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떠나는 여행

이런 친구

담마다사 이병욱 2015. 1. 17. 10:12

 

 

이런 친구

 

 

 

 

 

 

호칭에 관하여 생각해 봅니다. 불자들은 보통 보살님 또는 거사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더 좋은 말이 아마 ‘법우’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법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뜻이지요. 부처님 가르침을 인연으로 하여 맺어진 친구라 하여 법우라 합니다.

 

친구라 하면 일반적으로 학교친구를 말합니다. 학교친구의 특징은 오래 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해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회친구가 있습니다. 대게 이해관계로 맺어진 사이라 볼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 또는 동업자 등이 해당됩니다.

 

이해관계로 만난 사이는 이해관계가 청산되면 쉽게 끊어집니다. 그래서 사회친구는 친구가 되기 힘들다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사귄 사람들이나 업체 사람들이 주변에 없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 되면 더 이상 관계가 유지 되지 않습니다. 동업자가 대표적입니다.

 

종교로 만난 친구가 있습니다. 타종교의 경우 형제 또는 자매라 합니다. 가족처럼 친척처럼 가까운 사이라고 강조 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인연을 맺으면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학교친구와도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래 가는 것 같습니다.

 

불교를 인연으로 해서 만난 사람을 법우라 합니다. 또는 도반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도반은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요? 또 진정한 친구는 어떤 경우를 말하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초기경전에 명확하게 명시 되어 있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다.

2) 서로 대화를 통해 왕래를 해 보아야 알 수 있다.

3) 재난을 만났을 때 알 수 있다.

4) 논의를 통해서 알 수 있다.(S3.11)

 

 

첫 번째 항을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말 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좋아 보이는 사람도 함께 생활해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단점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인지 아닌지는 함께 생활해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오래 생활하다 보면 다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함께 살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같이 살아보아야 알지 짧은 동안에는 알 수 없습니다.(S3.11)”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요?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고 판단 되었을 때 떠 나는 사람들은 진정한 친구로 볼 수 없습니다.  

 

두 번째 항을 보면 재난 등 위기에 닥쳤을 때 행위를 보면 진실한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화재가 났을  때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뛰어가 목숨을 구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하철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이해관계를 따지고 손익을 따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질 것이 있으면 만나고 도움이 안되면 멀리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단지 알고 지내는 사람, 즉 지인(知人)에 지나지 않습니다.

 

친구의 성공과 번영을 함께 기뻐해 주고, 친구의 불행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여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는 친구, 그리고 죽었을 때 관을 매고 갈 수 있는 친구, 이런 친구가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이런 친구가 있을까요? 단 한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이라 봅니다.

 

 

 

2015-01-17

진흙속의연꽃