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카츄사 각국어 버전과 러시아 포크댄스, 남부군에서 본 달밤의 괴기한 피아골축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2. 15. 21:03

 

카츄사 각국어 버전과 러시아 포크댄스, 남부군에서 본 달밤의 괴기한 피아골축제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살인자도 되고 도둑이 될 수 있다. 그 상황은 조건이다. 그런 상황은 자신이 만든 것일 수도 있고 주변에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때 그 장소에 있었을 때 상황에 휩쓸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EBS에서 남부군을

 

EBS에서 남부군을 보았다. 매주 일요일 심야시간에 한국영화 특선을 보여 준다. 이전에도 한번 보았으나 이번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만 확인 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관심있게 끝까지 지켜 본 것은 영화가 재미 있기도 하지만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의 영향도 크다.

 

80년대 후반 남부군을 책으로 읽었다. 그때 당시 큰 이슈를 일으켰던 베스트셀러이었다. 그때 당시 책을 읽으면서 , 세상에 이런 삶도 있었구나!”라며 공감 하였다. 그것은 너무나 처절한삶이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쓴 자서전이야기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실감하였다.

 

소설로 접한 남부군을 두 세 번 읽었다. 그러다 보니 책에 어떤 이야기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도 관심을 가지고 읽었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 훤하다이번에 EBS에서 영화로 보니 마치 책을 다시 한번 읽은 듯 하다. 더구나 책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영상으로 보니 책으로 읽은 것 보다 더욱 더 리얼하다. 책으로 보는 것 보다 영상으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EBS에서 제공되는 영화 남부군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다. 그것도 몰입하여 보았다. 중요장면은 디카로 촬영하였다. 또 주요대사는 스마트폰의 메모기능을 활용하였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몰입하여 영화를 보았다.

 

각본 장선우

 

영화를 보니 첫 부분에 자막이 뜬다. 주로 배우나 스텝들의 이름이다. 그런데 매우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장선우라는 이름이다. 영화감독 장선우님을 말한다. 남부군에서는 각본 장선우라고 자막이 떴다.

 

각본이란 연극이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글을 말한다. 배우의 동작이나 대사, 무대장치 따위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글이다. 소설이 있을 때 이를 영화화 하기 위해서는 별도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을 각본 또는 극본이라 한다.

 

자막에서 각본 장선우라고 나왔을 때 반가웠다. 그것은 블로그와 관련하여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장선우감독과의 인연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간다. 그 중에는 이름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흔적을 남기기 않기 때문에 다녀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긴 분들이 종종 있다. 영화감독 장선우님도 그런 케이스이다.

 

제주도에서 부인과 함께 레스토랑을 하고 있다는 장선우님이 어느 날 글을 하나 남겼다. 불교와 관련된 대본이 완성되어서 이를 소설형식으로 출간하였는데 선물로 보내겠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장선우감독의 친필 사인을 받고, 구도(求道)시나리오‘따타가따’(2012-07-25)’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내용은 이렇다. 출판사에 따르면, 장선우님이 <따타가따 Tathagaga 如來>’라는 책을 출간 하였는데 이곳 블로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하였다. 남긴 글에따르면 감독님께서 책을 쓰시는 동안 이곳 블로그에 들러 많은 도움을 받았었고, 의지하였다고하셔서..”라는 내용이 있다.

 

이런 글을 받고 매우 놀랐다. 이름 없는 불자의 일상적 이야기가 유명인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책을 보내 왔다. 책에는 장선우감독의 친필사인이 있었다. 이런 인연으로 장선우 감독의 공개편지 “달라이 라마 존자님께 묻습니다”(2012-07-2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말로만 듣던 빨치산이…”

 

남부군의 저자는 이태이다. 영화 남부군은 정지영 감독의 작품이다. 각본은 장선우님이이다. 영화를 보니 예전의 보았던 책의 내용과 거의 일치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장선우님은 원본에 충실하여 각본한 것이라 보여진다. 이렇게 자막으로 장선우님의 각본임을 확인 하자 더욱 더 영화에 몰입하게 되었다.

 

영화 초입에 기자 출신의 이태가 빨치산이 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말로만 듣던 빨치산이…”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번도 자신이 빨치산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상황이 빨치산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느 날 빨치산이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고 한번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처음은 주인공이 입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된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글을 하나 쓰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 했다. 그래서 다음 날 책을 주문했다. 오래 전에 보았던 남부군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니 당일 도착 하였다.

 

 

 

 

 

 

 

책에서 가장 보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춤과 노래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도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슬쩍 비추어 줄 뿐이다.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기대하였던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책에서 본 것을 표현하고 싶었다.

 

남부군에서 여러 인상적 장면이 있지만 아직까지 뇌리에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것은 춤과 노래 장면이다. 특히 어떤 노래인지 확인 할 방법이 없어서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 한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당일 도착 하였다. 오래 전에 두 세 차례 읽은 적이 있기 때문에 내용은 매우 익숙하다. 그리고 영화로도 접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러나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영화에서는 빠져 있다. 모든 장면을 영상으로 표현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서문에는 저자의 생각이 가장 잘 반영 되어 있다. 남부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태는 서문에서 그 때 당시 대학생이던 한청년의 말을 상기 하면서 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의 삶을 기록해주세요라는 말을 인용하였다. 아마 수기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라 본다.

 

 

 

 

 

 

오래 전에 책을 읽었을 때 남는 말이 바로 역사의 수레바뀌에 깔려 죽어간이라는 말이었다. 그 때 당시 공감한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 간 자들이 이십대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그 때 당시 같은 이십대로서 만일 내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똑 같은 운명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 저자 이태는 서문에서 그들과 같은 또래의 청춘들이 30여 년 전에 겪었던 일들을 이제 그들에겐 까마득한 전설이며 잊혀져야 할 얘기들이다.”라 하였다. 1980년대 말을 기준으로 하여 30년 전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책이 나오고 난지 26년이 지났으니, 그 때 당시 일어났던 이야기들은 이제 56년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죽음의 대열에 뛰어든 젊은 지성들의 고뇌를 기록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리고 북한정권에 의해서마저도 버림받은 채 남한의 산중에서 소멸되어간 비극적 영혼들의 메아리 없는 절규를 적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들이 책에 리얼하게 표현 되어 있다. 그래서 책만 읽어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영화로 보니 더욱 더 리얼하다.

 

 

 

 

 

 

 

달밤의 괴기한 피아골축제

 

옛말에 백문불여일견이라 하였다.  이 말은백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남부군을 여러 번 읽는 것 보다 영화 한편 보는 것이 더 전달이 빠름을 말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책에 표현 되어 있는 모든 이야기를 보여 주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주요 장면만 보여 준다.

 

주요 장면을 볼 때 책에서 본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책에서 표현된 내용이 없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 장면 중의 하나가 절망적 상황에서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이다. 그 장면 중에서도 가장 궁금한 것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이다. 그래서 책을 구입하였다.

 

서문에 이어 가장 먼저 펴 본 것이 바로 절망적 상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이다. 어렵지 않게 찾았다. 남부군이 궤멸단계에 이른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에 있는 그 장면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날밤 피아골에서는 춤의 축제가 벌어졌다.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투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 댄스를 추며 흥을 돋구었다.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

 

(남부군, 400-401p, 이태)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이 밝혀 졌다. 피아골축제에서 부른 노래가 카츄사이었던 것이다. 막연히 그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으로 확인한 것이다. 궤멸에 처한 빨치산들이 노래와 춤을 추는 장면이 매우 괴기스럽게 느껴진다.

 

이 피아골축제와 관련하여 수기 남부군을 보면 최문희라는 여성 빨치산이 등장한다. 최문희에 대하여 이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문화지도원 최문희는 동작이 활달하고 격정전인 인상의 20대 여인이었다. 평양에서는 오페라 카르멘에서 카르멘 역을 맡았다. 유명한 오페라 가수이며 공훈배우였다고 한다. 그녀는 등사판으로 ‘50곡집’, ‘20곡집등 가사집을 만들어 대원들에게 배부하고 틈틈이 노래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우리는 이 기억력 좋은 여인으로부터 주로 소련 것을 번역한 군가와 가요를 수십 가지 배웠다. 노래공부도 중요한 과업 중의 하나였다.

 

(남부군, 404p, 이태)

 

 

빨치산들이 피아골축제에서 불렀던 카츄샤노래가 바로 최문희라는 여성으로부터 배운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최문희가 악극단의 배우출신이라 하니 러시아 포크댄스도 그녀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영화에 삽입되었더라면

 

책에서 묘사된 장면은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단지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잠깐 보여 준다. 모닥불 주위를 남녀 빨치산대원들이 손을 잡고 빙빙 도는 모습만 잠깐 보여 줄 뿐 노래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책에 따르면 매우 리얼하게 설명되어 있다. 궤멸 직전에 있던 남부군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 피아골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명목은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한 것이라 한다.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 청춘들이 주어진 짧은 시간을 춤과 노래로서 즐긴 것이다.

 

 

 

 

 

 

작가는 절망적 상황에서 춤을 추는 남녀 빨치산 대원들에 대하여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말이 오랫동안 기억이 남았다. 먹지 못하여 몰골이 말이 아닌 상황에서 그것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어진 짧은 시간을 카츄사노래와 함께 러시아식 포크댄스를 추었다고 하니 누구나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피아골의 괴이한 축제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졌다. 만일 작가가 이런 사실을 수기로 알리지 않았다면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라는 문구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면이 영화 남부군에 삽입 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카츄사노래와 러시아 포크댄스

 

EBS에서 영화를 보고 다음 날 책을 주문한 것은 순전히 몇 구절을 확인 하기 위해서이었다. 그것도 어떤 노래인지 궁금하여 구입한 것이다. 예전에 책을 읽긴 읽었지만 노래의 제목이 기억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이 도착하자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노래 제목이다. 그 노래 제목은 예상하였던 대로 러시아 민요 카츄샤이었다.

 

빨치산들이 절망적 상황에서 러시아식 포크댄스를 추며 불렀던 노래 카츄사이다. 그런데 카츄사노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비록 러시아민요이긴 하지만 세세계 유명 성악가들과 합창단에 의해 불려졌다. 이에 대하여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 러시아 민요 카츄샤(2014-06-08)’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러시아민요 카츄사 (Katyusha, Катюша)러시아의 문학가 톨스토이의 작품인 ‘부활’의 여주인공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 노래의 제목이 소설속의 주인공이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이 노래가 유명하게 된 것은 시인이있던 미하일 이사코프스키가 ‘부활’의 여주인공을 모티브로 시를 지은 것에서 유래한다. 1938년에 이 시를 가지고 당시 모스크바  고리키 극장의 작곡가였던 마트베이 이사코비치 블란테르가 작곡을 해서 ‘카츄샤’라는 민요가 만들어 지게 되었다고 한다.

 

카츄사는 전장으로 나가는 애인의 무사함을 기원하며 불려진 노래라 한다. 그리고 2차대전 중에 소련군 병사들 사이에서 많이 불려진 노래라 한다. 이렇게 전장에서 많이 불려졌기 때문에 군가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카츄사는 이제 러시아를 대표하는 민요가 되었다고 한다.

 

남부군을 보면 빨치산들이 카츄샤 노래와 함께 러시아 포크댄스를 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카츄샤노래가 빨치산 노래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전자공장 조립라인에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차임벨로서도 사용 되는 것을 보았다. TV에서 어느 기구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 카츄샤 노래를 애잔하게 부르는 것을 보았다. 일본군으로 끌려 갔다가 소련군 포로가 된 것이다. 거기에서 배운 노래가 ‘카츄사’라 한다.

 

카츄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민요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민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숙명 가여금 연주단에 의해 국악버젼으로 연주된 바 있고, 코리아 남성 합창단에 의해 한국어 버젼으로도 불려진바 있다. 그리고 요즘 중학교 음악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카츄샤는 전세계사람들이 사랑하는 음악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카츄샤 노래는 어떤 것일까? 러시아 가수가 부르는 카츄샤를 포함하여 각국어 버전은 다음과 같다.

 

 

 

 

카츄사 러시아 남자가수버전

(Russian Red Army Choir – Katusha)

 

 

 

 

 

 

카추샤 러시아 여자가수버전

(Varvara the song Katyusha)

 

 

 

 

 

 

 

카츄샤 영어 버전

Katyusha English version.mp4

 

 

 

 

 

 

카츄샤 독일어 버전

[SONG] Katyusha (German)

 

 

 

 

 

 

카츄샤 프랑스어 버전

Katioucha - Tatiana Bulanova & Chœur Piatnitski -- English & French subtitle

 

 

 

 

 

 

카츄샤 이탈리아어 버전

Katyusha Italian Version (with lyrics)

 

 

 

 

 

 

카츄샤 스페인어 버전

Katyusha Español

 

 

 

 

 

카츄샤 그리스어 버전

Katyusha in Greek

 

 

 

 

 

카츄사 덴미크어 버전

Katyusha in Danish

 

 

 

 

 

카츄사 폴란드어 버전

Katyusha Polish

 

 

 

 

 

카츄사 터어키어 버전

Katyusha / Катюша - Turkish & Russian Pride together!!!

 

 

 

 

 

카츄사 히브리어 버전

Katyusha in Hebrew

 

 

 

 

 

 

카츄사 중국어 버전

Катюша на китайском (Katyusha - Chinese version)

 

 

 

 

 

 

카츄사 일본어 버전

Katyusha Japanese Version (with lyrics)

 

 

 

 

 

 

카츄사 한국어 버전1

2. Котюша (Katyusha) 카츄샤 / 러시아

아주남성합창단 제10회 정기연주회(2012 1027일 성남아트센터)

 

 

 

 

 

 

카츄사 한국어 버전2

Katyusha Катюша Russian Song

 

 

 

카츄샤(Katyusha)

 


Расцветали яблони и груши
(
라스쯔비딸리 야블라니 이 그루쉬)
사과꽃 배꽃이 피었지

Поплыли туманы над рекой
(
빠쁘일리 뚜마느이 나드 리꼬이)
강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Выходила на берег Катюша
(
브이하질라 나 베롁 까쮸샤)
까쮸샤는 강 기슭으로 갔지

На высокий берег на крутой
(
나 브이쏘끼 베롁 나 끄루또이)
높고 험한 강 기슭으로

Выходила песню заводила
(
브이하질라 뻬스뉴 자바질라)
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Про степного сизого орла
(
쁘라 스찌노바 씨조버 아를라)
스텝에 있는 푸른 독수리에 대해서

Про того которого любила
(
쁘라 따보 오 까또라버 류빌라)
그녀가 사랑하고

Про того чьи письма берегла
(
쁘라 따보 치이 삐씨마 베례글라)
그녀의 편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에 대해서

 

Ой! ты песня песенка девичья
(
오이! 뜨이 뻬스냐 뻬센까 제비치야)
! 노래야 처녀의 노래야

Ты лети за ясным солнцем вслед
(
뜨이 리찌 자 야스님 쏜쩸 프슬롓)
날아라 밝게 빛나는 태양을 따라 날아라

И бойцу на дальнем пограничье
(
이 바이쭈 나 달님 빠그라니치이)
그리고 머나먼 국경의 병사에게

От Катюши передай привет
(
아트 까쮸쉬 뻬례다이 쁘리볫)
카츄샤로부터의 사랑을 전해다오 

 

Пусть он вспомнит девушку простую
(
뿌스찌 온 프스뽐닛 제부쉬꾸 쁘라스뚜유)
그가 순박한 처녀에 대해 회상 할 수 있도록

Пусть услышит как она поет
(
뿌스찌 온 슬르이쉿 깍 아나 빠욧)
그가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Пусть он землю сбережет родную
(
뿌스찌 온 제믈류 베레지옷 라드누유)
그가 조국을 지킬 수 있도록

А любовь Катюша сбережет
(
아 류봅 까쮸샤 스베레지옷)
카츄샤가 사랑을 간직할 수 있도록

Расцветали яблони и груши
(
라스쯔비딸리 야블라니 이 그루쉬)
사과꽃 배꽃이 피었지

Поплыли туманы над рекой
(
빠쁘일리 뚜마느이 나드 리꼬이)
강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고

Выходила на берег Катюша
(
브이하질라 나 베롁 까쮸샤)
까쮸샤는 강 기슭으로 갔지

На высокий берег на крутой
(
나 브이쏘끼 베롁 나 끄루또이)
높고 험한 강 기슭으로

Выходила на берег Катюша
(
브이하질라 나 베롁 까쮸샤)
까쮸샤는 강 기슭으로 갔지

На высокий берег на крутой
(
나 브이쏘끼 베롁 나 끄루또이)
높고 험한 강 기슭으로.......

 

  카츄샤(Katyusha).docx

 

 

 

동영상을 보면 카츄샤 노래는 애잔한 음조이다. 그러면서도 흥겨운 노래이다. 더구나 백댄서에 의한 러시안 포크 댄스를 보면 실제로 전장에서 흥겨운 축제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디어헌터 버전

 

러시아민요 카츄샤는 영화와 만화, 심지어 게임기등에도 적용되었다. 전자제품 조립공장 라인에서 휴식시간을 알리는 차임벨로서도 사용된다.

 

영화의 경우 디어헌터(The Deer Hunter, 1978)’에서 카츄샤음악을 들을 수 있다. 월남전 입대를 앞두고 마을청년과 처녀가 결혼식을 치룬다. 이때 러시아 이민자 출신의 마을사람들이 성대하게 한바탕 피로연 축제를 벌인다.

 

 

 

디어헌터(The Deer Hunter, 1978)

 

 

 

카츄샤 디어헌터 버전

Katyusha- The Deer Hunter Soudtrack

 

 

 

테트리스 버전

 

카츄사노래는 게임기도 적용되었다. 1980년대 8비트 컴퓨터 시대에 일본 닌텐도의 패미콤이 그것이다. 또 한때 누구나 즐겼던 테트리스게임이 있는데 삽입곡으로도 활용되었다.

 

 

 

 

카츄샤 테트리스 버전

The Next Tetris - BGM 6

 

 

 

에니메이션 버전

 

에니메이션에도 카츄샤 음악이 적용되었다. 일본에 걸즈 앤 팬저(GIRLS und PANZER : ルズ&パンツァ)’라는 에니메이션이 있는데 테마곡으로 적용된 노래가 카츄샤이다.

 

걸즈 앤 팬저는 아쿠타스(アクタス)에 의해 제작된 TV에니메이션이다. 약칭 가르반(ガルパン)’이라 한다. 여기서 팬저라는 말은 영어 Panger로서 전차를 뜻한다. 그래서 걸즈 앤 팬저(Girls and Panzer)’에 대하여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소녀들과 전차(탱크)’가 될 것이다. 2012년 만화로 연재되던 것을 같은 해 TV에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걸즈 앤 판처로 소개 되어 있다.

 

 

 

ルズ&パンツァ

 

 

카츄샤 일본 에니메이션 버전은 판차 프라우다고교 버전(カチュシャ プラウダ高校ver)’으로 알려져 있다.

 

 

 

 

카츄사 일본 에니메이션 버전

【ニコカラ】カチュシャ プラウダ高校ver【Катюша】

 

 

여기서 푸라우다고교는 에니메이션 걸즈 앤 팬저(Girls and Panzer)에 등장하는 가공의 고등학교를 말한다.

 

 

 

궤멸되는 남부군

 

수기 남부군에 따르면 풀밭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둘레를 돌며 카투사의 노래와 박수에 맞춰, 남녀 대원들이 러시아식 포크 댄스를 추며 흥을 돋구었다.”라 하였다. 더구나 피어오르는 불빛을 받아 더욱 괴이하게 보이는 몰골들의 남녀가 발을 굴러가며 춤을 추는 광경은 소름이 끼치도록 야성적이면서도 흥겨웠다.”라 하였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잠시 긴장의 끈을 늦춘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뿐이었다. 남부군은 궤멸 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면 달밤의 괴기한 피아골축제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부군은 궤멸 되었다. 영화에서는 궤멸 되어 가는 장면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 하였다. 책으로 읽는 것 이상이다. 포위되어 마치 독안에 갇힌 쥐처럼 되었을 때 추위로 인하여 동상에 걸린 발이 썩어 들어 가는 장면이 보인다. 또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을 씹는 장면이 보인다. 나무껍질을 씹다가 어금니가 통째로 빠지는 장면도 나온다.

 

 

 

 

 

 

이와 같은 절망적 장면에 대하여 영화에서는 적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이 적이다라 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직면 하였을 때 오로지 살고 싶은 본능만이 발동할 뿐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면 말미에 보면 허무하게 투항하는 것으로 끝난다.

 

 

 

 

 

 

책에 따르면 주인공은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 올 때 마다 나는 강철의 빨치산이다라고 외쳐 댔다고 하였다. 그러나 추위와 배고품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라 하였다. 오로지 생존본능만 남아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남부군의 저자 이태에 대한 기사가 있다. 책이 출간되고 난 후 세상에 널리 알려졌을 때 인터뷰한 기사이다. 시사저널에 실린 1990년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배우 안성기가 젊은 날의 자신을 열연하고 있는 영화《남부군》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는데 어떤 장면에서 우셨습니까?

 

 하동군 악양전투에서 소련전사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폭격을 맞아엄마??를 부며 신음중인 소년전사를??이제 네 할 일 다 했으니 엄마한테 가라??고 총을 쏘던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여자대원(이혜영 역)이 실행했지만 실제로는 남자대원이 총을 쏘았습니다. 간호병 박민자(최진실 역)와 헤어지는 장면도 감회가 깊었으며 안성기가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날의 나의 초상, 동료ㆍ애인의 모습이 재현된 영화를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촬영현장에 직접 가셔서 고증도 하셨다면서요?

 

 지리산 노고단, 영암 월출산, 고창 선운사 계곡, 포항 보경사 계곡 등 촬영장소에는 다섯 번 정도 갔습니다. 그런데산천의구??라는 말은 맞지 않더군요. 간호병 박민자와 헤어지던 돌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길은 전부 시멘트로 포장되고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에 텔레비전 수신기가 달려 있어 촬영하기엔 부적합하더군요.

 

 

영화 표현상 원작의 내용과 달라진 점은 없습니까?

 

 원작에 등장하는 140여명의 인물 중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묶어 영화에서는 동일한 사람으로 설정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출신 이상열과 연희대학교 영문과 수석 졸업자인 김 영(최민수 역)을 동일하게 묶은 것이 그 예입니다. 또 빨치산과 토벌군의 노래겨루기 장면에서 본래는 서로 군가를 불렀지만 영화에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의미에서두만강 푸른 물에…??를 불렀지요. 전체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같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저서에서는 합동통신사의 한 기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 국영통신인 조선중앙통신사 소속 기자가 되었으며 결국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가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합동ㆍ한국ㆍ공립 등 3개 통신사 직원 2백여명을 모아놓고 북한 중앙통신에서 파견된 책임자 박덕수가 연설을 했어요. 이튿날 가보니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고 또 2~3일 후에는 거의 안나왔어요. 의용군 나간 사람도 있고 도망간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겠지요. 최종적으로 여남은명이 선발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사람, 개혁의지를 가졌던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그들이 골라냈던 거지요.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소총의 총알 같은 것이 아닌가 해요. 시발점에서 몇 밀리미터의 차이가 멀리가서는 2~3백미터 간격으로 벌어지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순간을 인식 못하다가 나중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그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이론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회 모순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지식인의 한사람이었고,‘우측에서 보면좌경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법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우익청년단의 테러를 다루는 태도만 해도 지나치게 편파적이었습니다. 한쪽은 맞아죽어도 못본척하고, 때려죽인 사람이 도리어 영웅이 되는 사회였습니다. 좌익청년을 때려죽여서 그 시체를 남산의동번원사??라는 절 마루밑에 처넣어둔 일도 있었습니다. 좌익이나 반정부 계열 사람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요.

 

 

합동통신사 기자 재직 당시 쓴 기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것입니까?

 

 한 해 사이에 배가한아동범죄기사와밤거리 여인의 실태조사’‘쌀값파동에 관한 기사들입니다. 그때는 5개 신문에서 통신기사를 받으면 주는특종상제도가 있었는데 몇차례 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빨치산 대원은 주로 어떤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까? 누구나 입산하면 유격대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당시 대한민국 법률 치하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구 10월사건, 27사건, 여순사건에 관련된 사람이거나 좌익기관에 협력해서 수배를 받든가 박해가 예상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이념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인간관계 때문에 입산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보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민가에 들어가 약탈행위를 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남한 빨치산이 소멸되어간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원도 없었고 근거지가 될 만한 고안도 없는 상태에서 빨치산 투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리가 간 것이지요. 지리산이 제일 크다고 하지만 반경 15km만 나가면 민가가 있는 야지였기 때문에 15km 원 안에 있는 상태니까 빨치산이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지요. 유격전이 성립할 수 없는 여건에서 투쟁을 하자니 약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은 빨치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행위는 없었습니까? 책에 나오는 황대용 같은 빨치산 때문에 그들이 폭력을 일삼는인간백정??이라는 인식이 심어진 것은 아닌가요?

 

 적어도 남부군에서만은 양민학살이나 방화행위는 없었습니다. 부락민의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든가, 절대적으로 필요치 않은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훈시를 받았지요. 그러나 추운 겨울날 마을에 내려가면 구들장 뜨뜻한 안방에 자꾸 들어가게 되고, 산에 치는 꿀벌의 꿀을 따먹는 일도 있었지만황대용은 인간을 이념의 도구로 여기는 인물인데 빨치산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경우에 듭니다.

 

 

주민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을텐데요

 

 해방지구에서는 협조적이었고 그밖에는 비협조적이었지만 총칼이 있으니까 반항하는 일은 없었어요. 주민들은 좌도 우도 없이 그저 난리나 빨리 끝났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소감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전체 당원으로부터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북도당에 있을 때보다 남부군 직속부대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이현상 자신은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 있었다고 봅니다. 남한정부에도 반대하고 김일성정권에도 반대하면서 토착적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 건설을 꿈꿔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남과 북 틈새에서 처절한 삶을 살다가 죽은고독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현상이 지향하는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다면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는'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그를'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죽음을 받아들였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산중에서 여러 사령관을 모셔봤지만 그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이미지와는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었어요. 부대 통솔도 경직된 것이 아니었고 전체 대원으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았지요. 혁명가로서는 그것이 결격사유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먼발치에서만 이현상을 보았지만 김 영은 가까이서 그를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한 김 영이 능선을 넘어가다가 짐이 무거워서 낑낑대니까 옆사람이 나눠들자고 하면서 그의 짐을 져 주더래요. 몇사람이 쫓아와서선생님??하고 부르는 바람에 그가 이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휴전협정 후 남부군을 위시한 남한 빨치산들이 북한정권으로부터도 버림받음으로써 처참하게 쓰러져갔다는데 전쟁 당시 남한 빨치산과 인민군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습니까?

 

 빨치산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명령을 받아 인민군에 협력하는 관계였어요. 인민군도 당의 지배를 받고, 빨치산도 당의 지배를 받으며 상호보완의 역할을 했지 인민군이 직접 빨치산에 명령을 내리는 수직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체포당한 순간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토벌대에 쫓기며 짐승처럼 산중을 헤매다보니 오직 살고 싶다는 원시적 욕망만 남았습니다. 열흘 동안 밥 두끼를 먹은 상태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를 보고 밥한덩이 얻어먹으러 갔다가 토벌대에 잡혔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였지만 일말의 자괴감은 있었습니다. 그뒤 남원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산에 남아 있는 사단장 및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경무관으로 있던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지요.

 

 

이현상은 1953 918일 사살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해 가을, 창경원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이현상 유류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흠모의 정??이 깊었기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때 성북경찰서 앞에 그의 시체를 전시했는데 아무리 흉악무도한 범인이라고  해도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제주 43사건 당시 군사부장 이덕구의 시체를 제주시 관덕정 앞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대창으로 찌르게 했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현상의 죽음에는 의문이 따릅니다. 군에서는 그의 권총을,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갖고 서로 공로타툼을 하는데 어느 한쪽이 사살했다면 전리품이 나뉘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3의 인물이 사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현상의 부인이었던 하모여인이 생존해 있고 그 아들이 모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보았습니까?

 

 부인이 재혼해서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남부군'생존자는 몇 명이나 되고 어떻게 살고 잇습니까?

 

 전체 대원이 650명이었고 휴전협정 당시인 538월에는 여자 13, 남자 11명으로 전체 24명이엇습니다. 책이 출판된 후 연락이 닿아 김 영과 두 여자대원을 만났습니다. 김 영은 《깃발없이 가자》라는 시집을 출판했으며 여자대원 이옥자는《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의 어머니이며 또 한 여자대원은 중풍에 걸려 있습니다.

 

 

김 영씨와의 해후가 궁금합니다.

 

 출판사를 통해 어느날 연락이 왔더군요. 그는 폐색증이 심해 차를 한 정거장도 타지 못한다면서 나더러 오라고 햇습니다. 서울 영등포 시장에서 사과장사를 하는 그를 만났습니다. 37년만에 만났습니다….(눈시울을 붉히며 안경을 벗어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965년에는 李愚?라는 이름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어 3년 동안 정당활동을 하셨으며 또 현재도 민주산악회 부회장으로 김영삼씨와의 산행이 잦은 걸로 압니다.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김영삼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지가 대단히 강하고 시국에 대한 통찰력이 천재적이라고 봅니다. 일 추진력도 대단하고….

 

 

●3당합당을보수대야합'이라고 보는 비판적 견해도 있습니다.

 

 김총재의 결단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20대에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요즈음 대학생들의 시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서른살인 막내아들이 대학교에 다닐 때 화염병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 착잡했습니다. 말릴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내 자식은 안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5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 최루탄을 마셔가면서 6월항쟁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6공은 일단 국민들의 선거를 통해서 출범했기 때문에 합법성인 인정된다고 봅니다. 운동권 학생 중에 북한선전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주시파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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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되는 날에야 지리산에서 숨진 영혼이 승천할 수 있다는 말로써통일염원'의 의지를 피력하신 적이 있는데 문익환ㆍ황석영ㆍ임수경씨의 방북은 어떻게 보십니까?

 

 개인적으로 돌출행위를 한다고 해서 통일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통일 프로그램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자신을 역사의 물결에 밀려온 것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시대의 물결을 타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까?

 

훌륭한 저널리스트입니다.

 

 

만일 통일이 된 후에 《남부군》을 다시 쓴다면 내용이 바뀔 수도 있습니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남부군》의 저자 , 시시저널 1990-07-01)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오래 전에 읽었던 남부군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젊은이들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보니 세상에 이런 일도 다 있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같은 연령대에 읽었을 때 더욱 더 리얼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지리산에 가게 되면 이전에 읽었던 남부군의 내용이 떠 올려 졌다.

 

지리산에 두 번 가보았다. 한번은 산악회를 따라 갔었고, 또 한번은 순례법회를 따라 갔다. 이중 순례법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법계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 법계사, 해발1450m 최고높이의 산신기도도량(2008-04-14)’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지리산 법계사는 해발 1450미터에 있다. 바로 위쪽에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이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 있는 법계사를 당일치기로 가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12일 일정으로 갔다.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법계사에서 하룻밤은 이색적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일까 문명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차소리도 들리지 않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에 있었다. 그런데 안내판에 따르면 법계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의 근거지이었다고 한다.

 

 

 

 

 

표지판을 보면 법계사는 빨치산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곳이라 하였다. 법계사가 지리산 안쪽 깊숙한 곳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해발 1450미터로 고도가 높아 빨치산들이 은신하기에 최적의 장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부군 주둔하던 곳이라 한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법계사에서의 하룻밤이 특별나게 생각되었다. 더구나 이전에 읽었던 남부군에 대한 이야기가 떠 올랐다. 그래서 그 때 당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 죽은 수 많은 영혼들이 이곳 법계사 앞마당에서 러시아민요와 함께 러시아 포크댄스를 추던 장소가 아니었을까?”라고도 생각해 보았다.

 

 

 

 

 

 

 

 

2014-12-15

진흙속의연꽃

 

 

 

카츄샤(Katyusha).doc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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