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깨달음은 가까이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7. 24. 11:28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깨달음은 가까이에

 

 

 

연이틀 비가 내리고 있다. 장마철에 비가 내리는 것은 당연함에도 그 동안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반가운 비라 아니 할 수 없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면 출근길 교통혼잡이 극에 달하지만 그럼에도 타는 듯이 더운 날 보다 훌씬 낫다. 이렇게 시원하고 서늘한 날씨를 가져 주기 때문에 여름철 내리는 비는 고마운 비이다.

 

무엇이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는가?”

 

비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는 수 많은 부처님말씀이 있다. 가장 먼저 생각 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Vuṭṭhi alasa analasañca

mātā puttava posati,
Vu
ṭṭhi bhūtūpajīvanti

ye pāā pahavisitāti.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Pajjotasutta -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 전재성님역)

 

 

하늘사람이 부처님에게 무엇이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고 도대체 무엇이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는가?”라고 게송으로 묻자 부처님이 역시 게송으로 답하신 것이다.

 

생명과도 같은 비

 

게송의 키워드는 (Vuṭṭhi)’이다. 그런 비를 어머니로 비유하였다. 그리고 비를 맞고 자라는 생명에 대하여 아들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어머니-, 아들-생명으로 대비된다. 이렇게 본다면 비는 어머니와도 같은 것이다. 비로 인하여 만물이 소생하고 비에 의지하여 살아 가기 때문이다.

 

가뭄이 들 때가 있다. 비가 와야 하는 장마철임에도 비가 오지 않을 때가 있다.그 때 대지는 말라가고 농작물은 타 들어 간다. 이렇게 비가 오지 않으면 그 해 농사는 망치게 된다. 그 결과 민심은 흉흉해지고 이농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1960년대 중후반 대한해(大旱害)’가 그랬을 것이다.

 

기우제(祈雨祭)의 추억

 

지난 6월 고향에 갔었다. 고향에 갈 때 마다 늘 바라 보는 산이 있다. 그 산은 서쪽에 돌출 되어 있는 큰 산이다. 해발고도는 낮지만 평지에 돌출 되어 있으므로 매우 크게 보인다. 들어 가 보면 산세가 매우 깊다고 한다. 옛날 그 산에서 기우제(祈雨祭)’ 지낸 것을 보았다.

 

초등학교 이전에 기억이 있다. 그 때 당시 대한해가 연속으로 들어서 기우제를 지냈다. 마을의 어른들만 간 것으로 알고 있다. 기우제를 지내던 밤 서쪽 하늘 산 중턱에서 불길이 솟아 올랐다. 전기도 들어 오지 않던 그 시절에 들은 이야기로는 비가 오지 않아서 비가 오게 해달라고 마을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 후에 비가 왔는지 오지 않았는지 기억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연이어 발생한 대한해로 인하여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농사지어 먹고 살던 농부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서울을 향하여 야간열차를 탄 것이다. 그래서 서울 변두리 산동네’ ‘달동네라 불리는 동네를 터전으로 하여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도시빈민이 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TV에서 자연다큐프로를 보면 세랭기티평원에 대한 것이 많다. 평원에 건기가 시작 되면 모든 것이 매말라 버린다. 이렇게 건기가 시작되면 동물들은 물을 찾아 이동한다. 그러나 이동할 수 없는 생명이 있다. 물에 사는 악어나 하마처럼 물에 의지하는 동물이다. 건기가 되어 대지가 타들어 갈 때 악어들의 삶은 비참하다. 점점 말라가는 물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검은 구름이 형성되고 잔뜩 흐린날씨가 된다. 그러다 번개와 천둥소리와 함께 세찬 빗줄기가 쏟아진다. 우기가 시작 된 것이다. 그러자 대지는 순식간에 촉촉히 젖어서 생명들이 살아난다. 초목은 물론 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비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비는 생명과도 같다. 그런 비를 뿌리는 하늘은 대지의 어머니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도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mātā puttava posati)”이라 하였을 것이다.

 

법화경 약초유품에서

 

비가 내리면 대지를 촉촉히 적신다. 도시에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를 적신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비가 내리면 차별 없이 적신다는 것이다. 고급아파트단지나 허름한 단독주택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비를 맞는 것이다. 농촌이라면 논이나 밭이나 들, 또는 산에도 골고루 내린다. 그래서일까 게송에서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Vuṭṭhi alasa analasañca)”라 하였다.

 

비는 게으른 자나 부지런한 자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내린다는 것이다. 이 구절은 법화경에서 약초유품을 떠 올리게 한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나 숲, 그리고 약초는 많지마는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니라. 먹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이나 숲이나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이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하를 따라서 제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을 따라서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마는,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법화경, 약초유품)

 

 

약초유품에 따르면 비는 차별 없이 내린다고 하였다. 다만 받아 들이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일시에 비가 골고루 뿌려 주지만 큰 잎과 줄기와 뿌리를 가진 나무는 많이 받아 들일 것이고, 반면 작은 나무는 적게 받아 들일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같은 비가 내려도 그릇에 따라 담기는 비의 양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사전에 따르면 약초유품에 대하여 인간과 천상은 소초(小草), 성문ㆍ연각은 중초(中草), 보살은 대초(大草)에 비유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런 비유는 대승보살사상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 약초유품에 대한 오리지널버전은 초기경전에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것이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Vuṭṭhi alasa analasañca)”라는 구절이라 본다.

 

번뇌를 상징하는 비

 

비와 관련하여 두 번째 이야기는 법구경의 게송을 들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thāgāra ducchanna           야타가랑 둣찬낭

vuṭṭhi samativijjhati,            윳티 사마띠윗자띠

Eva abhāvita citta          에왕 아바위땅 찟땅

rāgo samativijjhati.             라고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못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듯이

닦여지지 않은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dhp13)

 

 

Yathāgāra succhanna           야타가랑 숯차낭

vuṭṭhi na samativijjhati,         윳티 나 사마띠윗자띠
Eva
subhāvita citta         에왕 수바위땅 찟땅

rāgo na samativijjhati.          라고 나 사마띠윗자띠

 

지붕이 잘 이어진 집에

비가 스며들지 않듯이

잘 닦여진 마음에

탐욕이 스며들지 않는다. (dhp14)

 

 

법구경 13번과 14번 게송은 키워드가 (vuṭṭhi)’로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비는 고마운 비, 생명의 비가 아니라 번뇌를 상징한다. 문단속을 하지 않았을 때 도둑이 찾아 오듯이 감각기관을 수호하지 않았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에 지배당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붕이 잘 이어진 집은 감각기관을 잘 단속한 것으로 비유된다. , , 코 등 감각기관을 잘 지키면 번뇌가 들어 올 수 없다. 그런 번뇌에 대하여 게송에서는 대표적으로 탐욕(rāga)’을 들었다. 여기서 탐욕은 비와 같은 것이다.

 

아사와(āsava)

 

게송에서 비는 번뇌의 상징이다. 그런 비는 내려서 흘러 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번뇌를 뜻하는 빠알리 아사와(āsava)’가 역시 흘러 내리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Āsava에 대한 PCED194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āsava

: (lit: influxes), 'cankers', taints, corruption's, intoxicant biases. There is a list of four (as in D. 16, Pts.M., Vibh.): the canker of sense-desire (kāmāsava), of (desiring eternal) existence (bhavāsava), of (wrong) views (diṭṭhāsava), and of ignorance (avijjāsava). A list of three, omitting the canker of views, is possibly older and is more frequent in the Suttas , e.g. in M. 2, M. 9, D. 33; A. III, 59, 67; A. VI, 63. - In Vibh.

 

(PCED194, āsava)

 

 

사전을 보면 āsava는 어원적으로 ‘influxes’라 하였다. 이는 유입, 쇄도, 도래를 뜻한다. 그래서 아비담마에 따르면 아사와(āsava)에 대하여 ā(향하여)+sru(to flow, 유입)’에서 파생된 남성명사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아사와는 유입이라는 뜻을 지니게 된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아사와는 종기에서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오랫동안 발효된 술을 뜻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뜻의 아사와는 교학적으로 보았을 때 해로운 마음의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번뇌라고 번역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아사와는 흘러나오는 고름이나 악취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아사와는 네 가지로 설명된다. 그것은 1)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의한 번뇌(kāmāsava), 2)존재에 의한 번뇌(bhavāsava), 3)견해에의한 번뇌(diṭṭhāsava), 4)무명에 의한 번뇌(avijjāsava) 이렇게 네 가지 번뇌가 있다. 여기서 견해의 의한 번뇌를 존재에 의한 번뇌에 포함시키면, 세 가지로 분류 될 수 있다.

 

비는 일시에 골고루 지붕에 뿌려진다. 볏단으로 이은 지붕에 조금이라도 틈이 있다면 그 틈으로 비가 스며 들어 방바닥에 빗물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비가 새지 못하도록 겹겹히 단단히 이어져 있다면 안심해도 좋다. 이렇게 법구경에서는 비가 번뇌의 상징으로 비유 되었다.

 

포말 비유의 경(S22.95)에서

 

초기경전에서 비와 관련된 세 번째 이야기이다. 상윳따니까야 포말 비유의 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 말씀이 있다.

 

 

Seyyathāpi bhikkhave, saradasamaye thullaphusitake deve vassante udake udakabubbua uppajjati ceva nirujjhati ca. Tamena cakkhumā puriso passeyya nijjhāyeyya yoniso upaparikkheyya, tassa ta passato nijjhāyato yoniso upaparikkhato rittakaññeva khāyeyya tucchakaññeva khāyeyya asārakaññeva khāyeyya ki hi siyā bhikkhave, udakabubbue sāro?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가을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 눈 있는 자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한다고 하자. 그가 그것에 대하여 보고 고요히 관찰하여 이치에 맞게 탐구하면, 비어 있음을 발견하고,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 수행승들이여, 무엇이 실로 물거품의 실체일 수 있는가?”

 

(Pheapiṇḍūpama sutta-포말 비유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95,전재성님역)

  

 

 

Rain

 

 

경에서는 물거품(udakabubbua)’이 키워드이다. 물거품은 비가 올 때 바닥에 떨어질 때 생겨난다. 이 물거품에 대하여 부처님은 조용히 관찰할 것을 말씀 하셨다.

 

물거품은 어떤 의미일까? 주석에 따르면 물방울은 허약해서 잡자마자 부서지기 때문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느낌역시 허약해서 영원하고 안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거품을 느낌으로 비유하였다.

 

물거품은 오래가지 않고 금새 사라진다. 조건에 의하여 물방울이 생겨 났다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처럼 느낌 역시 조건발생하여 머물다 금새 사라진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손가락을 한번 튕길 때 십만억의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조건발생하여 일어난 현상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경에서 실체가 없는 것을 발견한다라 하였다.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같아서

 

느낌은 일시적 현상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을 때 영원히 계속 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바뀌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괴로운 느낌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느낌에 대하여 사람들은 목숨을 건다. 몇 해 전에 일본드라마 오오쿠()’를 본적이 있다. 5대 쇼군 도쿠가와 츠나요시(川綱吉, 1646~1709)’와 측실들간의 궁중암투에 대한 드라마이다.

 

이 드라마에서 츠나요시는 마치 조선시대 연산군을 떠 올리게 한다.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자신의 측실로 만들고자 한 것에 대해서이다. 그 상대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여인은 절의 주지출신 여승이었다. 관서출신으로 성내의 궁녀에 대한 교육담당으로서 선발된 것이다.

 

그런데 츠나요시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그녀를 넘보려 한다. 이때 그녀가 한 말이 “하오나 살갗이 닿아 통한 정은 한 순간... 물거품과 진배 없을 것이옵니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즐거운 느낌은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감각적 쾌락을 목적으로 하여 정을 나누는 것은 결국 로 귀결 되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본다면 오오쿠 작가는 마치 초기경전의 한 구절을 멋지게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포말비유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기 때문이다.

 

 

Pheapiṇḍūpama rūpa

vedanā bubbuupamā
Maricikupam
ā saññā

sakhārā kadalūpamā,
M
āyūpamañca viññāa

dīpitādiccabandhunā.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S22.95)

 

 

법구경에도 유사한 게송이

 

물거품과 관련하여 법구경에서도 유사한 게송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Yathā bubbulaka passé,   야타 붑불라깡 빠쎄

yathā passe marīcika,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 loka avekkhanta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빳사띠.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법구경, Dhp 170, 전재성님역)

 

 

게송에서 첫번째 구절에서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이라 하였는데 이는 포말비유의 경에서 빗방울이 떨어질 때에 물거품이 생겨나고 사라지는데라는 구절과 같은 내용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을 보면 서로 연결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거품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

 

부처님은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주의 깊게 관찰하면 텅 비어 있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한 인연담이 있다. 인연담 중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한 때 오백 명의 수행승들이 부처님께 명상주제를 받아 숲속에 들어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특별한 것을 얻지 못하고 각자에게 알맞은 명상주제를 얻자.’라고 생각하고 부처님께 돌아오는 도중에 아지랑이를 명상주제로 삼아 수행하면서 왔다.

 

그들이 승원에 들어서는 순간 폭우가 내렸다. 그들은 여기 저기 입구에 서서 급류의 힘으로 솟아올랐다가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서 우리의 몸이 생겨나고 부서지는 것이 물거품과 같다.’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주의를 기울였다.

 

부처님께서는 향실에 앉아서 수행승들에게 모습을 나투어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라고 가르쳤다. 가르침이 끝나자 그 수행승들은 선 채로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

 

(법구경 170번 게송 인연담, 전재성님)

 

 

인연담에 따르면 오백 명의 수행승들은 물거품이 일어 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었다. 인연담에서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라한의 경지를 말한다.

 

이렇게 물거품을 보고 깨닫게 된 것은 모든 현상에 실체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빗방울이라는 조건으로 생겨난 물거품은 단지 매우 짧은 시간 지속 되었을 뿐 이내 사라지곤 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그렇게 본 것이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것도 집착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죽음의 신이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그런데 게송의 인연담을 보면 다른 게송의 인연담과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거룩한 경지를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법구경에서 인연담을 보면 부처님설법을 듣고 대부분 흐름에 든 님(수다원)’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으나 이 170번 게송에서는 거룩한 경지(아라한)’를 성취했다라고 하였다. 왜 이렇게 차이가 있을까?

 

이는 게송에서 네 번째 구절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Maccurājā na passati)”에 힌트가 있다. 초기경전에서 죽음의 사자는 번뇌 다한 아라한을 결코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번뇌 다한 아라한은 더 이상 재생의 업을 짓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생의 마음, 즉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아 죽음의 신이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연담에서 그 수행승들은 선 채로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깨달음은 가까이에

 

어렸을 적 시골에 살 때 초가에 살았다. 볏집으로 이어 지붕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비가 와서 지붕아래로 흘러 내렸다. 작은 도랑에 흘러 내린 빗물은 물거품을 만들었다. 그것도 연속으로 물거품을 만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본 적이 있다. 요즘 도시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빗방울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서도 깨우칠 수 있다는 사실이 초기경전에 기록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것이 반드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어야만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깨닫게 해 주는 것은 도처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4-07-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