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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는 눈물과 이유 있는 눈물, 시간역행영화 박하사탕

담마다사 이병욱 2015. 3. 26. 11:14

 

이유 없는 눈물과 이유 있는 눈물, 시간역행영화 박하사탕

 

 

 

지금은 그런 느낌이 덜 들지만 어렸을 때는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또 어떤 때는 꿈속에서 보았는지 현실인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었다. 지나가는 길에 어떤 장면을 보았을 때 매우 익숙한 듯한 느낌이나,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예전에 한 번 보았던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를 말한다.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마치 여기에 있도록 예정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느낌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시간역행영화 박하사탕

 

수요일 심야에 영화 박하사탕을 보았다. 매우 수요일 EBS1에서는 한국영화특선을 보여준다. 그것도 밤 12시가 갓 넘은 심야시간대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잠을 설쳤다. 심야에 영화를 본 이유도 있지만 영화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해석해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박하사탕은 시간역행영화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흐름은 과거 또는 현재에서 미래로 전개 된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 될지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렇게 앞 일을 알 수 없도록 해 놓은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줄거리이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주인공의 미래나 운명 역시 알 수 없다.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매력은 반전에 있다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고 상상도 못한 반전이 벌어졌을 때 영화를 보는 묘미를 느낀다. SF영화에서 기괴하게 생긴 생명체라든가 식스센스에서 반전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간역행 영화는 이미 결론이 난 상태나 다름 없다. 이후 장면이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에 대한 흥미도 극적인 반전도 볼 수 없다. 주인공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가며 스토리를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그 짧은 순간에

 

박하사탕은 주인공 설경구가 기차에 치여 죽는 장면에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치여 죽기 일보직전에 나 옛날로 돌아갈래!”라며 절규하는 장면을 말한다. 그 짧은 순간 몇 초 사이에 어떤 생각이 일어났을까? 수 초 사이에 지나온 삶의 과정이 파노라마쳤을 것이다. 이를 영화에서는 기차길 장면을 이용하여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장면을 보여 준다.

 

흔히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죽기 직전에 몇 초 사이에 지나간 인생을 본다고 한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인생의 전과정이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현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시간이 늘어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이 기차에 치여 죽기 일보 직전에 삶의 전과정이 보였을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가장 의미 있는 사건들 몇 개만 보여 준다.

 

노동자들의 야유회에서

 

영화를 보면 처음부분과 시작부분이 거의 일치한다. 다만 시간대가 20년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처한 상황과 환경은 같은 것으로 되어 있다.

 

설경구가 기차에 치여 죽을 때가 나이 40세이다. 20년 전의 설경구는 20세라 볼 수 있다. 20세의 설경구와 40세의 설경구는 20년 이라는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설경구라는 인물은 같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같은 설경구도 아니고 같은 상황도 아니다. 20년 전과 20년 후의 상황은 다른 것이다. 이는 조건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의 설경구는 20세로서 순수한 청년이었다. 시대적 배경은 1979년이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야유회장면부터 영화는 시작 된다. 같은 또래의 남녀 젊은이들이 그 때 당시 유행하였던 노래를 부르고 디스코를 추는 등 시대적 상황을 잘 묘사 하고 있다.

 

이상해요, 여기 한번도 안 와봤는데 익숙해요

 

주인공 설경구에게는 애인이 있다. 같은 또래의 여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설경구에게 끌려서 호감을 보인다. 아직까지 험한 세상을 겪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가진 청년들이다. 그런데 설경구는 주변을 둘러 보더니 이상해요, 여기 한번도 안 와봤는데 익숙해요라고 말한다.

 

설경구는 왜 이렇게 말을 하였을까? 영화를 보면 이미 답이 나와 있다. 시간역행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에서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강가에서 노는 친구들, 그리고 철로와 철로를 지나는 기차 등이 언젠가 한번 와 본 듯 매우 익숙한 것 장면을 말한다.

 

20세의 설경구가 야유회에서 본 강가와 철교는 사실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럼에도 설경구는 철교랑 강이라 내가 너무 잘아는 데 거든요라고 말한다. 이에 애인은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 꿈에서 본 거래요라고 말한다. 이에 설경구는 정말 꿈이었을까요?”라고 의문한다. 그러자 여자는 영호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대사를 적어 놓은 것은 스마트폰에서 음성녹음을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기세간은 왜 익숙할까?

 

설경구는 강이랑 철교랑 너무 익숙하다고 하였다. 한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익숙하다고 말하자 애인은 꿈에서 본 것이었을 것이라 말한다.

 

꿈속에서는 자신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장면을 많이 보게 된다. 특히 어렸을 때의 꿈이 그렇다. 그래서 G 은 꿈과 관련된 책을 보면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 그 사람의 일생을 암시한다고도 하였다.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하여 소개 해 놓은 책이 이부영박사의 책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이라는 세 권의 책이다.

 

사람들은 매일 꿈을 꾼다. 어떤 꿈은 너무 생생하여서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이 안갈 때 도 있다. 또 어떤 꿈은 컬러풀한 총천연색으로 기분이 좋은 꿈도 있다. 반면 어두칙칙하고 두렵고 무서운 악몽을 꿀 때도 있다. 이렇게 갖가지 꿈을 꾸지만 꿈을 꾸는 주체는 항상 자기자신이다. 그래서 꿈속에서 나꿈꾸는 나는 같은 것이다.

 

꿈속에서 나와 주변환경은 모두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꿈속에서 나는 꿈속의 기세간이 매우 익숙해 보인다. 이렇게 꿈속의 기세간이 익숙한 것은 꿈꾸는 나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꿈을 꾸는 나는 대아(大我, I)’라 볼 수 있고, 꿈속의 나는 소아(小我, i)’로 볼 수 있다.

 

이왕이면 좋은 꿈을

 

영화에서는 언젠가 한번 본 장면에 대하여 꿈속에 본 것이 아닐까?’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현실은 꿈속이나 다름 없다. 꿈속의 나(i)는 꿈속의 삼라만상 등의 기세간이 매우 익숙하다. 이는 대아(I)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대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꿈속에서의 나나 꿈속에서 환경은 모두 자신이 만든 것이다. 소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주변환경이 익숙한 것은 마치 꿈속에서 나나 기세간은 모두 꿈꾸는 나가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설경구가 강과 철교 등 주변환경이 익숙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애인은 꿈속에서 보았을 것이라 말하며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좋은 꿈을 꾸는 것이 좋다. 하지만 꿈은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가려 꿀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왕이면 좋은 꿈을 꾸기 바란다.

 

영화에서 주인공 설경구에게는 좋은 꿈이 아니었다. 이는 영화에서 시간역행하며 보여 주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이유 없이 흐르는 눈물

 

설경구는 애인의 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슬며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언젠가 본듯한 강이며 모래사장이며 철교를 유심히 바라 본다. 특히 철교가 매우 익숙한 듯 오랫동안 응시한다. 마치 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전에 본 것처럼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익숙하긴 하지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설경구는 철교를 한참 응시하다 무언가 본 듯한 표정을 짓는다.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슬프고 안타까운 표정이다. 그리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른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20세의 설경구는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었던 철교를 한 없이 응시하며 눈에 눈물이 맺혔다. 주인공은 왜 이유 없이 울었을까?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에서는 20년 후 설경구가 그 철교에서 나 옛날로 돌아갈래!”라며 기차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장면이 나온다.

 

알 수 없는 미래라 하지만

 

미래는 어떻게 전개 될지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이라 한다. 왜 그럴까?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용하다는 점집에서 과거는 귀신같이 알아 맞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 해 주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현재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살아온 인생역정이 얼굴모습이나 성향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집에서는 얼굴만 보아도 대충 그 사람에 대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워낙 변수가 많기 때문에 예측하기 어렵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하여 미래를 말해 준다는 것은 넌센스에 가깝다. 그럼에도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 사람이 하는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이 지은 업대로 과보를 받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신이 지은 행위에 따라 미래가 결정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살아 온 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미래가 보인다.

 

눈물의 의미는?

 

20세의 설경구는 전에 본적이 없는 철교를 한동안 응시하다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눈물도 있을까? 사람이 울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아기가 울 때는 배가 고파서 젓 달라고 울 것이다. 갑순이가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 없이 운 것도 갑돌이 생각 뿐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한 없이 운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더구나 한번도 본적이 없는 철교를 바라보며 눈에 눈물이 맺혔다면 자신의 운명을 어느 정도 예측한 것이 아닐까?

 

다시 그 철교를 바라보며 눈물을

 

40세의 설경구는 20년 동안 산전수전 다겪었다. 순수한 청년이 군대에 들어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살인까지 하게 된다. 1980년 이등병 설경구는 광주에 개엄군으로 투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소녀를 사살하고 만다. 이후 경찰에 투신하여 경찰로 살아 가지만 해서는 안될 고문 등으로 점차 망가지는 삶을 살게 된다. 이후 경찰에 나와 사업을 하지만 주식 등으로 빈털터리이가 되고 이혼까지 당하게 된다.

 

철저하게 망가지고 버려진 설경구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자살을 생각한다. 그러다 20년 전의 공단 노동자들의 야유회 소식을 듣게 된다. 그래서 다시 20년 만에 그 강, 그 철교 있는 곳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20년 전의 순수한 청년이 아니었다. 산천은 변함이 없고 철교 역시 변함이 없지만 사람은 모두 변해 있다. 더구나 설경구 자신은 더 이상 옛날의 그 청년의 모습이 아니다. 특히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 옛날의 애인은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중환자실에서 투병하다 죽었기 때문이다.

 

20년 만에 다시 그곳에 되돌아 온 설경구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마구 날뛰다가 다시 조용히 한 곳에 자리 잡는다. 20년 전 청년이 앉았던 자리이다. 그런 설경구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20년 전 철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20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철교를 보며 눈물이 맺힌 것이다.

 

 

 

 

 

 

 

 

현재를 놓쳐 버리면

 

20년전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고, 20년 후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설경구는 악몽을 꾼 것일까? 그래서 마주 보고 달려 오는 기차를 향하여 나 옛날로 돌아 갈래!”라 하였을까?

 

영화의 첫 부분은 40세 된 설경구가 열차에 부딪쳐 죽기 일보직전부터 영화가 시작 된다. 대부분 영화가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 가며 사건이 전개 되지만 박하사탕과 같은 영화는 반대로 현재에서 과거로 시간이 거꾸로 흘러 가며 영화가 전개 된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시점은 현재이다.

 

모든 사건은 현재에서 시작 된다. 과거의 일어 났던 일도 현재로 수렴되고, 앞으로 일어날 일도 현재에서 출발된다. 그러나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어떻게 될까?

 

마음이 과거에 가 있으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음이 미래에 있다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를 놓쳐 버리면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있기 쉽상이다.

 

이유 없는 눈물과 이유 있는 눈물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20세 청년이 철교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예측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것이다. 어떤 운명일까?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변수가 많은 미래가 어떻게 전개 될지는 용하다는 점집에서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미래는 운명 지워진 것이나 다름 없다.

 

영화의 첫부분에서는 40세의 장년이 철교를 바라보며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회환의 눈물이라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는 것이다. 어떤 운명일까? 역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20년 전의 20세에 이유 없이 흘렸던 눈물이나 20년이 지난 40세에 이유 있는 눈물이나 모두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항상 현재를 살면

 

영화에서 20세 시절의 시점도 현재이었다. 영화에서 40세 시절 역시 현재이다. 주인공이 더 오래 살아 60이 되었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점은 현재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들은 항상 현재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마음이 과거로 가 있거나 미래에 가 있다면 계속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낸 꿈속의 나는 꿈속의 기세간에서 살아 간다. 그런데 꿈속의 기세간은 매우 익숙하다. 대아가 꾸는 꿈에서 사는 소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꿈이 꿈이 아닌 줄 알면 된다. 현재를 놓치지 않으면 된다.

 

현재를 놓치면 꿈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과거에 살고 미래에 살게 된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꿈속에 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살라고 가르치셨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M131)

 

 

 

2015-03-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