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천주교시복식 참관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4. 8. 17. 13:25

 

 

천주교시복식 참관기

 

 

 

파파 파파 여기!”

 

참으로 극적인 장면이다. 교황이 오픈카를 타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돌자 수염이 나고 피골이 상접하다 시피 깡마른 사람이 노랑 피겟을 들고 파파 파파 여기!”라고 다급하게 외친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 한듯이 교황은 오픈카에서 내려 허름하고 깡마른 사람에게 다가 간다. 그러자 깡마른 사람은 교황의 손에 입을 맞춘다.

 

 

 

프란치스코교황 김영오씨 위로(유튜브)

 

 

 

깡마른 사람은 유민아빠로 잘 알려져 있는 김영오씨이다. 한국천주교 시복식날 세월호유가족들 수백명이 초대 받았는데 이순신장군상 아래 가장 요지에 자리잡은 것이다. 그래서 U자형 길을 오픈카가 돌게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세월호유가족 중에서 무려 33일간이나 단식을 하고 있는 유민아빠와 교황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 눈물이 날 것 같다

 

유민아빠가 교황의 손에 입맞춤을 하고 있는 장면에 대한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처음 접하였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적이었다. 이날 교황이 세월호유가족을 만날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있었지만 이처럼 극적인 장면은 전혀 예상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날의 동영상을 본 네티즌들의 다수가 , 눈물이 날 것 같다라는 말이었다.

 

극적인 장면을 지켜 보던 현장의 천주교신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기사로 보도 되기도 하였다. 네티즌들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라고 하였다. 왜 사람들은 가슴뭉쿨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을까? 그것은 이제까지 세월호유가족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와 여당의 대접을 받지 못하였고, 최근에는 야당으로 부터도 미운 오리새끼 신세가 된 듯 하다.

 

왜 유가족들은 교황에게 파파 파파하며 절규한 것일까?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이날 광화문광장에 펼쳐진 플레카드가 말해 주듯이 “We want the truth(우리는 진실을 원한다)”라는 말이다. 유족들은 진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내새끼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어서 단식을 하고, 행진을 하고, 서명운동을 한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을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이 있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득권자들은 이를 무시하였다. 자식을 억울하게 잃은 것도 억울한데 마치 범법자 취급을 한 것이다. 그래서 가는 곳 마다 경찰이 가로 막고 심지어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인하여 실신하여 응급차에 실려 나가기도 하였다. 이렇게 120일 이상 유가족들은 서럽게 살아 왔다. 그런 그들을 다독여 준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교황이었다.

 

역사적인 현장에 가 보기로

 

8 16일은 천주교 시복식날이다. 30년만에 방한한 교황이 직접 시복식을 집전한다고 하여 백만명의 인파가 몰릴 것이라 한다. 역사적 순간이다. 그래서 가 보았다.

 

역사적인 날이라 생각되면 늘 현장을 가 본다. 사진과 동영상과 글로서 가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천주교 시복식날 역시 역사적인 날이기 때문에 불자이지만 가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선을 넘지 마십시요

 

오전 9시 넘어 종각역에 도착하였다. 시청역은 무정차 통과이기 때문이다. 광화문 광장으로 그것도 세월호유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천주교신자들만 입장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공항게이트처럼 곳곳마다 게이트가 있어서 신분이 확인 된사람만 입장이 허용된다. 그것도 몸수색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참관자들은 금지구역 밖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차단벽에는 이 선을 넘지 마십시요라는 경고문구와 함께 경찰이 철통같이 통제하고 있다.

 

 

 

 

 

이날 광화문광장에는 천주교 신자들 17만명 가량이 몰렸다고 한다. 광화문에서 시청의 서울광장에 이르기까지 천주교신자들로 가득찬 것이다. 그러나 일반관람자들은 금지구역이 설정 되어 있어서 하얀 차단벽 바깥에서 서서 볼 수 밖에 없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 같다.

 

 

 

 

 

 

 

 

 

 

 

 

 

1미터 이내의 하얀플라스틱 차단벽으로 인하여 안쪽과 바깥쪽이 구별된다. 안쪽 사람들은 모두 검증된 사람들이고, 바깥쪽 사람들은 검증되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경찰들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과연 백만명 모였을까?

 

보도에 따르면 차단벽 안쪽에는 약 17만명의 천주교 신자가 운집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단벽 바깥 쪽의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하얀플라스틱 차단벽 밖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간이 비좁아서 통로에는 겨우 두 세람이 스칠 정도이다. 인도 안쪽까지 모두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내 주었기 때문이다. 바깥에 종종 많은 규모의 사람들이 앉아 있긴 하지만 차단벽 안쪽과 비교하면 매우 협소하다. 그럼에도 매스컴에서는 백만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과장된 수치이다. 차단벽 안쪽이 17만명이라면 차단벽 바깥에는 그 보다 많은 수가 모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만명 서명 운동

 

그런데 이날 바깥쪽에서 본 광경 중의 하나가 있다. 그것은 세월호참사와 관련 서명부스이다. 곳곳에 서명 부수가 마련 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에 마련 되어 있다. 지난번 400만명 서명을 하여 제출하였으나 꿈쩍도 하지 않자 이번에 천만명 서명 운동에 돌입 한 것이다.

 

 

 

 

 

천주교 부스에서는

 

바깥에는 천주교부수가 마련 되어 있다. 두개의 천막이 일조로 되어 있는데 곳곳마다 설치 되어 있다. 한쪽 부수에서는 서울시의 수도물 브랜드인 아리수를 산더미로 쌓아 놓고 무료로 나누어 준다. 바로 옆 부스에서는 교황관련 서적을 팔고 있다. 이런 부수가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는데 모두 동일한 형태이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천주교가 매우 조직화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입장한 천주교인들은

 

이날 행사를 보기 위하여 최대한 가까이 가 보았다. 초대받지 못한 객이기 때문에 차단벽 바깥에서 안쪽을 들여다 서서 들여다 볼 수밖에 없다. 청계광장 방면에서는 입장한 천주교인들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광화문광장에 모여 든 천주교인들은 교구별로 자리가 배정 되어 있다. 그래서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교인들이 지정된 자리에 앉아 교황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옥외형 전광판에서 KBS방송을

 

좀더 잘 보기 위하여 프레스센터방향으로 이동하였다. 그럼에도 광화문을 볼 수 없다. 다만 곳곳에서 설치 되어 있는 전광판으로 밖에 볼 수 없다. 특히 ‘SAMSUNG’로고가 들어간 임시전광판이 곳곳에 설치 되어 있어서 신도들은 전광판에 시선을 집중한다.

 

프레스센터 앞에는 대형 옥외형 전광판이 설치 되어 있다. 원래 광고전광판인데 이날 만큼은 KBS방송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교황이 나타나자 일제히 180도 방향을 바꾸어

 

차단벽 안쪽에는 신도들이 교황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 교황이 있는 북쪽 방향을 바라 보고 있다.

 

 

 

 

 

 

그러나 교황이 나타나자 일제히 180도 방향을 바꾼다. 교황이 있는 북쪽을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남쪽에 있는 대형전광판을 보기 위해서이다. 보이지 않는 교황 보다 비록 전광판속의 교황이지만 보이는 곳을 찾다 보니 정반대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하얀 머리수건을 쓴 천주교인

 

안쪽의 천주교인들은 잘 훈련된 듯이 보인다. 모두 진지한 자세로 교황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 보고 때로는 박수와 함께 환호 한다. 특히 여자 천주교인들 중에서는 하얀 머리수건을 쓴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대형전광판에서는 머리수건을 쓴 천주교인을 클로즈업하여 종종 보여준다. 마치 천주교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머리수건은 어떤 의미일까? 검색하여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사를 비롯한 교회 예식에서 여성 신자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 이는 초대 교회부터 전해 오는 관습으로 세례성사를 통해 얻게 된 부활의 새 생명을 상징한다. 미사보는 화려하게 치장한 머리를 가려 정숙함과 겸손함을 나타내기도 한다.

 

(미사보, 천주교용어자료집)

 

 

천주교사전에 따르면 여인들이 쓰는 하얀 미사보정숙함과 겸손함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였다.

 

왜 미사보를 쓸까?

 

미사보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시각이 있을 수 있다. 천주교사전에서 정의된 것처럼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과거 부정적 전통에 얽매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미사보와 유사한 형태는 나라마다 있다. 이슬람권에서는 얼굴가리는 히잡이 있다. 종종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 출신의 여인들이 길거리에서 얼굴만 내 놓고 다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미사보와 유사한 형태일 것이다.

 

옛날 우리나라 여인들도 히잡이나 차도르 비슷한 것이 있었다. 여인들이 외출할 때에 머리를 가리고 다녔던 것이다. 이는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도 확인 된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인들이 밖에 나갈 때는 얼굴을 감추고 다녔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왜 얼굴을 가리고 다녔을까? 자료에 따르면 얼굴을 가리지 않고 민낯으로 다니면 남자들이 그녀를 보고 성적자극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얼굴을 드러내 놓고 다니면 단정치 못한 여인으로 취급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바이블에서도 확인 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바울당시에 고린도 여인들도 머리에 수건을 써서 자신의 머리를 남자들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것이 예의이었다고 한다.

 

미사보 사용이 높은 이유는?

 

천주교인들의 미사보는 관습에 따른 산물로 보인다. 이는 고린도 교회에서 소수의 여인들이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디. 예배질서가 문란해지자 바울은 관습에 따라 여인들에게 머리수건을 쓰도록 지시한 것이 오늘날 미사보의 유래라 한다.

 

 

 

 

미사보는 천주교의 상징과도 같다. 미사보를 쓴 모습이 순결하고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는 결혼식에서 신부가 면사포를 쓰는 것 같다. 그래서  죄를 잔뜩 지은 여인도 하얀미사보를 쓰면 마치 성녀가 되는 것처럼 착각이 들정도로 여성에게는 매력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미사보는 남녀평등의 시대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가톨릭 내에서도 여자신도들의 의식이 높아지고 세계적인 남녀평등의 추세에 따라 여러나라에서는 미사보를 쓰지 않은 여성들이 많다고 한다. 교황청에서도 미사보를 강요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천주교인들이 미사보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천주교인들은 미사보를 쓰는 비율이 높다고 한다. 미사보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차별화때문일 것이다. 천주교와 다른 종교와의 차별화 측면에서 쓰는 경우가 있고, 개인적으로 하얀수건을 쓴 모습이 거룩하고 단정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날 KBS방송을 중계한 광고전광판에서 미사보를 쓰고 있는 여자신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 주었다.

 

 

 

 

 

장엄곡을 부르는 천주교인

 

교황이 등장하자 천주교인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환영한다. 장중한 음악과 함께 천주교특유의 엄숙함이 넘쳐난다. 마치 잘 훈련된 사람들처럼 신도들은 교황이 나오는 전광판을 바라 보며 장엄곡을 함께 따라 부른다.

 

 

 

 

현장을 보도 하는 외국인기자

 

역사적인 교황방한을 맞이 하여 외국인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특히 필리핀사람들이 많았다. 아시에서 유일하게 카톨릭국가가 필리핀인데 우리나라에 온 이주노동자들로 보인다. 그리고 외국 방송서에사에서 현장을 보도 하고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당당히 서 있는 십자가

 

시복식은 대한민국수도 한복판에서 열렸다. 광화문을 배경으로 하여 커다란 십자가가 서 있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당당히 서 있는 십자가를 보니 마치 이 나라가 교황의 나라로 선포 된 듯이 보였다. 천주교인들에게는 최대의 잔치일지 모르지만 불교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편하기 그지 없는 광경이다.

 

 

 

 

 

교황을 방한을 맞아 천주교에서는 왜 광화문광장에서 시복식을 거행하였을까? 이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내비친 글이 있다. 시복식을 몇 주 앞두고 교계신문에 기고한 법응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우리 역사와 국민들에게 있어서 광화문 광장이 갖는 상징과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단지 지나간 역사의 한 장소가 아니라, 현재도 엄연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이다. 설왕설래 그 처음 설치과정에 얽힌 이야기야 어떻든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이곳에 위치한 이유이고, 한 해의 마지막과 시작을 알리는 국가적 공식행사가 이곳에서 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곳에서 구태여 특정종교의 내밀한 의식을, 박해와 순교의 역사에 기반한 그 어떠한 심리에서 봉행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교황 행사 광화문 광장이어야 하나?, 법응스님, 불교닷컴, 2014-07-03)

 

 

광화문광장은 우리나라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굳이 대한민국심장부에서 특정종교의 행사가 열리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에서 광화문광장으로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광화문 인근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조선시대 천주교박해로 인하여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입었기 때문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광화문광장을 선택하였다는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불자가 보기에는 마치 땅밟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 땅밟기?

 

기독교에 땅밟기가 있다. 근래에 공분을 일으켰던 봉은사땅밟기가 유명하다. 남의 땅에 들어와 자신의 땅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교황방문이 마치 대한민국을 땅밟기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광화문 근처에서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그 순교를 보상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200년이 지난 오늘날 시복식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행사를 치루는 것이다.

 

거국적으로 치루어지는 듯한 시복식을 보면서 종교형평성문제를 제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법응스님은 기고문에서 만일 이 시복식을 기화로 금년 가을에 광화문광장에서 불교계가 수계식을 하거나 호국의 상징인 서산대사, 사명대사, 만해 스님과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승군에 대한 천도의식을 봉행하고자 하니 허가해 달라 하면 어찌할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

 

대한민국수도 심장부에서는 듣기에도 생소한 라틴어가 들린다. 교황이 라틴어로 말하면 이를 동시에 자막으로 보여주고 한국인신부가 한국말로 통역한다. 더구나 진행을 맡고 있는 한국신부는 라틴어로 말하기도 한다. 방송에 따르면 이런 라틴어는 천주교신자들에게는 생소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날 교황은 시복식과 관련하여 강론을 하였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스마트폰 메모앱에 저장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 승리는 우리의 승리입니다라는 말이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윤지충 등의 순교에 대하여 승리로 본 것이다. 그래서 마치 광화문광장이 마치 승리의 광장이 된 것처럼 보였다.

 

광화문광장에는 대장엄송이 울려 퍼진다. 장중하고도 엄숙한 대장엄송을 수십만신자들은 따라 부른다. 대한민국심장부에서 울려 퍼지는 장엄송과 광화문을 아우르고 있는 십자가를 보면서 이날이 마치 천주교의 땅인 것을 선포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만 그런 것일까?

 

 

 

 

 

 

떨떠름해 하는 불교인들

 

시복식을 보니 불자의 한사람으로서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것은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불교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불교인은 교계신문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칼럼을 실었다.

 

 

이와 같은 행보를 보는 우리 불교계의 속내는 매우 떨떠름해 보인다. 교황의 방한을 반기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나 광화문이라는 시민의 공간을 온전히 시복식에 내어준다는 것이 못내 불만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남의 잔치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그냥 떨떠름해 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교황의 방한이 우리에게 미칠 영향이 녹록치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장기적으로 한국불교의 미래에 큰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에 이번 교황의 방한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황 방한은 한국불교 어떤 영향을 줄까?, 김관태, 불교포커스, 2014-08-13)

 

 

글쓴이는 떨떠름하다고 하였다. 교황방한과 시복식을 바라보는 불자들의 생각이 일부는 착잡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떨떠름 하다라고 표현 하였다.

 

떨떠름 하다라는 말은 일종의 중립적인 표현이다. 잘 나가는 천주교를 부러워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불교계의 현실을 되돌아 보았을 때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천주교의 전래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늘 한국불교계의 무기력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된다.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신장할 것

 

이번 교황의 방한으로 인하여 천주교의 교세가 크게 신장할 것으로 본다. 이는 30년 전 교황이 방한한 이후 천주교의 교세가 급신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불교와 기독교의 턱밑 까지 치고 올라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럴 때 교황의 방한으로 인하여 마침내 추월할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 관점이다.

 

그렇다면 이번 교황의 방문으로 인하여 천주교의 교세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기사에 따르면 고산문화재단이 진행한 국민여론조사의 수치를 감안할 때 내년 인구센서스의 예상 종교인구는 개신교인구 1천여만 명, 불교인구 800여만 명, 천주교인구 700여만 명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교포커스, 2014-08-13)”라고 하였다.

 

이는 내년 종교인구조사를 가정한 것이다. 종교인구 조사는 매십년 마다 진행되는데 2005년에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불교가 1위 종교이었으나 2015년종교인구조사에서는 2등으로 밀려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더구나 천주교가 턱밑까지 치고 올라 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서울과 수도권에서 불교인구는 천주교 보다 못하게 되어 3등 종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미래의 종교지형은 매우 비관적이어서 2025년 종교조사가 발표 되면 천주교가 불교를 추월하여 불교는 전국적으로 3등 종교가 될 신세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떨떠름 한 것이다.

 

불교계는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는가?

 

천주교가 급신장할 동안 불교계는 한 일이 거의 없다. 질 낮은 출가자들이 절빼앗기 싸움에나 열중한 모습을 보여 준 것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는 중앙집권적으로 잘 통제 되어 있는 천주교와 비교하였을 때 비교된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매우 자유롭게 살아 갈 뿐 통제도 받지 않고 그렇다고 중생구제에도 열중하지 않는다. 구름처럼 바람처럼 떠 돌아 다니면서 마치 내키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사는 곳에 불교가 보이지 않는다. 통계상으로는 천만신자를 가진 1위 종교라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조계종에서 신도증을 보면 알 수 있다.

 

교계기사에 따르면 조계종 신도등록자는 21만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의 등록신도가 고작 21만명에 지나지 않은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래서 신도등록에 박차를 가하여 4년 이내에 백만명을 목표로 할 것이라 한다. 이렇게 신도등록을 해 놓으면 매달 내는 교무금이 있어서 안정적으로 종단을 운영할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하여 어떤 이는 조계종 신도는 백만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 한다.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는 한

 

천주교를 바라보는 불교인들의 시각은 떨떠름 한 것이다. 이번 교황의 방문에 대하여 한편으로 시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부러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불교가 크게 발전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쇠퇴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것은 한국불교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역에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역에 불교가 없다는 것은 뿌리가 없다는 것과 같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고사하고 말듯이, 지역에 기반을 두지 않고 오로지 산중에만 있는 한국불교는 결국 고사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단단한 기반을 두고 있는 종교는 번영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천주교의 성장은 눈부시다.

 

전세계적인 추세는?

 

전세계적으로 기독교는 퇴조현상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는 기독교에 대하여 낡은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전근대적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대신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불교가 점차 보급되어 가고 있고 미래에는 불교적 패러다임이 지배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에서서만큼은 기독교가 강세이다. 이렇게 기독교가 강세인 곳은 아시아에서 필리핀과 한국뿐이다. 세계적인 추세와는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희망이 있는데

 

한세대만 지나면 천주교가 다수종교가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불교는 3등으로 떨어져 소수만 믿는 종교가 되리라고 예측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 교황이 방한 하였다. 한세대 전에 교황이 방문하여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였다면, 이번 교황의 방한은 대역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위로 하는 듯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향후 천주교신자들의 폭발적 성장에 도움을 줄 것이다. 이런 모습이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착잡하기도 하고, 또 떨떠름 하기도 하다. 그러나 한 가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 원음을 접하면서 기존 한국불교에 대하여 비판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 보이는 무위’, ‘무위도식’, ‘무식등 소위 한국불교의 삼무현상을 보았을 때 미래는 매우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하나의 희망을 갖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 원음의 발견이다. 무언가 꼬이거나 잘 되지 않을 때 초심을 이야기 하듯이 부처님의 원음에 희망이 있다.

 

부처님원음을 접하면서 불교의 진수를 맛본다. 아무리 신도가 많고 커다란 성전을 가진 종교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만 못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를 알고 나면 모두 시시해 보이는 것이다. 수십만명이 모여서 대장엄송을 부른다고 하여도 마치 맹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 진리는 빠알리니까에 고스란히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한게송으로 요약한다면

 

앞으로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원음은 더욱더 알려 질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이 점차 확산 되고 있다. 그러나 후진국일수록 미개한 나라일수록 전통문화가 없거나 약한 나라일수록 맹신의 종교가 강세를 보인다.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을 한게송으로 요약한다면 어떤 것일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Sabbapāpassa akaraa,    삽바빠빳사 아까라낭

kusalassa upasampadā,      꾸살랏사 우빠삼빠다

Sacittapariyodapana      사찟따빠리요다빠낭

eta Buddhāna' sāsana에땅 붇다나 사사낭.

 

諸惡莫作     제악막작

衆善奉行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정기의

是諸佛敎     시제불교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이 게송에 부처님 가르침이 요약 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청정에 대한 것이다. 죄악을 짖지 않고 착하고 건전하게 살아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과거에 출현하였던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한다.

 

이렇게 진리는 쉽고도 간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하게 사는 것에 대하여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으나 여든 살 먹은 노인도 행하기 어렵다.”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다면 청정하게 하여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에서 알 수 있다. 디가니까야에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Catunna ariyasaccāna

yathābhūta adassanā,

Sasara dīghamaddhāna

tāsu tāsveva jātisu.

 

Tāni etāni diṭṭhāni

bhavanetti samuhatā,

Ucchinna mūla dukkhassa

natthidāni punabbhavoti.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

여기 저기 태어나

오랜 세월 윤회했네.

 

이들 진리를 보았으니

존재의 통로는 부수어졌고

괴로움의 뿌리는 끊어졌고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어졌네. (D16. S56.21)

 

 

바로 이것이 불교의 궁국적인 목적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윤회의 종식이다. 마음을 청정하게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성취하였을 때 삶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어떤 다른 것에도 의존하지 않게 된다.

 

 

 

2014-08-1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