하여 죄악시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에도 스님들은 오로지 산중에서만 산다. 사람사는 곳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저런 험한 말을 듣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하안거를 폐지해야 한다고 본다. 한국실정에서는 동안거 한번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당시에도 안거는 3개월을 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안거중이라도 재가자가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 가서 소통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일년에 두 차례 안거는 부당한 것이다.

 

 

2014-06-2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