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이것 이상 보살행은 없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1. 11. 17:13

 

이것 이상 보살행은 없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

 

 

 

스님들의 출가이야기

 

스님들의 출가이야기를 들어 보면 때로 감동적이기도 하고 때로 눈물겹기도 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출가한 스님이 있는가 하면 눈물의 출가도 있다. 대체로 눈물겨운 출가이야기가 많다.

 

어느 스님은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자신의 출가이야기를 밝혔다. 큰 뜻을 품고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님의 반대가 심해서 그야말로 가출을 하게 된 것이다. 가출이 되어 출가한 후에 모든 연락을 끊고 산속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족들이 백방으로 찾아 다녔고 행방불명으로 실종신고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난 스님은 차라리 그 때 용기 있게 부모님을 설득하였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방송에서 말하였다.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출가와 관련하여 논서와 초기경전에 일화가 있다. 먼저 청정도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Ussāvova tiaggamhi,

sūriyuggamana pati;

Evamāyu manussāna,

mā ma amma nivārayā”ti. (jā. 1.11.79);

 

 

 “The dewdrop on the blade of grass

Vanishes when the sun comes up;

Such is a human span of life;

So, mother, do not hinder me” (J-a IV 122).

(빅쿠냐나몰리역)

 

 

 “풀잎 끝의 이슬이 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이

인간의 수명도 그와 같습니다.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Ja.iv.122)

(청정도론, 8 12,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서 죽음에 대한 명상(Maraassatikathā)’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따까에 실려 있는 게송을 인용한 것이다.

 

인간의 수명에 대하여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보았다. 이슬이 햇볕이 나면 곧바로 사라져 버리듯이 사람의 인생 역시 지나고 나면 덧없음을 말한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젊어서 출가하여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출가를 요청한다.

 

하지만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로 호락호락 하지 않을 것이다. 옛말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게송에서는 어머니 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mā ma amma nivārayā)라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대림스님은 대괄호를 이용하여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라 하였다. 이렇게 번역하였을 때 과연 대괄호를 포함해야 하는지 난감해진다. 대괄호안의 내용을 무시한다면 어머니, 저의 방해하지 마십시오가 되어 이상한 번역이 되어 버린다. 대괄호치기를 하였을 때 뜻이 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 저를 [출가를]방해하지 마십시오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어색하다. 이럴 경우 차라리 대괄호를 사용하지 않고 의역하여 어머니, 저의 출가를 방해하지 마십시오라고 주석적 번역을 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부모가 바라는 것은

 

대부분의 부모들은 출가를 반가워 하지 않는다. 초기경에 따르면 재산이 많은 장자들이 그렇다. 랏타빨라의 부모도 그랬다. 가업을 이어나갈 아들이 출가 하려 하였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막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랏타빨라의 부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여,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 네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M82)

 

 

눈에 띄는 말은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이다. 재산이 많으므로 마음 껏 감각적 쾌락을 즐기되 공덕도 쌓으라는 말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생활을 말한다.

 

랏타빨라의 출가이유

 

대승불교에서 테라와다불교를 폄하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소승불교라는 말이다. 오로지 자신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질 뿐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삶을 산다고 비난한다. 과연 그럴까?

 

출가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유 없이 출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출가 이유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랏타빨라의 출가이유에 대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게송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돈으로 장수를 얻지 못하고

또한 재산으로 노쇠를 면할 수 없네.

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라고 현자는 말합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죽음과 만나고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도 그렇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음에 얻어맞아 누웠으나

현명한 자는 죽음과 만나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재산보다 탁월하고

지혜로 궁극적인 목표를 이룹니다.

생에서 생으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악행을 저지릅니다.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가니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윤회합니다.

적은 지혜로써 그것을 신뢰하는 자

모태에 들어 저 세상으로 갑니다.

 

마치 도둑이 강도짓 하다 사로잡혀

악한 행위에 괴로워하듯이

사람들은 죽은 후에 다음 세상에서

악한 행위로 괴로워합니다.

 

감미롭고 즐거운 다양한 감각적 쾌락이

여러 가지 형색으로 마음을 교란시키니

감각적 쾌락의 묶임에서 재난을 보고

왕이여, 나는 출가를 택했습니다.

 

마치 과일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청년이건 노인이건, 몸이 부수어지면 떨어지니

왕이여, 이것을 보고 출가했습니다.

진실한 수행자의 길이 보다 탁월합니다. (M82, 전재성님역)

 

 

부유한 집안의 아들 랏타빨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하였다. 출가이유를 보면 존재에서 두려움을 보고 행위에서 두려움을 본 것이다. 행위에 따라 모태에 들어 세세생생 윤회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 것이다. 짧고 덧없는 생에서 이번에 출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으로 알고 출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처들이 있었음에도

 

랏타빨라에게는 이미 전처가 있었다. 그것도 한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 있었다. 이 때 전처들은 랏타빨라에게 서방님이여,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여인들이 있어서 그녀들을 위해 청정한 삶을 영위합니까? (M82)”라고 물어 본다. 랏타빨라가 출가하여 분소의를 입고 걸식을 함으로서 청정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인간계의 여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미모의 천상의 여인과 살게 될 것을 염려 해서 한 말이다. 이에 랏타빨라는 자매들이여, 내게 아름다운 하늘여인들이 있어서 그녀들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M82)”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옛 아내들은 고귀한 아들이 우리를 자매들이여!’라고 불렀다거.’고 울면서 졸도 하고 말았다.(M82)”라고 표현 되어 있다.

 

! 괴롭다. ! 고통이다

 

초기경에 따르면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출가하려 할 때 부모의 반대가 심했다. 부처님 당시 부호의 아들인 야사가 출가하려 할 때 야사의 아버지는 야싸야, 너의 어머니가 비탄에 젖어 슬퍼하고 있다. 어머니의 목숨을 보존토록 하라.(Vin.I.15-20)”라고 말하였다. 가업을 이어나갈 아들이 출가하려 하자 야사의 어머니는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슬픔에 잠긴 것이다. 그럼에도 아들은 결국 출가 하고 만다. 그렇다면 야사는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왜 출가하였을까?

 

율장대품에서는 야사의 출가이유가 기록 되어 있다. 그런 야사는 대부호의 아들로서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감각적쾌락을 누리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어느 날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 괴롭다. ! 고통이다.”라고 외친다. 가질 것 다 가지고 즐길 것 다 즐기고 사는 대부호의 아들이 고통을 호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마음껏 즐기고 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야사는 부처님을 만나고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잘 배운 양가집의 자제이었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아 들이는 속도도 빨랐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곧바로 알아 듣고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 되었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재가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없었다. 번뇌가 다한 자에게 재가의 삶이 미련 없기 때문이다.

 

번뇌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소멸된 번뇌가 다시 찾아 와도 번뇌를 쫒아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 그래서 재가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야사의 어머니는 비탄에 젖어 슬퍼 하며 야사가 돌아 오기를 바랐다. 이에 부처님은 훌륭한 가문의 아들 야사가 환속하여 이전의 재가의 생활처럼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Vin.I.15-20)”라 하였다.

 

대략난감해 하는 수행자

 

랏타빨라는 부모와 전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이유를 명확하게 밝히며 출가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확고한 출가이유를 가지고 있었을 때 부모나 전처의 만류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식이 있을 때 어떻게 될까?

 

한 때 부처님이 사왓티에 계실 때의 일이다. 존자 상가마지가 부처님을 뵙기 위하여 사왓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상가마지의 전처가 이 소식을 듣고 사내아이를 데리고 사왓티에 도착하였다. 상가마지가 한 나무 아래에 앉아 있을 때 전처가 다가왔다. 전처와 상가마지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그녀는 다가와서 존자 쌍가마지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쌍가마지의 전처]

수행자여, 나는 꼬마아이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부양하십시오.”

 

이처럼 말하자 존자 쌍가마지는 침묵했다.

 

두 번째에도 그녀는 존자 쌍가마지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쌍가마지의 전처]

수행자여, 나는 꼬마아이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부양하십시오.”

 

두 번째에도 존자 쌍가마지는 침묵했다.

 

세 번째에도 그녀는 존자 쌍가마지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쌍가마지의 전처]

수행자여, 나는 꼬마아이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부양하십시오.”

 

세 번째에도 존자 쌍가마지는 침묵했다.

 

그러자 존자 쌍가마지의 전처는 아들을 존자 쌍가마지에게 던지고 이와 같이 말하고 떠났다.

 

[쌍가마지의 전처]

수행자여, 이 아이는 당신의 아이입니다. 당신이 아이를 키우십시오.”

 

(Sagāmajisutta-쌍가마지의 경, 우다나 Ud5, 전재성님역)

 

 

우다나에 실려 있는 상가마지의 경을 보면 대략난감해 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뚜렷한 출가이유를 가지고 출가한 수행자에게 전처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어린 꼬마 아이를 데리고 나타났다.

 

전처는 이미 출가한 수행자에게 자신과 아이를 부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혼을 하여 처자식이 있다면 당연히 부양할 의무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에 상가마지는 아무 말도 못한다. 단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수행자가 파계를 하기 전에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결말이 났을까?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쌍가마지는 그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런데 존자 쌍가마지의 전처는 멀지 않은 곳으로 가다가 존자 쌍가마지가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도 걸지 않는 것을 보았다. 보고나서 이와 같이 이 수행자에게는 아이는 필요없다.’라고 생각하고 되돌아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Sagāmajisutta-쌍가마지의 경, 우다나 Ud5, 전재성님역)

 

 

세속적 관점으로 본다면 상가마지는 비정한 아버지이다. 자신의 혈육을 본채 만채 할 뿐 만 아니라 마치 남의 아이처럼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 아이를 자신이 키우려 한다면 수행자의 삶을 포기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처를 따라 아이와 세속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출가이유가 분명하다면 과감하게 뿌리 칠 수 있을 것이다. 세속적 관점에서 본다면 매정한 아버지일지 모르지만 출세간적 입장에서 본다면 가능한 이야기이다. 결국 전처가 아이를 데려 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영화 삼사라(Samsara)에서

 

상가마지의 이야기를 보면 영화 삼사라(Samsara, 2001)가 떠 올려진다. 티벳승려가 환속하여 처자식과 살다가 재출가한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하여 삼사라 (samsara), 방울이 바다에 떨어지면(2009-04-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영화삼사라에서 재출가를 결심한 전승려는 기로에 서게 된다. 환속하여 이미 오세 가량된 아들까지 하나 두고 있는 입장에서 다시 출가하려 하는 것이다. 이에 전처가 부처님과 야소다라 왕비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며, 야소다라 왕비가 없었다면 부처가 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도를 이루어 깨닫게 된 것도 아이를 데리고 산 야소다라왕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삼사라( Samsara , 2001)

 

 

재출가하려는 전승려를 앞에 두고 전처는 야소다라왕비를 자신과 대비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면서 야쇼다라가 남편과 아들을 떠나고 싶었을지라도 몰라요라고 말하며 야소다라 왕비가 분노와 외로움과 슬픔에 빠져 살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재출가하려는 남편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전처가 한밤중에 자식을 버리는 어머니는 없어요라고 말하며 남자만 그럴 수 있죠라고 말한다. 처자식을 남겨 놓고 깨달음을 위하여 재출가하려는 남편에게 하는 말이다.

 

재출가하려는 전승려는 주저 앉고 만다. 전처가 아이의 입장에서 아빠는 어디 갔냐고말하였을 때 뭐라고 대답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묻자 전승려는 이러지도 저로지도 못하며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재가로 돌아 갈 수 없는 아라한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하늘눈으로 상가마지와 전처와 아이의 상황을 지켜 보고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이건 출가한 수행자에게 아이를 떠 넘기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감흥어를 읊는다.

 

 

Āyanti nābhinandati

pakkamanti na socati.
Sa
gā Sagāmaji mutta

tam-aha brūmi brāhmaan

 

[세존]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으니

애착에서 해탈한 쌍가마지를

나는 거룩한 님이라 부른다.”

 

(Sagāmajisutta-쌍가마지의 경, 우다나 Ud5, 전재성님역)

 

 

감흥어에 따르면 상가마지는 아라한이었다.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 번뇌다한 아라한이 되었으므로 어떤 업도 짓지 않는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다시 재가로 돌아 갈 수 없다. 그럼에도 상가마지의 전처는 자신과 아이를 부양하라고 말한 것이다.

 

영화삼사라는 환속한 승려가 처지식을 부양하고 살다가 재출가 하는 이야기이다. 이는 상가마지이야기와는 다른 것이다. 상가마지는 처자식이 있는 상태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지만 영화에서의 주인공은 번뇌에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묘사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된다.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흔히 하는 말 중에 가는 사람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물리치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맹자에서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가는 사람을 붙들지도 않고 오는 사람을 물리치지도 않으며(去者不追 來者不拒)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받을 뿐입니다.”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이말은 불가에서도 즐겨 사용되는 말이라 한다.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 것은 인연이 다 되었기 때문으로 보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것은 새로운 인연을 맺기 때문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소극적 대응방식이다. 요즘 타종교의 경우 오는 사람은 환영할 뿐만 아니라 한번 들어 오면 못 빠져 나가게 하기 때문이다.

 

가는 사람 붙들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라는 말 보다 더 소극적 말이 있다. 그것은 우다나에 표현 되어 있는 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떠나는 것을 슬퍼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출세간적 삶의 방식이다. 세간의 삶과는 반대의 방식을 말한다.

 

세간에서는 오는 것을 기뻐하고, 떠나는 것에 대하여 아쉬워 한다. 그러다 보니 쉽게 떠나지 못한다. 요즘 말로 그놈의 정 때문에사는 것이다. 그러나 출세간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오는 사람이라 하여 특별히 기뻐할 것도 없고, 떠나는 사람이라 하여 또한 특별히 슬퍼할 것도 없다. 왜 그럴까? 항상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발생하였을 때 단지 알아차리면 그뿐이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즐거운 느낌인 줄 알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운 느낌인 줄 알면 그 뿐이다.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는 등 연기의 순환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윤회의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스님들은 왜 출가를 하였을까? 불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대목이다. 이에 대하여 출가의 이유를 들어 보면 매우 다양하다. 그렇다면 왜 출가를 하는 것일 것일까? 이에 대하여 한마디로 윤회의 두려움을 보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빅쿠라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Sasāre bhaya ikkhatīti bhikkhu(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빅쿠)”라고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랏따빨라의 출가이유를 보면 결국 윤회의 두려움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더 이상 모태에 들지 않기 위해 윤회를 종식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출가이유가 분명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Kamma: )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출가이유가 불분명하면 재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하게 된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도박승, 은처승 등 각종 범계행위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의 두려움 때문에 출가하였다고 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소승이라 볼 수 있을까?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관세음보살

 

마하야나주의자들은 보살사상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초기불교와 테라와다에 대하여 오로지 개인적인 구원에만 관심을 갖는 소승이라 폄하한다. 이렇게 대승보살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대승보살의 모습은 매우 화려하다. 대표적으로 관세음보살을 들 수 있다.

 

수월관음도에 묘사 되어 있는 관세음보살을 보면 빅쿠의 모습이 아니다. 삭발하지도 않았고 분소의도 입지 않았다. 그대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고 몸에는 비칠 듯 하는 얇은 사리를 걸치고 있다. 또 목과 팔 에는 갖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는 목걸이와 팔찌 등을 하고 있어서 보기에 매우 화려해 보인다. 마치 귀부인이 온갖 치장을 하고 있는 듯하다.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관세음보살은 중생구원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빅쿠의 모습이 아닌 귀부인의 모습이 된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 재가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깨달은 중생이라 하여 보디사트바라 하였을 것이다.

 

보살과 빅쿠는 다르다. 보살은 중생으로서 세간적 삶을 살아 가지만 빅쿠는 출가자로서 출세간의 삶을 살아 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보살의 삶과 빅쿠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보살은 중생과 함께 세세생생 살아가지만, 빅쿠는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 윤회를 종식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 이상 보살행은 없다

 

누군가 보살로서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굳이 출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랏타빨라 부모가 말하였듯이 “사랑하는 아들 랏타빨라여, 먹고 마시고 놀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누리고 공덕을 쌓으며 즐겨라.(M82)”라는 말이 있듯이, 재산을 많이 축적하여 베풀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도 보살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에서 공덕을 쌓고 사는 삶은 모두 보살행으로 볼 수 있다.

 

굳이 대승보살사상을 강조 하지 않아도 베풀고 보시하는 공덕행을 실천하고 있다면 보살사상을 실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공덕행 보다 더 수승한 삶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출가수행자로서의 삶이다. 왜 출가수행자의 삶이 더 수승한가? 그것은 대승보살사상 보다 더 중생을 구원하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청정한 삶을 살면 궁극적으로 괴로움을 소멸하고 열반을 성취하게 된다. 이는 중생구원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괴로움과 윤회를 종식시킬 수 있다는 메시지야말로 최고의 구원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빅쿠가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서 가르침을 실천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었을 때 이것 이상 구원의 메시지는 없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을 보면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내용이 있다. 이 문장 하나만 본다면 대승보살사상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S4.5)”라고 문구이다. 이 문구의 뜻은 무엇일까? 괴로움으로 가득찬 이 세계를 살아 가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구원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

 

누구든지 가르침을 실천하여 윤회를 종식하게 되었을 때 이 보다 더 큰 구원의 메시지는 없다. 이렇게 본다면 윤회의 두려움을 알아서 출가한 빅쿠가 궁극적으로 열반을 실현한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다. 세상에 이것 이상 보살행이 어디 있을까?

 

 

2014-11-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