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전도선언은 행복론이 아니라 열반론
율장대품에 ‘악마의 이야기’가 있다. 제1장 크나큰 다발에 실려 있는데 두 편이다. 하나는 전도선언과 관계 되어 있고, 또 하나는 단순히 반복적인 게송으로 되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악마를 주제로 하여 ‘악마의 모음(āra Saṃyutta, S4)이라 하여 별도의 상윳따가 있다. 그런 악마는 실재하는 것일까?
전도선언과 악마가 무슨관계가
율장대품에도 전도선언이 있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S4.5)’라 하여 악마의 모음(S4)에 실려 있다. 전도선언과 악마가 무슨관계가 있는 것일까?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하게 된 것은 이 세상에 예순한 명의 아라한이 생겨났을 때이다. 정각을 이루고 약 일년이 된 시점이다. 불과 일년만에 61명의 아라한과 재가신자들이 하나의 교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교단에 비교하면 미미한 것이었다. 이제 태동단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61명의 아라한에는 부처님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머지 60명의 아라한도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이 틀림 없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최초의 이귀의(二歸依)자
61명의 아라한으로 인하여 상가가 형성되었다. 또한 재가신자도 형성되었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최초의 재가신자는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의 이야기’에 나오는 ‘따뿟사’와 ‘발리까’이다. 부처님이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에서 칠일동안 해탈의 지복을 누릴 때 지나가던 상인들이다.
이들 상인은 부처님에게 보리죽과 밀환을 공양한다. 단지 자신들의 행복과 안녕을 바라면서 공양한 것이다. 오늘날의 기복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상인들은 부처님과 가르침에 귀의 하였다. 이른바 ‘이귀의(二歸依)’이다. 상가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따뿟사와 발리까에 대하여 율장대품에서는 “그들은 세상에서 최초로 두 번의 귀의를 제창한 재가의 남자신자이었다.(Vin4)”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장 먼저 형성된 재가대중
불교를 사부대중의 종교라 한다. 빅쿠와 빅쿠니의 출가대중, 그리고 우빠사까(청신사)와 우빠시까(청신녀)의 재가대중 이렇게 네 개의 그룹으로 이루어진 교단이 불교이다. 그런데 율장대품에 따르면 사부대중 중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것이 ‘재가대중’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해탈의 지복을 누리고 있었던 부처님에게 보리죽과 밀환을 공양한 지나가던 상인들이었다.
사부대중 중에서 가장 먼저 재가대중이 형성되었다. 다음으로 출가대중이다. 율장대품에 따르면 오빅쿠의 교화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빅쿠 중에서 콘단냐가 진리의 눈이 생겨나 구족계를 요청하였을 때 최초로 출가대중이 생겨난 것이다. 이후 나머지 네 명의 빅쿠들도 구족계를 요청하여 모두 다섯 명의 빅쿠로 이루어진 승가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에서 재가대중이 승가 보다 더 먼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부대중이 형성되기 까지
부처님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생겨 났다. 이 때 야사가 등장한다. 대부호의 아들로서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2세와 같은 입장이다. 그런데 야사이야기를 보면 야사의 부모와 전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삼귀의를 제창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된 것이다. 야사의 아버지는 삼귀의를 제창한 최초의 남자신자(우빠사까)가 되었고, 야사의 어머니와 전처는 삼귀의를 제창한 최초의 여자신자(우빠시까)가 되었다. 이로서 빅쿠니를 제외한 삼부대중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삼부대중이 형성되기 까지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
구 분 |
설 명 |
비 고 |
1 |
보리수이야기 |
연기의 순관과 역관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여 연기법을 깨달음 |
연기법 |
2 |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이야기 |
오만한 바라문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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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무짤린다이야기 |
용왕 무짤린다가 머리위에 후드를 펼쳐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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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의 이야기 |
상인 따뿟사와 발리까가 보리죽과 밀환을 공양함. |
이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 |
5 |
하느님의 권청이야기 |
사함빠띠하느님이 부처님에게 진리를 설해 줄 것을 요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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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 |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진리를 설함. 이 세상에 아라한이 여섯 명이 됨. |
최초로 상가가 형성됨 |
7 |
야사출가와 최초의 재가신자 이야기 |
야사의 출가로 일곱명의 아라한이 생겨남. 야사의 아버지가 삼귀의 제창으로 최초로 재가의 남자신자가 됨. |
삼귀의한 최초의 남자신자 |
8 |
최초의 재가의 여자신자에 대한 이야기 |
야사의 어머니와 전처가 삼귀의를 제창하여 최초로 여자신자들이 됨 |
삼귀의한 최초의 여자신자들 |
9 |
네 명의 재가친구의 출가이야기 |
야사의 재가친구 네 명이 출가하여 이 세상에 열한명의 아라한이 생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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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오십명의 재가친구의 출가이야기 |
야사의 재가친구 오십 명이 출가하여 이 세상에 예순한명의 아라한이 생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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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보면 상가가 형성된 과정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꼰단냐 등 출가한 다섯명의 수행자로 상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야사이후에서 부터는 재가에서 출가자가 나오게 된다. 율장대품에서는 모두 야사의 친구라 되어 있다.
수준높은 출가자와 여유있는 재가자
야사와 야사의 친구들은 모두 재가출신들이다. 한번도 출가하여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 보지 않은 자들이다. 수행을 목적으로 출가한 사문들과는 다른 그룹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야사와 야사친구들을 보면 부처님당시 상류층의 자제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율장에 따르면 야사에 대해서는 “바라나씨 시에 야싸라고 불리는 훌륭한 가문의 아들, 유복한 부호의 아들이었다.(Vin7-14)”라 표현 되어 있다. 또 야사의 친구에 대해서는 “존자 야싸에게는 네 명의 재가의 친구들로써 바라나씨 시의 대부호들과 부호들의 가문의 젊은이들이….(Vin7-14)”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 당시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한 재가자들은 모두 잘 배운 대부호나 양가집의 자제들이었음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처님의 초기교단을 구성하고 있는 인적자원이 모두 준비된 자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수준높은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들을 뒷받침하는 재가그룹 역시 든든하후원자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는 삼귀의한 최초의 재가신자가 대부호인 야사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것을 알 수 있다.
야사의 친구 수십명이 출가하였으므로 야사의 부모가 재가신자가 되었듯이, 야사의 친구들의 부모들 역시 재가신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재가신자들은 야사의 부모처럼 대부호이거나 양가집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초기교단은 수준높은 출가자와 여유있는 재가자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담마에 의한 세계의 정복
예순한 명의 아라한으로 이루어진 출가대중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들 출가빅쿠들을 후원하는 대부호등 든든한 재가대중이 형성되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시고 난 다음 진리를 펴기로 결심하고 난 후 일년도 되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다. 이 때 부처님은 전도선언을 하게 된다. 바라나시라는 도시에 국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로 가르침을 알려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담마에 의한 세계의 정복이라 생각된다. 경전에 따르면 32상을 가진 자가 출현하였을 때 재가에 있으면 왕이 되어 세상을 정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출가하게 되면 담마로 세상을 정복하게 되어 있다. 이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로 설명된다.
정복왕은 전차 등 사군을 동원하여 세상을 정복한다.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왕이바퀴가 달린 전차를 굴렸을 때 상대방은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맞서 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막강한 군사력 앞에 대부분 성문을 열어 주고 말 것이다. 그런 전차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앞으로 나아갈 뿐 후진하거나 옆으로 가지 않는다.
그런데 32상을 가진 자가 출가하면 역시 바퀴를 굴린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법의 바퀴이다. 정복왕은 전차의 바퀴를 굴리지만 32상의 출가자는 진리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의 바퀴 역시 오로지 전진만 할 뿐 후진이나 옆으로 가는 일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Rājāhamasmi sela 라자하마스미 셀라
dhammarājā anuttaro, 담마라자 아눗따로
Dhammena cakkaṃ vattemi 담메나 짝깡 왓떼미
cakkaṃ appativattiyaṃ. 짝깡 압빠띠왓띠양
“셀라여, 왕이지만 나는
위 없는 가르침의 왕으로
진리의 바퀴를 굴립니다.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
(Selasutta-셀라경, 숫따니빠따 Sn3.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셀라에게 위없는 가르침의 왕이라 하였다. 그것도 ‘위없는 가르침의 왕(dhammarājā anuttaro)’이라 하였다. 그래서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진리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전진만 할 뿐 후진불가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결코 거꾸로 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cakkaṃ appativattiyaṃ)”라 하였다.
부처님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부처님은 담마의 왕이다. 담마의 왕이 굴리는 바퀴는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간다. 정복왕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차를 앞세우고 진격하였을 때 성문을 열어 주지 않을 수 없듯이, 부처님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진리를 설하였을 때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어느 누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부처님이 생노병사 등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를 설하였을 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그리고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또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설하였을 때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진리로서 받아 들여졌을 때 법의 바퀴는 굴러간다. 그것도 오로지 앞으로만 굴러 가는 바퀴이다. 그런 진리의 바퀴를 막을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하였다. 이는 진리의 바퀴를 본격적으로 굴리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를 달리 말하면 담마에 의한 정복을 천명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런 전도선언은 어떤 것일까?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전도선언은 다음과 같다.
Muttohaṃ bhikkhave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Tumhepi bhikkhave muttā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Caratha bhikkhave cārikaṃ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Mā ekena dve agamittha Desetha bhikkhave dhammaṃ ādikalyāṇaṃ majjhekalyāṇaṃ pariyosānakalyāṇaṃ sātthaṃ sabyañjanaṃ kevalaparipuṇṇaṃ parisuddhaṃ brahmacariyaṃ pakāsetha. Santi sattā apparajakkhajātikā assavaṇatā dhammassa parihāyanti. Bhavissanti dhammassa aññātāro. Ahampi bhikkhave yena uruvelā senāninigamo5 tenupasaṅkamissāmi dhammadesanāyāti.
[세존]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본래부터 눈에 띠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유명한 부처님의 전도선언이다. 똑 같은 내용이 상윳따니까야와 맛지마니까 등 사부니까에서도 나온다.
전도의 목적이 이익(hitā)과 안락(sukhā)?
부처님은 “길을 떠나라(Caratha cārikaṃ)”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아라한이 된 빅쿠들에게 명령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적극적인 포교를 명령한 것이다.
수행자라 하여 은둔의 삶을 사는 것 보다 세상에 나아가서 가르침의 바퀴를 굴리라는 부처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그렇게 명령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라는 말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다.
과연 전도의 목적은 이익(hitā)과 안락(sukhā)에 한정되는 것일까? 여기서 이익을 뜻하는 히따(hitā)는 ‘benefit; blessing; good; welfare. (adj.), useful; beneficial’로 풀이된다. 그리고 안락을 뜻하는 수카(sukhā)는 ‘pleasant, happy; happiness, pleasure, joy, bliss.’의 뜻이다. 모두 이익, 축복, 복지, 즐거움,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행복론과 열반론
부처님이 전도명령을 내린 것은 천상과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신 것에 대하여 중생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론을 주장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행복을 가져 주는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도 행복이고, 선정삼매에 들어 가는 것도 행복이고, 심지어 열반도 행복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한정해 버린다면 타종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니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행복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로지 행복론만을 말한다면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불교밖에서도 언제든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전도선언에서 이익(hitā)과 안락(sukhā)을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다음 구절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을 불쌍히 여겨(lokānukampāya)”라는 말이다. Lokānukampāya는 Lokā+ānukampā 형태이다. Lokā는 세상을 뜻하고 ānukampā는 ‘compassion; pity’의 뜻이다. 그래서 Lokānukampāya는 “세상을 불쌍히 여겨”라고 번역되었다. 이 문구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세상을 연민하고”라 번역하였다. 하지만 이 문구에 대한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왜 세상을 불쌍하게 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은 왜 세상을 불쌍하게 보았을까?
부처님은 왜 세상을 불쌍하게 보았을까? 주석에는 없지만 추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전도선언하기 위하여 떠나는 자들이 모두 아라한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예순한 명의 아라한이 생겨 났는데 모두 유여열반상태라 볼 수 있다. 수명이 다하여 죽음에 이르면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어 있다. 그런 아라한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세상사람들은 불쌍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세상사람들은 지금 당장 쾌락을 향유하려 하며 살지만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새로운 태어남을 유발하기 때문에 세세생생 삼계를 두레박처럼 윤회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세상사람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길을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의 의미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명령을 내리면서 특별하게 당부한 것이 있다. 그것은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처음, 중간, 마지막이라는 세 가지 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각주를 참고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No |
처음도 훌륭하고 ādikalyāṇaṃ |
중간도 훌륭하고 majjhekalyāṇaṃ |
마지막도 훌륭한 pariyosānakalyāṇaṃ |
1 |
계행(sila) |
멈춤과 통찰의 길 |
경지와 열반 |
2 |
계행과 삼매 |
통찰과 길 |
경지와 열반 |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은 세상사람들에게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처음, 중간, 마지막이라는 말에 대하여 주석(Srp.I.172)에서는 두 가지로 해석하였다.
표를 보면 처음이라는 말에는 계행이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열반’이 들어가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아라한들에게 전도명령을 내린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다.
경전을 무시하는 한국불교
한국불교에서는 경전을 무시한다. 이는 선불교의 전통과도 관계가 있다. 선종의 경우 불립문자와 교외별전을 표방한다. 그래서 바로 마음을 보라고 한다. 이것이 직지인심이다. 바로 마음을 보았을 때 성불할 것이라 한다. 이것이 견성성불이다. 그래서 선종은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특징으로 한다.
선종에서 마음에 비중을 두다 보니 경전을 멀리 하게 되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은 오로지 마음과 뜻으로 전승될 뿐 문자와 언어로는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문자로 기록 되어 있는 경전에 대하여 불요의경이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정도로 보았다.
한국불교에서 경전을 무시하는 전통이 있어서일까 초기불교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이 전승되어 오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옴에 따라 부처님이 어떤 말씀 하셨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열반이다.
일부만 전달하지 말고 빠짐 없이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명령하면서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이라는 말은 sātthaṃ sabyañjanaṃ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 빠알리구문에 대하여 빅쿠보디는 “the right meaning and phrasing”라 하였다. 이는 “바른 의미와 문구로”라는 뜻이다. 초불연에서도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라 하여 빅쿠보디의 번역과 동일하다.
부처님은 세상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할 때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 또는 “의미와 표현이 갖추어진 가르침”을 전달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하라는 말과 같다. 가르침 중에 일부만 전달하는 것이 빠짐 없이 알려 주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차제설법
부처님의 가르침은 매우 다양하다. 모아 놓으면 팔만사천가르침이 된다. 이와 같은 방대한 가르침을 모두 전달하려면 평생가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단계가 있기 때문에 차제설법으로 설명된다. 아무리 팔만사천 법문이라 하더라도 마치 벽돌쌓듯이 단계적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이는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이 재가의 부호 야사의 아버지를 비롯한 재가자들에게 설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쪽에 물러 앉은 대부호인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차례로 가르침을 설했다. 예를 들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대부호인 장자에게 건강한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을 설했다.
(Rājāyatanakathā niṭṭhatā-라자야따나 나무 아래의 이야기,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 처음부터 사성제를 설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보시에 대한 이야기등 쉬운 가르침부터 설하였다. 그래서 가르침이 무르익으면 더 높은 가르침을 설하였다. 최종적으로 사성제를 설하여 번뇌에서 벗어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차제설법’이라 한다.
보시와 기도만 강조하는 한국불교
전도선언에서 부처님이 아라한들에게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훌륭한 가르침을 설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또는 ‘의미와 표현이 갖추어진 가르침’을 설하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도 빠짐 없이 설하라는 것이다. 보시에 대한 가르침만 설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한국불교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어디를 가나 “열심히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며 보시하면 큰 공덕을 짓는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절에 10년, 20년, 30년, 아니 평생 다녀도 연기법이 무엇인지, 사성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는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긴 것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훌륭한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차제설법이다. 그래서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에게 궁극적으로 열반으로 이끌어야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보시이야기나 하고 기도나 열심히 하라고만 말하며 더 높은 가르침을 알려 주지 않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전도명령을 어긴 것이 되고 ‘직무유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왜 청정한 삶을 살아라 하였을까?
불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라고 말하며 행복론을 이야기한다. 불교가 행복을 말하는 종교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행복 그 자체를 말하지 않는다. 엄밀하게 말하면 “불교는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종교에서도 행복을 말하고, 심지어 종교를 가지지 않은 자들도 행복을 말한다. 하지만 열반을 말하는 종교는 오직 불교밖에 없다. 그런데 전도선언을 보면 불교가 열반을 추구하는 종교라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낸 구절이 있다. 그것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거룩한 삶’은 ‘brahmacariya’를 말한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청정범행’이라 번역하였다. 그렇다면 청정한 삶을 사는 목적은 무엇인가?
부처님의 전도선에서 마지막도 훌륭한 가르침을 설하라 하였다. 여기서 마지막이라는 말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열반’을 뜻한다고 하였다. 차제설법에서 마지막 가르침은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제자 들에게 청정한 삶의 모습을 보여 자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을 실현하라는 말이다. 완전한 열반을 실현하였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성되어 괴로움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윤회가 종식된다. 이와 같은 완전한 열반을 실현 하였을 때 세상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것이다.
부처님도 전도하러
부처님이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된 자들은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완전한 열반에 들것이지만 세상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로움을 겪고 윤회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그래서 연민의 마음으로 진리를 펴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상가가 형성되자 전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둘이서 가지 말고 홀로 가며 전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자신도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 지역의 쎄나니가마 마을로 가겠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 자신도 전도활동하러 떠난 것이다. 그런데 주석에 따르면 부처님이 쎄나니가마에서 전도활동에 대한 것이 상윳따니니까야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에 실려 있다.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을 보면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은 초전법륜경과 무아상경에 이어 세 번째 법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법문에서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셨을까? 경의 말미에 부처님은 “그는 싫어 하여 떠나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그가 해탈 할 때 ‘해탈 되었다’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S35.28)"라고 말씀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가야산 정상의 천명의 수행자들이 모두 준비된 수행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재가자와 달리 가르침을 받아 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에 무아의 가르침으로 열반으로 이끈 것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이 전도선언을 명령한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번뇌에서 벗어나 윤회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도선언은 단순하게 중생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하여 윤회로부터 벗어 나게 하기 위한 선언이라 볼 수 있다.
게송에서 확인된 열반론
불교의 목적이 행복론이 아닌 열반론인 이유는 악마 빠삐만과의 대화에서 드러난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명령을 하고 자신도 쎄나니가마로 향하겠다고 하였다. 그때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에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Baddho'si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Mahābandhanabaddho'si
na me samaṇa mokkhasī"ti.
[빠삐만]
“모든 올가미에 당신은 묶여 있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그대는 커다란 올가미에 묶여 있네.
수행자여, 그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으리.”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갑자기 악마가 등장하여 올가미에 묶여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어느 누구도 빠져 나갈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올가미는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하늘사람과 인간의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종류(Srp.I.171)”이라 하였다. 그것은 눈, 귀 등 으로 즐기는 다섯 가지 쾌락을 말한다. 이렇게 악마가 말하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역시 게송으로 답한다.
"Mutto'haṃ sabbapāsehi ye
dibbā ye ca mānusā,
Mahābandha namutto'mhi
nihato tvamasi antakā"ti.
[세존]
“나는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네.
하늘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나는 커다란 올가미에서 벗어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악마 빠삐만에 대하여 죽음의 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석에 따르면빠삐만은 마라의 별명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악마는 모든 경우에 부처님과는 다른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그런 악마는 일반적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유혹하는 자의 입장에 있지만, 여기서는 엄격한 고행을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의 개인적인 각주를 보면 “이것은 두 가지 극단이 그렇지 않은 것 보다 가깝다는 것을 시사한다.”라고 하였다.
율장에 온전히 남아 있는 게송
부처님은 빠삐만에게 “그대가 패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의 신으로서 빠삐만이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 것으로 알 수 있다.
"Antalikkhacaro pāso
yavāyaṃ carati mānaso,
Tena taṃ bādhayissāmi
na me samaṇa mokkhasī"ti.
[빠삐만]
“허공 가운데 움직이는
생각이라는 올가미
내가 그것으로 그대를 묶으리.
수행자여,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이 게송과 이어지는 부처님의 게송은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올가미의 경(S4.5)’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생각의 경(S4.15)’라 하여 또 다른 경에서 게송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율장대품에서 ‘악마에 대한 이야기1’에서는 빠삐만과 부처님의 두 차례의 문답식 게송이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때로 율장에서는 경장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이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죽음의 신이 찾으려 해도
게송에서 “허공 가운데 움직이는(Antalikkhacaro pāso)”이라는 말이 있다. 각주에 따르면 “그 올가미는 공중에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감각적 인상은 모든 측면에서 사유에 침투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주석에 근거 하지 않은 전재성님의 견해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그것은 생각이다. 그래서 허공가운데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라는 올가미라 하였다.
생각은 사유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이라는 올가미(pāso mānaso)’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정신에 관계 되는 올가미이다. 정신(의근)과 사실(법경)에 관련된 감역에서 일어나는 체험현상을 비유한 것이다.(Srp.I.177)”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남을 말한다. 반대로 대상이 없다면 마음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를 말한다. 이렇게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때 죽음의 신은 찾지 못할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야 명색이 생겨서 윤회하게 되는데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아무리 죽음의 신이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욕망으로 인하여
허공에서 움직이는 올가미에 대하여 초불연의 각묵스님은 ‘애욕의 올가미’라고 각주 하였다. 그리고 “보통의 올가미는 몸뚱이만 묶이지만 애욕의 올가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까지 묶어 버리는 힘을 가졌으며 여기에 묶인 자는 절대로 풀려 날 수 없다는 말이다.(초불연상윳따1권 475번 각주)”라고 각주 하였다. 여기서 애욕의 올가미라는 말은 raga pasa에 대한 말이다. 빅쿠보디는 “The snare is the snare of lust(그 올가미는 욕망의 올가미이다) ”라 하였다.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욕망일 것이다.
존재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삼계 어느 곳에선가 태어나게 되어 있다. 이 생에서 다음 생에서 태어날 때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므로 마음이 일어나는 한 죽음의 신의 올가미에 걸려 들게 되어 있다.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한 악마의 올가미에 걸려 들기 때문에 빠삐만은 “수행자여,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한 것이다.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
부처님이 악마에게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네”라 하였다. 그럼에도 악마 빠삐만은 계속 자신의 올가미에 걸려 들었다고 말한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을 답한다.
"Rūpā saddā rasā gandhā
phoṭṭhabbā ca manoramā,
Ettha me vigaparisuddhaṃto
Nihato tvamasi antakā"ti
[세존]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의
감각에서 즐거운 것들
거기서 나의 욕망은 떠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감각에서 즐거운 것들(manoramā)’이란 오욕락을 말한다. Manoramā는 원래 ‘마음에 드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오욕락이 마음에서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을 유발하는 행위(kamma)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렇게 욕망이 떠 났을 때 청정한 삶이 실현되어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알았을 때 더 이상 악마의 올가미에 잡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시 한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 (nihato tvamasi antakā)”라고 선언한다.
끝장 내는 자?
각묵스님은 죽음의 신을 뜻하는 ‘antakā’에 대하여 ‘끝장 내는 자’라고 번역하였다. 그래서 “끝장을 내는 자여, 그대가 패했도다”라 하였다. 빅쿠보디는 ‘End-maker(끝을 만드는 자)’라 하였다. 그래서 “You're defeated, End-maker!(네가 졌다. 끝을 만드는 자여!)”라고 번역하였다. Antakā에 대한 빠알리사전을 보면 ‘the Death’의 뜻이다. 베딕어로는 ‘being at the end, or making an end’라 설명되어 있다. 빅쿠보디는 베딕어에 근거하여 ‘End-maker(끝을 만드는 자)’라고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antakā’에 대하여 죽음의 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무엇이든지 알면 사라진다!
초기경전에서 악마(마라)는 항상 부처님과 반대편에 서 있다. 다른 종교에서 보는 악마와는 달리 초기경전에서 보는 악마는 부처님과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낸다. 그래서 깨달음이 길을 분명하는데 이용된다. 이렇게 대조적인 견해를 제시하는 악마는 매번 부처님에게 패한다. 패할 때 마다 하는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Atha kho māro pāpimā "jānāti maṃ bhagavā jānāti maṃ sugato"ti dukkhi dummano tatthevantaradhāyī ti.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
(악마에 대한 이야기1, 율장대품 제1장 크나큰 다발, 전재성님역)
악마에 대한 부처님의 승리이다. 죽음의 신이라 불리우는 악마의 올가미에 아무 것도 걸려 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악마가 패배한 것이다. 그 때 하는 말이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jānāti maṃ bhagavā jānāti maṃ sugato)”라는 말이다.
무엇이든지 알면 사라진다. 통증도 통증이라고 아는 순간 더 이상 정신적 고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행복도 행복이라고 아는 순간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그러나 캄캄한 방안에 스위치를 넣는 순간 모든 것이 한 눈에 들어 오듯이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악마도 정체가 탄로 났을 때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라고 말하는 순간 악마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물러 간다. 이 때 하는 말이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jānāti maṃ)”라는 말이다. 그래서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마라(악마)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분류하면
악마는 부처님에게 패배했다. 다른 모든 존재에게 항상 이겼으나 오로지 부처님과 제자들에는 늘 패한다. 패한 이유는 더 이상 재생의 마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재생의 마음이 일어나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수 있는데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으니 죽음의 신의 올가미에 걸려 들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악마는 어떤 의미일까?
악마라고 번역된 마라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대조적인 견해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철학적으로 마라는 번뇌, 업의 형성력, 존재의 다발(오온)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라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분류하면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
타화자재천에 거주하는 신으로서의 마라(악마)
여기서 ‘신으로서 악마(devaputta-māra)’는 어떤 뜻일까? 이에 대하여 전재성님은 율장대품에서 다음과 같이 각주하였다.
Prj.I.44에 따르면, 악마 마라는 자재천(Vasavatthi)으로 하늘아들 다마리까(Damarika)라고 불리며, 감각적 쾌락의 욕망계의 하늘나라에서 그 최고천인 남이 만든 것을 지배하는 신들의 하늘나라(타화자재천)에 살면서 수행자들이 감각적 쾌락의 욕계를 벗어나는 것을 방해하는 자이다.
(율장대품 132번 각주, 전재성님)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마라는 타화자재천에 사는 자이다. 타화자재천은 욕계6천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고 수명 또한 가장 길다. 이렇게 본다면 신으로서 마라는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거주 하는 것이 된다. 마치 사람이 인간세상에 살살 듯 마라 역시 타화자재천을 근거지로 하여 살아 가는 것이다.
삼계를 부정하는 자들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 31개의 세계를 말한다. 이를 크게 구분하면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삼계가 된다. 이와 같은 불교적 세계관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형성조건에 따라 생겨 났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불교적 세계관은 초기경전을 근거로 한다. 그럼에도 이를 부정하는 자들이 있다. 삼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단지 부처님이 방편으로 말씀 하신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심지어 소설적 구성으로 보기도 한다.
삼계가 있는지 없는지 증명할 수는 없다. 다만 경전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셨기 때문에 그런 줄 알 뿐이다. 이렇게 경전적 근거를 들면 어떤 이는 경전을 맹신한다고 한다. 특히 과학의 시대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사함빠띠 하느님(브라흐마)나 악마 빠삐만, 그리고 제석천, 사대왕천 등 욕계나 색계의 존재들은 모두 허구일까?
유튜브에서 ‘양자물리학1’라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삼계와 31가지 조건에 따라 형성된 세상이 있다면 거기에 거주하며 사는 존재들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차원이 다른 세계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2차원의 세계에 사는 자가 3차원을 이해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유튜브에서 ‘양자물리학1’라는 동영상을 보았다. 과학의 시대에 과학적으로 설명된 물리현상에 대한 것이다. 이 동영상의 말미에는 재미 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평면으로만 이루어진 2차원의 세계에 사는 자가 3차원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동영상에서 부분커팅하여 만든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커팅된 동영상을 보면 2차원 세계에 갑자기 무엇인가가 출현한다. 하지만 2차원의 존재들은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은 3차원 사물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2차원에 사는 자의 두려움
2차원의 평지에서는 6면체나 구(球), 4면체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래서 누군가 갑자기 출현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차원의 관점으로 본다면 3차원에서 들어온 손가락은 다음과 같이 갑자기 출현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 때 2차원 사람들은 땅위에 평형한 것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그것도 아무 이유없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모두 놀라 도망가기 바쁘다. 그들은 모르는 것에 대해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아니 아직 알려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삼차원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무엇인가 출현하였을 때 놀랄 것이다. 아직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다.
알고 있는 것만을 본다면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을 본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새로운 것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까? 어떻게 상자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상자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은 무서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원 평면에서 무엇이 출현하였을 때 “누가 이야기 하는 거죠?”라든가, “당신은 누구죠?”라고 물을 것이다. 3차원의 존재에 대하여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3차원 존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차원 사는 존재는 2차원 이외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또 2차원 이상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럼에도 3차원의 존재는 2차원의 존재에게 “나는 다른 차원, 다른 공간에 존재한단다”라고 설명해 준다. 그리고 “나는 너 바로 위에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2차원 존재는 더욱 더 놀라 방문을 닫아 버린다. 그러나 3차원 존재는 2차원의 평면세계를 한눈에 보고 있기 때문에 방에 숨어 있어도 다 알고 있다.
3차원 존재는 2차원 평면세계를 한눈에 보지만
3차원 존재는 2차원 평면세계를 한눈에 보고 있다. 그러나 2차원에 있는 존재는 3차원의 존재를 볼 수 없다. 그래서 바로 위에 있다고 알려 주어도 위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라는 말을 쓰지 말아 달라고 말하며 더욱 더 숨어 버린다.
2차원 존재에게는 ‘위’라는 말 자체를 모른다. 알려 주어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공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2차원의 머리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몰라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라고 말하면서 숨어 버리는 것이다. 더구나 그 단어를 사용하면 무서운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차원 존재는 3차원 존재에게 “당신은 유령인가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3차원 존재는 “난 단지 너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한번에 여러가지를 볼 수 있지만 넌 그렇게 할 수 없지?”라고 말한다.
“당신은 누구세요?” “하나님이세요?” “당신은 유령인가요?”
3차원 존재는 2차원 존재가 볼 수 없는 것을 알려 준다. 방에 금고가 있고 또 어느 방에는 무엇이 있는지 말해 준다. 하지만 2차원 존재에게는 무척 신비하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어떻게 그걸 아는 거죠?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묻는다.
동영상에서는 “하나님이세요?”라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3차원 존재는 “나는 너와 똑같단다”라고 말해 준다. 그러면서 3차원 공간의 현상을 설명해 준다. 즉, 2차원 평면의 세계를 위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줌에도 2차원 존재는 여전히 이해를 못한다. 그래서 “당신은 유령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차원 밖으로 나와 보니
2차원 존재는 2차원 세계 밖에 모른다. 2차원 바깥에 또 다른 차원이 있는지 알 지 못하고 알 필요도 못 느낀다. 2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2차원 세계에서 태어나 죽는 것이다.
2차원 존재는 3차원 존재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한다. 3차원 세계를 알려고 하지만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제가 어떻게 될까요?”라고 말하며 두려워 한다. 이에 3차원 존재는 2차원의 존재에게 평면 공간을 벗어나게 해 주어 위에서 내려다 볼수록 해준다. 2차원이 아닌 3차원 공간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자 이제까지 전혀 듣고 보지 못하였던 것을 경험하게 된다.
형성된 세계와 다차원
양자물리학동영상은 차원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곳이 3차원 세계이지만 또 다른 차원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과학에서는 또 다른 차원을 가정하여 이론을 전개 시켜 나간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사는 차원 이외에 또 다른 차원이 없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삼계에 31개의 세계가 있다고 하였다. 물론 고대인도의 신화와 불교적 세계관이 결합된 것이긴 하지만 업의 조건에 따라 형성된 세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타당한 것이다.
불교에 31개의 세계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인간이 사는 공간과 같은 조건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이 3차원 공간의 세계라면 축생을 제외하고 다른 세계에 거주 하는 존재는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31개의 세계가 있다고 하여 반드시 인간이 사는 3차원 공간으로 생각할 수만은 없다.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다양한 업의 형성력으로 존재들이 태어난다. 그렇게 분류하여 놓은 것이 삼계 31개의 세계이다.
전지전선(全知全善)한 부처님
부처님에 대하여 삼계도사라 하고 일체지자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천지를 창조한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일체지자이기 때문에 ‘전지전선(全知全善)’한 존재라 볼 수 있다.
일체지자로서의 부처님이 발견한 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을 발견하여 깨달은 자 붓다가 된 것이다. 연기법은 원리로서 이미 확정되어 있는 진리이기 때문에 발견하였다고 한 것이다. 부처님이 만든 법이 아니라 발견한 법이다. 그런데 이 연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다시는 삼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한권으로 요약된 경전을 보면
부처님이 위없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무상정등정각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사함빠띠 브라흐마가 알았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하느님 싸함빠띠는 마치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동안 그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세존 앞에 모습을 나타내었다(S6.1)”라고 표현 되어 있다. 마치 없던 곳에서 갑자기 출현 한 것처럼 보인다. 마치 2차원 평면세계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런 표현에 대하여 어떤 이는 단지 방편으로 설명하기 위한 소설적 구성이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근거도 대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함빠띠의 갑작스런 출현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저 그려러니 하면서 받아 들일 뿐이다.
그런데 초기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초월적 내용이 한 두군데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초기경전에서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를 걷어내자고 한다.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을 보면 초월적이고 신비한 이야기가 모조리 빠져 있다. 청원경(S6.1)에서 사함빠띠가 등장하지만 “힘센 사람이 굽혀진 팔을 펴고 펴진 팔을 굽히는 동안..”으로 시작되는 신비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또 전도선언에 대한 내용은 있지만 마라의 게송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거품을 빼고 한권으로 만든 것이 한권으로 읽는 경전의 특징이다.
삼계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
초기경전에서 브라흐마, 마라, 제석천, 사대왕천 등이 등장하고 또한 등장할 때는 갑자기 출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부처님이 방편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후대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아야 할까?
만일 초기경전을 픽션으로 본다면 방편이라는 이름 하에 꾸며낸 소설적 구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각자 지은 행위에 따라 형성된 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에 그 세계는 반드시 인간이 사는 세계와 똑 같은 차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본다면 초기경전에서 볼 수 있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현상은 모조리 허구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2차원 평면세계에 사는 자가 3차원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인간이 사는 곳과 욕계5욕천은 차원이 다른 세계이고, 색계나 무색계는 더욱 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3차원 공간에서 사는 자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알 수 없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워 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브라흐마든 마라든 다른 차원에서 어떤 존재가 갑자기 출현하였을 때 “당신은 누구죠?”라거나 심지어 “당신은 유령인가요?”라고 말할지 모른다.
전도선언은 행복론이 아니라 열반론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Mārakathā)’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윳따니까야에서는 ‘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S4.5)’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악마(마라)를 주제로 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경의 내용을 보면 악마와 싸워서 이기는 승리의 경이다. 어떻게 싸워서 이기는가? 그것은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서 이기는 것이다. 다름 아닌 청정한 삶의 실현이다. 이렇게 청정한 삶을 살았을 때 다시 태어남이 없기 때문에 악마의 올가미에 걸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에 대한 불쌍한 마음으로 전도선언을 하였다. 그런 전도선언은 담마에 의한 세계의 정복을 의미한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 어느 누구도 이를 막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전도선언은 행복론이 아니라 열반론이다.
2014-11-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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