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 행복(parama sukha)이란? 무짤린다 용왕이야기
성도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는 무짤린다이야기(Mucalindakathā)이다. 첫 번째의 보리수이야기와 두 번째의 아자빨라보리수이야기에 이어 세 번째로 무짤린다나무 아래 에서 일어난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칠일을 경과한 뒤에 삼매에서 일어나 아자빨라니그로다나무아래에서 나와서 무짤린다 나무 아래로 다가 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무짤린다 나무아래에서 홀로 가부좌를 하고 칠일 동안의 해탈의 지복을 누리고 앉아 있었다.
(Mucalindakathā –무짤린다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전재성님역)
율장에 등장하는 무짤란다이야기는 용왕 무짤린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루벨라지역의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의 옆에 있던 나무의 이름을 무짤린다라 한 것이다.
무짤린다나무는 보리수인가?
그러나 무짤린다나무가 보리수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는 두 번째로 등장하는 아자빨라니그로다와 네 번째 나무로 등장하는 라자야따나나무도 마찬 가지이다. 다만 첫 번째로 등장하는 나무는 보리수임이 틀림 없다. 그것은 율장대품에 따르면 첫 번째 나무에 대하여 “세존 께서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직후, 우루벨라 지역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계셨다.”고 함으로서 분명히 보리수(bodhirukkha)임을 밝히고 있다.
신화적 이야기
무짤린다이야기와 관련하여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Tena kho pana samayena mahā akālamegho udapādi; sattāhavaddalikā sītavātaduddinī.
Atha kho mucalindo nāgarājā sakabhavanā nikkhamitvā bhagavato kāyaṃ sattakkhattuṃ bhogehi parikkhipitvā upari muddhani mahantaṃ phaṇaṃ karitvā aṭṭhāsi: "mā bhagavantaṃ sitaṃ, mā bhagavantaṃ uṇhaṃ, mā bhagavantaṃ ḍaṃsamakasavātātapasiriṃsapa4samphasso'ti.
그런데 그때 아닌 큰 구름이 일어나 칠일 간 비를 내리고 찬 바람이 부는 흐린 날이 계속 되었다. 그러자 용왕 무짤린다가 자신의 궁전에서 나와서 ‘한기도 세존을 헤쳐서는 안된다. 열기도 세존을 헤쳐서는 안된다. 등에, 모기, 바람, 더위, 뱀과의 접촉도 세존을 헤쳐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하며 세존의 몸을 똬리로써 일곱 번 감아올리고 머리 위에 크나큰 후드를 펼치고 섰다.
(Mucalindakathā –무짤린다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전재성님역)
성도와 관련하여 세 번째 이야기를 보면 신화적 내용이 등장한다. 그것은 용왕 무짤린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칠일 간 비가 내리고 찬 바람이 부는 등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 났을 때 무짤린다용왕이 부처님을 보호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용왕이 부처님을 일곱 번 감아 올려서 한기와 열기로부터 보호하고, 더구나 비와 햇볕으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부처님 머리 위에는 후두(덥게)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몸이 감긴 모습은 보이지 않고
용왕으로 몸이 감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이에 대하여 ‘Mucalinda’를 키워드로 검색하여 보니 다음과 같은 사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진은 보드가야에 있는 무짤린다상이다. 호수 중앙에 명상의 부처님을 용이 자신의 몸으로서 보호 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세존의 몸을 똬리로써 일곱 번 감아올리고(bhagavato kāyaṃ sattakkhattuṃ bhogehi parikkhipitvā upari)”라는 구절에 대한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용왕이 후드를 만들어 보호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불교와 베다시대의 민속이 결합되어
경에서 무짤란다 용왕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신화적인 이야기에 대하여 다음과같은 각주가 보인다.
mucalindo nāgarājā: 한역에서는 용(龍)이라고 즐겨 번역하는 나가(nāga)는 일반적으로는 인도 민속신앙에서 바다나 강이나 연못에 살며, 코브라와 같은 뱀이나 코끼리 등의 모습을 취하기도 하는 반신반인적 존재이다. 거기서 ‘나가’는 숨겨진 보물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용왕 무짤린다는 무짤린다 나무 근처의 연못에 거주했다.
(29번 각주, 율장대품, 전재성님)
한역으로 용이라 번역되는 나가는 반신반인적 존재라 한다. 이는 인도신화에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상윳따니까야 3권 828번 각주에서 용이나 금시조, 건달바에 대하여 “불교와 베다시대의 민속이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하였다.
회의론자들의 말대로 하면
상윳따니까야 56개에 달하는 주제중에서 신화적인 내용도 많다. 대표적으로 용의 모음(S29), 금시조의 모음(S30), 건달바의 모음(S31), 구름에 사는 하늘사람의 모음(S32)을 들 수 있다. 이 네 가지 주제는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면 신화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각각 지은 업의 종류에 따라서 다르게 태어나는 상이한 부류들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경전에 포함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회의론자들은 후대에 편집 되었다거나 부처님의 직설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품을 걷어 내듯이 신화적인 이야기, 초월적 이야기를 걷어 내자고 한다. 그래서 사성제나 팔정도, 십이연기 등과 같은 근본 가르침만 취하면 될 것이라 한다.
회의론자들의 말대로 하면 방대한 초기경전은 한권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놓치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방편으로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신화적이라 하여 내친다면 불교는 철학화 될 것이다. 종교적으로 기능을 상실하고 단지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학문이 될 것이다.
네 종류의 신화적 이야기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한 수 많은 이야기는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 의미 없는 생명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처님이 비록 신화적인 이야기를 하였을지라도 이면에는 심오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용왕이나 금시조, 건달바, 구름신 등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최기경전에 등장하는 네 종류의 신화적 이야기에 대하여 표로 요약하였다. 상윳따니까야 3권 해제글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No |
구 분 |
내 용 |
비 고 |
1 |
용 Nāga |
1) 용은 뱀처럼 생긴 강력하고 신비적인 동물로 히말라야 산이나 지하세계이나 심해세계에 사는 존재. 2) 그것들은 감추어진 보물을 얻어 인간에게 이익을 주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 3) 그들은 일시적이지만 지상에 출현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경우가 있음, |
-선악이중성 -사대왕천의 지배(서쪽) |
2 |
금시조 Supaṇṇa |
1) 가루다와 일치하는 금시조는 용들의 교활한 적 2) 금시조는 새김이 없는 용을 급습하여 붙잡아 삼켜 버리는 맹조류 |
선악이중성 |
3 |
건달바 Gandhabbakāya |
1) 천상의 음악가로 묘사되어 부드러운 이미지 2) 수신(樹神)으로 향기로운 식물에 사는 요정과 일치 |
-선행 -사대왕천의 지배(동쪽) |
4 |
구름에 사는 하늘사람 Valāhaka |
구름에 사는 신 |
선행 |
네 종류의 신화적 존재를 보면 천상의 존재는 아니다. 이에 대하여 해제글에 따르면 “이 모든 존재들은 인간과 낮은 하늘나라의 중간에 사는 존재로 여겨진다”라고 하였다. 인간 보다는 수승하지만 그렇다고 욕계나 색계, 무색계에 사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존재들은 많은 나라의 문화나 신화속에서도 등장한다.
선악이중성을 갖는 나가(Nāga :용)
네 종류의 초월적 존재 중에 불자들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는 ‘나가(용)’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는 나가에 대한 묘사가 매우 많이 등장한다. 이처럼 친근한 이미지의 나가는 한자문화권에서는 ‘용’으로 묘사 되어 있다.
한자문화권에서 용은 긍정적 이미지이다. 그러나 나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 만은 아니다. 사악한 이미지로서의 묘사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난도빠난다(Nandopananda)용왕 길들인 이야기(2011-03-03)’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초기경전에서 용에 대한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 두 가지가 공존한다. 이는 동양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된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선악이중성을 갖는 것이 용이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수행승이여, 여기 알에서 어떤 용들이 이와 같이 ‘우리는 일찍이 신체적으로 선악행을 사고 언어적으로 선악행을 하고 정신적으로 선악행을 하였다...(S29.3)”라고 말한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상윳따니까에 따르면 선악행으로 태어난 것은 용과 금시조 두 종류이다. 나머지 건달바와 구름에 사는 하늘사람은 선행을 하여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변신에 능한 용
초기경전에 묘사된 용은 변신에도 능하다. 일시적이지만 지상에 출현하여 인간의 형상을 취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율장대품에서 용이 비구로서 승단에 출가한 사건이 잘 말해 준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용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승단에 출가하였다. 이렇게 출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용은 “내가 어떠한 수단으로 용으로서의 출생에서 벗어나 빨리 인간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을까?(Vin.I.86-87)”라고 의문한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출가하려면 인간임을 확인 받아야
율장대품에 따르면 용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출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구족계를 받는 과정에서 신분이 노출되고 말았다. 이 부분에 대한 율장대품의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래서 그 용은 바라문 청년의 모습으로 수행승에게 다가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수행승들은 그를 출가시키고 구족계를 주었다. 그때 그 용은 한명의 수행승과 함께 한 귀퉁이의 정사에 살았다. 그리고 그 수행승은 밤에 새벽녘에 일어나 밖에서 경행을 했다. 그러자 그 용은 수행승이 나가면 안심하고 잠들었다. 그러자 온통 승원이 한 마리의 뱀으로 가득 찼다. 칭문으로 똬리가 불쑥 튀어 나왔다.
(구족계를 받아서는 안되는 자3, 율장 대품 Vin.I.86-87)
용에서 사람으로 변신한 자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난 것을 묘사한 대목이다. 이처럼 용의 신분이 노출 되자 수행승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부처님은 축생들에게는 구족계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준 구족계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멸빈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 그런가? 경에 따르면 용들은 가르침과 계율 가운데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먼저 인간의 지위를 얻은 다음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아야 됨을 말씀 하셨다. 이 사건 이후로 승단에서는 모든 출가자들에 대하여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 받아야 했다.
서로 적대적인 용과 금시조(supaṇṇa)
네 종류의 신화적 존재를 보면 서로 상극인 것도 있다. 용과 금시조(supaṇṇa)가 그렇다. 경에 따르면 용의 천적은 금시조이다. 이렇게 본다면 용 보다 더 강한 존재가 금시조라 볼 수 있다.
경에 따르면 금시조는 몹시 포악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 가운데 알에서 생겨난 금시조는 알에서 생겨난 용들을 잡아 가지만 태에서 생겨난 용들이나 습기에서 생겨난 용들이나 화생하여 생겨난 용들을 잡아가지는 못한다.(S30.2)”라고 설명 되어 있다. 금시조는 열등하거나 동등한 용들을 공격할 수 있지만 우월한 것들은 공격할 수 없다.
금시조의 크기는?
그런 금시조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난생의 금시조가 구라염마라 나무 동쪽 가지에서 날아 내려와 날개로 대해의 물을 치면 해수가 이백유순으로 갈라질 정도여서 난생의 용을 자유자재로 낚아채 잡아 먹을 수 있다.
(상윳따니까야 811번 각주, 전재성님)
장아함 대정판에 실려 있는 주석을 옮겨 놓은 것이다. 금시조가 같은 난생의 용을 잡아 먹는 과정에 대하여 표현 되어 있다. 그런 금시조의 크기는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 각주에 따르면 “그들은 씸발리숲에 사는 거대한 새로 날개와 날개 사이가 150요자나 정도 된다. 날개짓을 하면 가루다폭풍이 몰아친다. 이 폭풍은 온 도시를 어둠에 휩싸이게 만들고 건물들을 부수어 버린다.(상윳따3권 809번 각주)”라고 설명 되어 있다.
금시조는 날개 사이의 길이가 150요자나에 달한다고 하니 굳이 요즘 도량형으로 계산하면 2,700키로미터에 달한다. 2,700키로 미터 크기의 금시조가 한번 날개 짓을 하면 대양의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물속에 숨어 있는 용을 찾아 낼 수 있다고 한다. 금시조의 크기와 관련하여 상상속의 새 대붕(大鵬)이 연상된다.
금시조(supaṇṇa)와 대붕(大鵬)
“군작이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라는 말이 있다. 평범한 사람이 큰 인물의 뜻을 헤아려 알기가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대붕이라는 말은 장자에 등장한다. 그런 대붕은 “날개의 길이가 삼천 리이며 하루에 9만 리를 날아간다는, 매우 큰 상상의 새. 북해(北海)에 살던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변해서 되었다고 한다”라고 사전에 설명 되어 있다.
대붕의 날개의 길이가 삼천리라면 약 750키로 미터에 해당된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금시조가 2,700키로미터 가량 되니 크기로 따진다면 금시조가 대붕 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각 나라의 문화와 신화에서 커다란 새에 대한 원형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바라문학생으로 변신하여
부처님의 성도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로서 무짤린다용왕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런데 용왕은 부처님을 보호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악이중성을 갖는 용의 속성에서 선한 측면이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을 보호하던 용이 날씨가 좋아 지자 인간으로 변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경에서 “용왕 무짤린다는 칠일이 경과한 뒤에 비가 그쳐 청명한 날씨가 된 것을 알고 세존의 몸에서 똬리를 풀었다. 자신의 본색을 버리고 바라문 학인의 모습으로 나투어 세존께 귀의하며 세존의 앞에 섰다.”라고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이 감흥어로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는다.
Sukho viveko tuṭṭhassa
sutadhammassa passato,
Abyāpajjaṃ sukhaṃ loke
pāṇabhutesu saṃyamo.
Sukhā virāgatā loke
kāmānaṃ samatikkamo,
Asmimānassa yo vinayo
etaṃ ve paramaṃ sukha
[세존]
“가르침을 배운 자,
보는 자, 만족한 자에게
멀리 여읨이 행복이고, 생명에 대한 자제,
세상에서 폭력의 여읨이 행복이다.
세상에서 탐욕을 여의고
각각적 쾌락의 욕망을 뛰어넘음이 행복이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교만의 제거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Mucalindakathā –무짤린다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전재성님역)
이 게송에서 키워드는 수카(sukha)이다. 일반적으로 행복이라 번역된다. 그래서 아홉 가지 행복이 소개 되어 있다.
게송을 분석해 보면
이를 각주를 참고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No |
구 분 |
설 명 |
비 고 |
1 |
가르침을 배운 자 sutadhammassa |
해설된 가르침을 배운 자 |
|
2 |
보는 자 passato |
자신의 정진력으로 얻은 궁극적인 앎의 눈으로 보는 자 |
|
3 |
만족한 자 tuṭṭhassa |
네 가지 길(흐름에 든 길, 한 번 돌아오는 길, 돌아 오지 않는 길, 거룩한 길)에 대한 앎을 통한 기쁨으로 만족한 것. |
사향사과 |
4 |
멀리 여읨이 행복 Sukho viveko |
집착의 대상을 여읜 열반이 행복 |
|
5 |
생명에 대한 자제 pāṇabhutesu saṃyamo |
불살생(avihimsa) |
|
6 |
폭력의 여읨이 행복 Abyāpajjaṃ sukhaṃ |
분노를 여읜 상태로 연민이 생기기 이전의 단계 |
|
7 |
세상에서 탐욕을 여의고 virāgatā loke |
세상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사라지는 것 |
불환자 |
8 |
각각적 쾌락의 욕망을 뛰어넘음이 행복 Sukhā virāgatā loke kāmānaṃ samatikkamo |
돌아 오지 않는 길을 언급한 것 |
불환자 |
9 |
‘내가 있다’는 교만의 제거 Asmimānassa yo vinayo |
거룩한 경지에 이른 것 |
아라한 궁극적 행복 |
표를 보면 모두 아홉 가지 행복이 소개 되어 있다. 그런데 아홉 가지 중에 가장 나중에 표현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교만의 제거라 하였다. 이는 아라한이 되기 이전의 낮은 단계의 결박을 뜻한다.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자만이다. 비록 자만이 있음으로 인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올라왔지만, 경지에 올라왔다면 내려 놓아야 한다. 이는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한다’는 말과 같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다.
Āhārasambhūto ayaṃ bhagini kāyo. Āhāraṃ nissāya āhāro pahātabbo. Taṇhāsambhuto ayaṃ bhagini.Kāyo taṇhaṃ nissāya taṇhā pahātabbā mānasambhūto ayaṃ bhagini kāyo. Mānaṃ nissāya māno pahātabbo. Methuna sambhūto ayaṃ bhagini kāyo. Methune ca setughāto.Vutto bhagavatā.
[아난다]
“누이여, 이 몸은 자양분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양분에 의존하여 자양분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갈애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자만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합니다. 누이여, 이 몸은 성교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세존께서는 성교를 법도의 파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Bhikkhunīsutta -수행녀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4.159, 전재성님역)
앙굿따라니까야 수행녀의 경에 따르면, 아난다는 거짓으로 아픈 채 하는 수행녀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래서 갈애에 의존하여 갈애를 극복해야 하듯이, 자만에 의존하여 자만을 극복해야 함을 말한다. 이런 방식은 마치 독을 독으로 제독하는 것과 같다.
향기 밴 상자의 비유
자만을 극복하려면 자만에 의존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 자만도 결국 내려 놓아야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자만(mana)을 제거할 것인가? 초기불교의 훈습(熏習)이야기(2013-07-3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어떻게 자만을 내려 놓을 것인가? 이에 대하여 ‘케마까의 경’에서 케마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케마까]
벗들이여, 예를 들어 더러워져 때가 묻은 옷이 있는데, 주인은 그것을 세탁업자에게 맡겼고, 세탁업자는 그것을 소금물이나 잿물이나 쇠똥에 고루 뒤섞어, 맑은 물에 세탁했다고 합시다.
아무리 그 옷이 청정하고 깨끗하더라도 아직 거기에는 남아 있는 소금물 냄새나 잿물냄새나 쇠똥냄새가 가신 것은 아닙니다. 세탁업자가 그것을 주인에게 주면, 주인은 그것을 향기가 밴 상자에 넣어 보관해서, 그는 거기에 배어있는 소금물냄새나 잿물냄새가 쇠똥냄새를 없애버립니다.
(Khemaka sutta-케마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9, 전재성님역)
자만을 제거하기 위하여 향기 밴 상자의 비유를 들었다. 아무리 옷을 깨끗이 빨아도 비누 냄새 등이 남아 있을 때 비누 냄새를 제거 하기 위해서는 향기 밴 상자에 옷을 넣어 두면 비누 냄새 등이 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마찬 가지로 마지막 까지 남아 있는 자만이라는 미세한 번뇌는 지혜로서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길의 지혜를 말한다. 그래서 거룩한 경지를 향하는 길의 지혜는 향기로운 냄새가 배어 있는 상자와 같다고 하였다.
궁극적 행복(parama sukha) 이란?
자만이라는 미세한 번뇌가 제거 되었을 때 가르침은 완성된다. 그래서 다시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열반, 불사의 경지에 이른다. 이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빠라마수카(궁극적 행복)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궁극적 행복이란 무엇일까?
누구나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 한다. 마치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말하는 것 같다. 대승기신론을 출처로 하는 이고득락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일까?
누군가는 열반이 행복이라 한다. 그래서 ‘열반락’이라 하여 이고득락에서 말하는 낙이 열반락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맞지 않는 말이다. 열반 그 자체에 대하여 표현하기 힘든 것임에도 열반락이라 규정한다면 열반 역시 제행무상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불교의 삼법인 중에 제행무상이 있다. 한번 형성된 것은 고정되어 멈추어 있지 않고 늘 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여 소멸되고 마는 것이 모든 형성된 것들의 운명이다. 만일 누군가 열반락을 이야기 한다면 그런 열반은 존재 하지 않게 된다.
느낌은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느낌에 목숨을 건다면 범부일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에게 느낌은 단지 알아 차릴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느낌은 즐기는 대상이 아니다. 빠라마수카라 하였을 때 궁극적 행복이란 아라한의 삶을 말한다.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의 삶 자체가 궁극적 행복이라는 뜻이다.
[세존]
“가르침을 배운 자,
보는 자, 만족한 자에게
멀리 여읨이 행복이고, 생명에 대한 자제,
세상에서 폭력의 여읨이 행복이다.
세상에서 탐욕을 여의고
각각적 쾌락의 욕망을 뛰어넘음이 행복이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교만의 제거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행복이다.”
201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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