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법우님을 보내며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5. 22:33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법우님을 보내며

 

 

 

영화 보는 재미에

 

요즘 영화를 즐겨 보고 있다. TV를 통해서이다. 지나간 영화이지만 엄선해서 보여 주기 때문에 볼만하다. 더구나 HD고화질로 제공되기 때문에 예전의 TV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다. 특히 EBS에서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에 명화를 보여 주는데 요즘 영화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영화를 볼 때 늘 준비하는 것이 있다. 관심 있는 영화를 볼 때는 디카스마트폰을 준비 한다. 디카로는 명장면을 찍을 준비 만반의 준비를 위해서이고, 스마트폰은 명대사를 기록해 놓기 위해서이다.

 

영화를 보면 명장면 못지 않게 명대사도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보는 영화임에도 볼 때 마다 새로운 것은 장면과 대사를 다시 음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 보던 영화의 맛이 다르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 보는 영화의 맛이 다르다.

 

포레스트 검프(1994)에서

 

새해 들어 첫 번째 일요일 오후에 포레스트 검프를 보았다. 검색을 해 보니 1994년 영화이다. 그러고 보니 20년 전에 만들어진 이제 흘러간 영화가 되었다. 극장에서 본적이 없고 TV에서 여러 번 영화이다. 이번에 몇 번째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오랜만에 보니 마치 처음 접하는 것처럼 새롭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이미 보았던 장면이 되살아 나기도 한다. 그러나 대사를 보니 전혀 새로운 느낌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인상적인 대화를 스마트폰 메모에 저장하였다. 그런 대사 중의 하나가 죽음도 삶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어머니가 아파서 죽음에 이르게 되자 아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하여 죽음도 삶의 일부란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주인공의 여자친구이자 아내가 죽게 되자 이 말을 또 하게 된다. 아내가 불치의 병으로 젊은 나이에 죽게 되자 죽음도 삶의 일부이네라고 어머니가 했던 말을 그대로 말한다.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바보지

 

영화를 유심히 보면 명대사가 많다. 영화를 여러 번 보았지만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포레스트 검프에서 기억해 두고 싶은 또 하나의 명대사가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경직된 듯한 모습을 보고 누군가 너 바보 아니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 주인공은 이런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대단한 콤플렉스를 가졌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주인공인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바보지라며 대응한다. 영화에서 이 대사는 앞서 언급된 죽음도 삶의 일부다라는 말과 함께 두 번 등장한다. 그래서 기억이 된다.

 

행위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주인공이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바보지라고 말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 할 수 있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행위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 바라문인 것도 아니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 (stn136)

 

 

부처님이 사왓티에서 지체 높은 가문의 바라문의 집앞에서 탁발 하였다. 부처님 당시 사성계급의 정점에 있었던 바라문들은 부처님의 교단에 불만이 많았다. 그것은 바라문 가문에서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자가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화가 단단히 난 바라문이 부처님의 탁발하는 모습을 보자 까까중아, 거기 섰거라. 가짜 수행자여, 거기 섰거라. 천한 놈아, 거기 섰거라.(Sn1.7)”라고 모욕을 준다. 이에 부처님이 바라문이여, 도대체 당신은 천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이 게송을 읊는다.

 

부처님 당시에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이 결정 되었다. 바라문가문에 태어나면 바라문으로 살고, 노예로 태어나면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 가야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태생에 의하여 신분이 결정되는 것을 부정하였다. 그 대신 행위에 의해 신분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능인이 되고,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됩니다.(stn651)”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행위에 의해 바라문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나,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바라문이 되기도 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stn650)”라 하였다.

 

누가 바보인가?

 

마찬가지로 포레스트 검프에서 주인공이 바보처럼 보이지만 겉 모양만 보아서는 바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다지 똑똑하지 않아 보이고 경직되 보이는 주인공의 외양만 보고서는 너 바보 아니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단호하게 바보짓을 하는 사람이 바보지라며 대응한다.

 

바보짓을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행위를 하는 자를 말한다. 부처님 말씀에 행위에 의해서 천한 자도 된다고 하였는데 바보 같은 행위를 한다면 바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보 같다고 하여도 바보의 행위를 하지 않으면 결코 바보라 볼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바보 같아 보이는 주인공은 바보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바보라 볼 수 없다.

 

포레스토 검프를 보면서 건진 것은 영화대사 두 구절이다. 하나는 죽음도 삶의 일부다라는 말과 바보짓을 해야 바보지라는 말이다. 두 대사 중에 전자가 와 닿는다. 그것은 지난해 끝자락에 법우님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난 법우님

 

법우님이 암투병하다 세상을 떠났다. 지난 12 30일의 일이다. 연락을 받고 장례식장에 도착한 날은 12 31일 저녁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법우님들 몇 분이 왔다. 함께 한 법우님에 따르면 죽기 바로 하루 전까지만 해도 통화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몇 년간에 걸친 암투병과 암의 전이로 인하여 몸의 면역체계가 완전히 파괴 되어 돌아 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베이붐시대 초반에 태어났던 법우님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다. 그래서 아가씨 또는 처녀 보살이라 불렸다. 법우님은 가정을 이루지 않아 가족이 없다. 다른 장례식장과는 달리 화환도 별로 없고 기업이나 단체의 화환도 보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장이 더욱 더 썰렁하였다.

 

법우님은 불교교양대학 동기이다. 2004년 불교와 인연을 맺었기 때문에 알고 지낸지 십년 된다. 그러나 교류는 별로 없었다. 다만 일부 인연 있는 법우님들은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있어서 암투병 중에도 병문안을 자주 갔다고 한다.

 

법우님과 교류가 별로 없었음에도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생이 참으로 무상함을 느꼈다. 죽음이라는 것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듯이 여겨 졌다. 이제 까지 주로 나이 든 세대의 죽음만 접하였으나 같이 공부한 도반의 죽음을 접하자 마치 친척이 죽은 듯이 안타까웠다. 영화대사에서처럼 죽음이란 삶의 일부이다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도처에 깔려 있는 죽음

 

누구든지 태어나면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태어나는 순간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삶의 운명은 그런 것입니다.(stn575)”라 하였다.

 

그런데 요즘은 늙어서 죽는 것 보다 사고사로 죽는 경우도 매우 많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 비행기가 추락하여 죽기도 하고, 열차가 전복되어 죽기도 하고, 배가 침몰 되어 죽기도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천장이 무너져 죽기도 하고,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견고해 보이던 바닥이 꺼져 추락사 하기도 한다. 이렇게 죽음은 도처에 깔려 있다.

 

길가던 사람이 삭아서 낡아 빠진 간판이 바람에 흔들려 떨어지는 바람에 죽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그 후로는 간판 밑을 지날 때 항상 조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으로부터 도망 갈 수 있을까?

 

평소 건강하던 사람이 어느 날 검진에서 암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말기라고 한다. 의사의 예언대로 불과 몇 개월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렇게 본다면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숫따니빠따에서는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럽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stn574)”라 하였다. 여기서 키포인트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라는 말이다. 뒤집어 말하면 한마디로 사람의 목숨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가 될 것이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사고로 인한 사망이 갈수록 늘어 나고 있다고 한다. 사고사는 급작스럽게 죽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숫따니빠따에서 말한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다라는 말은 진리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자연사라 하여 목숨이 정해져 있을까?

 

자연사 역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기대수명까지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대수명 이상 산다고 하여도 백년을 넘기 힘들다. 백년 이내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고사나 자연사 모두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죽을까봐 벌벌 떤다

 

미래가 불확실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초조와 불안에 시달릴 것이다. 죽음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면 그 죽음이 내일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잠 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 될지 알 수 없다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운명이다. 그래서일까 숫따니빠따에서는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stn576)”라 하였다. 여기서 키워드는 죽음의 두려움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구절을 다시 말하면 한마디로 사람들은 죽을까봐 벌벌 떤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앞날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 한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도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초기경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 틀림 없다. 부처님은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stn576)”라 하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죽을까봐 두려워 하며 살아 간다. 언젠가는 맞부딛쳐야 할 죽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잊고 살아 간다. 애써 잊고 살아 가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 피해 가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 그렇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 하려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믿음과 지계와 보시의 생활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을 하면 보험을 들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또 저승갈 노잣돈을 준비해 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그러므로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서

미래를 위해 쌓아야 하리.

공덕이야말로 저 세상에서

뭇삶들의 의지처가 되리.”(S3.20)

 

 

이렇게 믿음으로서 지계하고 보시하는 하는 생활을 하면 사실상 천상행은 보장 된 것이나 다름 없다. 죽음에 임해서도 행복하게 임종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천상에 태어나는 것 보다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저승사자도 잡아 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위대한 불사(不死)의 열반

 

초기경을 보면 죽음의 신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저승사자의 개념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죽음의 신도 알아 보지 못하는 삶을 살라고 하였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이 몸은 물거품과 같다고 알고

아지랑이와 같다고 깨닫는 님은

악마의 꽃들을 잘라버리고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 Dhp46)

 

 

아비담마에 따르면 사람이 임종에 이르면 업의 표상태어날 곳의 표상을 보게 될 것이라 한다. 이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마음이 있어야 존재하기 때문에 재생연결의 마음이 일어날 때 다음 생이 시작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게송에 따르면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서리라라 하였다. 이는 번뇌가 부수어진 수행승은 악마의 시야를 넘어선다라는 뜻이다. 악마의 시야를 넘어 섰다는 것은 악마의 눈에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재생하여 다시 태어나는 자들은 마음이 일어 나기 때문에 죽음의 왕이 볼 수 있지만, 마음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죽음의 왕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 고디까의 의식을 찾아 헤메는 죽음의 신은 위와 아래와 옆과 사방과 팔방을 찾아도 그를 발견하지 못했네. 고디까는 어디로 갔는가?(S4.23)”이라 하였다. 해탈하여 열반에 든 고디까에게 마음이 일어날 리가 없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재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신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마음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의 극복이다. 그래서 죽음의 왕의 시야를 넘어선 것에 대하여 위대한 불사(不死)의 열반이다라 하였다.

 

아라한의 죽음은 축복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죽지 않는다. 그리고 태어나지도 않는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임종으로 죽게 되면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오온에 집착하는 존재에게 있어서 오온의 죽음이 있을지 몰라도 오온을 내 것이라 보지 않는 아라한의 죽음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라한의 죽음에 대하여 불사(不死)’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의 죽음은 축복과도 같은 것이다. 모두가 죽음으로 슬퍼 하고 비통해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이는 죽음이 아니고 불사이기 때문에 아라한의 죽음은 축복 그 자체인 것이다.

 

법우님의 명복을 빌며

 

항상 함께 할 것 만 같았던 이들이 떠날 때 인생무상을 느낀다. 더구나 병고로 또는 사고사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슬프다. 나이 들어 살만치 살다가 떠나면 호상(好喪)’이라 하지만, 이른 나이에 젊은 나이에 떠나는 죽음은 애상(哀喪0’이라 한다.

 

애상을 당한 법우님의 명복을 빈다. 착하게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선처에 났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고 남은 자들은 슬퍼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럴 때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의 말씀이 틀림 없다.

 

 

[세존]

 

1

이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있습니다.

 

2.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런 것입니다.

 

3.

결국 익은 과일처럼

떨어져야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4.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빚어낸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그렇습니다.

 

5.

젊은이도 장년도

어리석은 이도 현명한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해 버립니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6.

죽음에 패배 당하여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비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지들도 그가 아는 자를 구하지 못합니다.

 

7.

친지들이 지켜보지만,

보라 매우 애통해하는 자들을!

죽어야 하는 자들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갑니다.

 

8.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9.

그대는 오거나 가는 사람의

 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대는 그 양극을 보지 않고

부질없이 슬피 웁니다.

 

10.

미혹한 자가 자기를 해치며,

비탄해한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라도 생긴다면,

현명한 자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11.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 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12.

스스로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죽은 자들을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비탄해 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13.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14.

또한 스스로 지은 업으로 인해

태어날 운명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죽음에 정복당해

전율하고 있는 뭇 삶들을 보십시오.

 

15,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그 생각과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떠남도 이와 같으니,

저 자연의 이치를 보십시오.

 

16.

가령 사람이 백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을 떠나

이 세상의 목숨을 버리게 됩니다.

 

17.

그러므로 거룩한 님에게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

‘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18.

보금자리에 불난 것을 물로 꺼버리듯이,

단호하고 지혜롭고 잘 닦인 현명한 사람이라면,

바람이 솜을 날리듯,

생겨난 슬픔을 날려버려야 합니다.

 

19.

자신을 위해 행복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있는 비탄과 탐욕과 근심과

자기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20.

번뇌의 화살을 뽑아,

집착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슬픔을 뛰어넘어

슬픔 없는 자로 열반에 들 것입니다.

 

(화살의 경, 숫따니빠따 Sn3.8, 전재성님역)

 

 

2015-01-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