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한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 일겁윤회에서 한사람이 남긴 유골의 양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13. 18:45

 

  

“한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일겁윤회에서 한사람이 남긴 유골의 양은?

 

 

 

 

군사 칸베에(軍師 官兵衛)

 

인터넷으로 즐겨 보는 드라마가 있다. 일본 NHK 대하드라마이다. 매년 새로운 주제로 1년간 방송 되고 있는데 올해의 경우 군사 칸베에(軍師 官兵衛)이다. 여기서 군사(軍師)라는 말은 사령관이나 지휘관 밑에서 군사적 계략(計略)이나 작전을 맡은 사람을 말한다. 일본 전국시대에 쿠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라는 뛰어난 전략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동안 수 많은 NHK대하 드라마를 보았다. 인터넷에서 자막으로 제공되는 사이트를 통해서이다. 그런데 하나의 특징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시대적 배경이 전국시대막부말기의 드라마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에 일본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웅이 가장 많이 출현한 시기 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국시대의 경우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토쿠가와 이에야스 이렇게 세 명이 유명한데 이를 전국삼걸이라 한다. 모두 개성이 있는 인물들로 알려져 있다.

 

인생오십년

 

드라마에서 인상적으로 본 장면이 있다. 그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의 배신으로 인하여 혼노지에서 불에 타 죽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인생오십년

돌고 도는 인간세상에 비하면

꿈처럼 덧없거늘

 

한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번뿐,

신명나게 살았구나.”

 

 

 

 

오다 노부나가가 죽었을 때 그의 나이는 49세 이었다. 오십이 다 된 나이에 일본천하의 통일이 눈 앞에 있었으나 부하장수의 갑작스런 배신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을 때 불길 속에서 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의 원문을 찾아 보니 人間五十年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夢幻くなり。一度生て、ぼせぬのあるべきか라고 되어 있다. 한번 태어나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 그런데 현재 위치에 오르기 까지 수 많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는데 본인이 막상 죽음에 이르렀을 때 마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본래의 시어에 없는 내용이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번뿐, 신명나게 살았구나.”라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인생은 원타임(One Time)’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단멸론적 사고라 볼 수 있다.

 

만일 오다 노부나가가 불법에 귀의하여 불교에 대하여 알았더라면 이와 같은 시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는 불교와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절을 불태우고 수 많은 승려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드라마에서는 신명나게 살았구나라고 말하면서 목에 칼을 대 자결하고 스스로 불에 타 죽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전사의 경(S42.3)에서

 

오다 노부나가는 인생오십에 많은 것을 이루었다. 특히 백년 가까이 계속된 전국시대에서 통일의 기반을 마련해 놓은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래서 일본인 들이 가장 좋아 하는 영웅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수 많은 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면 죽어서 지옥에 가 있음에 틀림 없다. 이는 초기경전에서도 확인 된다.

 

상윳따니까야에 전사의 경(S42.3)’이 있다. 마을 촌장이 부처님에게 “세존이신 고따마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 라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촌장은 왜 이런 질문을 하였을까?  그것은 전사가 전장에서 열심히 싸워 죽으면 ‘전사자의 하늘(sarañjitāna devāna) 이라는 천상에 태어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말이 맞는지 부처님에게 확인 받고 싶어서 질문한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선의의 폭력일지라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병사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적과 싸워 적을 죽였다면 살생을 한 것이다. 살생업을 지었기 때문에 결코 선처에 태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전사자의 하늘이라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말이 있어서 촌장이 부처님에게 진짜 그런 곳이 있는지 물어 본 것이다.

 

싸우다 죽은 자들은 모조리 지옥에 태어날 것

 

이에 부처님은 매우 충격적은 말을 한다. 촌장의 기대와는 정반대이다. 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촌장이여, 전사가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 그의 마음은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을 구타하거나 결박하거나 절단하거나 박멸하거나 없애 버려야 한다’ 는 생각 때문에 이미 저열해졌고 불우해졌고 사악해졌습니다.

 

그 전력을 다해서 싸우는 자를 적들이 살해하여 죽인다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

 

(Yodhājīvasutta-전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자들은 모조리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그것은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마음 상태 때문이다. 증오 없이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증오의 마음을 품고 죽음을 맞았다면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다음 생이 결정 될 것이다. 임종순간에는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기 때문에 증오의 마음을 가진 채 죽는 다면 악처에 태어 나기 쉽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쟁에서 증오와 원한의 마음을 품은 채 죽는 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지옥이 있는데 있는데 그곳에 태어납니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종교가 먼저인가 국가가 먼저인가?

 

폭력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듯이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호국을 위한 것일지라도 부처님 가르침 입장에서 본다면 지옥에 태어날 을 짓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호국불교의 명목으로 승려들이 칼을 들고 전투에 참여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된다.

 

불교는 평화의 종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리는데 있어서 결코 폭력이나 전쟁을 통하여 전달하지 않았다. ‘뿐나의 경(S35.88)’에서처럼 뿐나빅쿠는 때리면 맞는 식으로 비폭력적 전도방식을 취하였다. 이는 씨를 말리는 개신교 방식과 다른 것이고, 신의 이름하에 성전(聖戰)을 치루는 이슬람방식과 또한 다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불교는 평화의 종교임에 틀림 없다. 평화의 종교에서 타인을 죽이는 전쟁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전쟁에서 증오심을 가지고 싸우는 전사가 죽었을 때 결코 전사자의 천상에 갈 수 없고 모조리 전사자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사람들에게 종교가 먼저이냐 국가가 먼저이냐?’라고 물으면 어떤 답을 할까? 국민교육이 잘된 사람이라면 국가가 먼저라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총을 들고 맞서 싸울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와 다르다. 어떤 전쟁도 정당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증오의 마음으로 죽으면 전사자의 지옥에 태어날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을 듣자 촌장은 통곡을 한다. 지금 까지 잘 못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촌장]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에 슬퍼하여 통곡한 것이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전사들의 옛 스승의 스승으로부터 이와 같이 ‘전사는 전쟁터에서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하는데 전력을 다해서 싸우면서 적들에 의해 살해되어 죽임을 당하면, 그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전사자의 하늘에 태어난다’ 라고 오랜 세월 동안 속아 살고 기만당하고 현혹된 것입니다.

 

(Yodhājīvasutta-전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3,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촌장은 이제 까지 속고 살아 왔다고 하였다. 전쟁에 참가 하여 용감하게 싸우다 죽으면 전사들만이 가는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오랫동안 알고 있었으나 사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촌장은 오랜 세월 동안 속아 살고 기만당하였다라고 말한다.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vs “한번 뿐인 목숨이다. 목숨을 가벼이 하지 말라!”

 

경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랫동안 속고 살았다. 특히 전쟁에서 그렇다. 드라마에서 전쟁을 독려하는 자들은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평화를 사랑하는 자는 한번 뿐인 목숨이다. 목숨을 가벼이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 하나 뿐인 목숨을 이용하려는 자가 있는 가 하면, 하나 뿐인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자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당연히 후자이다.

 

윤회의 과정에서 남긴 유골의 산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그렇다고 하여 모두 다 똑 같은 죽음이 아니다.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 목숨을 아끼지 말라!”라는 말에 현혹되어 증오를 낸 마음에서 죽음을 맞이 한다면 그 순간 악처에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죽은 자는 유골을 남기고 저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윤회의 과정에서 남긴 유골은 얼마나 될까? 상윳따니까야 사람의 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Ekassekena kappena

puggalassaṭṭhisañcayo,
Siy
ā pabbatasamo rāsi

 iti vutta mahesinā

 

[세존]

일겁의 세월만 윤회하더라도

한 사람이 남겨놓는 유골의 양은

그 더미가 큰 산과 같이 되리라고

위대한 선인께서는 말씀 하셨네.”(S15.10, 전재성님역)

 

 

 

Skull mountain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이렇게 시작도 알 수 없는 뭇삶들은 무명에 가리고 갈애에 속박되어 삼계육도를 유전하고 윤회한다. 만일 사람으로 태어 났을 경우 뼈와 해골을 남길 것이다. 그런 뼈무더기를 한 곳에 쌓아 두면 커다란 산을 이룰 것이라 한다.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드라마에서 본 오다 노부나가 역시 죽음 앞에서 무력하였다. 단지 한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한번뿐, 신명나게 살았구나.”라고 하였으나 또 다시 어떤 존재로 태어났을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 수 많은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에 악처에서 태어 났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래서 이승에서 또 하나의 뼈무더기를 남겼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무명에 가려지고 갈애에 속박된 모든 존재들 역시 죽을 때 뼈무더기를 남길 것이다. 그래서 유전하고 윤회할 때마다 늘어 나는 것은 뼈와 해골일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여기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Yato ca1 ariyasaccāni

sammappaññāya passati:
Dukkha
dukkhasamuppāda

dukkhassa ca atikkama,

 

[세존]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거룩한 진리,

괴로움과 괴로움의 발생과

괴로움을 뛰어넘는 괴로움을 종식으로 이끄는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보는 자가 있으니,

 

 

Na sattakkhattu parama

sandhāvitvāna puggalo,
dukkhassantakaro hoti

sabbasaññojanakkhayā'

 

그는 많이 잡아 일곱 번을

더 윤회하더라도

모든 속박을 부수고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이다.” (S15.10, 전재성님역)

 

 

 

2014-08-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