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장의 가르침

재가자에게 율장은 금서(禁書)일까? 교계(敎誡)가 지속되는 이유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7. 15:01

 

재가자에게 율장은 금서(禁書)일까? 교계(敎誡)가 지속되는 이유

 

 

 

과거에 부처가 출현한 이유는?

 

불자들이라면 누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지속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진리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는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으나 부처가 출현하여 가르침을 펼쳤을 때 가르침으로서 진리는 유한하다는 말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래 지속 되지 않는다. 과거에 수 많은 부처가 출현한 것이 이를 설명한다. 고따마붓다 이전에도 과거칠불이라 하여 수 많은 부처가 출현 하였는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도중에 사라졌음을 말한다. 그런 공백기간이 한량 없이 지속 되다가 또 다시 부처가 출현하여 가르침을 편다. 그런 가르침은 진리로서 가르침이다. 하지만 진리 그 자체는 부처가 출현하든 출현 하지 않든 항상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다.

 

정법과 정법시대

 

지금의 시대를 정법시대라 한다. 마하시사야도의 십이연기법문집에 따르면 정법이란 교학과 수행 그리고 통찰,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갖추어진 것을 말한다. 여기서 (1)교학(pariyatti)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록된 삼장(ti-piaka)을 공부하는 것이고, (2)수행(paipatti)이란 계·정·혜 삼학을 닦는 것이며, (3)통찰(paivedha)이란 출세간도를 통찰하고 성스러운 과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법시대는 어떤 개념인가?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있으면 정법시대이고,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고,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불교는 정법시대일까?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 아닐까

 

최근 교계에서는 정법논란이 뜨겁다. 그것은 스님들이 계율을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권력승들이 모든 것을 독식함에 따라 갈수록 정법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이에 일부 뜻있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반발하고 있다. 특히 송담스님의 탈종과 관련하여 기성종단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있다. 그래서 비판적인 교계신문사이트에서는 연일 한국불교의 추락을 우려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최근에 실린 어느 재가불자는 다음과 같이 기고 하였다.

 

 

팟케스트 '정봉주의 전국구'에서는 날마다 새로 밝혀지는 승려들의 추악한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장윤선의 팟짱'에서도 부패 타락한 승려들의 행태를 널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외 교계 언론에서도 아름다운 선행 소식보다는 권력 싸움과 주지자리 다툼, 도박 ,폭력 ,은처, 사찰재산 착복 등의  소식이 단골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들려오고 보아지는 것은 승려들의 추잡한 모습 밖에 없으니 너무 참담하고, 승려들이 승려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려들의 행태를 분석해 보면 한국불교종단 내의 많은 승려들이 불법을 훼손시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절이나 교회를 다닐까요, 평신도 보명, 불교닷컴 2014-11-05)

 

 

글에서 눈에 띄는 말이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이다. 도박 ,폭력 ,은처 등 일부 타락한 승려들을 지칭한 말이다. 그렇다고 모두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장윤선의 팟짱에 출연한 김영국거사의 말에 따르면 조계종 만여명의 스님 중에 불과 200여명이라 한다. 나머지 대다수의 스님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백여명의 승려들 때문에

 

이백여명의 승려들 때문에 한국불교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다. 인터넷시대에 누구라도 접속할 수 있는 팟캐스트방송을 통해서이다. 정봉주의 전국구나 장윤선의 팟짱이 대표적이다.

 

팟캐스트방송은 파급력이 막강하다. 방송될 때마다 다운로드가 백만회를 넘는다하니 입에서 입으로 회자 된다면 수백만명이 한국불교의 추악한 현실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불과 이백여명 정도 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승려들 때문에 스님들 전체가 매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승려들의 도박, 음주, 폭행 등이 일상화 되고 현실이다. 이런 사실이 불자들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알려 지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스님들이 과연 거리를 활보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글쓴이는 이제는 길을 가다가 어느 승려들을 만나게 되면 신뢰는 고사하고 혐오감이 생겨 못 본체  피하게 되고 사찰 경내에서 만나는 것도 마음이 불편하여 가능한 피하고 싶어집니다.”라고 기고하였다.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팟캐스트방송을 들어 보면 한국불교의 추악한 모습이 여지 없이 드러난다. 세속사람들의 도덕적 평균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단임을 알 수 있다. 도박, 은처, 폭력은 다반사이고 특히 선거과정에서 후보를 매수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다. 스님들은 못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하다. 연예인 뺨치는 노래 솜씨, 일류 주방장을 넘보는 음식만드는 솜씨 등 세속사람들도 그다지 높은 가치를 쳐 주지 않는 일에 올인하는 듯한 모습이다. 머리만 깍고 승복만 걸쳤을 뿐 하는 행위는 세속인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한국불교는 더 이상 자정능력이 없다고 한다. 아무리 뜻있는 스님들이 성명을 내고 재가단체에서 호소를 해 보지만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일부 권승들의 이권이 따른 암묵적 카르텔은 더욱 더 견고해지는 듯하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자정능력을 상실하다 보니 더 이상 내부적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팟캐스트방송 등으로 국민들에게 일부 권승들의 추악한 카르텔이 외부의 힘에 의해서 고발되고 있는 실정이다. 과연 한국불교는 어디까지 추락할 것인가?

 

승가가 있기나 한 것일까?

 

한국불교에 승가가 있기나 한 것일까? 불자들이 불법승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불자가 되는데, 한국불교에서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가 존속하는 것일까? 현재 한국불교에는 부처님도 가르침도 상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왜 그럴까? 부처님도 다르고 가르침도 다르고 더구나 상가는 존재 하지 않는다. 그것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에 상가가 존재 하지 않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것은 한글삼귀의문에서 알 수 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말 때문이다. 스님들께 귀의할 뿐 상가에 귀의한다는 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가가 존재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불교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종 되어서 부처님도 없고 가르침도 없고 상가도 없는 것이다.

 

한국불교에는 스님만 있을 뿐 상가가 없다. 상가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 볼 수 있을까? 만일 한국불교에 상가가 있다면 아마 재가상가만 있을 뿐이다. 일본의 재가승단과 다름 없다.

 

일본에서는 스스로 상가가 없음을 인정한다. 종파불교를 지향하는 일본불교에서 큰 종파의 경우 부처님당시의 상가와 거리가 먼 것이다. 대처육식을 하는 등 재가승가화 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종파에서는 스님들이 머리를 기르고 심지어 양복을 입기도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머리깍은 재가승가의 모습이다. 이렇게 재가승가라 하는 것은 율장정신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종단은 있지만 승가는 없다

 

한국불교는 재가승가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삼귀의문에서 승가에 귀의합니다가 아니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문구가 결정적이다. 따라서 한국불자들은 스님들에게만 귀의할 뿐 승가에는 귀의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종단이 있어서 이를 승가라 한다.

 

한국불교에 종단은 있지만 승가는 보이지 않는다. 승가라 하면 계율을 지키는 집단을 말한데 사실상 한국불교에서는 계율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스님들도 부처님 당시의 계율, 심지어 구족계 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다. 돈을 받아서는 안된다든가 소유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기본적인 계율을 지키지 않으니 승가라 볼 수 없다. 한국불교에 종단은 있어도 승가는 없는 이유이다.

 

율장대품의 후렴시

 

승가가 없다는 것은 계율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계율이 무너지고 지키지 않았을 때 그런 집단에 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라 볼 수 있을까? 율장대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계율의 위대한 의취는

품행이 방정한 자들에게 행복을 가져오니

악한 욕망을 지난 자를 제어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자를 섭수한다.

 

교계를 포함하는

일체지의 승리자의 활동경계로

다른 것이 없는 결계,

안온하여, 잘 시설된 것으로 의혹을 떨쳤으니.

 

율장 안의 다발과

부수와 논모 가운데

의취에 따라 행하는

착하고 건전한 님은 이치에 맞게 실천합니다.

 

소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소떼를 보호하지 못하듯,

계행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가 제어를 수호할 것입니까?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

 

그러므로 총섭을 위하여

앎에 따라서

차례로 후렴시를 읊의니,

내가 말하는 것을 들의십시오.

 

이야기와 인연과 잘못과

논리에 생략이 있으니

그 생략이 어려우니,

논리를 통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율장대품, 1장 크나큰 다발, 후렴시, 전재성님역)

 

 

흔히 빠알리삼장이라 한다. 율장, 경장, 논장을 말한다. 경율론이 아니라 율경론이다. 한국의 팔만대장경에서는 경율론 순이지만 빠알리니까야는 율경론 순이다.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이렇게 율장이 먼저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게송이 있다. 후렴시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Pamuṭṭhamhi ca suttante

abhidhamme ca tāvade,

vinaye avinaṭṭhamhi

punatiṭṭhati sāsana.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

 

 

 

Abhayagiri Dagaba

 

 

율장에 실려 있는 이 게송을 보면 율장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빠알리삼장이라 하여 위나야, 니까야, 아비담마 이렇게 세 가지 종류의 가르침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로 간주 하는 것이 바로 위나야(율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니까야나 아비담마가 없어도 위나야만 있으면 교계가 존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재가자에게 율장은 금서(禁書)

 

요즘은 누구나 율장을 읽을 수 있다. 빠알리위나야가 한글로 번역되어 출간 되었기 때문이다. 관심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데 이제 까지 율장은 스님들의 차지이었다. 재가자는 율장을 접해서도 안되고 읽어서는 안되는 일종의 금서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율사스님은 교계신문사이트에 기고한 글에서 재가자가 율서를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승가의 청정과 유지를 목적으로 한 출가자만의 내부 규정을 보는 것이 재가신도들의 수행과 신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재가신도로서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은 불자의 바른 자세는 아니다.(율장 공개해야 , 법보신문)”라고 경고하였다.

 

율사스님에 따르면 율장은 재가자가 보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심리이다. 하지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율장에 대하여 재가자가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데 대체 율장 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길래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율장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최근 번역 되어 나온 전재성박사의 율장대품과 소품을 구입하였다. 틈나는 대로 읽고 있지만 내용은 매우 방대하다. 그래서 율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다 읽어 나가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필요한 부분만 찾아서 읽으면 된다. 그런데 율장을 접하다 보니 대품 첫 번째 장에서는 상가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부터 시작하여 어떻게 하여 상가가 형성되었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상가의 형성과정을 보면 경장에서는 보이지 않는 내용도 있다. 보리수이야기가 대표적이다. 보리수아래에서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 되어 있는 것이다. 보리수를 비롯하여 여러 나무에서의 이야기들이 그것이다. 우다나에 보리수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파편적이다.

 

율장 초입에 가장 먼저 언급된 내용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불교가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부터 시작 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실려 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들이 연기법을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율장 첫 페이지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한국불자들이 절에 다닌 다고 하지만 교리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것은 경전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경전을 본다고 하여도 그 방대함에 질려서 갈피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장대품 첫 장을 보면 모든 것이 명쾌하다.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그리고 깨닫고 난 다음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한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가의 형성과정에 대한 것이다.

 

초전법륜경과 무아상경

 

율장은 계율에 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가의 형성에 대한 이야기가 초입에 실려 있다. 그런데 경장에서 볼 수 있는 핵심가르침도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내용일까?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시었다. 처음에 부처님은 깨달은 것으로 만족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범천) 사함빠띠의 권청으로 진리로서의 가르침을 펴게 된다. 가장 먼저 자신과 함께 수행하였던 오비구가 대상이 된다. 오비구를 대상으로 하여 자신의 깨달은 이야기를 해 주는데 이것이 부처님의 최초의 설법이라 불리우는 초전법륜경이다. 그래서 빠알리위나야에서는 초전법륜경(S56.11)이 그대로 실려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자 이를 알아 듣는 사람이 생겨났다. 진리의 눈을 뜬 것이다. 이렇게 오비구 모두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그러자 오비구는 구족계를 요청하고 부처님은 구족계를 주었다. 이것이 불교역사상 최초의 상가가 형성되는 순간이다.

 

오비구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나자 부처님은 더 높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것은 무아의 가르침이다. 다른 어떤 종교에서도 볼 수 없는 불교만의 독특한 가르침이다. 이 무아상경은 다름 아닌 아라한이 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괴로움과 윤회로 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깨달음이 맞는지 알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눈이 생겨난 오비구를 대상으로 하여 무아의 설법을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 불리우는 무아상경(S22.59)’이다. 이와 같은 두 번째 설법으로 오비구는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그래서 율장에 따르면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가 입증된 것이다

 

상가와 교단의 형성과정

 

율장대품 크나큰 다발에 상가의 형성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오비구에 이어 다음 이야기는 야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니까야에서 야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지 못하였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야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오로지 위나야에만 실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야사와 야사의 친구가 합류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아라한이 이제 예순 한 명이 되었다. 불과 일년도 안되어서 교단으로서 면모가 갖추어지게 된 것이다. 이때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하게 된다. 그래서 각자 전도의 길을 떠나게 하여 가르침을 널리 알리게 할 것을 명한다.

 

부처님 자신도 전도의 길을 떠났다. 우루벨라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부처님은 깟사빠 삼형제를 교화하였다. 이때 부처님의 세 번째 설법이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불의 설법또는 연소의 경(S35.235)’이라 한다. 이렇게 세 번째 설법으로 깟사빠 삼형제의 교단이 합류함으로써 부처님의 교단은 크게 신장되었다.

 

재가자가 율장을 알아야 하는이유

 

빠알리위나야에는 부처님의 깨달음에서부터 상가의 형성과정, 그리고 계율이 제정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특히 계율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재가자들의 역할도 크다. 위나야에 따르면 수행승들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혐책하고 분개하고 비난 하는 것을 들었다.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일반사람들이나 재가자의 비난, 혐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처음 부터 율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만들어지다 보니 율장에는 엄청난 양의 지켜야 할 사항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에사소한 학습계율은 폐기 해도 좋다.(D16.123)라 하였다.

 

위나야에 실려 있는 이야기는 내용도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인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엿보인다. 그런데 금하는 내용은 출가자들에 출가자들에 한정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재가자가 알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출가자가 어떻게 생활 하고 있는지에 안다면 더욱 더 존경스런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의 종주국이라 볼 수 있는 스리랑카에서는 재가불자들에게 율장교육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빅쿠들이 어떤 존재인지 잘 알기 위해서라 한다.

 

재가자들이 율장에 대하여 알면 여러가지 이점이 있다고 한다. 빅쿠들이 계를 어기려 할 때 제지 할 수 있고, 율장을 공부함으로 인하여 빅쿠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고 더 잘 모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테라와다빅쿠들은 철저히 율장정신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재가자들은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 주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율장이야기 중에 성교에 대한 것이 있다. 

 

왜 성교를 금하였을까?

 

빅쿠들은 성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이는 청정한 삶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금하는 계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을까? 위나야에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 한다. 그리고 구족계를 받은 자가 행해서는 안될 네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네 가지 행해서는 안될 일(Cattāri akaraīyāni)’중에 성교에 대한 항목은 다음과 같다.

 

 

한 때 수행승들이 어떤 수행승에게 구족계를 준 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그는 나중에 홀로 오다가 도중에 전처를 만났다. 그녀는 이와 같이 말했다.

 

[전처]

당신은 방금 출가했습니까?”

 

[수행승]

, 나는 출가했습니다.”

 

[전처]

출가자들은 성교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와서, 성교를 합시다.”

 

그래서 그는 성교를 행한 뒤에 뒤늦게 왔다. 수행승들이 이와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

벗이여, 그대는 이렇게 오랫동안 무엇을 했는가?”

 

그러자 그 수행승은 수행승들에게 사실을 말했다. 수행승들은 세존께 그 사실을 말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구족계를 주고 나서 도반을 알선해 주고 네 가지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일러주는 것을 허용한다.

 

1) 구족계를 받은 수행승은, 심지어 동물과도, 성교를 해서는 안된다. 수행자가 아니고 싸끼야의 아들도 아니다. 사람이 머리를 자르면 그 몸체로 살아 갈 수 없듯이, 수행승이 성교를 행한다면, 수행자가 아니고 싸끼야의 아들이 아니다. 이것은 목숨이 다하도록 행해서는 안될 일이다.”

 

(Cattāri akaraīyāni- 네 가지 행해서는 안될 일, 율장대품 제1)

 

 

방금 출가한 자에게 전처가 나타날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때 규정해 놓지 않으면 전처와 성행위가 이루어 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인하여 부처님은 네 가지 행해서는 안될 것을 일러주어야 함을 말씀 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이 허락함으로 인하여 율장이 성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네 가지 행해서는 안 될 일

 

그렇다면 부처님이 허용한 네 가지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일러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성교

동물과도 성교를 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머리를 자르면 그 몸체로 살아 갈 수 없듯이

투도

풀잎이라도 주지 않은 것을 훔칠 목적으로 갖지 말아야 한다.

줄기가 없는 시든 잎이 다시 푸르러지지 않는 것처럼

살생

개미라도 의도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

큰 돌을 부수어 두 부분으로 나누면, 다시 결합할 수 없는 것처럼

사칭

인간을 뛰어넘는 상태에 이른 것을 사칭하지 말아야 한다.

종려나무의 꼭대기를 자르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듯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네 가지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일러주는 것을 허용하였다. 성교, 도둑질, 살생, 사칭을 말한다. 그래서 동물과도 성교를 해서는 안되고, 길가의 풀잎 하나 뜯어서도 안된다. 개미처럼 미물을 죽여서도 안된다. 구족계를 받은 자가 이렇게 네 가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하여 수행자가 아니라 하였고 사끼야의 아들이 아니라 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깨달았다고 말하지 말라

 

네 가지 중에 사칭이 있다. 이는 초월적인 경지에 대한 사칭을 말한다. 인간을 뛰어 넘는 상태에 이른 것을 뜻한다. 이를 테면 선정이든지 해탈이든지 삼매이든지 성취이든지 길이든지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깨달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자신은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닌다면 사끼야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였다. 차라리 빈방에서 고독을 즐기면 즐겼지 삼매가 어떤 경지이고 해탈이 어떻고 열반이 어떤 것인지 말을 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소식했다라든가 득도했다라든가 깨달았다고 떠 벌리고 다닌다면 종려나무의 꼭대기가 잘린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잘린 종려나무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계(敎誡)가 지속되는 이유

 

빠알리삼장은 모두 다 중요하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 니까야(경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나야(율장) 게송에 따르면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라 하였다. 이로 보았을 때는 율장이 가장 중요하다. 경장과 논장이 사라져도 율장만 남아 있으면 교계가 지속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교계라는 말은 sāsana를 번역한 것이다.

 

Sāsana는 문자적으로 ‘message’의 뜻이다. PCED194에 따르면 ‘teaching; order; message; doctrine; a letter’로 설명된다. 가르침, 명령을 뜻한다. ‘instruction(교본), discipline(규율)’의 뜻도 있어서 불교도의 신앙과 체제 (Buddhist religion or dispensation)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sāsana에 대하여 가르치고 훈계한다는 의미에서 교계(敎)’라 번역하였을 것이다.

 

율장없이 상가는 존속할 수 없다

 

율장이 남아 있는 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존속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율장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가르침도 사라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가르침이 존속하여도 오래 가지 못함을 말한다. 왜 그럴까? 상가가 없기 때문이다. 상가가 사라지면 가르침이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가가 존속하는 한 가르침은 오래 간다. 율장정신에 따라 계율을 지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장없이 상가는 존속할 수 없다. 만일 율장없이 상가가 존속한다면 재가상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나야에서 왜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이 존속하는 한 교계는 지속한다고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율장정신에 따라 승가가 존속하기 때문에 가르침이 살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위나야에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들어 있기 때문에 가르침이 살아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위나야에는 계율에 대한 이야기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율장대품 초입에는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 실려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율장 첫 페이지에 십이연기가 나온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다.

 

위나야에는 부처님의  핵심설법이 들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인 초전법륜경과 두 번째 설법인 무아상경이다. 사실상 이 두 설법이 부처님의 핵심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사성제를 설하였고, 무아상경에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나야 초반부에는 연기의 가르침, 사성제의 가르침, 무아의 가르침 이렇게 세 가지 핵심 가르침이 들어 있다.

 

위나야 게송에서 니까야와 아비담마가 없어도 위나야만 있으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속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는 것은 위나야에 십이연기, 사성제, 무아의 가르침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나야가 전승된다는 것은 상가가 전승되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위나야를 잃지 않는 한 부처님의 상가는 전승되어 갈 것이다.

 

 

만약에 경전과 논서를

잃어버리더라도

계율을 망가뜨리지 않으면,

교계는 언제나 지속합니다. (Vin.I.98)

 

 

 

2014-11-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