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지체 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경전적 근거를 왜 밝히지 않는가?
법사가 법문할 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훌륭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면 대부분 경전에 실려 있는 이야기이다.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법문하기 때문에 마치 법사자신이 말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글을 읽을 때도 마찬 가지이다. 경전적 근거를 밝히지 않고 글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경전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설령 경전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너무 포괄적이어서 어디 쯤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분류가 잘 되어 있는 초기경전
초기경전을 접하다 보면 분류가 잘 되어 있다. 누구나 열어 볼 수 있도록 경전적 근거를 제시 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윳따니까야의 경우 이니셜 ‘S’로 시작하고, 맛지마니까야는 ‘M’으로, 디가니까야는 ‘D’로, 앙굿따라니까야는 ‘A’로 시작한다.
누군가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라는 문구를 인용하였다고 하였을 때, 분류방식에 따라‘S22:43’로 하면 된다. 여기서 ‘22’는 상윳따니까야 56개의 주제 가운데 ‘22번째’라는 뜻이고, ‘43’은 22번째 상윳따의 ‘43번째 경’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근거를 남겨 놓으면 누구나 쉽게 해당 경전을 열어 볼 수 있다.
율장의 경우는
율장의 경우는 어떠할까? 아직까지 니까야(경장)과 같은 체계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PTS본 페이지에 따라 분류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율장에 ‘지체 높은 친구들의 이야기(Bhaddavaggiyasahāyakānaṃ vatthu)’ 가 있는데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약어가 보이지 않는다. 굳이 분류를 한다면 ‘Vin23’이라 할 수 있다. 위나야 23페이지에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 방법을 든다면 목차에 실려 있는 것을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하박가-제1편 마하박가-제1장 크나큰 다발-두번째 송출품-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글을 인용하거나 경전적 근거를 들 때 너무 길다. 이럴 경우 Vin.I.23이라 하면 될 것이다. 위나야 1권 23 페이지에 있는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음을 말한다.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율장대품에 실려 있는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는 부처님 당시 상류층 자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니까야(경장)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위나야(율장)에서만 발견된다.
야사와 야사친구들이 출가함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는데 경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그 때 예순 한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Vin.I.20)”라 되어 있다.
60명의 아라한이 생겨나자 교단으로서 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60명의 아라한들에게 전도명령을 하였다. 부처님 스스로도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 지역의 쎄나니가마 마을로 가겠다.(Vin.I.21)”라고 선언하였다.
우루벨라로 가는 도중에
율장에서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는 부처님이 우루벨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이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Atha kho bhagavā bārāṇasiyaṃ yathābhirattaṃ viharitvā yena uruvelā tena cārikaṃ pakkāmi. Atha kho bhagavā maggā okkamma yena aññataro vanasaṇḍ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taṃ vanasaṇḍaṃ ajjhogāhetvā aññatarasmiṃ rukkhamūle nisīdi.
Tena kho pana samayena bhaddavaggiyā sahāyakā sapajāpanikā tasmiṃ vanasaṇḍe parivārenti. Ekassa pajāpati nāhosi. Tassa atthāya vesī ānītā ahosi. Atha kho sā vesī tesu pamattesu parivārentesu bhaṇḍaṃ ādāya palāyittha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씨 시에서 계실만큼 계시다가 우르벨라 지역으로 유행을 떠났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길에서 벗어나 한 우거진 숲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 우거진 숲속에 들어가 한 나무 아래 앉았다.
그런데 그때 서른 명의 지체 높은 친구들이 부인을 동반하여 그 우거진 숲에서 놀고 있었다. 한 친구는 부인이 없어서 대신에 기녀를 동반하고 왔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방일하게 놀 때에 그 기녀가 재물을 가지고 도망갔다.
(Bhaddavaggiyasahāyakānaṃ vatthu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율장대품 Vin.I.2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 당시 상류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 베나레스라 불리우는 바라나시 인근의 숲에 들어가 유흥을 즐겼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는 ‘우거진 숲’이라 하였다.
총림(叢林)에 대하여
여기서 우거진 숲은 vanasaṇḍa를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총림을 말한다”라 되어 있다. 총림(叢林)이란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잡목이 우거진 숲”이라는 뜻이고, 또하나는 불교용어로서 “많은 승려가 모여 수행하는 곳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후자의 경우 선원과 강원과 율원을 갖춘 큰 절을 일컫는 말로서 여러 승려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며 안거하는 것을 가리킨다. 수많은 승려들과 신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 마치 나무가 우거진 수풀과 같다는 비유에서 비롯된말이다.
vanasaṇḍa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찾아 보면 ‘jungle thicket’라 되어 있다. 덤불과 잡목 숲으로서 밀림을 말한다. 이와 같은 밀림에 들어가면 밖에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경에서는 “그들이 방일하게 놀 때에”라 하였다.
여기서 ‘방일하게 놀다’라는 표현은 ‘pamattesu’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become intoxicated; was clearless, slothful or negligent; neglected’라 설명되어 있다. intoxicated은 ‘술이나 마약에 취한 ’이라는 뜻과 ‘몹시 들뜬’ 이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방탕하게 놀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방일하게 놀 때에 그 기녀가 재물을 가지고 도망갔다”라 하였다.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기녀가 술해 취해 있는 자들 몰래 값비싼 물건을 가지고 도망 간 것이다. 이처럼 숲에서는 못된 음행이 벌어지는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자를 유혹하는 아낙네
그런데 숲속과 관련하여 숫따니빠따에도 여인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날라까의 경(Sn3.11)에 “가령 숲 속에 있더라도 불의 화염 같은 높고 낮은 것들이 나타나고, 아낙네는 해탈자를 유혹합니다. 아낙네로 하여금 유혹하도록 하지 마십시오.(stn703)”라는 게송이 있다. 숲속에서 사는 성자들을 아낙네가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아낙네(Nāriyo)는 “숲속에 놀러 오거나 땔감을 구하러 온 여인(Prj.II.492)”이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숲은 성자들이 머무는 곳도 되지만 번뇌를 의미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시는 “숲에서 묶이는 번뇌를 버리는 것”을 다루고 있다고 하였다.
숲은 번뇌의 대명사
부처님 당시 숲속은 오늘날 불륜모텔과도 같은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 은밀하게 음행을 할 수 있는 장소로도 활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숲은 번뇌의 온상과도 그랬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숲을 잘라버려라. 나무는 말고, 숲에서 두려움이 생기니 수행승들이여, 숲과 덤불을 자르면 그대들은 숲에서 벗어나리. (Dhp283)”라 하였다.
법구경 게송에서 ‘숲에서 두려움이 생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주석에 따르면 “자연의 숲에서 사자와 같은 짐승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처럼, 번뇌의 숲에서 태어남 등의 두려움이 생겨난다. (DhpA.III.424)”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에서 숲은 번뇌의 대명사와 같다.
“여자를 보았습니까?”
율장대품에 따르면 바라나시의 지체높은 자제들이 숲속에서 질펀하게 놀았다. 그 중에 한명은 기녀를 데리고 왔는데 도중에 값비싼 물건을 훔쳐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아마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었을 때 도망 갔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 나 보니 기녀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저기 찾으러 돌아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 숲에 머물고 있는 한 수행자를 발견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율장대품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 되어 있다.
그러자 그들 친구들은 그 친구를 도와서 그 여자를 찾아 나섰다. 우거진 숲을 헤메다가 세존께서 한 나무 밑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 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공자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여자를 보았습니까?”
(Bhaddavaggiyasahāyakānaṃ vatthu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율장대품 Vin.I.23, 전재성님역)
기녀가 도망가가자 부부동반으로 함께 놀러 왔던 다른 친구들도 기녀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나무아래에 까지 오게 되었다. 경에서는 ‘공자들’이라 하였는데 방일하게 놀았기 때문에 아마 흐트러진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출세간의 진리를 깨달은 수행자와 탐진치에 절어 사는 세속의 부자들과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이 때 첫 마디가 “여자를 보았습니까? (itthiṃ passeyyā)”라는 말이다.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공자들이 “여자를 보았느냐”는 말에 부처님은 “그대들은 여자로 무엇을 하려 하는가? (Kimpana vo kumārā, itthiyā!)”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Taṃ kiṃ maññatha vo kumārā, - katamaṃ nu kho tumhākaṃ varaṃ, yaṃ vā tumhe itthiṃ gaveseyyātha, yaṃ vā attānaṃ gaveseyyāthā?"
[세존]
“공자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들에게 어떠한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Bhaddavaggiyasahāyakānaṃ vatthu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율장대품 Vin.I.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널리 알려진 유명한 말이다. 니까야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율장대품에서만 볼 수 있다.
“자기자신은 등불에 비유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여기서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attānaṃ gaveseyyāthā)” 대하여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attānaṃ gaveseyyāthā: 자기자신은 등불에 비유된다: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
(율장대품 152번 각주, 전재성님)
이 각주는 주석서를 근거로 한 것이 아니다. 전재성님의 개인적인 견해가 실린 각주이다. 그런데 각주에 따르면 법구경의 한 게송을 인용하여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 (attānaṃ gaveseyyāthā)”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세속에서 통용되는 말
경에서 자기자신을 찾는다고 하여 ‘자아’를 찾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부처님이 ‘자기자신(attā)’라 한 것은 하나의 ‘관습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왜 상대방을 깍아 내리려 하는가,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자만심(2013-03-11)’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부처님이 세상 속에서 “나는 말을 한다”라고 하였을 때 ‘나’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말씀 하신 것이다.
[세존]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실체가 없는 ‘나’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세상의 관례에 따라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숲에 머무는 빅쿠들이 ‘나는 먹는다, 나는 앉는다, 내 발우, 내가사’ 등의 표현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누군가는 불교적 가르침이 자아가 없다는 무아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한 언어사용이 가능한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아’를 말하는 불교에서 ‘나’라는 표현을 하였다고 하여 모순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빅쿠보디의 각주에 따르면 “세속적인 표현이 있고, 세속적인 용어가 있고, 세속적인 협약이 있고 세속적인 개념이 있다. 그것은 여래가 그것들을 집착없이 사용하는 것이다”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율장대품에서 부처님이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자신을 찾는 것인가?”라 하였을 때, 자기자신은 세속에서 통용되는 말을 표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은 불타고 있다
율장대품에서는 여자를 찾는 대신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주를 보면 법구경의 게송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법구경 146번 게송이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잘 표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Ko nu hāso kim-ānando
niccaṃ pajjalite sati?
Andhakārena onaddhā
padīpaṃ na gavessatha?
오, 어찌 웃고, 어찌 즐기는가?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
그대들은 어둠에 덮여 있는데,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146)
게송에서 “언제나 세상은 불타고 있고(niccaṃ pajjalite sati)”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DhpA.III.103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항상 감각적 탐욕 등과 같은 열한 가지 불로 불타고 있는데, 웃음이 무엇이고 즐거움이 무엇인가? 이러한 환락은 누릴 가치가 없다.
열 한가지 불이란 Sdk.80-81에 따르면, 1) 탐욕, 2) 성냄, 3) 환상, 4) 질병, 5) 늙음, 6) 죽음, 7) 슬픔, 8) 비탄, 9) 고통, 10) 절망, 11) 과도한 노력을 말한다.
(법구경 994번 각주, 전재성님)
주석에 따르면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에 대하여 탐욕과 성냄 등 열 한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초전법륜경 ‘고성제’에서 내용도 보인다.
고성제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탐욕이나 성냄, 질병으로 세상이 불타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괴로움으로도 세상은 불타고 있는 것이다.
왜 과도한 노력이라 하였을까?
그런데 열 한가지 불 중에서 ‘과도한 노력’이 포함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왜 과도한 노력도 세상을 불타게 하는 요인이 될까?
세상은 탐욕의 불로 불타오르고, 성냄의 불로 붙타오른다. 그래서 연소의 경(S35.28)에 따르면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S35.28)”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주석에 실려 있는 열 한가지 불 중에 ‘탐욕, 성냄,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절망’이라는 표현의 근거가 되는 경이라 볼 수 있다.
세상이 탐욕으로 붙타고 있다. 그런데 탐욕을 내면 낼수록 불은 더욱 더 거세게 타오를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탐욕으로 살고 성냄으로 살고 있는데, 매일 탐욕하고 성낸다면 연료는 더욱 더 많이 생겨 날 것이다. 매일 ‘자가충전’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가충전된 연료로 인하여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세생생 타오를 것이다. 그래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연료로 하여 연료가 소진 되지 않는 한 유전하고 윤회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타는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법구경 게송에서는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 (padīpaṃ na gavessatha?)”라 하였다.
등불을 구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율장대품 각주에 따르면 “왜 자기자신을 찾지 않는가?”와 같은 의미이다. 똑 같은 의미가 법구경에서는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라고 표현 되어 있다. 자기자신을 등불에 비유하여 말씀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등불은 어떤 의미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 각주를 보면 “여덟 가지 무명의 어둠에 덮여 있는데, 어둠을 몰아낼 지혜의 등불을 구하지 않을 것인가?(DhpA.III.103)”의 의미라 한다. 그래서 여덟 가지 무지의 어둠에 대하여 법구경 141번 게송의 주석을 참고 하라고 하였다.
법구경 141번 게송의 주석을 찾아 보았다.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무지의 의혹이 있다.
1) 부처님에 대한 의혹
2) 가르침에 대한 의혹
3) 참모임에 대한 의혹
4) 생성에 대한 의혹
5) 소멸에 대한 의혹
6)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혹
7) 연기에 대한 의혹
8) 조건으로 일어난 것들(연생)에 대한 의혹
(법구경 973번 각주)
탐욕과 성냄은 내 뜻대로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과도한 열정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무언가를 이루고 해 내기 위해서는 욕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욕망이 탐욕으로 성냄으로 발전 되었을 때 과도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과도한 노력은 세상을 불타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부처님의 한 마디에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다가 달아난 기녀를 찾으러 나선 공자들은 부처님과 만났다. 부처님으로부터 ‘여자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한가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 무시하며 지나칠 것이다. 마치 노자 도덕경에서 누군가 도를 이야기하면 대부분 크게 웃어 버린다는 말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대부분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체 높은 공자들은 많이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의 한 마디에 알아 들었다. 그래서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욱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Vin.I.23)”라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공자들이여, 그렇다면 앉아라,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가르침을 설하겠다. (Vin.I.23)”라며 가르침을 주었다.
쉬운 가르침부터
율장대품에 따르면 부처님은 공자들에게 쉬운 가르침부터 알려 주었다.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차례로 가르침을 설했다. 예를 들어 보시에 대한 이야기, 계행에 대한 이야기,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위험-오염과 욕망의 여읨에서 오는 공덕에 대하여 설명했다. 그리고 세존께서는 대부호인 장자에게 건강한 마음, 유연한 마음, 열린 마음, 기뻐하는 마음, 청정한 마음이 생겨난 것을 알자, 모든 부처님들에게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을 설했다.
(Bhaddavaggiyasahāyakānaṃ vatthu -지체높은 친구들의 이야기, 율장대품 Vin.I.23, 전재성님역)
이렇게 차례로 가르침을 설하자 그들에게서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진리를 보게 되자 공자들은 출가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그들은 진리를 보고, 진리를 얻고, 진리에 깨우쳐 들어가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승의 가르침을 신뢰하였다. (Vin.I.24)”고 하였다.
공자들은 출가 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요청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오라!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살아라! (Vin.I.24)”라고 말씀 하셨다.
2014-01-04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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